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왕사
1. 개요
이 문서는 부여의 역대 왕들에 대한 정보를 담은 문서이다. 부여를 다루는 역사 기록은 불행하게도 상당히 적으며, 그렇기에 부여의 역대 왕들이 누구였으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의 동이전에는 부여의 위치나 지리, 풍속 등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한 국내 사료에도 부여의 초기 건국사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부여의 역대 왕사를 정리해 보면 중간에 큰 공백기가 생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는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그 후손인 대소왕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으나 그 뒤의 기록은 부분 부분 끊겨 있어 제대로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서에서 나오는 부여와 중국 사서에서 나오는 부여가 동일한 정치체인지도 의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단군의 아들 중에 부루가 있기 때문에 한국 사서의 부여는 고조선에 가까운 정치체지만, 중국 사서에 나오는 부여는 백제와 같이 위구태왕을 시조로 모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
2. 역대 왕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 나라를 동부여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뒤에서는 동일한 나라를 북부여라고 기록하는 등 혼란이 있다. 게다가 『광개토왕릉비』에서도 주몽이 도망쳐 나온 나라를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라고 기록하고 있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나라를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서기 285년 선비족이 침입해 의려왕이 자결하고 백성들이 동쪽으로 피난을 갔을 때 옥저로 피난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 동부여라고 보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동부여는 예전부터 우리(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주몽이 북옥저를 정벌한 적이 있기 때문. 하지만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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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2.1. 종합
- 기록상 왕 재위기간 년도 사이에 공백이 많다.
3. 계보
4. 관련 기록
- 49년에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 111년에 부여의 왕이 낙랑을 공격했다.
- 121년에는 고구려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수천 기병을 인솔해 현토를 포위할 때 부여 왕의 아들인 위구태를 보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와 군과 힘을 합쳐 그들을 격파했다.
- 136년에 부여왕이 직접 한나라를 방문했다.
- 167년 부여의 왕인 부태왕이 현도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 174년 한나라와 국교를 재개했다.
- 220년 ~ 226년 사이에 읍루가 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부여가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다.
- 240년 ~ 247년 사이에 일어난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당시, 부여는 위나라군에게 군량을 제공했다.
- 285년에 모용부가 동쪽으로 부여를 공격하자 의려 왕이 자살했고 그의 자제들은 도망가 옥저로 들어갔다.
- 346년 전연의 침공을 받고 현왕 등 5만명이 전연으로 끌려갔다.
- 410년 '동부여'로 기록된 세력이 고구려 광개토 왕에 의해 정벌당했다.
- 457년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다.
- 494년 부여 왕이 처자를 데리고 고구려에 들어가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
[1]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국내의 기록에는 부여의 시조를 해모수라 하였으나, 중국 측의 기록인 《후한서》 에는 동명을 부여의 시조로 기록하였다. 《논형》에 남아있는 설화가 고구려의 추모왕(동명성왕)의 건국 설화와 판박이라서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연남산 묘지명』 등에 동명왕과 추모왕이 별개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에 동일한 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한다.[2] 《삼국유사》 에 따르면 해부루왕이 재상 아란불의 말을 듣고 가섭원으로 천도하자 기원전 59년 음력 4월 8일에 그 옛 터에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주몽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으나 설화적 윤색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3] 왕을 포함한 왕족들이 모두 중국으로 끌려간다.[4] 현왕이 끌려간 뒤에 낳은 아들로 보인다. 서기 384년에 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5] 잔(孱)의 뜻은 '잔약하다, 나약하다'다.[6] 의라왕의 재위는 책계왕과 동시에 시작되고, 현왕의 재위는 계왕과 동시에 끝난다. 따라서 이 둘이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조손 관계일 것이다.[7] 한국 사서에서 등장하는 부여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