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
[clearfix]
1. 개요
《논형(論衡)》 길험편에 전하는 부여의 시조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나 현재 역사학에서는 주몽과는 다른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삼국유사에서는 북부여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해모수를 계승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하고 훗날 고구려 건국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고주몽은 졸본부여를 계승했다고 한다.[1]
2. 상세
1세기 후한의 저서인 《논형(論衡)》 권2 길험편에서 부여 동명왕 설화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삼국유사 기록에 나타는 동명제를 부여의 창업왕인 동명왕으로 보아 그가 졸본부여를 건국했으며 이를 고구려가 계승했다는 주장도 있다.[2] [3]북이(北夷) 고리국 왕의(영품리왕 추정) 시비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에 던져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그 어미가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했을 때, 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성장하자 왕이 죽이려 함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는 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해줘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된 것이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4]
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을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지만,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추모(주몽)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의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추모를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쓰였으되,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의 몸종이 태기가 있어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를 낳으면 귀히 되어 반드시 왕이 되리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몸종이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기운이 뻗쳐 내렸으므로 내가 아이를 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되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덥히고 마굿간에 버린즉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를 않고 필경은 부여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인용
즉 나라를 연 개국의 인물은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이며 이를 계승하여 건국한 인물이 주몽임을 알 수 있다.[6][7]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연남산 묘지명 금석문 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졸본 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구절이 있으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 조에서도
즉 졸본 부여의 왕은 동명왕을 계승한 후손으로 추측되며 졸본왕의 공주 소서노가 주몽과 결혼하여 졸본 부여를 계승하고 고구려를 건국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비문을 보면 광개토대왕은 왕위를 계승하여 17세손에 이르고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4세손(=13대손)인데, 비문과는 3대의 차이가 난다. 이를 통해 고구려가 졸본부여를 계승했으며 동명왕으로부터 왕위 계승을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비문에 동명왕은 언급조차 되지 않으므로 고구려인들이 시조를 동명왕으로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 또한 가능하다.'''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다.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중략)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호(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내용을 보면
라는 구절에서 고구려의 왕성이 고(高)씨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북부여 왕족은 고(高)씨가 아니고 해(解)씨이다. 해모수, 해부루, 주몽도 해모수의 아들내지 후손으로 평가하고 있고 주몽의 아들 유리도 해씨이니 주몽은 원래 해씨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구려 건국시 고씨로 바꾸고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이유 없이 해씨를 버리고 고씨로 바꿀 이유는 만무하다. 즉 이 또한 동명왕 계승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는 고(高)씨를 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료로서 속일본기 권40 환무천황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또한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백제의 시조를 부여의 동명왕부터로 시작되고 있다고 보는데, 도모(都慕)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의 시조라고 보는 도모(都慕)와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鄒牟; 주몽(朱蒙))는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 이는 단지 명칭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실제로 당시 고구려나 백제계 유민들 사이에서 고구려 시조와 백제 시조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즉 9세기까지만 해도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은 서로 다른 독자적인 시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天帝授籙 摠諸韓而稱王
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가 록(籙)을 주어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사료들을 통해 삼국시대 이전에 원래는 추모와 동명을 별개의 인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대로라면 후대 기록에서 추모(주몽)=동명이라고 보게 된 것은 세월이 지나는 과정에서 잘못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데, 연남산이 사망한 시점은 고구려 멸망 후로 동일한 설화가 고구려 측과 백제 측에 각각 다르게 전승되어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다른 인물로 확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당장 신라 김씨 신화도 동일한 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김알지와 김성한 버전 양자가 모두 존재한다. 백제 건국 신화도 시조 비류설과 시조 온조설이 공존한다. 그리고 고구려 후기의 인물인 안승 또한 동명성왕을 '''태조'''라고 지칭하여, 다른 고구려 국왕과 달리 전체적으로 백제의 전승을 수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후한 시대의 서적인 《논형(論衡)》 길험편에 주몽 설화와 거의 같은 내용의 '''부여(고구려가 아님) 시조 동명''' 설화가 전해지는 것이 유일한 기록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일반적으로 고구려 건국 설화로 알려진 그 이야기는 사실 부여의 건국 설화로, 후대의 고구려인이 먼저 성립한 부여의 건국 설화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일찍부터 학계에 제기되었다.
3. 기타
'주몽이 동명성(금성)을 뜻하는 말'이며 그러므로 주몽이 동명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대 기록인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오히려 '주몽'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풀고 있을 뿐 금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한 언어적 유사성을 통해 접근하는 이러한 가설은 역사적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경우 굉장히 조심해야 하며, 실제 고대 언어의 음가나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경우 심각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당대 사료에서 주몽 = 동명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등장한 이상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와 속일본기,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의 태조로 도모대왕이라는 인물을 언급한다. 백제 역시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왕실의 기원을 부여에 두고 있따는 점에서 여기서 도모가 주몽이 아닌 동명왕 설화의 부여 동명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도모대왕과 관련된 설화에 부여 동명왕 신화에는 존재하지 않고 고구려 주몽 신화에만 등장하는 하백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있어 도모왕은 부여 동명왕보다 고구려 추모왕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도모왕은 제1대로 하여 근구수왕(근귀수왕)을 16대왕으로 하는 기록이 속일본기에 나오는 거를 보면 도모왕은 기원전 1세기 인물이 되므로 도모는 주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백제와 고구려가 동명왕 설화를 자신의 시조설화에 차용하거나 족보의 가장 위에 위치시켰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후대에 동명=주몽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백제 건국 설화에 삽입했을 수도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동명왕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고구려의 주몽 설화[9] 는 동명왕의 설화와 거의 흡사하여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 이후에는 아예 동명왕과 주몽이 같은 인물이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다. 이는 외부에서 졸본에 정착한 주몽 세력이 졸본의 왕위를 계승하였기에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주몽이 동명왕을 이은 정통성을 강조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구려란 국명 자체도 동명왕의 탄생지 고리국의 고리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만큼 주몽을 동명왕의 적통을 이은 인물로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권력 다툼에 밀려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온조 또한 동명왕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데, 온조 또한 동명왕의 계승의식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동명왕의 혈연적 후손은 주몽이 아닌 온조이다.[10] 훗날 백제의 성왕은 동명왕이 건국한 부여의 이름을 따서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기까지 했다.
2010년 KBS 역사스페셜 '동명루트를 찾아서'라는 편에서 동명왕을 조명하였다.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