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이슬람 회의

 


1. 개요
2. 상세


1. 개요


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된 정당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Abul A'la Maududi)가 창건했는데, 창건자 마우두디의 경우 원래 이슬람 모더니즘 계열 학자였으나 나중에 사이드 쿠틉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슬람주의 성향 학자가 되었다.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반자유주의, 반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파키스탄의 세속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이슬람 교리에 입각하여 금융업에 반대한다고 하지만 이 정당에서 갈라져나온[1] 방글라데시 이슬람 회의는 고리대금업으로 고통받던 서민들을 구제해주던 그라민 은행이 "샤리아에 입각한 금융"이 아닌 불신자들의 은행이라며 공격해서 망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2. 상세


오늘날에는 점점 세력이 약해져가는 정당으로 과거 대한민국의 자유당은 이 정당에 비하면 양반 of 양반이다. 해당 정당의 당수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파키스탄 내 소수종파 아흐마디야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주장하다가 수감된 적이 있었으며, 이후 쿠데타로 파키스탄이 군사독재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 "타락한 서구 문화와 여성 해방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미명하에 과거 군사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을 지지했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원래는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온건파 학자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 함께 인도 통일 운동을 전개하고 무함마드 이크발로부터 총애를 받는 등 존경을 받던 학자였으므로, 해당 학자가 "타락한 서구 문화와 여성 해방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라는 말을 하자 파키스탄 내 개혁주의자들을 발언권을 상당부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해당 발언들은 당시 파키스탄 상황에서 봤을 때 반서구주의 포퓰리즘에 영합했다고도 해석해도 문제없는 발언이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슬림 지식인 사이에 퍼진 서구 문화와 사상의 맥을 끊는 일이며, 이슬람 고유의 샤리아가 서구 문명이 제시하는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슬림 지식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들이 문화와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이들에게 빌려와야만 했던 잘못된 개념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 아불 알라 마우두디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말한 샤리아는 서구 문명이 제시하는 그 무엇보다도 '''고리대금업자들의 기득권 사수에 있어서'''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원래 이슬람에서는 고리대금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지만,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고 샤리아법상 보통은 상환 날짜를 말도 안되게 짧게 잡은 후 막대한 액수의 벌금을 채무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방식으로 이자 소득 창출이 이루어진다. 물론 채무자가 산수에 약해야 이자 소득을 늘리기 더 쉬운 점을 감안해서 보통 이렇게 샤리아를 등에 업은 고리대금업자 집단들은 문맹 퇴치 운동 등에 갖가지 핑계를 대며 반대하는 편이기도 하다.
원래부터 우민화에 관심이 많았던 파키스탄 군부 정권과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합작품으로 파키스탄은 20세기 후반 문맹률 80%를 달성하고, 오늘날에도 여성 인권 탄압국으로 오명을 쓰게 되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파키스탄을 이슬람 현대주의에 입각한 국가로 발전시키려 했으나, 이슬람주의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가 이를 허물어버린 셈이다.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되어 있는 단체치고는 특이하게도 친사우디 성향이 있다. 보통 무슬림 형제단은 사우디랑 사이가 좋지 않다. 사우디 학자들이 사이드 쿠틉의 꾸란 해석이 이단이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의외일 수도 있으나, 해당 정당은 아흐마디야 신도에 여권을 따로 발급하는 법을 통과시켜 사실상 메카메디나로 성지순례를 금지시켜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의 호감을 산 것. 해당 정당은 파키스탄의 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 아브두스 살람이 아흐마디야 신도라는 이유만으로 기록말살형을 주도했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초창기에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인도의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이 같이 협업하여 통일 국가로 독립하는 방안을 지지하였으나, 파키스탄 독립 이후에는 이슬람의 정화라는 미명하에 힌두교인 및 시크교도와의 모든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연계를 끊기를 요구했는데, 이는 소수자를 박해하면서 내부의 불만을 약자에게로 돌리는 군부독재 포퓰리즘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파키스탄 내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무함마드 알리 진나 사후에는 서서히 법적으로 여러 차별을 받으며 2등 시민으로 강등되었다.
참고로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이나 정의 파키스탄 운동같은 중도~중도우파 정당의 온건 세속적 이슬람 민주주의 정당과는 구별된다. 오늘날에는 다행히 활동 범위가 크게 축소되어 파키스탄 북서부 파슈툰족 거주지 근처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해당 단체 회원들의 주도로 갖가지 황당한 이유로 투석형을 집행해서 사람을 잡는 등 엽기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창건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사이드 쿠틉과 친했던 점과, 희대의 개막장 집단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와의 커넥션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1] 방글라데시는 한 때 파키스탄의 영토였으나 독립 운동 끝에 오늘날 독립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