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교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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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시기 1598년 음력 9월 20일 ~ 10월 7일에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얽혀 싸운 격전. 순천성 전투(順天城 戰鬪)라고도 한다. 장도 해전도 포함된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그 직후 일본에서는 조선에 나와있는 군의 철병을 결한다.
이것이 조선측에 알려지면서 음력 9월부터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목표로 한 동로군,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타겟으로 한 중로군,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타겟으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남진, 왜군을 추격하는 전략을 세운다. 한편으로 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전라도 부터 경상도 까지 남해안을 따라서 왜군을 밀어내는 전략도 세운다. 이를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라 한다.
시도는 좋았지만, 당시 동원한 군을 모두 모아도 왜성 하나를 함락시키기도 어려운 판국에, 특히 왜성을 제대로 경험해 본 적 없는 군대로 몇만씩 나눠서 동시다발적으로 공략을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피해가 커지자 명나라 장수들은 싸움 보다는 알아서 물러날 때 까지 대기하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서로군 제독 유정은 8월에 조선에 들어와 군대를 거느리고 한성, 수원, 전주를 경유하여 남하한 후 9월 19일 순천 왜교성을 공략하게 된다. 여기에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병악 등이 이끄는 1만여명의 조선군이 포함되어 총 3만 6,000의 육군 병력이 동원되었다.
수로군은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7월 24일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 후, 9월 말에 조명연합육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육군 3만 6천, 수군 1만 5천 합하여 5만 1천명의 군대였다.
2. 진행 및 경과
그러나, 음력 10월 3일 유정이 고니시 측의 뇌물에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한다. 수군은 공성을 준비한 부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육군이 주저 앉은 시점부터 이미 작전은 실패라고 봐야 했다. 전투의 성격은 정박한 왜 수군과의 해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장도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 11척을 나포, 왜군 3,000명이 사상하는 등 전과를 올린다[7] .
그러나 이전의 수군 전투와 달리 조명연합군 측 피해가 비교적 컸다. 명군의 경우 왜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8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를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 조선 수군 130여명 역시 전사했다. 아무래도 해당 지역의 지리 및 왜군의 전투방식을 잘 알던 조선 수군에 비해서 명나라 군대는 잘 몰랐을 게 분명하고, 그걸 전해주기에는 서로 말이 달라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명나라 수군의 전선은 왜선에 비해 압도적이지 못했다[8] .
3.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1회, 99회 ~ 100회에서 나오는데, 촬영을 초기에 해서인지 전투 신이 확실히 실감이 나며 전투의 긴장감도 느껴지는 것이 공을 들여 찍은 티가 난다.[9] 여기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인 포로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아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지만 처음에 살려달라며 소리지르던 포로들이 이순신이 공격을 주저하다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꿔 '차라리 짐은 되지 말자'며 일본군에게 반항하면서 자신의 대장선이 공격당해 바닷물에 빠지는 굴욕을 당했다. 전투 후 조선 수군은 전체적으로 쓸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승리자의 모습과는 영 거리가 멀다.[10]
99회 ~ 100회는 1회와 대체로 비슷했으나 1회 방영 이후 설정 변경 등으로 인해 대사, 장면, BGM이 1회와는 다르게 나왔으며 새로 촬영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1598년(무술년) 10월 3일. 조·명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농성 중이던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매수된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은 협공 약속을 어겼고,''' 이에 수군 단독으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 전선 30여 척이 격침되고, 명 수군 2천여 명이 전사를 했으며,
조선 수군 역시 130여 명의 전상자를 냈으니, 조일 전쟁 막바지에 입은 의외의 피해였다.
본작에서 감정적인 성격으로 묘사된 이영남은 황세득을 구하러 가겠다고 난리를 치며 결국 억지로 황세득을 구하러 가려다가 이순신의 지휘봉에 뒤통수를 맞고 기절하는데, 이순신 역시 어쩔 수 없이 황세득을 버리고 가면서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떤다. 황세득은 이순신의 친척(처종형)이기에 이영남보다 상심이 크면 컸지 작을 리는 없었을 것이며, 권준이 위로할 때는 전장에서 전사한 아쉬운 목숨이 어찌 그 한 사람 뿐이겠느냐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진린에게 뇌물을 줘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만 그것을 충무공 이순신이 차단해버린다. 이에 빡친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포로 2명의 손목 4개를 베어 진린에게 보냈다. 이후 노량 해전으로 이어지고 노량 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망쳤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말을 베어서 식량으로 썼기 때문에 아시가루들과 똑같이 뛰어서 도망쳤다.
[1] 오야노 다네모토의 아들.[2] 유정은 형식상 지휘관이지,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 근처도 가지 않았다.[3] 육군 36,000여 명, 수군 15,000여 명[4] 일본 측 사료에 기반한 연합 수군의 피해 규모이며, 조선 측 사료에는 황세득, 이청일 휘하 130명의 조선 수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단 조선수군측 사상자는 130여명 내외이고, 대다수의 사상자는 명나라 수군에서 나왔다.[5] 다만 이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수로군은 제 역할을 다했으나 서로군을 이끌던 유정이 협조하지 않아 결국 순천을 뺏지 못했다.[6] 순천 왜교성에 갇혀있던 고니시는 이 전투로 인해 더더욱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는건 불가능해졌고, 결국 수로군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진린을 뇌물로 구워삼아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이것이 노량해전의 시발이다.[7] 이것만 떼어 장도 해전으로 불린다[8] 이순신이 새로 건조된 판옥선 2척을 진린에게 기함으로 쓰라고 빌려줬다는 기록이 있다.[9] 촬영 때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한 전투라고 한다.[10] 일본군의 피해가 더 컸지만 결과적으로 성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일이 이 모양이 된 이유는 전적으로 뇌물에 넘어간 유정의 우유부단함과 공명심에 눈이 먼 진린의 독단 때문인데, 내레이션에서는 피해만 설명해 주었을 뿐이다. 다만 전투과정내내 진린이 공을 탐내는 모습과 유정이 공격을 거부하는 모습이 나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