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

 

1. 개요
2. 역사
2.1. 이슬람 모더니즘의 퇴보
2.1.1. 레닌주의의 영향
2.1.2. 기독교 원리주의의 영향
2.1.3. 반지성주의화
2.2. 현대
3. 특징
3.1. 반지성주의
3.2. 비이슬람 사회에 대한 기만행위
3.3. 과격한 옥시덴탈리즘, 음모론 세뇌
4. 개념 구분
4.1. 이슬람=이슬람주의?
4.2. 이슬람주의=이슬람 근본주의/극단주의?
5. 비판 : 이슬람주의는 어떻게 이슬람권을 약화시켜 왔는가
5.1. 민주주의의 관용을 숙주로 삼는 확장 전략
5.2. 무책임한 선교 전략
5.3. 이중잣대와 선민 사상
6. 관련 단체
7. 함께 보기


1. 개요


  • إسلاموية
  • Islamism, Islamist Separatism[1]
현대 무슬림 사회에서 원리주의적인 이슬람 해석에 입각하여 이슬람 신정 국가를 건설하려는 범운동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이슬람적 종교관에서는 심판의 날과 내세에서의 구원을 더 중시한다면,[2]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율법을 현실에 적극 도입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다소 현세지향적인 경향이 강하다.
과거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같은 칼리프 정권과 성격이 다르다. 이는 이슬람주의가 현대 정치 사상과 기술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완전한 제정일치 신정 정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이슬람 사학자 중 한 명인 아이라 라피두스(Ira Rapidus)에 따르면 이슬람에서 제정일치가 완전히 가능했던 시기는 예언자 무함마드에서 제 2대 칼리프 우마르 때까지였으며, 그 이후는 제정일치라고 보기 힘들다고 한다. 이슬람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고 통치 인구와 영토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교통과 통신 기술이 미비했던 당시 기준으로 완전한 형태의 신정 정권을 수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칼리프 우마르 시대 이후로 이슬람 칼리프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관료제를 도입하였으며,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는 칼리프들이 세속적인 헬레니즘 문화를 즐기는 사이 도회지에서는 무슬림 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이슬람 신학을 발전시키고, 압바스 왕조 시대부터는 이슬람 신학자들과 지방 군벌정권들이 서로 보호해주면서 유착하는 관계가 강화되었다.
오늘날의 이슬람주의는 이란 이슬람 신정 공화국의 사례에서 보듯 현대 과학기술로 교통과 통신의 발전을 이용하여 국민의 일상 생활까지 완전히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신정 정권을 추구한다. 즉 중세 초 이슬람 칼리프 정권보다 훨씬 더 보수화, 극단화될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으며, 실제로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가 고대 그리스, 로마와 인도의 과학 기술을 적극 도입했던 것과 반대로 오늘날의 이슬람주의에서는 극단적인 반서구주의와 반지성주의가 병행되어 나타난다.

2. 역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슬람 근본주의의 출현은 나즈드 지방에서 와하비즘이 성행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와하비즘을 지원하던 아랍인들은 부패한 오스만 제국의 관료들을 몰아내고 이슬람 율법을 더 적극적이고 원리주의적으로 적용하면 유토피아가 건설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이들이 이슬람주의자의 초창기 모습을 보여준다. 와하비즘이 세계화되기 이전의(즉 오스만 말기) 이슬람 세계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현대인이 상상하는 무슬림 사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이혼이 매우 자유로웠으며, 기독교 등 다른 종교를 이슬람과 동시에 믿는 이중 신앙도 시골을 중심으로 흔했다.[3] 수피가 길거리에 생식기만 가리고 걸어다녀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는다던지, 동성애가 처벌받지 않는다던지 지역에 따라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해도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다던지 등등... 그러나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이슬람주의가 영향력을 가진 이후론 현대인에게 익숙한 극도로 경직된 무슬림 사회가 만들어진다.
20세기 초반에서는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에 해당하는 나즈드 지역, 19세기 말 수단마흐디 운동 정도가 오늘날의 이슬람주의와 흡사한, 중세처럼 단순히 근본주의 성직자들의 협조를 받고 정복전쟁에서 "지하드"를 선포하는 것을 넘어, 일반인들의 일상 생활까지 이슬람 근본주의적으로 통제하고 기존의 무슬림 정권을 이른바 “불신자”라고 낙인찍는 형태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1. 이슬람 모더니즘의 퇴보


19세기 무렵 이집트와 인도를 중심으로 이슬람 모더니즘 단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단체들은 출발 자체는 매우 온건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시아파와 순니파가 화해하여 제국주의에 맞서고,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화해하여 인도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한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 일부다처제를 비판하고 이집트의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모두 서구의 모더니즘(자연현상을 이성적으로 객관화, 수치화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무함마드 압두, 메이지 유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급진적인 서구화를 추구한 사이드 아흐마드 칸 등 시작은 굉장히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이슬람 모더니즘은 '''와하비즘'''과 '''레닌주의'''를 흡수하였고, 기독교 근본주의로부터는 선교 방식과 '''엄숙주의''' 및 '''세속문화 혐오'''를 받아들이며 극우적으로 퇴보하면서 이슬람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이슬람 모더니즘와하브파와의 영향을 주고 받은 이슬람 신학 사조로 살라프파가 있다. 서구 외세의 침탈로부터 어떻게 무슬림들을 구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인도와 이집트 등 제 3세계 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이슬람 초창기와 이슬람 원리원칙으로부터 해답을 찾기 시작했으며, 이 와중에 수피와 마드하브가 이슬람 발전의 걸림돌이라고 주장하고 비판하면서 살라피즘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기원 때문에 오늘날의 살라피스트는 반수피, 반시아 성향이 강하다.
무슬림 형제단은 심지어 라시드 리다 같은 살라프파의 시조조차도 개혁이 너무 온건하고 친서구적이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모더니즘에 와하브파 신학을 받아들인 라시드 리다를 온건하고 친서구적이라고 비판할 때부터 이들의 싹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2.1.1. 레닌주의의 영향


마르크스가 혁명의 주체로 노동자를 주목하고 농민을 무시한 것과 다르게 레닌은 빈농들과 소수민족이 많은 당시 제정 러시아 상황에 특수성을 고려하여, 농민과 식민지 피지배 민족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의 많은 부분을 보완,수정하였고 이는 서구의 식민화나 경제적 예속 상태로부터 고통받던 무슬림 지식인들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의 창립자 하산 알 반나이슬람 모더니즘와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과도기적인 인물로, 이집트 서민층의 반서구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반영 감정이 강했지만 대신 '''레닌주의'''에 호감을 느낀 하산 알 반나는 이슬람주의 교리에 레닌주의적 요소를 상당히 흡수하였고, 막심 고리키의 소설에 나온 노동자 운동과 유사한 방식[4]으로 지하조직을 운영하여 전세계로 이슬람을 확장해야 한다는 사상을 이집트 서민들에게 가르쳤다. 당시 하산 알 반나의 가르침은 당시 패배주의에 시달리던 중동 무슬림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효과가 있었으나, 이후 공교롭게도 사이드 쿠틉의 극단적인 반지성주의 해석이 더해지며 무슬림 형제단은 극우 집단이 되었다.
하산 알 반나가 벤치마킹하려 했던 지하 노동자 조직은 사이드 쿠틉의 극단적인 반서구주의와 비논리적인 증오 조장 문구가 더해지며,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의 근간이 된다. 시아파의 이슬람주의 발생과정 또한 이와 유사했는데 이슬람 사회주의 성향의 철학자 알리 샤리아티는 전통적인 12이맘파 신학에 마르크스-레닌주의(즉 스탈린주의)를 접목한 사상으로 이란 혁명 이전 대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1.2. 기독교 원리주의의 영향


남아프리카의 인도계 이민자 출신 무슬림 아흐마드 디다트는 기독교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선교 방식을 분석한 이후 이슬람 선교에 '''근현대 기독교식 선교 방식'''을 도입하였다. 아흐마드 디다트가 주로 참고한 기독교 종파는 삼위일체 대신 아리우스파와 유사한 교리를 추구하여 이슬람과 나름 접점이 있던 유니테리언 교회였는데, 아흐마드 디다트가 유니테리언 신학을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기독교 선교사들과의 토론 논쟁에서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패배주의에 시달리던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문제는 아흐마드 디다트가 벤치마킹한 대상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 등등 세속 문화를 경계하는 보수적인 신흥 종교 교단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더 심각한 문제는 사우디 아라비아 등 걸프 아랍 왕정 국가에서 와하비즘을 포교할 때 아흐마드 디다트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서구 내 온건파 무슬림 커뮤니티 각지에 와하비즘을 포교했다는 점이다. 와하비즘이 나쁘고 말고를 떠나서 근본주의 성향의 와하비즘 율법 해석과 이슬람주의의 결합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은 이란의 이슬람주의에 훨씬 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국은 거대한 사탄”이라고 칭하던 호메이니가 미국을 비판할 때 사용하던 논리 중 상당부분은 바로 미국 바이블벨트 내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캘리포니아 지역의 개방적인 히피 문화를 공격하던 것을[5]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물론 사이드 쿠틉만큼 치졸한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호메이니 역시 미국을 음란물과 히피, 동성애가 판치는 마귀소굴로 묘사하며 디스하길 즐겼는데 이 과정에서 보수 기독교계의 호모포비아 및 엄숙주의 문화가 이슬람주의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다.

2.1.3. 반지성주의화


남아시아의 이슬람 모더니즘계에서 촉망받던 천재 학생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파키스탄 독립 이후 극우적인 이슬람주의로 전향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수피 소수종파 아흐마디야[6] 신도들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주장(...)했으며, 이후 세속주의 정권이 쿠데타로 전복되자 파키스탄 군부의 우민화 정책에 동조하여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는 미명하에 파키스탄 군부의 공교육 예산 비율 삭감을 미화하였다. 당시 파키스탄 군사독재 정권은 미국에 공군기지를 임대하는 대가로 상당한 원조금을 받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 국가 예산 대부분을 발전소나 학교를 짓는 대신 국방비로 몰빵하였다.[7] 그 결과로 파키스탄은 20세기 후반에도 문맹률이 80% 정도에 달했다. 문맹률이 50% 이하로 감소하는 시점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우려하던 파키스탄 군사독재자들 입장에서 아불 알라 마우두디만한 효자가 없었다.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여성 인권 신장 운동도 "타락한 서구화와 여성 해방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미명 하에 반대하였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 함께 활동했던 경력에 무함마드 이크발의 총애로 권위를 가진 신학자가 이런 말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압박을 주었으니, 진보 성향 개혁가들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이슬람 모더니즘 학자 사이드 아흐마드 칸무함마드 이크발은 "무지는 빈곤의 어머니이다."라는 슬로건으로 교육 확대를 통한 빈곤층 구제를 통해 남아시아 무슬림 사회에서 최소한 고리대금이라도 없애려고 노력했는데,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이조차도 뒤집어 엎었다. 우민화 정책을 이용해서 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독립 이전 방글라데시)에서 국민들의 눈을 가린 후 고리대금마저 샤리아로 합법화시켰다.[8]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고리대금이 간통보다 수십 배는 나쁘다고 나오지만 마우두디는 "타락한 서구화와 여성 해방을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할 때와는 다르게 고리대금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방글라데시의 고리대금 사회문제는 무함마드 유누스가 1980년대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고 나서야 2000년대 후반부에나 가서 간신히 해결되었다.[9]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우르두어로 쓴 책들은 우르두어 서적들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들인데, 이는 그의 천재성을 증명함[10]과 동시에 그가 파키스탄 내 군사독재자들의 우민화 정책으로부터 얼마나 해먹었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카슈미르 해방을 위한 성전을 부르짖으며 자발적으로 반정부 극단주의자라며 감옥에 자진해서 수감되는 퍼포먼스도 행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을 마치 이븐 타이미야나 이븐 한발처럼 보이도록 한 언플이었고 실제로 군사독재 정권의 여타 일반적인 수감자나 정치범으로 대우받지는 않았다. 우민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서구주의 포퓰리즘을 악용하던 천재 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파키스탄 군부 독재자들의 재산 증식을 도와준 공로로 뉴욕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2.2. 현대


[image]
사진에 나온 문구는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이슬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쓰여져있지만 이슬람권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니캅 같은 복식 관련한 문화는 시대가 지나면서 계속 변화하여 왔다. 실질적으로 이런 종류의 문구와 사진들은 근본주의자들의 호응과 지원을 얻기 위한 문구일 뿐이다.
70년대 이슬람권만 해도 세속주의가 상당한 지역이 적지 않았으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80년대 서양에서 신보수주의로 인한 우경화 내지 보수 열풍이 불면서 그 영향으로 중동 대중들 사이에서 종교적 보수주의 내지 이슬람주의가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사실 단순히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냉전시대였기 때문에 70~80년대 신보수주의자들이 세속적 아랍민족주의, 아랍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이슬람주의를 후원한 것도 이슬람권 우경화에 크게 기여했다.
한 술 더 떠서 호메이니이슬람 신정 혁명에 자극받은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도 자국에서도 이슬람주의 성향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슬람 율법을 더 수구적으로 적용하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세계의 우경화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우경화의 촉매제 역할을 한 셈이다. 호메이니의 이란 이슬람 신정 공화국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최초의 사례라 하겠다.

3. 특징



3.1. 반지성주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자신들도 편견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다른 사회 소수자들을 편견을 가지고 비하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이슬람 선교가 이슬람 신정 국가 설립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이슬람적인 문화는 언젠가는 사라질 무가치한 적폐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려 들기 때문. 이들의 사고방식은 미국의 바이블 벨트 지역의 반지성주의적 기독교인들이나 한국의 보수 성향 개신교인들과 다소 비슷하다. 타종교나 타종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은 덤.
이슬람주의자들은 히잡[11], 부르키니[12], 샤리아[13], 아랍어[14]가 무슬림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하며, 애완견을 키우면 무슬림이 아니며 음악을 들어도 무슬림이 아니고 영화도 보지 말고 세속 학문도 공부하면 안된다는 극단적 엄숙주의 성향을 보인다. '''모스크 운영비를 횡령하거나 성추문을 일으키는 건 쉬쉬하고 넘어가지만 소설책을 읽으면 사탄의 꾀임에 빠졌다고 맹비난을 퍼붓는 이들 덕분에 이슬람권의 인문학 발전은 오늘도 지체되는 중이다.'''
특히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은 시아파를 음해하는 레퍼토릭을 퍼트리고 있는데 심한 것은 시아파 무슬림들이 집단난교를 종교의식으로 삼는다는 망언도 있을 정도이다. 이런 음해는 수피 종파 아흐마디야한테도 해당되는데 아흐마디야를 '''아흐마디''', '''까디아니'''라고 칭하면서 미르자 굴람 아(흐)마드를 우상숭배하는 사교집단으로 매도하고 대영제국에 빌붙어 인도 아대륙 착취에 협력했다고 날조하고 있다.[15]

3.2. 비이슬람 사회에 대한 기만행위


진보 성향의 인권운동가들이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이슬람주의자들은 같은 무슬림들에게 "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는 대신에 공학을 공부하냐 신앙심이 없냐?" 같은 방식으로 억지 꼬투리를 잡거나 일부러 관심을 끌기 위해서 지구 구형설을 부정한다던지 같은 행동으로 다른 무슬림들의 행복권을 적극 침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국내 이슬람주의 선교사들 같은 경우는 비무슬림 중 힘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슬람을 선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슬람을 알리고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16] 그래놓고 뒤에서는 대놓고 '''선교자금'''을 모금받아 그 돈으로 다른 한국인 무슬림들에게 소송 협박을 거는 등 뒤통수를 치고 다닌다. 선교 자금을 모금받을 때는 일부러 자신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계기를 장황하게 써놓은 후 동정심을 요구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돈으로 신앙을 구입한다는 한국식 종교관에도 충실한 셈이다.
게다가 이슬람주의자들은 비이슬람권의 사회자유주의 정당을 이용하여 자신을 사회적 소수자로 치장하여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비무슬림들에게 히잡을 설명할 때는 페미니즘적 수사를 이용하여 히잡이 성적 대상화에 저항하는 수단이라고 강연하는 경우가 있으나, 동시에 무슬림들에게는 ‘성폭행의 원인은 니캅, 아바야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세뇌시키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왔다. 이런 이중잣대 선교 전략에 말려든 비이슬람권의 사회자유주의, 일부 좌파 정당[17]은 이슬람주의자들이 다원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함에도 이들을 진보로 착각하거나 동정하면서 퇴행적 좌파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서구 사회의 이슬람주의자들 중에 여성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왜냐하면 무슬림 여성이 직접 니캅과 부르카, 차도르가 무슬림 여성의 필수불가결한 권리라고 주장하면 서구인들이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를 받아들일 거라고 믿는 생각 없는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많고, 걸프 산유국의 선교 지원금이 뭉텅이째로 굴러들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짜 이슬람 원리원칙 그대로 따지자면 히잡이나 니캅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걸치거나 입는 복장이다.''' 정교회 기독교인들도 교회 들어갈 때는 히잡 비슷하게 머리를 가리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으라는 복장을 가지고 과시적으로 유튜브에 출연하는 여성 이슬람주의자들이 과연 무슬림 여성들의 의견과 권리를 제대로 대표해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3.3. 과격한 옥시덴탈리즘, 음모론 세뇌


“유대인들에게 조종당하는 타락한 서구”, “서구 여성들은 성 상품화의 노예”같은 선정적인 증오 문구를 즐겨 사용한다. 큐어넌스러운 막장 음모론 세뇌도 빼먹으면 섭섭하다.
20세기 초 이슬람주의자들은 중동을 식민화한 영국, 프랑스에 반발해서 나치독일, 소련과 연대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치즘,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여러가지 황당한 음모론도 같이 들어왔다. 오늘날에는 대놓고 나치 이론을 옹호하는 경우는 없지만 대신 포스트모더니즘 사관을 왜곡해석해서 음모론을 생산하는 성향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4. 개념 구분



4.1. 이슬람=이슬람주의?


이슬람주의자들의 종교가 대다수가 이슬람이라서 혼동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슬람은 종교이고 '''이슬람주의는 근대 무슬림 사회가 레닌주의[18]기독교 근본주의[19]의 영향을 받으며 나타난 정치이념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이슬람주의(Islamism)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이는 Islamism, Islamist라는 말이 이들을 조롱하는 어휘이기 때문이다. 사이드 쿠틉과 그 제자들은 영어로 -ism이 붙은 사상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다른 무슬림 지식인들은 “그럼 이슬람 신앙의 기본인 ‘유일신 신앙(타우히드)’을 영어로 번역하면 Monotheism인데, 너희는 그럼 우상숭배자겠네.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뜻에서 조롱조로 접미사 -ism을 붙여 부른 게 그 어원이다.

4.2. 이슬람주의=이슬람 근본주의/극단주의?


이슬람주의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부정하고 이슬람 율법의 적극적 도입을 통한 신정 국가 설립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로 분류될 수 있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이 모두 테러와 암살을 저지르고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슬람주의를 이슬람 극단주의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슬람 극단주의는 영국 정부가 제시한 신조어로, 무슬림 테러리스트의 사상과 심리를 정의할 때만 사용된다.

5. 비판 : 이슬람주의는 어떻게 이슬람권을 약화시켜 왔는가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 뒤를 이은 정통 칼리파 시대의 무슬림들이 비무슬림들에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고 거대한 제국을 이루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초창기 무슬림 사회가 철저하게 능력과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행실보다는 가족, 친족관계, 지역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어느순간 천지개벽 수준으로 갑자기 능력 본위 사회로 바뀌면서 아랍인들의 포텐셜이 폭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초창기 무슬림들의 성공 요인이었던 공정성과 능력제일주의는 제쳐놓고, 오히려 "이슬람 율법 대신에 의학을 공부하면 신앙심이 부족한 것"이라 던 꼴통 수구 근본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다. 세속주의 독재정권의 부정부패를 개혁하겠다는 이들이지만 정작 이들도 사람을 능력이나 행실보다는 혈연, 지연을 가지고 뽑으며[20] 서구 사회에 대한 반감이 도가 지나쳐서 '''반지성주의'''가 되면서 오히려 무슬림 사회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무슬림들 중에 개혁주의자들[21]이나 타협주의자들[22]은 "이슬람주의가 이슬람을 최우선시하는 바람에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과학적 합리주의가 세속적이라고 배척해 결과적으로 무슬림 스스로를 비합리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 무슬림들은 이들 개혁주의자들과 타협주의자들을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민가서 잘 먹고 잘 사는 얌체 매국노"(...)[23]라는 식으로 매우 부정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이들이 이슬람주의자들을 대체할 가능성은 요원하다.

5.1. 민주주의의 관용을 숙주로 삼는 확장 전략


이슬람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허점을 악용하는 데 능하고 민주주의를 숙주로 삼는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에, 무슬림 국가들의 정상적인 민주주의 정착을 저해하는 가장 큰 방해요인이기도 하다. 이들의 횡포 때문에 온건 성향의 무슬림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세속적 군사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일이 많으며, 이는 온건 이슬람 성향 or 세속주의 성향의 민주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이란 혁명 때도 같이 혁명을 일으켰음에도 이슬람주의자가 정권을 잡자 세속주의자는 탄압받았고, 아랍의 봄 이후 각국에서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슬람 살라프파 신도라 하더라도 자신에게'''만'''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불교 승려들이 마늘 안 먹는다고 혹은 미국에서 아미시들이 옛날 방식대로 산다고 해도 일반 대중은 여기에 별 문제를 삼지 않는 걸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과 같은 경우 즉 이슬람주의 운동가, 선교사들의 경우처럼 내로남불을 주요 전략으로 채택한 경우, 오직 자신에게만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엄격한 사람들이 종교의 권위를 빌려 완장을 찬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슬림 국가들에서 이들이 저지르는 만행의 결과물은 2차대전 초반 소련군 정치장교들의 만행이나 북한군 정치장교의 이슬람 버전이라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집트의 경우 19세기 말 일본에서 이집트 케디브 왕조가 오스만 제국을 박살낸 것에 놀라 근대화 시찰단을 보냈을 정도였으나, 20세기 중반부터 이슬람주의가 번창하면서 경제/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 인프라 발전이 정체/퇴보되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국민 소득이 중국의 4분 1 정도에 불과한 저개발 후진국이 되었다.
서구 사회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성금 모금 활동을 통해 얻은 성금 상당수를 자신의 생계비 혹은 법정 소송에서 변호사 선임비(...) 등으로 활용하는데, 웨스트보로 침례교회 비슷하게 합의금을 목적으로 일부러 바쁜 사람들한테 소송거는 경우도 있고, 지 성질을 혼자 못이겨서 괜히 사소한 일로 다른 무슬림들에게 소송을 걸어 서구 사회 내 무슬림들 이미지를 깎아먹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5.2. 무책임한 선교 전략


대표적으로 이슬람으로 새로 개종한 여성들에게 니캅을 씌운 후 유튜브 방송에 출연시키는건,[24] 선교사나 선교 단체 입장에서는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의 선교 후원 자금이 당장 더 많이 들어올테니 단기적으로는 좋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이렇게 니캅을 착용하고 유튜브에 출연한 개종자 여성들이 뒤에서 몰래 마약을 맞는다거나 직장에서 갈등한 이후 테러리즘에 빠지는 등# 서구 사회 내 무슬림들 입지에 심각한 타격을 줘 왔다.
물론 와하브파, 살라프파라고 해서 이들을 다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살라프파, 와하브파에 답 없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이들이 보기에도 이슬람주의 특유의 선교 방식인 '''“나는 불쌍한 피해자니까, 너희는 나한테 복종하고 전도되어야 한다.”'''는 식의 선교가 너무 황당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청렴한 살라프파 하디스 학자로 유명했던 셰이크 알 알바니사이드 쿠틉 사후 그를 순교자로 미화하던 이슬람주의자들을 비판한 것을 들 수 있다.
서구 사회 내 무슬림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 해방당, 린다 사서 등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이슬람주의가 비이슬람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관용과 표현의 자유, 시민단체의 도움 등을 숙주로 삼는 전략과 '''비무슬림에 대한 내로남불을 선교 전략으로 선택한 이상, 이슬람주의 세력이 커질 수록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 사이의 갈등과 상호혐오가 커질 수 밖에 없다.'''

5.3. 이중잣대와 선민 사상


무슬림이 서구인한테 선교해서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면 아무리 개판 막장으로 살아도 무조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식의 교리를 홍보하는 것도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 기준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다우드 김 유사 강간 폭로 해명 논란이 있다. 사건의 당사자 다우드 킴 자체는 이슬람주의자가 아니지만,[25] 유튜브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댓글은 싹 지우고 이슬람주의 스타일의 댓글만 남겨놓아 심각한 논란을 일으켰다.
원래 무슬림들이 서구에서 이슬람을 선교하고 홍보할 때 주로 사용하는 문구가 "강간범 강력 처벌"인데, 다우드 킴을 옹호하던 이슬람주의자들은 오히려 델리 여대생 버스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강간범들이 쓰던 뻘논리[26]와 대동소이한 주장을 펼치며, '''이집트 알 아즈하르 대학의 파트와를 날조'''하거나 오히려 피해자에게 살인 협박을 하는 등 이슬람주의의 막장성과 엑기스를 그대로 보여주였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도 대한민국 인구 5천만명이 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에 5천만명이 모두 다 유튜브로 성금과 기부금 모금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막장 후진국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한국 내 거주하는 무슬림 외국인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경우 도와주는 사람들은 오히려 진영논리와 지역감정에 매몰된 유튜브 선교사들이 아닌, 그냥 평범한 생업에 종사하는 한국인 무슬림들이다. 정작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나서서 다우드 킴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외국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오히려 한국인 무슬림들한테 "너희는 개종자인 주제에 뭘 아냐? 다우드 킴은 죄가 없다." 라는 식으로 우기는 촌극도 연출되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선민 사상으로 눈과 귀가 틀어막혀있거나,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이슬람주의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둘 다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독자 연구나 비약이 아니며, 한국인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슬람주의자에 관련하여 널리 퍼진 푸념이다. 한국인 무슬림 중 정상적으로 회사에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한국인들은 부자니까 가난한 무슬림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다가도, 다우드 킴처럼 한류를 이용하고 귀여운 척 불쌍한 척 하는 경우는 노골적으로 성범죄까지 싸고 도는데, 도대체 이슬람주의자들하고 조원진, 친박신당 같은 극우집단하고 도대체 다른 점이 뭐냐는 비판과 한탄이 안 나올 수가 없다.

6. 관련 단체


  • 무슬림 형제단: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 이슬람주의 단체 원래는 계몽 단체로 시작했으나, 사이드 쿠틉의 영향으로 극단주의화 되었다.
  • 이슬람 해방당: 영국/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2의 규모의 이슬람주의 단체이다.
  • 하마스: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지부이다. 세속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대립하는 관계이다.
  • 헤즈볼라: 레바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단체로 의외로 문화 매체 및 타 종교에 관대한 편이다. 여기에 언급된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이쪽은 세속주의 성향의 이슬람 사회주의 정당이다.[27]
  •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 무슬림 형제단의 파키스탄 분파, 해당 정당의 분파가 방글라데시에도 있으며 심지어 한국에도 존재했었다.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가 과거 파키스탄 군사독재정권의 어용 정당이라면 방글라데시 이슬람 회의의 실상은 방글라데시 내 고리대금업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이다.(...) 무함마드 유누스가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여 고리대로 고통받던 빈민들을 돕자, 그라민 은행이 샤리아에 규정되지 않는 이자를 받는 불신자 단체라고 공격했던 개막장 집단이다. 고리대금을 은근슬쩍 옹호했던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방글레디시의 국어를 벵골어 대신 우르두어로 바꾸자는 운동도 전개중이다. 방글라데시 이슬람 회의의 한국 분파로 이른바 "다와툴 이슬람 코리아"가 생긴 적도 있으나 다행히 2004년 조직이 적발되어 공중분해되었다.
  • 서구 사회의 샤리아 경찰 : 말로는 경찰이지만 실상은 이민자 사회 내 사채업자, 불법 환전상, 포주들을 경건한 무슬림 혹은 사회 약자로 포장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조폭들도 겉으로는 의리 따지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것과 마찬가지라 보면 된다. 겉으로는 알코올 중독 예방 같은 좋은 목적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같은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핑계를 뒤집어씌워 저임금 착취나 사채업, 매춘업 등을 보호하고 은폐하는 일을 주로 한다. 상술한 다와툴 이슬람 코리아도 이런 샤리아 사채업자 조직으로 계획되었다.
  • 이란의 주류 보수주의, 우파정당 대부분.
    • 이란의 혁명 수비대[28]: 호메이니와 보수 율법학자들이 만든 이슬람 신정 체제를 신봉하는 극보수 단체이다.
  • 카타르: 세계 각지의 이슬람주의 단체들과 정당에 선교 자금을 지원해주는 입장이다.[29] 여담으로 카타르는 국민 소득이 세계 최상위권인 부국임에도 불구 외국인 근로자들을 열악한 근로 환경에서 노예 취급하며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데,## 이는 이슬람 신정 국가가 건설되면 지상낙원이 건설될 것이라 막연히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근거로도 지적된다.
  • 알누르당: 이집트의 살라피즘 정당으로 무슬림 형제단이 콥트교에 지나치게 온건한 입장이라고 비난하는 노답 극단주의 정당이지만, 이집트 제2의 이슬람주의 정당이기도 하다.
  •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내세운 우파정당이다.# 다만 이슬람주의이라기보다는 사회보수주의 성향 정당이라는 의견[30]도 있으므로 취소선 처리. 또한 최근 악질 근본주의 선교사 아드난 옥타르(필명 하룬 야히아)[31]에게 사실상 종신형이 선고된 것을 보면 이슬람 해방당 수준의 막장 단체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 네이션 오브 이슬람: 이슬람주의 단체 중 몇 안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남긴 단체이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 자체는 사이비 종파 + 증오 단체가 맞지만 가입했다 탈퇴한 인물들이 미국 민권 운동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 해당 단체에 발을 담궜었던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말콤 엑스, 무함마드 알리가 있다.

7. 함께 보기


  • 하산 알 반나
  • 사이드 쿠틉
  • 퇴행적 좌파
  • 사회보수주의
  • 샤리아
  • 이슬람 근본주의
  • 이슬람 극단주의
  • 레닌주의
  • 이슬람 사회주의
  • 알리 샤리아티
  • 호메이니[32]
  • 부르키니
  • 로버트 드레이퍼스
  • 옥시덴탈리즘

[1] 이슬람 분리주의. 민주주의의 관용과 표현의 자유를 숙주로 삼아, 이중 잣대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기존 민주사회를 전복하고 전체주의 신정 국가를 건설하려는 서구 내 이슬람주의 단체 및 주의를 지칭하는 어휘[2] الدُّنْيَا سِجْنُ الْمُؤْمِنِ وَجَنَّةُ الْكَافِرِ, “이 세상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감옥과도 같지만, 거짓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낙원과도 같습니다.” - 사힛 무슬림 하디스 2956.[3] 이런 환경에서 시크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4] 물론 하산 알 반나는 막심 고리키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직접 인정한 적은 없다. 다만 레닌이 1916년 발표한 제국주의론에는 대놓고 상당한 호감을 드러냈다.[5] 이른바 Californication 드립[6] 교리에 좀 황당한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종파는 아니었으며, 해당 종파 신도 중 파키스탄 최초 노벨상 수상자도 있었다.[7] 국방비 상당수가 방산비리로 낭비되거나 해외로 유출되었음은 물론이다.[8] 특별히 새로운 방법을 발명한 건 아니고 종래에 사용되던 방법을 응용하여 고리대를 이용한 죄에 따른 벌금을 돈을 빌린 사람한테만 다 뒤집어 씌우거나 말도 안된는 상환 일자를 잡아놓고 벌금을 채무자에게 다 뒤집어 씌우는 식으로 이자를 합법화했다.[9] 그라민 은행도 종종 연이율이 20~50%를 찍어서 비판을 받는 상황인데, 아불 알라 마우두디를 등에 업은 기존 고리대금업자들이 얼마나 많이 해먹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10] 문장력도 무척 뛰어났을 뿐만이 아니라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도도 깊었다. 무함마드 이크발이 그를 괜히 총애했던 것이 아녔다.[11] 이슬람주의자들이 정의하는 히잡은 단지 베일이 아니라 타종교식으로 노출하는 의상에 대항하는 이슬람 의상이다.[12] 부르키니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온건파 무슬림 여성이나 (좁은 의미의)근본주의 무슬림 여성 모두에게 외면받고 있다[13] 샤리아 법은 꾸란과 하디스보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관습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14]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한글을 무시하고 한문만 고집하던 것과 비슷한 사고 방식인데, 일반적으로 로마자보다는 아랍 문자가 습득히 더 어려우므로 선교사 측에서 권위를 과시하는데 유리한 점 때문인 것도 있다. 여담으로 국내 기준으로는 한국인 이슬람주의자 중 수능 한 번 본 적도 없는 인간이 해외 어학원도 정상적으로 수료 못한 상태에서 수능 아랍어 교실 한다고 광고하고 나대는 경우도 있다. 아랍어 실력이랑 권위랑 직결되기 때문에 허풍 떠는 셈. 이슬람주의자가 수피 계열이거나 시아파 계열이라면 타즈위드(꾸란 아랍어 낭독 독음)을 괜히 엄청 강조한다.[15] 심지어 미르자 굴함 아흐마드가 영국 스파이가 틀어준 축음기(...)에 나오는 말을 무식해서 신의 메시지로 오해했다는 음해성 설도 떠도는데, 이런 설은 당시 영국에서 왜 굳이 흔한 수피 종교인 나부랭이에게 굳이 비싼 전축과 스파이까지 보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16] 이는 한국 내에서 선교할 때 반테러리즘 성향인 것처럼 과시하는게 선교에 유리하기 때문이지, 진정 이슬람 근본주의에 경각심을 가져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내 대표적인 이슬람주의 선교사 박모씨가 다른 한국인 무슬림 온건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우드 킴의 성범죄 논란을 원론적으로 비호한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17] 영국을 본부로 둔 클리프주의 단체인 SWP와 그 자매단체인 노동자연대가 주로 그런 성향이 있다.[18] 레닌주의의 식민지 소수민족 해방과 자치 같은 이념을 받아들인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지하조직 운영을 통한 기존 정권 타도같은 개념도 흡수했다는 점이다. 이슬람 자체에는 지하조직 운영과 정부보조금(...) 악용 같은 교리가 없는데도, 마치 원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작해냈다.[19] 선교 방식과 전략을 벤치마킹했으며, 극단적인 선민사상과 엄숙주의 및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들을 흡수했다. 전통적인 개신교/가톨릭/정교회보다는 극보수성향의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보수성향 기독교계 신흥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경우 자동적으로 이슬람주의에 빠져들어서 심각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비율이 훨씬 더 높다.[20]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출신 무르시 대통령의 무능한 낙하산 인사가 아주 교과서적인 사례로 남았다.[21] 영어 위키백과에선 Liberalism and progressivism within Islam이라고 나온다.[22] 영어 위키백과에선 Islamic Modernism이라고 나온다.[23]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다소 조장되는 면이 있다.[24] 걸프 아랍 왕정 국가 출신 관광객 입장에서는 프랑스나 스페인 등지에서 니캅 쓰고 다녀도 별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현지인 입장에서 니캅을 착용하는 그 순간부터 정상적인 직장 생활 등은 포기해야 한다고 보면 된다.[25] 유튜브 컨설팅 받고 개종한 경우로 엄밀히 말하면 동영상이 이슬람 신학 자체보다는 한류 아이돌 열풍에 노골적으로 편승하는 것에 가까웠다.[26] 밤 늦게 돌아다니는 여성은 강간을 당해야 마땅하다는 식의 피해자 비난[27] 허구헌날 쓸데없는 성직자들의 설교 방송만 주구장창 나오는 다른 이슬람주의 성향 방송국과는 달리 헤즈볼라 소유의 방송국에서는 힙합 가수들(!)의 랩 배틀, 걸그룹(!!)의 공연 실황 영상, 코미디언들의 시사 비판 예능(!!!)이 잔뜩 나온다.[28] Islamic Revolutionary Guard Corps[29] 선교 자금을 보내주는 것 자체는 좋은데 돈을 좋은데 쓰는지 나쁜지 쓰는지 관리를 안하는게 문제로, 선교 자금의 적지 않은 부분이 관리 소홀과 부패로 인해 증발한다.(...)[30] 무슬림 형제단, 이슬람 해방당은 최종적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박멸(...)한다는 강령이 포함되어있는데, 여기는 그 정도로 노골적인 건 아니다.[31] 진화론이 프리메이슨과 공산주의의 음모라는 불쏘시개 음모론 책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면서 동시에 JMS 정명석 비슷한 사이비 교주 겸 플레이보이이다. [32] 세속 국가에서 신정 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한(...) 사례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위에 알리 샤리아티 덕을 많이 보았다. 호메이니 혁명은 명목상으로는 사치스럽고 부패한 친미 독재 왕정 타도를 기치로 내걸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과거 세속주의 정책 하에서 침해당하던 보수 율법학자들이 권익 수호가 목적이었다. 다만 최악은 아닌 차악에 해당하는데, 호메이니와 함께 하던 보수 율법학자 중에서는 문맹 퇴치 운동조차 반대하던 심각한 꼴통들도 상당히 많았으나 호메이니가 이들을 무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