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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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Ney
1769년 01월 10일 ~ 1815년 12월 07일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엘힝겐 공작이자 '''초대 모스크바 대공'''.[1][2]
조아킴 뮈라와 더불어 나폴레옹 군대의 대표적인 맹장#s-2으로 일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판단력은 갖추지 못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혁명 전까지
1769년 피에르 네의 차남으로 사르루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피에르 네(1738 ~ 1826)는 7년전쟁을 경험한 베테랑으로 제대후엔 오크통을 만드는 장인이 됐다. 어머니는 마르가레테 그레벨링거(Margarethe Grewelinger, 1739 ~ 1791)로 독일인이다.
네가 태어난 사르루이(Saarlouis)는 원래 16세기까지는 3개의 대주교령이라고 해서 메츠, 베르덩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었지만 17세기 30년 전쟁의 결과 프랑스 영토가 됐다(현재는 독일 영토로 자를란트 에 속해 있다). 어머니의 영향도 있다보니 그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함께 구사하는 바이링구얼로 성장했다.
오귀스탱 대학(Collège des Augustins)에서 공부하고 고향 사르루이로 돌아와 공증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광산과 철공소의 관리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성격에는 안맞았던 모양인지 1787년에 경기병 연대(the regiment of Hussar)에 병사로 입대한다. 부르봉 왕가 치하에서 장교가 되려면 최소한 1/4는 귀족의 피여야 한다. 적어도 조부모 대에 하나쯤은 귀족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네는 귀족도 아니고 특별히 무공을 세울 기회도 없었건만 얼마 안되는 평민 장교(Non-commissioned officer)로 빠르게 승진했다.
2.2.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1792년 부르봉 왕가가 완전히 몰락했다. 유럽의 온 왕국들이 반동 혁명으로서 프랑스를 공격해 오면서, 네는 북방군(Armée du Nord) 소속으로 발미 전투(1792), 니어빈덴 전투(1793)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우고 빠르게 진급했지만, 1794년 마인츠 함락 때 부상을 입고 잠시 전선에서 이탈했다. 부상을 털고 일어나 발미 포격, 니어빈덴 전투 등을 거쳐 1796년에는 여단장이 되었다.
1797년 노이비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창기병대가 프랑스 포대를 점거하기 위해 돌격해오자, 휘하 기병대를 지휘하여 직접 적과 맞붙었다. 창기병대를 패퇴시킨건 좋았지만 하필 '''시간차 공격'''으로 이번에는 중기병이 덮쳤다. 이 때 낙마해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힌 오스트리아 장군과 맞교환되어 돌아왔다.
1799년 사단장으로 승진한 후 스위스와 다뉴브 방면군 소속 기병 지휘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벌어진 빈터투어 전투에서 허벅지와 손목 부상을 당했고, 부상이 나은 다음에는 호엔린덴 전투(1800)에서 모로 장군 휘하에서 싸웠다. 호엔린덴 전투가 있던 해에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 드보아르네의 중매로 결혼하게 됐고, 나폴레옹의 측근이 되었다.
2.3.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1804년에 원수봉을 받고, 이듬해인 1805년 그는 대육군 제6군단을 맡았고 그 해 10월에 벌어진 엘힝겐 전투에서 활약하여 그 보답으로 1808년에 엘힝겐 공작이 된다. 다음 달에는 티롤로 쳐들어가 요한 대공으로부터 인스브룩을 빼앗았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을 철저히 캐발랐다. 1806년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신나게 털어줬고, 1807년의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의 린치에서 나폴레옹을 구해냈고, 프리슬란트 전투에서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을 제대로 털었다.
1808년 8월에 네는 스페인 방면의 제6군단을 맡았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의 소규모 작전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1809년 로버트 윌슨 경이 지휘하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을 패배시켰고, 1810년에는 마세나 원수의 포르투갈 침공에 합류해서 스페인에게서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빼앗고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에게서 알메이다를 빼앗는데 이어 코아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버트 크로퍼드 장군이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5,000명'''을 내쫓았다.[3]
그렇게 한껏 끗발을 날리더니 웰링턴 공이 직접 오자 밀리기 시작했다. 부싸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마세나와 같이 싸웠지만 사이좋게 웰링턴에게 발렸다. 하지만 '''용사중의 용사'''라는 그의 별명을 증명하듯이 토레스 베드라스를 비롯한 폼발[4] , Redinha, 카살 노보, Foz d'Aronce에서 퇴각하는 아군의 후위를 맡아 분투했고, 웰링턴의 추격을 계속 저지했다.
2.4. 러시아 원정의 네
그리고 1812년에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 대육군 제3군단을 맡아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에서 싸웠다. 스몰렌스크에서 네는 목을 다치는 부상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상처가 낫자 바로 보로디노 전투의 '''한복판에서 날뛰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이겼지만 러시아의 '''동장군'''님과 러시아군이 미리 식량을 싹 쓸어가버린 탓에 별 다른 진전이 없이 퇴각하게 되었다. 그때에 후위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네'''였다. 러시아 주력군을 저지하고 난 후에 다시 귀환한 네를 본 나폴레옹이 "정말 대단한 남자다. 네야말로 진정한 '''용사 중의 용사'''라고 불릴 만하다"라고 했다고 한다.[5]
여담으로 그는 러시아 원정군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러시아땅을 떠난 프랑스인'''이라 평가된다고 한다.
2.5. 러시아 원정 이후에서 백일천하
그러나 러시아 원정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에게 털리고 지금까지 잠자코 지내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슬슬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태껏 믿고 있던 베르나도트 '''웬수'''가 스웨덴을 대프랑스 동맹에 가맹시키면서 뒤통수를 까자 나폴레옹은 충격과 공포를 맛보았다.
가장 먼저 프로이센이 '''"내 땅 내놔 이 개객기야!"'''라며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이어 오스트리아도 여기에 참가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을 각개격파할 심산으로 급히 신병을 징집해서 라이프치히로 향했는데, 네의 군단은 뤼첸에서 표트르 뷔트겐슈타인 공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에게 기습당했지만 나폴레옹이 이를 알아차리고 대응을 함과 동시에 네와 협공해서 쫓아냈다.
그리고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쪽수'''에 밀려 줘 터지고 열심히 쳐발린 뒤 파리로 돌아오자 패색이 짙어졌다고 확신한 다른 원수들의 라인에 네도 가담했고, '''이어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강요하기 시작했다.'''[6] 하지만, 당시 파리가 연합군에게 어떤 꼴을 당할 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나폴레옹이 결국 질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자명했다.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당한 뒤 다시 복고된 부르봉 왕조에 충성했지만, 신 왕조에서 느낀 소외감과 부당한 대우에 분노한 그는 1815년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다시 나폴레옹의 막하로 들어갔다.[7]
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연이은 삽질[8][9] 로 기병대 다 날려먹고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에게 붙잡혀 1815년 12월에 결국 총살당했다. 옛날 전우였던 마르몽과 빅토르는 투표를 통해 그를 죽이는 것에 대해 찬성했다.[10]
2.6. 총살
당시 재판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형이 집행되기 전, 네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1815년 12월 4일 첫 번째 회의'''[11]
'''재판장''' : 원수 그대는 1급 반역과 정부 경비를 공격한 죄로 고소당했습니다. 그대에게 걸린 고발에 대해 듣게 될 겁니다. 정부 검사가 이제부터 고발 내용을 읽을 겁니다. 우선 서기에게 의원들의 출석을 확인할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네 원수가 비난을 받고 있는 행동에 대한 모든 진술과 모의에 대해 완벽하게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원수께서 범죄로 여겨지는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네 원수는 언제나, 특히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 왔습니다. 네 원수는 프랑스 정부가 바뀌는 상황에서 언제나 조국의 진정한 옹호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정부서식 종료.
'''미셸 네''' : (격렬하게 변호사의 조언을 중단하며) 예, 저는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인으로 죽을 겁니다. 각하께서 제가 하는 말을 들어주시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변론은 괜찮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에야 계속 방해만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의 변호사들이 한 일과 여전히 준비하고 있는 일들에는 고마움을 표하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변호하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잘것 없는 변호를 받느니 변호를 받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는 충성을 깨뜨렸다는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빌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모쥬가 했던 것처럼 하겠습니다. 유럽과 후손들에게 호소할 것입니다.
'''베이르유''' : 폐하의 장관들이나 국장들을 비난하고픈 게 있다면, 그들은 백성들이 너무 오래 임무를 태만히 한 것에 대해 참고 인내하여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은 프랑스인이 다 알고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고 측 변호사의 변론을 막지 않을 것이고, 이를 잘 듣고서 지금 여러분들께서 심사숙고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 인내심은 닳아가는 중입니다. 저는 변론의 자유가 아니라 책임감을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네 원수의 보호에 힘입어 그들은 어떤 문명 사회에서도 끔찍하게 여겨질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군대의 우두머리인 장군이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행하는데 너무 많은 장애가 있었다고 쳐도, 군주에게 충성을 유지하는 대신 자신의 전군을 이끌고 탈영을 했다고 믿을 만한 주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국가 방어라는 구실하에 벌인 이 모든 탈선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이 존엄한 법정이 잘 인지하고 있는 괴이한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연기에 연기를 거드하고 그것도 모자라 허가된 것 이상의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그의 변론을 듣고 있씁니다. 여러분들은 결론을 내리실 만한 모든 증거와 정보를 들으셨고, 피고 측의 변론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내용뿐이고 우리를 다시금 쓸데없는 잡담에 끌어들일 뿐입니다!
'''미셸 네''' : 각하, 저는 지금부터 제 변호사들이 말하는 걸 금지하겠습니다. 각하께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할 때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는 저를 재판하는 회의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모여도 좋다는 내용의 말을 하지않는 한, 변호사들이 말하는 걸 금지 시키겠습니다.
(후략)
'''재판장''' : 왕의 장관들은 그들이 한 말에 대해서 더 이상 부연하지 않았다 나는 법정이 신중하게 고려하게 될 고발장을 읽었다. 왕의 장관들은 논의 결과 프랑스 원수 네는 1793년 5월 12일자의 법령에 따라 유죄로 판결하고 여러 합의에 명시된 처벌을 받음을 선고한다. 네 원수는 재판의 모든 비용을 지불할 것을 명한다. 피고, 판결에 대해 할 말있습니까?
'''미셸 네''' :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없습니다, 각하.
사람들은 5시와 11시 30분에 물러나고 피고에 대해서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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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병사들이여, 내가 사격 명령을 내리면, 바로 내 심장을 쏘아라. 명령을 기다려라. 이것이 내 마지막 명령이다. 나는 내게 내려진 판결에 이의가 있다. 나는 프랑스를 위해 백번의 전투를 치렀지만, 내 조국을 배반한 적은 한번도 없다. 사격을... 개시하라!"'''
3. 평가
사실 네는 사단장으로는 충분해도 한 군을 맡아 지휘하는 육군 원수의 직위를 가지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워털루 이전에 벌어진 카르트브라에서의 실패와 리니에서 나폴레옹을 도와 프로이센군을 완전히 섬멸시킬 수 있던 찬스를 놓친 것도 그렇고 다부나 란의 대열에 들기는 상당히 모자란 편이었다. 사석에서 나폴레옹은 네에 대해 "만명의 병사를 거느리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라고 평했다. 하다못해 유일한 장점인 용맹도 뮈라에 미치지 못했다. 능력 이상의 지위에 올라갔다는 점에선 그루시와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상당히 기분대로 말을 막 내뱉는 편이었는데 보로디노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평상시처럼 최전선에서 지휘를 하지 않고 정신나간 명령들이 하달되어 오자 꼭지가 돌아버린 네가 "황제폐하께서 더 이상 장군이 되길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튈르리로 돌아가 우리가 장군이 되게 하면 되잖는가!" 라고 소리쳤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