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아흐마드 칸
- سید احمد خا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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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드 아흐마드 칸은 19세기 인도의 무슬림으로 무굴 제국 이후 위상이 실추되었던 우르두어를 부흥시킨 인물이다.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하여 수구적 율법학자(울라마)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서구 과학 서적을 우르두어로 번역시키는 작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사이드 아흐마드 칸과 그 동료들의 최대 관심사는 무슬림의 힘으로 서양식 교육을 '''직접''' 실시하여 미래를 책임질 지식인들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현대 파키스탄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
2. 상세
사이드 아흐마드 칸은 무굴 제국 고위 관료 가문 출신으로, 무굴 제국이 대영제국의 사실상 식민지가 되어 호흡기를 달고 있을 무렵 영국 행정기관의 관료로 일했다. 세포이 항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무굴 제국이 최종적으로 폐지되자 영국은 서서히 무슬림들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인구 수가 더 많았던 힌두교도들의 편의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무굴 제국 당시 사용되던 우르두어와 힌디어는 입말은 서로 호환되었으나 문자가 달랐는데, 영국 정부는 관청에서 페르시아 문자 대신 무슬림들이 읽지 못하는 데바나가리 문자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변경하였고, 사이드 아흐마드 칸은 여기에 큰 위기 의식을 느꼈다. 1875년 힌두교계에서 기독교 선교사들과 무슬림들의 부흥 운동에 영향을 받은 힌두교 부흥운동 아리야 사마지(Arya Samaj)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힌두교 신문, 잡지 발행부수가 급증하는 힌디어 르네상스가 시작되자 아흐마드 칸과 그 동료들은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고립된 소수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흐마드 칸은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하여 서구 과학 기술 서적을 우르두어로 번역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으며, 인도 각지에 대학에서 우르두어 강의도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1875년 알리가르에 앵글로 오리엔트 대학은 사이드 아흐마드 칸의 노력의 대표적인 결실 중 하나였다. 앵글로 오리엔트 대학은 강의실 내의 일반적인 강의보다 스포츠 활동을 통한 조직력 향상 등을 중시 여기는 커리큘럼을 도입하였으며, 20세기 상당수 무슬림 정치지도자들을 배출하는데 성공했다.
본래 친영파 관료였던 사이드 아흐마드 칸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가 더 잔혹하고 악랄한 방향으로 악화되자, 반영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말년에 그가 보인 반영, 반힌두 성향 무슬림 부흥 운동은 파키스탄 건국 이념의 제창자 무함마드 이크발에게로 이식되었다.
3. 여담
사이드 아흐마드 칸 본인은 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교육 보급에 힘쓰고 "무지는 빈곤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하며 교육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한 세기가 지나서 파키스탄 독립 이후 그의 이슬람 모더니즘 학파를 이어받았던 이슬람주의 신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 "타락한 서구화와 여성 해방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미명 하에 파키스탄 군사독재자들의 우민화 정책을 옹호하면서 파키스탄을 빈곤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무지는 빈곤의 어머니이다.
독립 이후 파키스탄은 비옥한 펀자브강 유역이라는 유리한 입지조건은 물론 미국에 공군 기지를 임대해주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원조를 받는 등 스타트업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불 알라 마우두디(Abul A'la Maududi 1903~1979) 같은 어용 신학자들이 우민화 정책으로 국민의 눈을 가리는 사이 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당시에는 방글라데시)에는 은근슬쩍 악질 고리대금업이 샤리아에서 합법화되어 번성하며 서민들의 신분 상승을 가로막았으며, 파키스탄 군사 독재자들은 학교나 발전소를 건설해야 할 돈을 거의 해외로 빼돌렸다.[1] '''아흐마드 칸의 제자 무함마드 이크발이 아끼던 제자였던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스승들을 배신하고 "무지는 빈곤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의 대표적 사례를 만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