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동

 

沙火同
(? ~ 1590년)
조선의 인물이자 순왜 중의 한 사람. 기록에 따라 사을배동(沙乙背同), 사을화동(沙乙火同), 살화동(乷火同), 사을포동(沙乙蒲同) 등으로도 읽는다.
전라도 진도 사람으로 오도(五島)에 표류했다가 왜구에게 투항했으며, 오도의 해적들이 조선 해안을 노략질하도록 길안내를 했다.
1589년 5월에 일본에서 소 요시토시, 다이라 히라노부, 게이테츠 겐소 등을 보내 사절을 교환해 국교를 맺자고 했다가 조선에서 지난날에 왜구들이 손죽도에서 이대원을 죽인 것을 언급했으며, 또한 사화동을 잡아 보내라면서 그 문제를 논의한다고 했다.
이로 인해 1590년 3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화동, 그와 공모한 자들, 포로 80여 명을 함께 보냈으며, 선조로부터 문초를 받은 후에 죽임을 당하고 종묘에 바쳐지게 된다.

1. 창작물에서


소설 구로시오에서는 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복잡이로 나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교를 요청했다가 조선에서 사화동을 넘기라고 해서 사화동을 잡아들이려 하는데, 히데요시가 보낸 사람이 오도로 가서 사화동을 넘기라 하자 해적들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동료를 넘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풍비박산 내겠다는 협박을 하자 해적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면서 사화동을 넘기기로 하며, 사화동은 해적의 소 두령 두 명에 붙잡혀 히데요시에게 넘겨졌다가 조선에 넘겨져 참수되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사화동을 사리사욕보다는 고된 삶때문에 별 수 없이 순왜가 된 사람으로 묘사한다. 사화동을 잡아 죽인 후, 그가 순왜가 되도록 만든 원흉인 조선 정치인들은 내비두고 일개 백성인 사화동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쓴 소리도 나온다. 다분히 현대 한국사회를 투영한 풍자였지만, 여론에선 매국노, 친일파를 옹호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징비록(드라마)에서는 정해 왜변 때 왜구의 길잡이 노릇을 했는데, 일본에서는 조선조선 통신사를 보낼 수 있도록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 요구로 인해 사화동은 조선으로 송환된다. 정해 왜변으로 부모님을 잃은 이천리가 원한을 품어 감옥에서 그에게 죽을 뻔 하지만, 류성룡의 만류로 이천리에게 죽지는 않는다.
처형되기 직전에 목숨을 구걸하면서 반민과 첩자들을 알려주겠다고 하지만 류성룡은 수작 부리지 말라면서 그대로 처형을 지시하며, 처형되기 직전에 선조, 류성룡, 이장손만이 알고 있던 비격진천뢰를 외쳐서 그들을 경악하게 한다.
비격진천뢰를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처형이 보류되고 잠시 갇혔는데, 류성룡이 누구에게서 들었냐고 묻자 자신을 살려주겠다는 약조를 한다면 이야기하겠다고 했지만 류성룡은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면서 간자를 잡는 것에 공헌한다면 주상 전하(선조)께 구명하는 상소를 올려주기로 한다.
그러자 주상 전하에게 약조를 받는 것을 이야기했다가 류성룡이 그것이 거래가 되냐면서 옥사에서 빠져나가도 백성들에게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들으며, 류성룡이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조정에서 보호해줄 수 있다는 말을 하자 일본에서 자신과 같은 방에 오만옥이라는 자와 같이 지내면서 세작으로 들어가 비격진천뢰 도면을 받아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류성룡으로부터 상소를 올렸지만 살려줄 수 없다면서 사과하자 믿은 자신이 미쳤다고 하면서 양반들은 내지 않는 조세를 자신 같은 백성들이 부담을 떠안는 처지 때문에 이런 나라에서 살 바에 어느 나라에 가든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죽을 죄를 지었지만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양반과 왕이라고 한다. 징비록(드라마)/평가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이 부분은 별로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