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 라 베두아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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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앙젤리크 프랑수아 위셰, 라베두아예르 백작[1]
Charles Angelique Francois Huchet, Comte de la Bédoyère
1786.4.17.~1815.8.19.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 제1제국의 장군. 워털루 패전 이후 체포되어 총살당한 몇 안 되는 장군 중 하나다. 영화 워털루(1970년 作)에서 나폴레옹(로드 슈타이거 분)이 틈만 나면 불러대는 바로 그 라베두아예르 장군이다.
1. 워털루 전투 이전의 경력
2. 100일 천하와 워털루 전투
3. 워털루 패전 이후
4. 기타


1. 워털루 전투 이전의 경력


1786년 4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치안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6년에 소위로 임관하여 군인의 삶을 시작한 그의 첫 시작은 놀랍게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절친인 장 란의 부관직(aide de camp)이었다. 1809년에 장 란이 전사하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의 양아들이자 이탈리아의 부왕 외젠 드보아르네의 부관이 되어 이탈리아로 간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원정군을 이끌고 떠나자 외젠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고 당연히 베두아예르도 종군하여 모스크바 전투, 베레지나 도하 전투 등 굵직굵직한 전투에 참여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는다. 한편 러시아 원정이 대재앙으로 끝나고 그동안 기죽어 살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대항해 제6차 대불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때 라베두아예르는 바우첸 전투에 참전하는 등 독일 전역에 종군하였다.
라이프치히에서의 대패로 나폴레옹의 제국은 프랑스 본토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실함하였고 대불 동맹군이 각지에서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다. 1814년 봄, 라베두아예르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파리 방어군에 남아있었지만 마르몽의 배신으로 파리 방어군이 항복하자 기가 꺾인 나폴레옹은 퇴위하였고 라베두아예르도 그를 따라 군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경험 있는 군인의 부족으로 새로 들어선 루이 18세의 정부는 그에게 복직을 요구했고 라베두아예르는 이를 수락하여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제 7 보병 연대장직을 맡는다.

2. 100일 천하와 워털루 전투


자신의 퇴위 이후 프랑스의 상황과 연합군의 분열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이 1년도 안되어 엘바 섬을 탈출해 주앙만에 상륙하자 루이 18세는 각지의 연대에 전 황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라베두아예르는 체포 명령을 생깐 후 돌아온 황제의 깃발 아래로 달려갔다. 그는 가장 먼저 나폴레옹에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합류한 장교였다.
나폴레옹은 자신과의 인연(란→외젠의 부관)과 그의 충성심을 인정했는지 라베두아예르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자신의 부관직을 맡긴다. 나폴레옹은 평화를 원했지만 잔뜩 쫀 유럽국가들은 얼마전까지 분열된 모습은 오간 데 없이 똘똘 뭉쳐 돌아온 나폴레옹을 쫓아내기 위해 군을 일으킨다.
이에 실력행사에 나서기로 한 나폴레옹은 12만의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로 향한다. 웰링턴 공작의 영국군과 블뤼허 원수의 프로이센군이 분산된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이 서로 뭉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하고 공세에 나선다.
미셸 네에게 약 2만4천 정도의 병력을 주어 카트르-브라에서 영국군을 상대하게 하였고 황제 본인은 직접 군을 이끌고 리니에서 블뤼허 에게 혼쭐을 내주었다. 이때 라베두아예르는 네의 별동대에 합류하기 위해 진군 중이던 드롱의 1군단에 전령으로 보내졌다. 황제가 라 베두아예르를 통해 전달한 명령은 드롱으로 하여금 군을 돌려 리니의 황제 본군에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드롱이 리니의 황제 본군에 합류했을 때 이미 블뤼허는 패하여 퇴각한 후였고, 네는 카트르-브라에서 영국군을 기습하였음에도 병력 부족으로 물러나는 웰링턴을 추격하지 못했다. 드롱이 자신의 군에 증원으로 오다가 되돌려짐을 알게 된 네는 무척이나 분노하였다. 만약 드롱 휘하 2만 병력이 처음부터 리니에 있었거나, 애초의 명령대로 카트르-브라에 합류했다면 영국군이나 프로이센군 둘 중 하나는 괴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락가락 명령 때문에 총 한번 못 쏴보고 하루종일 걷기만 하면서 귀한 시간을 낭비했고 도주한 연합군은 재정비를 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삽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패퇴하는 블뤼허를 쫓기 위해 에마뉘엘 그루시 원수(라고 쓰고 라고 읽는다)에게 3만명이나 되는 군을 내준 것이다. 워털루 전투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카트르-브라와 리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유리한 위치에 서고도 전략적으로는 두 번의 큰 실수를 저지르고 이는 나중에 직격탄으로 다가오게 된다. 어찌 됐건 라 베두아예르도 황제의 삽질에 수동적으로 동참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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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네가 말하는 증원군이 바로 되돌려진 드롱의 1군단이다. - 영화 워털루 中
1815년 6월 18일,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가 시작된다. 라베두아예르는 황제의 부관으로 전투 내내 그의 곁을 지키지만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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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워털루에 등장하는 라베두아예르. '''필리프 포르케'''(Philippe Forquet)라는 프랑스 배우가 그를 연기했다. 영화 초기,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이 퇴위하는 장면에서도 장군복을 입고 등장하는데 사실 이때 라베두아예르는 아직 영관이었고 파리에 있었다. (영화 ≠ 실제)

3. 워털루 패전 이후


워털루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라베두아예르는 전장에서 죽겠다고 똥고집을 피우는 나폴레옹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전장에서 벗어난다. 라베두아예르는 나폴레옹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의 휘하로 들어갔기에 루이 18세 입장에서는 반역자다. 따라서 잡히면 사형감이므로 그는 백색테러를 피해 미국으로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파리를 떠났지만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깜빡한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파리로 들어왔다.
이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되었다.(여권까지 얻은 마당에 망설이지 말고 떠났어야 했다. 술트의 사례를 상기해본다면.) 1815년 8월 2일, 라베두아예르는 수도 파리에서 체포된다. 군사재판에 회부된 그에게는 당연한 절차로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이는 불과 며칠 후인 1815년 8월 19일 집행되었고 라베두아예르는 30살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는 총살당하는 그 순간까지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라베두아예르의 묘는 파리에 있다.

4. 기타


나폴레옹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인정 받은 그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은 장군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언행록의 유서에 따르면 라베두아예르의 유가족에 10만 프랑을 지불하라고 했다 전해진다.
영화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에게 한 발언 중 하나[2]는 흔히 '희대의 아부질'이라는 식의 영 명예롭지 못한 내용의 짤방으로 돌아다닐 때가 있다. 그러나 그가 나폴레옹에게 보여준 충성심을 생각하면 단순한 립서비스라기보다는 진심에 준할 가능성이 높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오늘은 어린 자녀와 함께 있고 싶겠군?"/ "물론입니다. 폐하. (자식과) 함께 폐하를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들과 함께 나폴레옹에게 충성하겠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