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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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義智
156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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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가문의 문장.
1. 개요
2. 역사상의 모습
2.1. 임진왜란 이전
2.2. 임진왜란에 참전
2.3. 임진왜란 이후 동-서군의 충돌에 휩싸이다
2.4. 국서 위조로 조일 관계를 복원하다
3. 창작물에서
3.2. 코에이 게임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대마도다이묘(영주).
키리시탄(기독교) 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다리오.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는 그의 아내였다. 즉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 원래는 종교가 없었으나 장인의 권유로 가톨릭에 입교,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임진왜란 시기 '''대마도다이묘'''라는 점이다. 쓰시마 소씨 20대 당주였으며 한국 측 기록에서는 주로 한자를 그대로 읽어 종의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1] 임진왜란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 중 하나였으며 전쟁 도중과 이후에도 조선과 일본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다면적인 인물.

2. 역사상의 모습



2.1. 임진왜란 이전


1568년 15대 쓰시마 당주 소 마사모리(宗将盛)의 4남으로 태어난다.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宗茂尚)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하지만 소 시게나오는 일찍 죽었고, 이를 대신하여 차남 소 요시즈미(宗義純)를 양자로 맞이해 가독을 양도했지만, 소 요시즈미마저 일찍 죽어 덴쇼 7년(1579년) 음력 1월 4남 소 요시토시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 요시토시는 고작 11살에 소 가문 제20대 당주가 되었다. 이것이 조선에 잘못 전해져,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소씨를 내쫓고 종의지를 대마도 태수로 세웠다고 기록되기도 하였다.[2]
원래 특별히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장인어른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을 한번 믿어보라고 해서 그때부터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리오라는 세례명까지 받을 정도로 독실하게 가톨릭을 믿었다. 또한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1587년 음력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 소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했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는 당주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동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큐슈 정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고, 쓰시마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소 요시토시는 자신의 영지가 대마도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다이묘의 직함 이외에도 다른 다이묘와는 다르게 조선에서의 관직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조선 조정이 내려준 소 요시토시의 관직은 예조참의 격이었다고 한다. 현재 직급으로 보자면 차관보 정도로 볼 수 있다. 심지어 1589년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의 연회 때 선조를 만나 직접 술잔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과 사이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가장 난처해지는 사람은 다름아닌 소 요시토시였다.''' 왜냐하면 그의 영지가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끼어있어서 행여 조선이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공격을 당하기 때문인 데다가,[3] 무역의 거의 전부[4]를 조선에 의존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을 일으키려 하자 나름대로 목숨 걸고 반대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서 어쩔 수 없었고 소 요시토시 자신도 대마도다이묘이기 이전에 히데요시 아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인 상태라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발언권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전쟁 이전까지 소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 등이 조선과의 교섭에 힘썼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단념 혹은 조선의 입조 둘 중 하나를 관철해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덴쇼 16년(1588년)에 소 요시시게 사망 등의 악조건도 있어 교섭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더불어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의 뒤를 이어 소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1590년 조선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인 조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 수행무관 황진(黃進)을 복속사로 사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알현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복속한 것이라고 받아들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이 조선 사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과 달리 전국 통일에 대한 축하사절이었고, 이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축하사절을 보내도록 거짓 요청을 했기 때문에 내방한 사절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의 책봉국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승낙할 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 정복의 선도역 명령을 조선에게 전해야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대신 명에 조공을 하고 싶은데 길이 없으니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거짓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실현되지는 않았다.
소 요시토시는 이래저래 불쌍한 사람이다.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끼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복속사를 끌어들여야 하는데 솔직히 말했다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파탄나는데, 제일 크게 피해를 입는게 소 요시토시라서 이건 말도 못 하겠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저렇게 주작을 꾸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교섭은 실패했고 결국 전쟁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소 요시토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이자 사위라서, 출진을 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장인어른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조선정복 후 거제도를 봉지로 받기론 했다지만.

2.2. 임진왜란에 참전


결국 1592년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하였다. 13일에 총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차례로 공략하고, 26일에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을 상주에서 격파하였으며[5],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에서 요격 나온 신립(申砬)의 조선군을 괴멸시켜 충주를 공략하였다.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동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는 수도 한성에 입성하였다.
그 후, 여러 장수들과 한성회의를 한 후, 음력 5월 11일에 소 요시토시는 한층 더 북쪽을 향해 진격해, 18일에 임진강에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하였고,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차례로 공략하여 평안도로 나아갔다. 또, 음력 6월 8일에 대동강의 근처까지 도달하였으며, 16일에는 평양을 공략하였다.
음력 7월 16일,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조선에 지원군으로 들어와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을 공격했지만 격퇴했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해, 명군 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張國忠), 마세륭(馬世隆) 등을 죽였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이 이끄는 조선군이 평양을 공격하지만, 이도 격퇴하였다.
1593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명군 약 4만과 김명원의 조선군 1만이 평양을 공격하였다. 명군이 평양성의 성문을 돌파하자 왜군은 북부 구릉지역의 진지로 퇴각하였다. 이에 이여송은 "퇴로를 주겠으니 성을 양도하라"라고 통보하였고, 왜군은 이것을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수를 개시했지만, 조명연합군의 추격도 있어 어려운 퇴각이 되었다. 한성을 목표로 진격하는 명군에 대항해 왜군은 여러 방면의 각 군을 한성에 결집한 후, 명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가 벽제관 전투였다. 명군에서는 이 패전으로 위축되었고, 왜군도 행주대첩 이후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 한성 주위로 결집하는 대규모의 조선군 군단으로 인한 극도의 압박과 병량 부족 등에 의해 부담감을 느끼게 되어, 강화교섭을 한 후 부산 주변까지 철수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측의 강화 담당자 심유경(沈惟敬)과 평화교섭을 진행했지만, 서로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도 달라 난항을 겪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한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황녀를 천황후궁으로 삼고 조선 8도 중에서 4도를 내놓으라는 조항은 누가 생각해도 경을 칠 일이다. 심유경만력제에게 사실대로 보고하면 명나라 조정에는 헬게이트가 열릴 것이 뻔했다. 결국 심유경은 궁여지책으로, 만력제에게는 왜왕에 봉한다는 거짓보고를 하게 되었다. 요시토시는 국서의 내용을 쌍방의 형편에 맞게 개찬하는 등 평화교섭 성사를 위해 노력했지만, 명나라 측 강화 담당자인 심유경의 부족한 됨됨이와 이런 기만행위를 동반한 교섭은 아무 성과 없이 각국에 혼란만 야기시켰고, 끝내 교섭은 결렬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참전하였다. 우선 서쪽으로 진격해,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을 개시하였고, 4일째에 성을 함락했다. 다음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 전라도를 제압했다. 그 후, 겨울을 앞두고 후퇴해 남해 왜성에 머물렀다. 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파견된 왜군에게 음력 10월 15일부로 귀국명령이 하달되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이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마쓰라, 아리마, 오무라, 고토의 다섯 장수는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의 조명연합수군에 퇴각로가 저지되어 순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増), 데라자와 마사시게(寺沢正成) 등과 함께 순천에 갇힌 왜군을 구원하러 출진하였고,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수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 5명의 왜장은 이 틈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7년 동안의 전쟁은 끝이 났다.

2.3. 임진왜란 이후 동-서군의 충돌에 휩싸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동군)와 이시다 미츠나리 파(서군)로 갈려 서로 권력투쟁을 했다. 이 와중에도 소 요시토시는 서군 측 인사인 고니시 유키나가사위였던지라 누굴 지지할 그런 입장이 아니었고, 장인어른의 결정에 따라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소 요시토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시다 미츠나리가 어떤 인물인지조차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저 장인어른 따라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망 관리 실패, 모리 데루모토의 불성실한 태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줄배신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국 서군이 패배했다.
패배한 서군의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소 요시토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장인어른이 참수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소 요시토시 자신은 '''서군 다이묘임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음은 물론 영지 몰수도 없었다.''' 소 요시토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 대한 처우를 결정함에 있어서 다른 서군의 다이묘들은 참수, 영지 몰수, 사무라이 신분 박탈 등 상당히 가혹한 형벌을 내린 반면 자신에게만은 아무 처벌도 내리지 않아 의아해했다.

2.4. 국서 위조로 조일 관계를 복원하다


물론 이런 처분은 공짜가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기에 조선과 관계를 회복해야 했고, 쓰시마 소씨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조선을 잘 알고 교섭경험이 있는 전문가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가 처벌을 담보로 소 요시토시에게 요구한 임무가 몇 개 있었는데, 우선 고니시 일가와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 그리고 조선에 전쟁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내용으로 사과를 해서 조선의 용서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소 요시토시는 이에 응했고 계속 조선 조정에 잘못했다고 빌었다. 또한 그가 조선 조정에 해명하기를 "현재 일본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스리고 있는데, 그는 임진왜란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단 1명의 군대를 보내지 않고 끝까지 버틴 다이묘"[6]라는 점을 강조했다.
조선 측도 일본 측의 정식 사죄, 선릉정릉을 도굴한 범인과 왕릉의 시신을 보낼 것, 포로 송환 등을 요구했는데, 이 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소 요시토시가 보기에는 좀 어려워 보이는 요구도 있었는지 그는 국서를 중간에서 위조하는 꼼수를 쓴다.[7] 한쪽의 국서가 반대편에 도착하면 위조가 발각될 것이 뻔하므로 양쪽 국서 다 여러 번 위조했다. 당연히 국서 위조 사실이 밝혀지면 본인의 목숨은 물론 쓰시마 소씨 정권이 단절될 수도 있는 모험이었지만, 그만큼 쓰시마에게 있어 두 나라의 관계 회복과 교류 재개는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인 것이다. 이 국서 위조는 요시토시가 죽고도 한참 뒤인 1635년 아들 소 요시나리(宗義成) 시대에 발각됐는데, 이 국서 위조 사건의 처분을 어떻게 할 지 있었던 논쟁을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이라고 한다. 결국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무죄로 넘어가줘서 없던 일이 되었다. 왕릉 도굴 문제는 쓰시마에서 적당한 잡범들과 이름없는 시체를 대충 보냈는데, 조선 측에서도 조사를 해서 이게 진짜 도굴범과 시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이제 와서 항의해봤자 더 얻을 것도 없다는 공감대가 있어서 잡범들을 처형하고 사건을 종결짓는 것으로 대충 끝냈다. 포로 송환은 사명당 유정이 별도로 파견을 가서 실무 협상 후 포로를 되돌려 받기로 했다.
아무튼 이런 국서 위조 끝에 1607년이 되어서야 일본은 조선에게 용서를 받았고 다시 외교를 시작했으며 조선 측에서도 1607년부터 다시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보냈다. 이것이 1609년의 기유약조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무역도 재개되어 쓰시마 번은 소중한 식량 확보뿐 아니라 인삼, 비단부산 왜관을 통한 교역도 이백여 년간 거의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한편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마자 요시토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와 그녀가 낳은 아들[8]을 추방했다. 이것은 도쿠가와 정권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여서 자기 영지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와의 이혼은 더 이상 유키나가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수천 명의 쓰시마 백성들이 조선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어그로도 끈 상황에서 도쿠가와의 어그로까지 끌면 쓰시마는 피바다가 되었을 게 뻔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후에 소 가문에 괴변이 일어나자, 이를 쫓겨난 고니시 마리아와 고니시 만쇼 모자의 원혼 탓으로 여겨 신사를 세워 그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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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에 이렇게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결국 평화를 완수한 요시토시는 47세에 편하게 죽어 역대 대마도주들의 묘원인 쓰시마 섬의 '반쇼인(만송원)'에 함께 안장되었다.[9] 당시에도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그렇지 일단 성인이 되었으면 50세는 넘는 게 일반적이라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조일 양국과 동-서군의 이해관계 속에서 다이나믹한 군소 지역 다이묘의 인생치고는 지위와 가문, 그리고 조선 무역 독점권을 보존한 명 다이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군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고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인에겐 찝찝한 사실이고 본인도 어쩔 수 없이 참전한 전쟁이라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군과 명군을 상대로 상당히 많은 승리를 거두는 등 무장으로서의 재능도 상당했다.
소 요시토시의 10대손이 바로 일제강점기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이다.

3. 창작물에서


제대로 대우를 못 받고 있다. 그의 입지는 드라마에 등장하면 거의 엑스트라 취급이요, 게임에 등장하면 졸개 정도밖에 안 된다. 물론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것은 맞지만, 겉으로 보기엔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졸개 수준인 데다 그가 다스린 대마도는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이라 관심도가 매우 낮았다.
2016년에 쓰시마 시에서 쓰시마의 역사인물을 만화를 그린 시리즈를 펴내면서 첫 번째 시리즈로 소 요시토시가 선택되었는데, 이래저래 미화가 되었다. 좀 많이. # 제목은 초대 쓰시마 번주 소 요시토시-쓰시마 번 외교의 초석을 놓은 영주(初代對馬藩主宗義智 對馬藩外交の礎を築いた英主).

3.1. 한국사극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보다 한국의 사극에서 더욱 부각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배우와 엑스트라의 중간 정도밖에 안되는 안습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저 고니시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의 수발을 드는 정도가 거의 대부분이다.[10]
80년대 중순 당시 엄청난 제작비로 만들어 인기를 끌던 MBC의 사극 <조선왕조 오백년-임진왜란> 편에서도 종의지란 이름으로 나왔지만,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등 뒤에 가만히 서있는 역할로 사실상의 보조출연자 취급이었다.[11]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극 중반부에 장인어른의 뜻과 대마도주인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을 필사적으로 막으러 노력하는 부분이 비중있게 그려지며, 이후에도 꽤 자주 얼굴을 비치다가 최후반부 노량 해전에서는 역시 위기에 처한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한국 창작물 중에서는 그나마 대우가 낫다. 배우는 황준원.
불멸의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기를 다룬 징비록에서도 불멸의 이순신에서와 비슷하게 전쟁을 막고자 노력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배우는 조재완.[12]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일본 배우 요시무라 켄이치가 배역을 맡았으며, 왜관을 통해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전라도와 경상도로 간 부하가 마누라를 칭하는 단어를 각각 색시와 각시로 부르자, 조선 8도 사투리에 맞춰 책을 만들어야 하냐고 짜증낸다.[13]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의 왕을 샹가무(상감)라 칭한다는 걸 말해주는데 이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일본 다이묘들이 샹가무라 외치며 광기를 보인다.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조선의 무종 대에 대마도가 조선에게 정벌되었기 때문에 종씨 일가는 일본의 다이묘인 동시에 조선의 신하인 어중간한 상태가 되어 조선의 왕의 신하로 등장한다. 소 요시토시라는 일본 이름보다는 종의지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더 자주 언급된다. 대마도뿐 아니라 조선의 규슈 원정 당시 획득한 일기도 또한 종의지의 영토이고 오히려 종의지 본인은 평상시 이쪽에 체류한다. 조선에 협력하는 동시에 일본에 정보를 흘리는 박쥐짓을 하고 있으며, 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을 배신하여 순왜가 된다. 그러나 일본이 패배하면서 그도 포로로 잡혔고, 주인공은 종의지를 참수해버릴 생각이었으나 그가 죽을 힘을 다해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을 보고 살려주기로 한다. 을미동정이 조선의 대승으로 끝나고 대마도와 일기도가 조선의 직할령이 되어 더이상 다이묘는 아니게 됐지만, 조선령 규슈에서 하카타를 통치하는 관리가 되어 중 유일하게 죽거나 몰락하지 않았다. 원 역사와 다르게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고, 자신의 외가를 자신의 집에서 보호중이다.

3.2. 코에이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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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아무래도 자기가 군주격의 장수가 아니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로 등장하는 만큼 소 요시토시의 능력치는 짠 편이다. 다만 정치력이 70대 초반으로 다른 능력치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지만 그렇다 해도 단순히 능력 스텟치로만 따지면 거의 듣보잡 장수 수준이다. 그나마도 최신작에선 쓰시마가 그냥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며 성이 없기에 다이묘로서 플레이할 기회는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다른 다이묘로 딸을 시집보내서 일문을 만든 뒤, 은거하면서 요시토시에게 물려주는 방법밖에 없다.
야망 시리즈에는 쓰시마에 성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안습..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부활. 합전 39 내정 72.
태합입지전에서는 그나마 역사대로 반영하여 쓰시마 섬에 위차한 성 하나만 딸랑 가지고 있는 다이묘로 등장한다. 태합입지전 5 기준으로 능력치는 70넘는 능력치가 지모(72)하나뿐이며 기능도 수군2, 변설3을 제외하면 볼 게 없다. 그리고 세력이 약소한 다이묘이다보니 게임이 좀 진행된 후에 보면 규슈를 통일한 다이묘에게 이미 털려서 멸망하는 일이 많다. 그나마 대마도가 워낙 후질근한 곳에 위치해 있는지라 규슈의 군소다이묘들 중에선 제일 오래 버틴다.
보통 규슈를 통일하는 다이묘는 시마즈, 오토모, 류조지 중에서 한 곳인데, 얘네들 중 나머지 둘이 멸망하기 전까지 버틴 다음 규슈 지역이 대마도를 제외하고 모두 통일되었을 때 쓸려나간다. 거기다 장수는 많아야 소 요시시게, 오오이시 토모히사까지 해서 3명(보통은 토모히사랑 2명)뿐이다.
다만 상인으로 플레이시 조선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외교문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날 일이 생긴다. 물론 귀찮다면 닌자에게 의뢰해서 훔치거나 그냥 습격해서 썰어버리고 뺏어도 된다.
코에이에서 나온 것 말고는 전국 SAGA(戦国サーガ)전국염무(戦国炎舞)에서 여체화되어 등장한 적이 있다.

[1] '평의지(平義智)'라고도 하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의 성을 평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대 일본에서 자신들의 가문을 겐지(源)나 헤이지(平)의 일원으로 칭했기 때문에 쓰이던 방법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수길(平秀吉),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행장(平行長)이라고 하는 식. 참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가강(源家康)으로 불렸으며 비단 도쿠가와 가문뿐만이 아니라 쇼군가는 대외 공식 문서에 미나모토를 자칭하였다. 이는 당대 일본에서 꽤나 중요한 것이었는데, 단순히 어느 집안에 속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 가문에 따라 수여받을 수 있는 직책 또한 정해졌기 때문. 자세한 것은 쇼군 항목 참조.[2] 일본어 위키에 따르면 15대 당주였던 소 마사모리는 가신들의 모반으로 쫓겨났는데, 이 과정에서 가신들은 9대 당주 모리쿠니(盛國)의 손자 하루야스(晴康)를 환속시켜서 마사모리의 양자로 들이고 마사모리가 하루야스에게 가독을 상속하는 형식으로 마사모리를 당주에서 끌어내렸다. 하루야스는 요시토시의 할아버지(즉 마사모리의 아버지) 모리히로(盛弘)와는 형제 관계로(하루야스가 형), 마사모리의 아들인 요시토시나 그의 형이었던 시게히사, 요시즈미 입장에서 보면 하루야스는 그들의 큰할아버지(법적으로는 할아버지)이고 하루야스의 아들인 요시시게는 촌수상 그들의 숙부(법적으로는 아버지)뻘 항렬이 된다. 쉽게 말해 세조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했는데 예종이 단종의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서 왕위를 물려준 셈.[3] 그 사례로 이전 시대의 신라구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도 목표는 일본열도 본토였지만 그전에 먼저 털리는 건 당연히 쓰시마였다.[4] 쓰시마 섬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대마도는 평지가 적고 산이 많아 쌀 수확량이 적고 자체 경제는 빈약한 편이라 한반도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마도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식량은 사실상 모두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5] 격파라고 할 게 없었다. 당시 이일은 휘하에 군사가 하나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할 수 없이 조정에서 장기군관 80명을 내려줬으나 그나마 그 장기군관들 중에 3분의 1이 탈주했다. 50명이 조금 넘을 뿐인 군관들로 병력을 모집하자니 너무나 힘들었고 결국 1,000명도 모으지 못했다. 결국 이일은 싸우지조차 못하고 패했다.[6] 당연하지만 이에야스가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관동 지역의 안정을 핑계로 병력 차출을 거부했고, 형식적으로 1,000여 명 수준의 소규모 병력을 전진기지인 히젠 국 나고야에 보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이 병력도 조선까지는 보내지 않았다. 관동은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이라 대규모로 보내기 힘들다는 핑계도 있었다. 단순핑계는 아닌게 일본은 길다란 나라라서 서남쪽 가고시마에서 긴키 지방까지 육로 거리로만 조선으로 치면 해남군에서 두만강 거리에 육박한다. 관동의 다이묘들이 병력을 파견하게 힘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다테 정도나 제대로 참여했지 모가미, 난부는 이에야스처럼 나고야에 주둔했고, 우에스기는 개전초기에 히데요시 대리로 3개월간 참전한게 전부.[7] 포로 송환이야 막부에 요청하면 쉽지만 일본측의 사죄나 10년도 지난 선정릉 도굴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은 힘들었다. 일단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웠기에 임진왜란에 참여하지 않은 에도 막부에게 사과하라고 하면 반발할 것이 뻔했고, 도굴한 범인이 10년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서군 다이묘들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을 알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선정릉 도굴사건 참고. 뭐든간에 고작 대마도를 다스리는 영주로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은 자신의 능력에 벗어난 것이기에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8] 그래서 이 아들은 외가의 성씨를 따라 고니시 만쇼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그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9] 이 반쇼인은 이즈하라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힘든 거목이 가득하고 조선 국왕이 하사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 등 대마도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볼거리라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10] 임진왜란이 끝난 뒤 도쿠가와가 조선에 사과하는 조일 국교 정상화 과정은 한국 사극이든 일본 사극이든 주목받지 못하는 사건이다.[11] 실록에서도 교활하고 목숨 보전을 위해 아내와 아들을 버린 전형적인 못된 일본인으로 나온다.[12] 추노에서 큰놈이를 연기했다.[13] 그러나 사투리가 복잡한 걸로 따지면 일본도 조선 못지않다. 물론 조선도 도 단위 이하로 파고 들어가면 세세한 사투리 차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