부여왕(칭왕 초대)
1. 개요
한국 사서를 제외한 중국 사서에서 동명왕 이후에 첫번째로 등장하는 부여의 국왕. 이름, 시호가 전해지지 않는다. 선대 국왕인 동명왕과 후대 국왕인 시(始)와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2. 문헌
서기 49년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게 하였고 대외적으로 중국식 왕호(王號)를 사용하였다.[2] 그리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부여가 중국과 교류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동명(東明), 해모수 이후의 왕들을 제외한 실체가 확인되는 부여의 첫 번째 왕이다.建武(25~55)中, 東夷諸國皆來獻見.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註 045 光武厚荅報之, 於是使命歲通.
건무(建武)[1]
연간(A.D.25~55; 고구려 대무신왕 8 ~ 태조왕 3) 에 동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조헌(朝獻) 하고 입견(入見)하였다. 25년(A.D.49; 모본왕 2)에 '''부여왕(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므로, 광무제가 후하게 보상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이외에도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 대소왕의 사촌동생을 두고 "부여왕에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시켰다(封爲王 安置掾那部)"라는 글귀가 있어, 그와 동일인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이 경우 동명왕의 후손이라는 조건을 만족하지 못해서 동일인일 가능성은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