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병진책
1. 개요
임진왜란(정유재란기) 조선 - 명나라 연합군이 일본군에게 펼친 총공세, 성공했다면 조선 주둔 일본군을 끝장 낼 수 있는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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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598년 8월 18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직후에 5봉행(奉行)과 5대로(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침략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3. 작전 전개
1598년 7월 경략(經略) 형개(邢驚)[1] 겸 계료총독[2] / 비왜 총독 군문으로 명군의 최고 감독관 및 총사령관(1인자). 직급상으로 당시 경략 군문이었던 양호(후에 천진 순무였던 만세덕이 후임으로 보직됨)보다도 상급자였다. 다만 주 역할상 조선에 오지 않고 요동에 있던 사령부에서 전구를 총괄하고 양호, 만세덕으로 대표되는 경략 급[3] 인물들이 실질적으로 조선 전장을 책임지면서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형개가 조선으로 온 것은 양호가 경질된 후 후임자였던 만세덕이 아직 조선으로 부임하지 않아서 임시로 일선 지휘에 나섰다.[4] 형개가 한성으로 당도하면서,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군을 공격 목표로 한 동로군과, 사천 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군을 공격 목표로 한 중로군,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목표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였다. 이와 아울러, 진린의 명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의 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세웠다. 9월부터는 일본군의 상호간의 구원 전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적군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그러나 울산성 전투는 승리에 근접했으나 일본군의 원군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실패했고, 특히 사천성 전투 같은 경우, 조, 명 연합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는데, 무엇보다 명군 지휘관이었던 동일원(董一元)의 조급한 작전의 전개, 그리고 명군의 고질적 습관과도 같은 화약폭발 사고 때문에 거진 1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에 들어와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을 출발하여 수원을 경유, 전주로 내려온 다음, 순천 왜교성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 병사 이병악 등이 이끄는 조선군 1만여 명 등 병력 3만 6천으로 왜교성 공격을 서둘렀다.
수로군은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 명나라의 진린이 이끄는 수군이 합세하면서 편성된다. 그리고 7월 24일 조명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흥양의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에서 승리 후, 9월 하순에 이르러 마침내 서로군의 유정이 이끄는 육상군과 조 - 명 연합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의 총격전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음력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결국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했다(왜교성 전투).이 전투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왜군 3천 명을 무찔렀다. (장도 해전) 일본에 의하면 조명 수군 8백 명에게 사상을 입혔으며 조선 기록에 의해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휘하의 조선군 130명도 전사했다. 뒤이어 펼쳐진 노량해전에서도 소서행장을 구원하기 위해 투입된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는 전멸했지만, 정작 목표였던 소서행장은 놓쳤고, 여기에 조선 측도 이순신 본인이 전사한 것을 포함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4. 결과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펼친 사상 최대의 공세로 성공했다면 바그라티온 작전처럼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다수의 포로를 확보하여 일본 측을 압박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손발이 맞지 않거나 보급과 불운까지 겹쳐 실패하고 말았으며, 전투 중에 전사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일본군 대부분이 무사히 철수함으로써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이후 강화 협상 과정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1] 석성의 후임으로 명나라 병부상서(국방부 장관)이다. 병부상서 직위는 단지 현지에서의 지휘 체계 및 예우상의 확실한 보장을 꾀했고 북경의 병부청사에서 업무를 보던 진짜 병부상서는 따로 존재했다. 명, 청 시대의 역사를 보면 국가적 위기 사태에서 황제가 신임했던 인물에게 진짜 현직 벼슬과 더불어 칭호및 의례적 명예직 벼슬 / 보직을 수여한 사례가 많았다. 수여받은 인물이 확실한 전권을 발휘할 수 있게끔 황제가 힘을 실어주었다고 추측한다.[2] 북경 외곽 수도권과 요동 지역을 총괄하는 도지사격[3] 임진왜란의 발발로 신설된 ㅇㅇ군문식의 이런 해외 파병용 전시 보직의 예우는 최소한 명나라 중앙직제로는 각부의 시랑 급, 지방직제로는 순무, 포정사 급에 준했는데 경략 군문을 맡았던 인물들의 커리어를 보면 동급 보직을 이미 지내고 온 상태였다.[4] 형개는 정유재란 개전 직전 병부 좌시랑(국방부 제1차관)이었는데 기존의 병부 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외교 사기 행위에 연루되어 파면되어 옥에 갇히고 후임으로 상서가 되었으나 만력제가 바로 전쟁터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