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가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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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판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숫자 계산을 위해 쓰이던 도구이다. 대나무 또는 다른 재료로 만든 막대를 일정한 방법으로 늘어놓아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 또는 그 막대를 말한다. 산목(算木), 산대, 산책(算策)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산(算), 주(籌)라고도 한다.
2. 역사
산가지는 주판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전국시대 화폐에 산목으로 표시한 숫자가 나오며 노자가 쓴 <도덕경>에도 “수를 잘하는 사람은 산목을 사용하지 않는다(善數不用籌策).”라는 기록이 있어 최소한 춘추전국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부터 쓰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나타난 것을 보면 산의 재료는 대를 사용하며, 지름은 3푼(三分: 약 0.7㎝), 길이는 6촌(六寸: 약 14㎝)으로 271개를 6각모양의 그릇(六觚)에 넣으면 손에 알맞게 잡을 수 있는 크기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재료는 목재나 금속, 상아 등으로 다양해졌고, 길이도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고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1]
3. 사용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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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목으로 수를 나타내는 방법은 자릿수를 번갈아가며 가로놓기와 세로놓기로 구분하여 숫자를 표기하였다. 즉, 세로놓기로는 일, 백, 만 등의 자릿수의 숫자를 나타내었고, 가로놓기로는 십, 천, 십만 등의 자릿수의 수치를 나타내었다. 경우에 따라 가로놓기와 세로놓기의 자릿수를 서로 바꾸어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13세기 송나라 말까지는 0을 나타내는 부호가 없었으므로 0에 해당하는 자릿수의 수치는 비우고 표기하였다. 동양수학에서 일찍부터 발견되어 사용된 음수를 표기하기 위해 양수는 붉은색, 음수는 검은색으로 구분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음수의 경우 마지막 산목을 비뚤어지게 놓아 구분하기도 하였다.
산목은 산학이 체계화되는 고대로부터 비교적 근래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판이 보급되면서 사라졌으나, 한국에서는 산학의 기본적인 계산방법으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2] 예를 들어, 염상섭의 장편 소설 <삼대>엔 조 씨 가문의 당주 조의관이 평생동안 주판과 산가지만 끼고 살았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로 볼 때 20세기 초반까지도 주판과 더불어 계산을 하는데 널리 사용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다만 중국은 주판이 보급된 반대급부로 명나라 들어 방정식이나 유한 급수이론이 원나라 이론이라고 꺼리다가 실전되어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었지만, 한국은 방정식을 풀기에는 훨씬 수월한 산가지를 고집해 방정식론이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단순계산력은 산가지가 주판보다 많이 뒤쳐진 게 사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후로 한국에도 주판이 보급되어 주산을 가르치는 경우가 늘어났고[3] 이후엔 전자 계산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이젠 고대의 유물로만 남게 되었다.
4. 관용어
이 산가지는 숫자 계산 외에 점을 치는 용도로도 쓰였던 도구였다. 과거의 점쟁이들은 산목을 통에 넣고 흔들어서 산가지를 뽑아 그걸로 점을 쳤다고 한다. 이 산목이 든 통을 바로 산통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점을 치려고 산통을 흔들었는데 미처 산가지를 뽑기도 전에 떨어뜨려서 그 통을 깨버렸다면 당연히 점을 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산통을 깨다'란 관용어다. 이 말의 뜻은 '잘 되어가던 일을 그르치게 하다.'란 뜻이다. 이제 막 점을 치려고 산가지를 뽑으려는데 그 통을 깨먹어서 뽑을 수 없게 되어서 유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