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이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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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부터 1859년까지 인도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세포이 용병들이 일으킨 대규모의 봉기.
참고로 현대 인도군의 이등병 계급을 바로 '''세포이'''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이등병의 항쟁'이 된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영어 표현인 폭동(Mutiny)[1] 을 그대로 해석한 세포이 '반란', (인도)'대폭동'이라는 표현으로 1980년대만 해도 국내 세계사 교과서에서 가르쳤으나, "그럼 일제강점기 독립군도 반란군이냐"라는 반발이 많아지면서 1990년을 전후해서부터는 세포이 항쟁이란 말을 많이 쓰게 되었다.[2]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 제후의 연합 세력을 꺾어 벵골 지배의 길을 연 뒤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 및 아와드와 연합한 벵골의 항쟁을 분쇄하고 벵골 지배를 공고화한다. 뒤이어 18세기 중후반 인도 남서부를 장악한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세기 전반 인도 북중부의 마라타 동맹, 북부의 시크 왕국 세력을 물리치면서 1세기만에 인도 반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굴 제국의 틀과 크고 작은 지역 왕국은 아직 존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지배는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이 인도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지역 왕국들의 구지배층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 밀려들어오던 무수한 면직물 등으로 인하여 인도의 전통 면산업이 붕괴되었다. 그 당시 면산업의 중심지였던 다카는 15만이나 되던 인구가 3~4만으로 줄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인도 회사의 토지개혁 등으로 중소농민들이 땅을 잃게되자 이들은 동인도 회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포교와 동인도 회사 행정부의 인도인 무시가 심했다. 당장 1853년 창설된 법무위원회에서는 자문위원들이 전원 영국, 유럽인들이었으며 인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인도인들의 불만을 더욱 상승시켰다.
한편 동인도회사도 인도의 군소 왕국들을 병합했는데, 동인도회사 사장이었던 댈후지(Dalhousie. 1812~1860)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다고 동인도회사에서 판단했을 경우 영국에 종속된 번왕국의 영토를 합병할 수 있다는 규정을 내세웠다.[3] 이 수법에 눈 뜬채로 영지를 잃은 번왕 중에서 나중에 항쟁에 가담하는 락슈미 바이도 있었다.
인도를 지배한 영국군 육군에는 많은 인도인 용병들이 있었는데, 1850년 당시 영국군 26만 9000명 중 영국인은 4만 6000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인도 현지의 세포이였다. 이들은 이슬람, 힌두교, 시크교 등등 수많은 종교신자들로 뒤섞여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용병을 가리켜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의 'sipahi'에서 유래)'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정복을 위해 고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들을 출신지역에 따라 3개군으로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각각 벵골군, 봄베이군, 마드라스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처우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우선 연공에 따라 진급을 시키는 영국 육군의 진급 제도를 적용하다 보니 나이가 어느 정도 있던 세포이들은 상대적으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또한 '''힌두교도 상층 카스트들은 인도의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꺼렸는데'''[4] , 영국인들이 해외 원정을 요구하면서 세포이들과 갈등을 빚었고 영국 측에서는 이에 해외 원정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해고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려 대응했다. 그래도 먹고 살려고 입대한데다 돈은 준다길래 어찌어찌 원정은 하고있었는데, 1856년 일반복무규정에 의하여 '''벵골군의 상당수는 해외원정에서 제외되었다'''.
게다가 이들 세포이 용병들의 수가 더 늘어나자 동인도 회사 측은 '''경비를 줄이려고 세포이들의 퇴직연금 지급을 중단시켰다'''. 특히 벵골군 세포이들은 퇴직금의 부담을 줄이려고 봄베이군이나 마드라스군보다 급료까지 적게 받는 도중에 이 일이 터져 버렸다. 여기에 1856년 아와드 지역이 병합되자 세포이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누려온 토지세 특권 같은 특권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상 세포이들은 '''토지세 특권을 이유로''' 세포이업을 세습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세포이 반란의 배경에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돈 문제와 '''기존 기득권의 사수'''가 있었다.
(영화 '만갈 판데이' 중. 엔필드 머스킷 소총의 장전 및 사격 방법. 1분 40초부터 보면 된다)
영국과 세포이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857년 3월 29일 벵골군 세포이였던 '만갈 판데이(1827~1857)'가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지휘관의 말까지 쏘는 하극상을 벌이자 연대장은 판데이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나 '''단 한명을 제외한 모든 세포이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외에도 아그라 등 많은 도시에서 충돌이 있었다. 이는 1857년 5월 10일, 델리 북쪽 미루트에서 발생한 '화약 탄포 문제'로 항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단순한 화약 탄포가 일을 크게 만든 것은 바로 영국인이 '''소와 돼지의 기름을 칠한 소총 탄포'''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시하고, 무슬림들은 돼지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으며, 세포이로서 징집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종교 중 어느 한 쪽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군 부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입에 대면 카스트를 강등(!)당하게 된다. 벵골군의 세포이들은 라즈푸트(크샤트리아)/브라만 등 상층 카스트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본래 세포이들은 카스트에 상관없이 모집했으나 벵골군의 경우에는 플라시/북사르 전투로 인해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상층 카스트를 모집하고,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힌두교 의식/방식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벵골 세포이들은 영국 문화에 더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던 게, 당시 전장식 머스킷(새로 보급된 엔필드 머스킷)에는 흑색화약 정량을 종이에 납탄과 함께 싸서 끈으로 묶어 밀봉하는 페이퍼 카트리지를 사용했는데, 원래 머스킷 초창기에는 플라스크에 화약을 따로 담아 다녔지만 나중에는 휴대와 사용의 편의를 위해 페이퍼 카트리지로 옮겨간다. 페이퍼 카트리지라고 하지만 총탄의 탄피를 뜻하는 카트리지와는 조금 다르다. 본격적인 탄피 시대 초기에 종이탄피가 사용된 적이 잠깐 있지만 그것과도 동떨어진, 그냥 종이로 적정량의 흑색화약과 탄약을 둘둘 말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를 사용하려면 종이로 된 화약 탄포 한쪽을 '''이빨로 찢어서''' 탄포 안에 든 화약을 총구에 부어 넣은 뒤, 화약이 새나오지 않도록 카트리지 종이를 탄환과 함께 뭉쳐서(혹은 탄포 종이를 먼저 쑤셔넣고 다음으로 탄환을) 총신에 쑤셔넣는 구조였다. 그런데 방수효과를 위해서 탄포 종이를 동물의 지방으로 코팅해 두었던 게 화근이었다.
사실 영국측의 초기 예상은 '''총신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니 세포이들은 분명히 좋아하겠지'''였고, 이것 때문에 세포이 전원에게 이 총을 지급하려고 했다. 진영이 자꾸만 어수선해지자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해 영국인 장교들이 "그럼 니네들이 새로 만들어서 밀랍이나 양기름으로 코팅하셔"라고 말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그 말은즉 '''기름 문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 나중에 영국이 조사한 결과 소기름은 확인되었으나 돼지기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사 내용이 어찌되었건 이 사건은 인도인의 대대적인 분노를 부르게 된다.
아무튼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영국 측에서는 교본을 수정해 손으로 뜯어도 되는 방향으로 수정할 것을 권고했으나 대부분 시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명령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하극상으로 불명예 제대, 심지어는 교수형까지 시켰다. 영국군도 처음에는 이런 세포이들의 불만을 접수하고 장교들이 이를 개선할 것을 본국에 정식으로 건의했지만 본국에서는 별것이 아닌 문제로 무시해버렸다. 식민지 현지의 문화에 무지하고 종교 문제의 민감성이나 폭발성에 무지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문화충돌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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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 당시 분포도. 검은색은 세포이 반란 중심지역. 남색은 항쟁 중 정부는 영국을 지원했으나 군대는 주로 반란을 도운 지역. 파란색은 영국 지지 지역. 황색은 항쟁의 영향을 받은 영국 지배지역. 연두색은 중립지역. 흰색은 영국 직할 지배지역.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 황제의 통치 부활을 선언했다. 여기서 항쟁은 더욱 퍼져나가 중부 인도로 세포이 항쟁이 확대되면서 전혀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는데, 대다수의 소작농민들이 참여하면서 '반란'이 '항쟁', '독립운동'의 성격을 띄기 시작한다. 동인도 회사의 토지개혁으로 심각한 경제적 곤란을 겪던 소작농들은 처음부터 확실하게 동인도회사와 영국에 대한 거부를 명확히 하고 있었고 여기에 인도고유문화를 부정하는 영국에 대한 문화적 반감도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항쟁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농민과 시민도 참가해 영국의 지배는 위험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9월 델리의 세포이군을 격파한다음 무굴 황제를 체포했다. 여기에 이 항쟁은 강력한 통일 지도조직을 가지지 못한 것도 커다란 한계였다. 세포이 모두가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75개 연대중 44개 연대나 참여한 벵골군과는 달리 봄베이군은 3개연대만 동조했고, 마드라스군은 '''단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이 항쟁에 대해 여러 힌두교 번왕국[5] 및 시크교도들은 오히려 영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시크교를 탄압했던 '무굴 제국의 부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 때문에 시크교도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펀자브 지방의 토후와 손을 잡을 수 있기도 했다.[6]
이후에도 세포이 항쟁은 여러 지역에서 소모적인 활동이 있었으나, 결국 영국군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고 결국 그들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부딪쳐 1859년 7월에 완전 진압되었다. 이 와중에 세포이들은 포로로 잡힌 영국인들, 민간인을 매우 우대했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포로로 잡힌 여성을 안 건드려서 성불구자가 아니냐는 개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결국은 나중에 과격해져서 영국인을 보기만 하면 다죽여버리려 했다. 특히 칸푸르에선 반란군을 이끌던 나나 사힙이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항복한 영국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학살했는데 남자들은 전부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한 다음 아이들과 같이 고기자르는 칼로 토막살인을 해 우물에 던져버렸다. 이로 인해 한때 인도인들에게 동정적이였던 영국 본토 사람들마저 분노하여 전부 강경파로 변하고, 영국군은 이에 대응하여 더 많은 수의 반란군과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로 보복하여 인도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영국군은 가난한 집안에서 돈벌고자 서로 오려던 경우가 허다해서 적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나 강간은 워낙 흔했고 영국 여론도 이걸 비난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걸 혐오하며 약탈이나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고 심지어 시체를 뒤져 물건을 차지하는 부하까지 가차없이 교수형시킨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영국에서도 괴짜로 소문 났던 걸 보면 알만했다.[7]
포로로 잡힌 반란군은, 영국 육군에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포구(砲口, 대포 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날려 버리는 방법'''으로 처형됐다. 실제 사진이 남아 있고 그 사진이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정확히는 가로세로 세계사) 중동편에 실려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영국은 직접 통치로 전환, 쓸모 없어진 동인도 회사를 해체한다. 무굴 황제는 폐위하여 추방, 무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킨다. 이후 총독에 의한 정치를 지나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 자리에 올라 황제를 칭하고 식민지 인도 제국이 세워진다.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는 미얀마로 귀양을 떠나서 그곳에서 쓸쓸하게 죽었고 그의 아들들은 영국에 대항한 죄로, 투항한 황후 지낫 마할의 세 아들을 제외하곤 모두 잔혹히 처형되었으며 딸들은 영국 장교의 첩이 되었다.
세포이 항쟁이 있었던 무렵, 영국은 제2차 아편전쟁도 겪었기 때문에 영국은 양쪽에서 벌어진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물론 식민지를 위해서가 아닌 본국을 위한 것이었고 인도인의 처우가 나아지거나 정치적 권리가 더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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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을 다룬 영화 중 최근작으로는 2005년, 인도에서 제작한 'Mangal Pandey'(만갈 판데이)가 있다. 900만 달러로 제작하여 인도에서 22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은 그럭저럭 거둬들였다. 물론 그 전에도 영화화가 몇 번 되었다.
셜록 홈즈 단편 시리즈인 셜록 홈즈의 회상록 가운데 하나인 '꼽추 사내'(The Adventure of the Crooked Man)에서도 세포이 항쟁이 줄거리에서 중요한 배경 사건으로 나온다.
2016년 12월, 영국에서 새 5파운드 지폐를 발행했는데 여기에 수지가 사용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영국 내에 거주하는 채식주의자 및 힌두교도 공동체[8] 들 사이에 패닉이 벌어졌다. 세포이 항쟁 때처럼 전쟁이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상황이다.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에서 그려진 선전물도 있는데 영국을 상징하는 사자[9] 가 인도를 상징하는 벵갈호랑이에게 죽은 여자(세포이 항쟁 당시 희생당한 영국인)의 복수를 위해 벵갈호랑이를 공격하는 그림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인도 캠페인이 1857년에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 개요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인도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세포이 용병들이 일으킨 대규모의 봉기.
참고로 현대 인도군의 이등병 계급을 바로 '''세포이'''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이등병의 항쟁'이 된다.
2. 명칭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영어 표현인 폭동(Mutiny)[1] 을 그대로 해석한 세포이 '반란', (인도)'대폭동'이라는 표현으로 1980년대만 해도 국내 세계사 교과서에서 가르쳤으나, "그럼 일제강점기 독립군도 반란군이냐"라는 반발이 많아지면서 1990년을 전후해서부터는 세포이 항쟁이란 말을 많이 쓰게 되었다.[2]
3. 배경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 제후의 연합 세력을 꺾어 벵골 지배의 길을 연 뒤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 및 아와드와 연합한 벵골의 항쟁을 분쇄하고 벵골 지배를 공고화한다. 뒤이어 18세기 중후반 인도 남서부를 장악한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세기 전반 인도 북중부의 마라타 동맹, 북부의 시크 왕국 세력을 물리치면서 1세기만에 인도 반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굴 제국의 틀과 크고 작은 지역 왕국은 아직 존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지배는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이 인도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지역 왕국들의 구지배층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 밀려들어오던 무수한 면직물 등으로 인하여 인도의 전통 면산업이 붕괴되었다. 그 당시 면산업의 중심지였던 다카는 15만이나 되던 인구가 3~4만으로 줄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인도 회사의 토지개혁 등으로 중소농민들이 땅을 잃게되자 이들은 동인도 회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포교와 동인도 회사 행정부의 인도인 무시가 심했다. 당장 1853년 창설된 법무위원회에서는 자문위원들이 전원 영국, 유럽인들이었으며 인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인도인들의 불만을 더욱 상승시켰다.
한편 동인도회사도 인도의 군소 왕국들을 병합했는데, 동인도회사 사장이었던 댈후지(Dalhousie. 1812~1860)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다고 동인도회사에서 판단했을 경우 영국에 종속된 번왕국의 영토를 합병할 수 있다는 규정을 내세웠다.[3] 이 수법에 눈 뜬채로 영지를 잃은 번왕 중에서 나중에 항쟁에 가담하는 락슈미 바이도 있었다.
4. 세포이 용병들
인도를 지배한 영국군 육군에는 많은 인도인 용병들이 있었는데, 1850년 당시 영국군 26만 9000명 중 영국인은 4만 6000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인도 현지의 세포이였다. 이들은 이슬람, 힌두교, 시크교 등등 수많은 종교신자들로 뒤섞여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용병을 가리켜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의 'sipahi'에서 유래)'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정복을 위해 고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들을 출신지역에 따라 3개군으로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각각 벵골군, 봄베이군, 마드라스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처우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우선 연공에 따라 진급을 시키는 영국 육군의 진급 제도를 적용하다 보니 나이가 어느 정도 있던 세포이들은 상대적으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또한 '''힌두교도 상층 카스트들은 인도의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꺼렸는데'''[4] , 영국인들이 해외 원정을 요구하면서 세포이들과 갈등을 빚었고 영국 측에서는 이에 해외 원정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해고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려 대응했다. 그래도 먹고 살려고 입대한데다 돈은 준다길래 어찌어찌 원정은 하고있었는데, 1856년 일반복무규정에 의하여 '''벵골군의 상당수는 해외원정에서 제외되었다'''.
게다가 이들 세포이 용병들의 수가 더 늘어나자 동인도 회사 측은 '''경비를 줄이려고 세포이들의 퇴직연금 지급을 중단시켰다'''. 특히 벵골군 세포이들은 퇴직금의 부담을 줄이려고 봄베이군이나 마드라스군보다 급료까지 적게 받는 도중에 이 일이 터져 버렸다. 여기에 1856년 아와드 지역이 병합되자 세포이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누려온 토지세 특권 같은 특권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상 세포이들은 '''토지세 특권을 이유로''' 세포이업을 세습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세포이 반란의 배경에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돈 문제와 '''기존 기득권의 사수'''가 있었다.
5. 화약 탄포 문제
(영화 '만갈 판데이' 중. 엔필드 머스킷 소총의 장전 및 사격 방법. 1분 40초부터 보면 된다)
영국과 세포이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857년 3월 29일 벵골군 세포이였던 '만갈 판데이(1827~1857)'가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지휘관의 말까지 쏘는 하극상을 벌이자 연대장은 판데이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나 '''단 한명을 제외한 모든 세포이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외에도 아그라 등 많은 도시에서 충돌이 있었다. 이는 1857년 5월 10일, 델리 북쪽 미루트에서 발생한 '화약 탄포 문제'로 항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단순한 화약 탄포가 일을 크게 만든 것은 바로 영국인이 '''소와 돼지의 기름을 칠한 소총 탄포'''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시하고, 무슬림들은 돼지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으며, 세포이로서 징집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종교 중 어느 한 쪽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군 부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입에 대면 카스트를 강등(!)당하게 된다. 벵골군의 세포이들은 라즈푸트(크샤트리아)/브라만 등 상층 카스트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본래 세포이들은 카스트에 상관없이 모집했으나 벵골군의 경우에는 플라시/북사르 전투로 인해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상층 카스트를 모집하고,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힌두교 의식/방식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벵골 세포이들은 영국 문화에 더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던 게, 당시 전장식 머스킷(새로 보급된 엔필드 머스킷)에는 흑색화약 정량을 종이에 납탄과 함께 싸서 끈으로 묶어 밀봉하는 페이퍼 카트리지를 사용했는데, 원래 머스킷 초창기에는 플라스크에 화약을 따로 담아 다녔지만 나중에는 휴대와 사용의 편의를 위해 페이퍼 카트리지로 옮겨간다. 페이퍼 카트리지라고 하지만 총탄의 탄피를 뜻하는 카트리지와는 조금 다르다. 본격적인 탄피 시대 초기에 종이탄피가 사용된 적이 잠깐 있지만 그것과도 동떨어진, 그냥 종이로 적정량의 흑색화약과 탄약을 둘둘 말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를 사용하려면 종이로 된 화약 탄포 한쪽을 '''이빨로 찢어서''' 탄포 안에 든 화약을 총구에 부어 넣은 뒤, 화약이 새나오지 않도록 카트리지 종이를 탄환과 함께 뭉쳐서(혹은 탄포 종이를 먼저 쑤셔넣고 다음으로 탄환을) 총신에 쑤셔넣는 구조였다. 그런데 방수효과를 위해서 탄포 종이를 동물의 지방으로 코팅해 두었던 게 화근이었다.
사실 영국측의 초기 예상은 '''총신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니 세포이들은 분명히 좋아하겠지'''였고, 이것 때문에 세포이 전원에게 이 총을 지급하려고 했다. 진영이 자꾸만 어수선해지자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해 영국인 장교들이 "그럼 니네들이 새로 만들어서 밀랍이나 양기름으로 코팅하셔"라고 말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그 말은즉 '''기름 문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 나중에 영국이 조사한 결과 소기름은 확인되었으나 돼지기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사 내용이 어찌되었건 이 사건은 인도인의 대대적인 분노를 부르게 된다.
아무튼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영국 측에서는 교본을 수정해 손으로 뜯어도 되는 방향으로 수정할 것을 권고했으나 대부분 시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명령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하극상으로 불명예 제대, 심지어는 교수형까지 시켰다. 영국군도 처음에는 이런 세포이들의 불만을 접수하고 장교들이 이를 개선할 것을 본국에 정식으로 건의했지만 본국에서는 별것이 아닌 문제로 무시해버렸다. 식민지 현지의 문화에 무지하고 종교 문제의 민감성이나 폭발성에 무지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문화충돌의 사례.
6.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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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 당시 분포도. 검은색은 세포이 반란 중심지역. 남색은 항쟁 중 정부는 영국을 지원했으나 군대는 주로 반란을 도운 지역. 파란색은 영국 지지 지역. 황색은 항쟁의 영향을 받은 영국 지배지역. 연두색은 중립지역. 흰색은 영국 직할 지배지역.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 황제의 통치 부활을 선언했다. 여기서 항쟁은 더욱 퍼져나가 중부 인도로 세포이 항쟁이 확대되면서 전혀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는데, 대다수의 소작농민들이 참여하면서 '반란'이 '항쟁', '독립운동'의 성격을 띄기 시작한다. 동인도 회사의 토지개혁으로 심각한 경제적 곤란을 겪던 소작농들은 처음부터 확실하게 동인도회사와 영국에 대한 거부를 명확히 하고 있었고 여기에 인도고유문화를 부정하는 영국에 대한 문화적 반감도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항쟁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농민과 시민도 참가해 영국의 지배는 위험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9월 델리의 세포이군을 격파한다음 무굴 황제를 체포했다. 여기에 이 항쟁은 강력한 통일 지도조직을 가지지 못한 것도 커다란 한계였다. 세포이 모두가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75개 연대중 44개 연대나 참여한 벵골군과는 달리 봄베이군은 3개연대만 동조했고, 마드라스군은 '''단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이 항쟁에 대해 여러 힌두교 번왕국[5] 및 시크교도들은 오히려 영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시크교를 탄압했던 '무굴 제국의 부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 때문에 시크교도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펀자브 지방의 토후와 손을 잡을 수 있기도 했다.[6]
이후에도 세포이 항쟁은 여러 지역에서 소모적인 활동이 있었으나, 결국 영국군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고 결국 그들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부딪쳐 1859년 7월에 완전 진압되었다. 이 와중에 세포이들은 포로로 잡힌 영국인들, 민간인을 매우 우대했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포로로 잡힌 여성을 안 건드려서 성불구자가 아니냐는 개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결국은 나중에 과격해져서 영국인을 보기만 하면 다죽여버리려 했다. 특히 칸푸르에선 반란군을 이끌던 나나 사힙이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항복한 영국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학살했는데 남자들은 전부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한 다음 아이들과 같이 고기자르는 칼로 토막살인을 해 우물에 던져버렸다. 이로 인해 한때 인도인들에게 동정적이였던 영국 본토 사람들마저 분노하여 전부 강경파로 변하고, 영국군은 이에 대응하여 더 많은 수의 반란군과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로 보복하여 인도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영국군은 가난한 집안에서 돈벌고자 서로 오려던 경우가 허다해서 적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나 강간은 워낙 흔했고 영국 여론도 이걸 비난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걸 혐오하며 약탈이나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고 심지어 시체를 뒤져 물건을 차지하는 부하까지 가차없이 교수형시킨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영국에서도 괴짜로 소문 났던 걸 보면 알만했다.[7]
포로로 잡힌 반란군은, 영국 육군에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포구(砲口, 대포 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날려 버리는 방법'''으로 처형됐다. 실제 사진이 남아 있고 그 사진이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정확히는 가로세로 세계사) 중동편에 실려있다.
7. 항쟁 이후
이 사건의 여파로 영국은 직접 통치로 전환, 쓸모 없어진 동인도 회사를 해체한다. 무굴 황제는 폐위하여 추방, 무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킨다. 이후 총독에 의한 정치를 지나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 자리에 올라 황제를 칭하고 식민지 인도 제국이 세워진다.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는 미얀마로 귀양을 떠나서 그곳에서 쓸쓸하게 죽었고 그의 아들들은 영국에 대항한 죄로, 투항한 황후 지낫 마할의 세 아들을 제외하곤 모두 잔혹히 처형되었으며 딸들은 영국 장교의 첩이 되었다.
세포이 항쟁이 있었던 무렵, 영국은 제2차 아편전쟁도 겪었기 때문에 영국은 양쪽에서 벌어진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물론 식민지를 위해서가 아닌 본국을 위한 것이었고 인도인의 처우가 나아지거나 정치적 권리가 더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8.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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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을 다룬 영화 중 최근작으로는 2005년, 인도에서 제작한 'Mangal Pandey'(만갈 판데이)가 있다. 900만 달러로 제작하여 인도에서 22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은 그럭저럭 거둬들였다. 물론 그 전에도 영화화가 몇 번 되었다.
셜록 홈즈 단편 시리즈인 셜록 홈즈의 회상록 가운데 하나인 '꼽추 사내'(The Adventure of the Crooked Man)에서도 세포이 항쟁이 줄거리에서 중요한 배경 사건으로 나온다.
2016년 12월, 영국에서 새 5파운드 지폐를 발행했는데 여기에 수지가 사용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영국 내에 거주하는 채식주의자 및 힌두교도 공동체[8] 들 사이에 패닉이 벌어졌다. 세포이 항쟁 때처럼 전쟁이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상황이다.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에서 그려진 선전물도 있는데 영국을 상징하는 사자[9] 가 인도를 상징하는 벵갈호랑이에게 죽은 여자(세포이 항쟁 당시 희생당한 영국인)의 복수를 위해 벵갈호랑이를 공격하는 그림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인도 캠페인이 1857년에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 (주로 군인이나 선원들의)폭동, 반란을 뜻한다. 합법적인 체계나 권한을 무시하는 불법적인 행위라는 뉘앙스가 강한 표현.[2] 하지만 세포이는 실상 독립운동과는 차이가 매우 많다.[3] 로마제국이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 부디카 여왕이 비슷한 방법으로 영토를 빼앗겨 반란을 일으켰다.[4] 힌두교 마누 법전에는 한 번이라도 바다에 나갔다 돌아올 경우 이전의 계급과 상관없이 무조건 최하위 계급인 수드라로 강등한다는 규칙이 있었기에, 특히 높은 카스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싫어했다. 예를 들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도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집안의 친척들이 이 마누 법전을 근거로 하며 반대했기에 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5] 락슈미바이나 나나 사힙처럼 동인도회사에게 영지를 잃은 번왕들은 영지를 되찾기 위해 항쟁에 가담할 동기가 있었지만, 친영파 영주들은 항쟁에 가담할 이유가 없었다.[6] 거기다 탄포 문제도 시크교도들은 별 신경 안 썼는데, 어차피 시크교도들은 종교 교리상 인육 빼고 고기 안 가린다.[7] 사실 웰링턴 공작은 인도적인 이유도 있지만 약탈당하는 민간인들이 적성세력으로 돌아설 위험성 때문에 막았던 면이 강하다.[8] 힌두교도가 분노한 건 현대사회에서는 수지가 대부분 소에게 채취되기 때문이며 채식주의자의 경우 비건 계열은 음식뿐만 아니라 일상용품도 동물로 된 것은 먹고 쓰지 않기 때문이다.[9] 영국에서는 사자가 안 살았지만 영국에서는 옛부터 사자를 상징으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