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
공작위 창설

초대 '''아서 웰즐리'''

2대 아서 리처드 웰즐리


'''영국 제25/28대 총리
Field Marshal[1] / His Grace[2]
The Duke of Wellington
KG GCB GCH PC FRS
'''
토마스 로렌스, 1815년[3]
'''본명'''
Arthur Wellesley
아서 웰즐리
'''출생'''
1769년 5월 1일
아일랜드 왕국 더블린
'''사망'''
1852년 9월 14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켄트, 월머 성
'''작위'''
'''1대 웰링턴 공작[4]'''
가터 기사(Order of the Garter)
바스 기사(Order of the Bath)
왕립 겔프 기사단[5]
황금양모 기사단[6]
검 기사단[7]
빌렘 기사단[8]
'''정당'''
토리당 (1834년 까지)
(1834년 이후)
'''복무'''
대영제국 육군 (1787년~1852년)
'''계급'''
육군 원수 (Field Marshal)
'''주요참전'''
플랑드르 전투
제4차 앵글로-마이소르 전투
제2차 앵글로-마라타 전투
영국 전투
반도 전쟁
코티오테 전투
백일천하
워털루 전투
'''재임 기간'''
1기: 1828년 1월 22일1830년 11월 16일
2기: 1834년 11월 17일1834년 12월 9일
1. 개요
2. 생애
2.1. 나폴레옹 전쟁 이전
2.2. 나폴레옹 전쟁
2.3. 나폴레옹 전쟁 이후
2.4. 흑역사
2.5. 가족관계
3. 일화
4. 대중문화 속의 아서 웰즐리
5. 현재의 웰링턴 공작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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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작이 없는 영국은 상상할 수 없다. 그는 신하가 된 자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모두의 위에 우뚝 섰었다. 그는 온 나라에서 존경 받았으며 군주가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다. 오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 웰링턴 공작 사후

영국 육군 원수이자 제1대 웰링턴 공작이며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육군 최고의 지휘관이다. '''당시 무적에 가까웠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최대 호적수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씬 레드 라인을 위시한 수비적 전술의 극한을 보여준 명장이었다.'''[9]

2. 생애



2.1. 나폴레옹 전쟁 이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를 지배하는 영국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3남이라 영지를 물려받을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군에 투신했다. 특이한 것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가서 군사학을 배웠다는 점. 집안이 빵빵한 덕에[10] 영국 특유의 매관 제도를 이용하여 빠르게 진급, 1794년에는 연대장으로 플랑드르 지방에서 복무하다가 프랑스 혁명군과 싸워 공적을 쌓아갔다.
1798년 그의 형이 인도 총독[11]이 되자 형을 따라서 인도 주둔군에 복무하며 지방 반란들을 평정하며 형의 후광과 자신의 전과로 소장까지 진급한다. 제4차 마이소르 전쟁에서는 서양식 무기와 군사제도를 받아들여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마이소르 왕국을 격파하여 사실상 왕국을 멸망시켰고, 특히 1803년 9월 23일 벌어진 아사예 전투에서 5천 명의 병력으로 마라타 동맹의 5만 병력과 싸워 크게 승리했는데 웰링턴 본인은 워털루보다도 이 전투를 자신의 최고 전과로 꼽았다.[12][13] 1805년 본국에 귀국하여 인도에서의 공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지만, 본토의 육군고관들에게 인도 복무기간 중의 성과는 무시당한다.[14]
1807년 사단장으로 진급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덴마크를 침공하는 작전에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중장으로 진급, 1808년 반도 전쟁에서 포르투갈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이 파견한 부대의 선발대 지휘관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처음 향한다. 그러나 초전에 아직 소수였던 쥐노 휘하의 프랑스군을 연달아 격파하던 아서 웰즐리는 후속부대와 함께 도착한 상관들의 삽질로 신트라 협약을 맺었는데 쥐노 휘하의 포트루갈 주둔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에서 그냥 물러나는 대신 "자신의 약탈품을 포함해 자신들을 영국 해군이 프랑스로 수송해주는" 협약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비메이라에서 크게 패해서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즉, 계속 공격했으면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상황인데 이런데 저런 협약을 맺었다. 따라서 그의 성과가 모조리 날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1808년 9월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아서 웰즐리는 그 상관들과 함께 의회 조사를 받기 위해 본국으로 송환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2.2. 나폴레옹 전쟁


그러나 후임으로 임명되었던 존 무어 장군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직접 지휘하는 20만 대군에 밀려 퇴각하던 중 전사하자, 웰즐리는 그 후임으로 임명되어 다시 이베리아 반도로 향한다. 이후 연패로 개판이 된 영국군을 추스르고 군기를 확립하며, 포르투갈-스페인 국경에 강력한 요새들을 설치해 프랑스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러나 군의 사기와 전투 능력이 향상된데 반해 고질적인 약탈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여 민가를 약탈하다 걸리는 자들은 죄다 교수형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약탈행위는 번번히 일어났다. 웰링턴은 이에 질렸는지, 본국이나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기 병사들을 오합지졸, 영국사 최악의 부대,거지새끼들 등등으로 온갖 악평을 했다. 이베리아에서 철수하던 프랑스군의 뒷통수를 까 그동안 약탈했던 스페인의 보화들도 버리고 도망가게 만들었던 비토리아 전투에서는 병사들의 엄청난 약탈에 제대로 빡쳐 '술이나 쳐마시러 입대한 거지새끼들'[15] 이라고 했다가 욕을 먹기도 했다. 민가 약탈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의 시체를 뒤져서 물건을 챙기는 시체 약탈도 교수형에 처했다고 한다.[16]
덧붙여 스페인은 동맹국이기에 어떤 지휘관이 오더라도 제정신이라면 병사들의 약탈을 엄하게 다스렸을 것이다. 그리고 웰링턴은 프랑스에서의 약탈은 굳이 억제하지 않았다고 한다.
1810년 영국군을 포르투갈에서 몰아내기 위해 앙드레 마세나니콜라 장드듀 술트가 포르투갈로 침입해 왔으나, 부사코 전투에서 마세나군과 격돌, 영국-포르투갈군은 1,200명의 사상자가 난 데 반해, 마세나의 부대는 4,5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만든다. 그리고 그대로 요새선으로 후퇴, 요새를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제풀에 지치고, 식량과 물자는 바닥나고, 지휘부마저 분열되어 퇴각하게 된다. 그러나, 추격전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세나의 조공인 술트가 다른 쪽 국경에 침입, 바다호즈 요새를 점령했기에 추격을 중단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한다.
확실한 승리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단 프랑스군은 더 이상 포르투갈 공세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고, 영국이 오히려 공세를 가할 수 있는 입장으로 바뀌어, 웰링턴은 스페인 게릴라를 지원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을 노리는 한편, 수시로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여 서서히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스군을 약체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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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초상화
1813년, 마침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눈을 돌리는 틈을 타,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연파하기 시작, 비토리오 전투에서 스페인내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멸하고, 1814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남부를 유린하며 북상하던 중, 나폴레옹의 실각 소식을 듣는다. 웰링턴의 이베리아반도에서 활약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 항목에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있다.
1815년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는 이전과는 달리 호레이쇼 넬슨의 뒤를 잇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웰링턴 공작의 칭호와 영지를 하사받는다. 그리고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정세를 결정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그러나 빈 회의 와중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급히 귀국, 영국 육군을 이끌고 벨기에로 향해 워털루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맞아서 싸우다가 마침내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을 포위해 나폴레옹의 운명을 끝장낼 수 있게 된다.

2.3. 나폴레옹 전쟁 이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변신하여 의회와 내각에서 여러 활동을 한 끝에 1828년에 총리가 된다. 총리 시절 그의 주요 업적으로 아일랜드의 오랜 염원이었던 카톨릭교도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그로 인해 자신이 당수이기도 했던 보수주의 여당의 지지를 잃게 된다. 훌륭한 군인일 뿐 정치감각은 별로 없어서 군인 시절 얻었던 인기를 잃고 2년 만에 사임했다. 1842년에는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한다.
1846년 공직에서 은퇴한 뒤 1852년 8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으며 유해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2.4. 흑역사


위에서 언급되었듯 정치가로서는 영 아니었기에, 그의 흑역사 대부분이 정치가 시절에 생긴 일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까이는 흑역사가 바로 '''아편전쟁 지지발언을 의회에서 했다는 것[17]'''. 그냥 지지발언을 했다고 하면 그냥 one of them 같아 보이겠지만, 이 양반 한때 토리당의 당수까지 지냈고 1차 아편전쟁 끝무렵에는 육군 총사령관도 지낼 정도의 쨍쨍한 현역이었다. 아편전쟁 같은 경우는 훗날 수상을 지내는 윌리엄 글래드스턴 등 일부 영국 귀족 엘리트들도 반대할 정도였는데, 아서 웰즐리는 당시 수상이었던 파머스턴과 함께 가장 강력한 전쟁 찬성파였다. 이 팽팽한 대립 속에서 아편전쟁 결의안은 결국 271 대 261, 의회에서 겨우 9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1819년 맨체스터에서 보편선거를 요구하는 빈민들의 집회(차티스트 운동) 당시 기병대로 군중들을 깔아 뭉개기도 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맨체스터의 성 피터 광장이었기에 워털루 전투에 빗대어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고 욕을 먹었다. 이 피털루 학살은 마이크 리 감독이 피털루라는 제목으로 2018년 영화화 되었다.
총리 시절 있었던(1830년) 스윙 폭동(Swing Riots) 당시 농업 구조 변화와 전쟁으로 세금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농업 노동자들이 탈곡기 파괴운동을 벌여 사회가 불안정해졌는데, 거기서 '''현재 개선할 건 없다'''고 발언을 해버렸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마자 분노한 노동자들이 '''런던에 있던''' 그의 집을 털기도 했다.

2.5. 가족관계


초대 모닝턴 남작, 리처드 콜리 웨슬리(할아버지, 1690~1758 )/ 엘리자베스 세일(할머니?~?)
제1대 모닝턴 백작, 가렛 웨슬리(아버지,1735~1781) / 앤 웨슬리(어머니,1742~1831)
제2대 롱퍼드 남작 에드워드 파킨햄(장인, 1743~1792) / 캐서린 룰리(장모,?~?)
제1대 웨슬리 후작[A], 리차드 월즐리(큰형, 1760~1842)
아서 제랄드 월즐리(둘째형'''요절''',?~1768)
제3대 모닝턴 백작, 월리엄 월즐리폴(셋째형, 1763~1845)
프란세스 월즐리(넷째형, 1767~1770)
앤 월즐리(큰누나, 1768~1844)
제랄드 발레리안 월즐리(첫째동생, 1770~1848)
메리 엘리자베스 월즐리(여동생,1772~1794)
헨리 월즐리(둘째 남동생,1773~1847)
캐서린 월즐리(부인,1773~1831)
아서 리처드 윌즐리(장남, 1807~1884) 경 / 찰스 월즐리(차남,1808~1858)

3. 일화


병사들에겐 굉장히 엄격해 Iron Duke(철의 공작)이라고 불리던 때가 있었지만 사실 다정한 사람이라고 불러지는 일화들이 많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귀국하여 길을 가던 중 한 소년이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이런, 이런, 이건 신사가 할 행동이 아니지. 왜 그렇게 우느냐?."라고 물었다.

"제가 곧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는데 제가 학교로 가버리면 아무도 저의 두꺼비를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계속 울기 시작하자, 잠시 생각하던 웰링턴 공작은

"걱정하지 말고 학교로 돌아가거라. 두꺼비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라고 대답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몇 주 후 학교에 돌아가 있던 소년에게 한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는데 거기엔 '''영국군의 육군 원수'''이자 웰링턴 공작인 아서 웰즐리가 소년에게, "두꺼비는 잘 지내고 있음" 이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 시절에 숱하게 싸웠던 니콜라 장드듀 술트가 1838년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때 특별 대사로서 영국에 방문했는데 그를 발견한 웰링턴 공작은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놀란 술트가 그를 쳐다보자 공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디어 당신을 붙잡았군."

이베리아 반도에서 술트를 이긴 후 그와 벌인 추격전에서 그를 놓친 일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이 후 두 사람은 껄껄 웃으며 그 당시의 추억을 회상했다고 한다.

웰링턴 공작이 구제불능이었던 한 병사를 처형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너를 교육도 시켜봤고 상담도 해봤다. 그리고 탈영할 때마다 징계도 내리고 감옥에 보내기도 해봤다. 너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해봤지만 너는 뉘우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너를 사형에 처해야겠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장교가 급히 웰링턴에게 말했다.

"장군님, 장군님은 물론 군율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하셨습니다. 하지만 장군님께서 이 병사에게 시도하지 않으신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장교의 말을 들은 공작은 크게 감명받았고, 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병사는 완전히 달라졌고, 탈영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보다도 용감한 병사가 되었다고 한다.

워털루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축하파티가 열렸는데, 한 시골 병사가 손 씻는 물인 핑거볼을[18]

멋모르고 마셔 버리자 잔치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러자 웰링턴 장군은 "워털루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승리를 거둔 저 젊은 병사와 같이 핑거볼로 축배를 듭시다"라고 말하면서 물을 들이켰다. 이 순간 모든 손님이 핑거볼로 축배를 든 후 장내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말년의 아서 웰즐리(월링턴 공작)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이겼는데, 공작님의 군사적 재능이 나폴레옹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그러나 웰즐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최고의 전략가 한 명을 꼽으라면 바로 나폴레옹'''일 것이오."("In this age, in past ages, in any age, Napoleon.")

실제로도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아서 웰즐리만이 아니라 블뤼허 장군의 적절한 증원 도착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웰즐리 자신도 나폴레옹을 넘어서는 전략가라고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시대의 장군으로서 나폴레옹의 재능을 인정했다고 보는 쪽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예컨대 이베리아 전역 당시 가까운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군의 졸렬한 움직임으로 피해가 컸던 것을 한탄하며 '''만일 나폴레옹이 상대였다면 아군은 전멸'''했을거란 식으로 얘기한 적도 있다. 물론 이런 웰즐리의 발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정확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고, 영국이 나폴레옹을 띄워주는 것은 결국 그를 이긴 대영제국을 에둘러 자화자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 자체는 그 시대의 모두가 인정했다.[19]
다만 부하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없었는지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그가 사람이 없는 호수에서 헤엄을 즐기다가 익사할 뻔 했는데 우연히도 거길 지나던 부하 하나가 그를 구해주었다. 그가 고마워하면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줄테니 말해보라고 하자 그 부하가 말하길 "누구에게도 제가 장군님을 구했다는 걸 말하면 안 됩니다. 제가 맞아 죽을지도 모르거든요."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한 일화는 웰링턴 장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머 이야기로 쓰인다.

한 전투에서 두 병사의 약탈 사실이 적발되자, 그가 내린 처벌은 자신이 매달릴 교수대를 직접 만들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두 명 모두 자신이 매달릴 교수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 병사가 다른 병사에게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해댔다. “빨리 빨리 만들어! 장군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리고 그들은 잽싸게 교수대를 지은 뒤 교수형을 당했다.

그 외에도 사랑의 학교에 이런 일화가 소개되었다.
  • 출신 배경과 가족 대대로 뼛속까지 귀족이라 하인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직접 말도 걸지 않았다고 한다.
  • 4개국에서 작위를 받았다. 영국의 웰링턴 공작위 (1814), 포르투갈의 빅토리아 공작위 (1812), 스페인의 시우다드로드리고 공작위 (1812), 네덜란드의 워털루 공작위 (1815).
  • 워털루 전투가 끝나고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워털루를 방문했는데, 네덜란드가 세운 사자의 언덕 때문에 지형이 변한 것을 보곤 "빌어먹을 네덜란드 놈들! 내 전장을 망쳐놨어!"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이라는걸 별로 자랑스러워 하지 않았다. "인간이 마굿간에서 태어났다고 말이 되는 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실제로 작위를 받을때 아일랜드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성을 냈을 정도이다. 하지만 훗날 총리 시절에 카톨릭을 해방시킨 덕에 아일랜드 더블린에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높다.
  • 비프 웰링턴이라는 요리가 존재하며, 그 이름 때문에 아서 웰즐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명확한 연관성은 없다. 아래의 영국 요리 입맛 전설과는 달리 이쪽은 상당한 고급 요리로, 고든 램지의 시그니처 요리로도 유명하다.
  • 입맛이 좀 이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12년에 잠시 파리 대사로 있었을 때 프랑스 귀족의 만찬에 참가했다가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해 웰링턴을 초대한 공작이 "아니, 맛도 못 느끼면서 왜 파리에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게다가 식사도 불규칙적이고 가끔 계란 몇 개 정도 툭 까먹는 걸로 보아 맛에는 그다지 관심없었을 듯하다. 샤프 시리즈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 내용이 나온다.이베리아 반도 전쟁 도중 니콜라 장드듀 술트와 전투를 벌여서 승리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술트가 저녁 식사로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려다가 전투가 벌어져 먹지를 못했다. 식초를 넣는 문제와 양념의 종류에 대해서 요리사와 토론까지 벌이면서 받은 메뉴인데 말이다. 그리고 웰링턴이 전투에서 이기면서 그 스테이크 요리가 웰링턴의 저녁식사가 되었다. 근데 웰링턴이 그 스테이크 요리를 한입 먹더니,
>"프랑스 요리가 맛있다더니, 정말 맛이 없군. 고기에 뿌려진 양념을 없애고, 대신 식초를 뿌리게."
라고 요리사에게 말했단다. 설령 요리가 전투 도중에 식어서 맛이 떨어졌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괴이한 취향임을 묘사한 것. 실제론 술트의 식사를 노획해서 먹은 것은 사실이나 웰링턴이 여기에 대해 음식을 어떻게 해라, 맛이 어떻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적은 없다. 다만 와인은 꽤나 신경쓴 모양. 그런데 그것도 영 아닌 것이 영국산 와인만 마셨다나?


  • 전쟁 영웅답게 그의 이름을 딴 해군 전함이 여럿 존재했다. '웰링턴'이나 '아서 웰즐리' 대신 그의 별칭인 '아이언 듀크'를 사용, 제일 유명한 것은 1912년에 취역한 동명의 슈퍼 드레드노트 함급의 네임쉽 '아이언 듀크'[20], 가장 최신예 함은 1991년에 취역한 23형 프리깃 HMS 아이언 듀크다.


  • 공식 칭호가 무지막지하게 길다. 자국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동맹국으로부터도 주어진 것도 많기 때문이다. 칭호는 다음과 같다.
Arthur, Duke and Marquess of Wellington, Marquess Douro, Earl of Wellington, Viscount Wellington and Baron Douro, Knight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One of Her Majesty's Most Honourable Privy Council, and Field Marshal and Commander-in-Chief of Her Majesty's Forces.
Field Marshal of the Austrian Army, Field Marshal of the Hanoverian Army, Field Marshal of the Army of the Netherlands, Marshal-General of the Portuguese Army, Field Marshal of the Prussian Army, Field Marshal of the Russian Army, and Captain-General of the Spanish Army.
Prince of Waterloo, of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Duke of Ciudad Rodrigo and Grandee of Spain of the First Class.
Duke of Victoria, Marquess of Torres Vedras, and Count of Vimiera in Portugal.
Knight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the Golden Fleece, and of the Military Orders of St. Ferdinand and of St. Hermenigilde of Spain.
Knight Grand Cross of the Orders of the Black Eagle and of the Red Eagle of Prussia.
Knight Grand Cross of the Imperial Military Order of Maria Teresa of Austria.
Knight of the Imperial Orders of St. Andrew, St. Alexander Newski, and St. George of Russia.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Portuguese Military Order of the Tower and Sword.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and Military Order of the Sword of Sweden.
Knight of the Order of St. Esprit of France.
Knight of the Order of the Elephant of Denmark.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Hanoverian Guelphic Order.
Knight of the Order of St. Januarius and of the Military Order of St. Ferdinand and of Merit of the Two Sicilies.
Knight or Collar of the Supreme Order of the Annunciation of Savoy.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Military Order of Maximilian Joseph of Bavaria.
Knight of the Royal Order of the Rue Crown of Saxony,
Knight Grand Cross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of Wurtemberg.
Knight Grand Cross of the Military Order of William of the Netherlands.
Knight of the Order of the Golden Lion of Hesse Cassel, and Knight Grand Cross of the Orders of Fidelity and of the Lion of Baden.||
즉, 오스트리아, 하노버, 네덜란드, 포르투갈, 프로이센, 러시아, 스페인에다 영국을 합해 8개국의 원수가 된 것이다. 그 외에 주렁주렁 달린 호칭들은 빼고서도 말이다.


  •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전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튼의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연설을 하던 중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에서(Here)'라고 말한 것을 그 당시의 교장이 윤색을 가해 글을 쓴게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818년에 이튼을 방문했을때 "나의 용기와 기상은 이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얻은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모교에 감사했다고 하는걸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 각종 매체에서 종종 역대 명장을 100명 정도 뽑는데 그중 거의 필수적으로 상위권에 들어간다. 대충 2~30위 언저리 정도.


  • 전용 찬양곡이 존재한다.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 작곡한 '웰링턴의 승리'가 바로 이것.[21] 물론 본인도 베토벤 같은 대작곡가가 자신을 위한 곡을 작곡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기분 좋아 했다고 한다.[22]

4. 대중문화 속의 아서 웰즐리


나폴레옹 시대를 다룬 게임에 나올 경우 대부분 나폴레옹 다음가는 능력을 보유한다.
  • 나폴레옹 전쟁이 배경인 만큼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영국을 침공한 프랑스군을 대상으로 활약하고, 보수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인지 로렌스와 테메레르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말을 하지만, 꽉 막히고 무능한 높으신 분은 아니라서 용권신장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고, 여자인 제인 롤랜드를 상원의원으로 추천하는 등의 모습도 보인다.
  • 랑펠로에서 능력 A가 넷인 인물은 이 둘뿐이다. 셋인 인물은 메테르니히 뿐이고 피트, 다부, 카를, 쿠투조프같은 인물들도 둘 뿐이다.
나폴레옹 : Politics B Finance C Supply B Build A Leader A Infantry A Cavalry C Artillery A
웰링턴 : Politics B Finance B Supply A Build A Leader A Infantry A Cavalry B Artillery B
  • 보드게임 나폴레오닉워에서 장군의 능력은 전투능력-지휘능력으로 돼있는데 나폴레옹이 4-8으로 최고이고 웰링턴이 4-6으로 그 다음이다. (3-6인 다부, 술트, 쿠투조프가 그 다음) 이 작품의 후속작은 "웰링턴"인데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1812년에서 1814년을 다루고 있고 당연히 주인공. 술트와 함께 독보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웰링턴만을 위한 이벤트카드도 따로 존재한다.
  • 버나드 콘웰 경의 소설인 샤프 시리즈에 등장한다. 주인공 리처드 샤프의 은사로서, 인도에서 샤프에게 목숨을 구해진 후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준다.
  •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 영국군 원수로 등장. 각 나라 별로 한 명씩 있는 원수[23] 중 한 명이며 만렙에 가까운 지휘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처음 영국에 주어지는 육군 지휘관들의 능력이 죄다 고만고만해서 다른 장군들[24]을 고용하기 전까지는 프랑스를 상대로 이리저리 굴려질 운명이다. 물론 다른 장군들이 있어도 맹활약하긴 하는데 일단 전장에서 한 번 당하고 나면 능력치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 소설 혼블로워에 가상의 여동생인 바바라가 주인공인 혼블로워와 결혼하며 직접 나오지는 않으나 여동생을 통해 많이 언급된다.
  • 중국 SRPG 성녀전기에서 앤 웰즐리로 여성화 되어 등장한다. 본작의 네임드 여캐중에선 유일한 TS캐릭터인데 이름은 큰 누나인 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초반에 라이벌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하나 본격적으로 맞붙는건 중반부터이며 최종장에서 상대하는 적중 하나다.

5. 현재의 웰링턴 공작


현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Arthur Charles Valerian Wellesley, 1945~)는 9대째로 2014년에 작위를 계승했다. 전직 유럽의회 의원이자 현직 귀족원 의원이기도 하다. 공작부인은 프로이센 왕가 방계인 안토니아(Antonia)[25]로 열 살 연하이다. 2남 3녀를 두고 있다.
조상님처럼 그도 5개국 귀족 작위를 겸하고 있다[26]. 2010년에 스페인의 시우다드 로드리고 공작위[27]를 생전 상속받았고, 2014년에 부친이 별세하자 영국 워털루 공작은 물론이고 포르투갈의 빅토리아 공작이자 토레스 베드라스 후작이자 비메이로 백작(Duke of Victoria, Marquis of Torres Vedras, Count of Vimeiro),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워털루 공작(Prince of Waterloo)위를 상속받았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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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글래스고에는 웰링턴 공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문제는 '''웰링턴 공작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그리 예뻐하지 않는 잉글랜드인'''(정확히는 아버지대에 아일랜드로 이주한 잉글랜드인)이라는 점. 자기네 앞마당에 잉글랜드 영웅의 동상이 떡하니 놓여져 있는 것에 배알이 꼴린 스코틀랜드 시민들은 그렇다고 무식하게 부셔버릴 수는 없고,[28] 대신 머리에 교통 고깔을 씌워놓았다(...) 영어권의 묘사에서 찌질이나 덜떨어지는 사람 또는 수업때 벌을 받는 학생이 dunce(멍청이)라고 쓰여진 고깔모자(dunce cap)를 쓰는 묘사가 있는데 그런 점을 활용한 일종의 영국식 조크인 셈. 교통 고깔이 처음 발견된건 1980년대라니 나름 전통 있는 장난이라 할 수 있다.
행정 당국은 고깔을 벗겼지만 몇 번이고 다시 고깔이 씌워지는 바람에 고깔을 치우는 비용으로만 연간 10,000 파운드나 들어갔다. 결국 보다 못한 글래스고 시의회는 동상 훼손과 시민들이 다칠 것을 우려해 동상을 높이려고 계획한 적도 있으나 '고깔을 지키자'는 글래스고 시민들의 시위에 무려 72,000명이나 모이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웰링턴경 동상의 고깔 씌우기는 글래스고의 명물이 된 셈. 참고로 웰링턴 공작의 동상은 런던맨체스터, 햄프셔 주 등 영국 각지에 있지만 이런 수모를 겪는 곳은 오직 글래스고 뿐이다.
그의 이름을 딴 뱅거급 전열함 웰즐리 함이 1815년 진수되었는데, 백이십년 넘는 세월 동안 영국해군의 최고참 중 하나로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나치 독일 공군 슈투카의 폭격으로 침몰했다. 전열함 중 최후로 격침된 전열함이자[29], 항공 폭격으로 격침된 유일한 전열함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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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에 촬영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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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향년 84세로 임종한 아서 웰즐리의 데스마스크
[1] 육군 원수[2] 공작 본인에 대한 경칭[3] 밑에 있는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초상화랑 비교해보면 생긴 게 좀 심각하게 다른데, 로렌스의 스타일은 대개 고객들의 니즈를 많이 반영 시킨 아름다운 화풍이었고, 반대로 고야는 같은 로코코 미술의 거장이었지만, 인간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는 특유의 화풍이었기 때문이다. 고야가 인물화를 못그렸냐면 그것도 아닌 게, 그 역시 스페인 왕족들의 초상화를 여러 개 그렸던 사람이다. 그리고 고야가 작업을 시작하던 시기 웰링턴의 인지도는 그냥 좀 잘 싸우는 장군 정도였지, 나폴레옹을 물리친 위대한 영웅 수준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인기가 높아지자 뽀샵이 과해진 것이다.[4] 1st Duke of Wellington[5] 하노버 왕국. Guelphen-Orden(독일어)[6] 합스부르크 왕조. Insigne Orden del Toisón de Oro(스페인어)/Orden vom Goldenen Vlies(독일어)[7] 스웨덴 왕국. Kungliga Svärdsorden(스웨덴어)[8] 네덜란드 왕국. Militaire Willems-Orde(네덜란드어)[9] 주요 업적으로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을 구축하고 마세나를 물먹인 것과 워털루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프랑스군의 파상공세를 버텨낸 것이 꼽혀서 그렇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보여준 전과를 보면 공격적인 전략과 전술도 충분히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10] 사실과 다소 다르다. 정확히는 그의 아버지가 생존했을 때는 그럭저럭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어 막 임관했을 무렵에는 항상 돈 걱정을 하면서 지냈다. 이후에 이 때를 회고하기를 "나는 종종 돈이 부족할 때가 있었지만 결코 무력하게 빚더미에 올라앉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이후에 그의 부인이 되는 캐서린 페이큰햄과 교제하려 할 당시에는 그녀의 남동생이 '''가난하고 빚이 있으며 장래도 불투명하다며''' 반대해서 열받은 나머지 아끼던 바이올린도 불살라버렸을 정도였다. 뭐 결국 결혼은 성공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결혼 후에 아내와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는데 둘 다 성격이 강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자녀는 두 명. 더 아이러니한 것은 결혼을 반대했던 캐서린의 남동생 에드워드 페이큰햄이 둘의 사이가 원만하도록 가교 노릇을 한 것이다. 에드워드 페이큰햄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웰즐리의 부하로 있다가 1815년 앤드루 잭슨을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 준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국에서 전사한다. 여담으로 에드워드 페이큰햄에 대한 웰즐리에 대한 평을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용감한 바보'''였다.[11] Governors of the Presidency of Fort William (Bengal)로 벵골지역에 있던 윌리엄 요새의 지사였다. 인도 총독의 전신격이 되는 지위로, 당시에는 동인도 회사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었다.[12] 마라타는 인도 중부에 있던 국가이다. 인도군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훈련받아 유럽군대와 같이 싸울 수 있었다. 아사예전투 승리 후 전리품인 대포를 조사해보니 프랑스 표준 방식으로 운용했다고 한다.[13] 이 아사예 전투의 과정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사예 전투 당시 웰링턴은 9500명의 군대를 가지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무장한 2만 명의 마라타군 보병과 4만 명의 기병 및 유럽식으로 훈련받은 1만 800명의 보병들로 이루어진 총 7만 800명의 마라타 군대와 정면으로 대결을 벌여 이겼다. 이는 웰링턴이 뛰어난 지휘관이고 영국군 병사들이 엄격한 훈련과 군기를 갖춘 덕분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마라타군 내부의 심각한 분열 때문이었다. 당시 마라타 군대는 라고지 본슬레와 신디아 등 두 명의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신디아와 불화를 빚었던 본슬레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는 바람에 마라타군이 혼란에 휩싸여 정면으로 돌격해오는 영국군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22~224쪽[14] 당시 인도의 군대는 전체적으로 영국군과 싸우면 지기 바빠서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합지졸들 부숴놓고 자랑거리가 되느냐는 식의 반응이 나온 것이다.[15] 사실 틀린 말도 아닌게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육군에 입대하는 병사들 중 약 80%는 다른 직업을 구하지 못한 실업자이거나 아니면 매우 가난한 빈민가 출신이어서 엄격한 통제가 없으면 곧바로 주변 민간인들을 상대로 술주정이나 약탈 같은 행패를 부릴 만큼 군기가 문란했다.[16] 당시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7만 8천 명, 프랑스군은 5만 8천 명이었는데, 연합군은 4,500여 명이 전사했고 프랑스군은 8천여 명 전사에 포로 2천여 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탈출해서 프랑스 복귀에 성공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군이 노략질해가던 스페인의 보화들은 당시 화폐 가치로 최소 5백만 파운드로 추정되고 정확한 액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이 중 웰링턴이 공식적으로 회수한 것은 고작 2만 5천 파운드 정도였고, 영국군 병사들이 약탈한 액수는 대략 1백만 파운드로 추정된다. 심지어 영국군 95 연대의 에드워드 코스텔로라는 병사는 개머리판 몇번 휘둘러 1천 파운드를 털었다는 무용담 아닌 무용담도 구체적으로 전해질 정도다. 사실 100만 파운드를 약탈한 영국군 병사들은 세번째 약탈자들이였는데, 첫 번째는 물론 영국군에게 뒷통수 맞고 패주하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챙길 건 챙겨갔던 프랑스 병사들이고, 두 번째는 주변에 살던 비토리아의 주민들이였다. 팀킬과 살인 약탈 방화가 난무하고 무지한 병사와 주민들이 명화백의 그림들을 뜯어서 은그릇과 보석을 포장하는 데 사용하는등 완벽한 개판이었다. 프랑스군은 완전히 붕괴해서 부대 유지도 못하고 패주중인 상황이였고, 나폴레옹의 형이자 프랑스에서 스페인 왕으로 세웠던 조세프도 타고 있던 마차가 영국군 기병대에게 따라 잡혀서 영국군이 마차 문을 열었을 때 반대쪽 문, 혹은 뒷문을 열고 튀었어야 했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영국군 병사들이 전투는 뒷전이고 사방에 널린 보물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서 전과 확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웰링턴이 빡친게 돈이 회수가 안돼서뿐만은 아니였을 것이다. 덧붙여 조세프의 마차를 덮쳤던 기병들은 그를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가 마차안에 남겨두고 간 요강을 전리품으로 챙겨 술잔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7] 이것 때문에 중국은 아서웰즐리를 좋게 안보는 편이다.[A] 겸 제2대 모닝턴 백작[18] 원래 서양에서는 음식을 그냥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음식을 찍어먹는 포크는 10세기에 동로마 제국에서 처음 생겨났지만 서유럽에는 18세기 무렵에야 일반화되었는데, 그냥 음식을 편하게 손가락으로 집어먹으면 될 것을 왜 굳이 포크로 불편하게 찍어먹느냐는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포크를 써서 음식을 찍어먹으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편견도 강했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격식을 갖춘 고급 서양식 레스토랑에는 핑거볼이라고 하여 손가락을 씻는 용도의 물이 담긴 그릇이 나오는데, 원래 서양에서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먹고 난 후에 손가락을 물에 담가 씻던 습관을 반영한 흔적이다.[19] 심지어 나폴레옹 때문에 군대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고 직장을 잃어버린 클라우제비츠나 덤으로 목숨마저 잃은 샤른 호르스트 같은 사람들도 나폴레옹을 미치광이 전쟁광이라고 욕할지언정 '''전술의 천재'''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웰링턴 자체가 고지식한 군인 타입인지라 상대를 높이면서 자기를 높이는 식의 교묘한 말을 하는 타입으로 보기도 어렵다.[20] 유틀란트 해전 당시 영국 대해군 총기함.[21] 워털루 전투가 아니라, 그보다 앞선 1813년 스페인의 대프랑스 항쟁을 지원하기 위한 비토리아 전투 승리를 기념한 곡이다. 작곡될 당시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러한 분위기를 타서 인기리에 연주되었다.[22] 베토벤은 처음에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권력을 이양한듯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위해 '영웅'을 작곡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실망하여 이내 증오하게 되었고, 결국 나폴레옹을 쓰러뜨릴 맞수인 웰링턴을 찬양하게 되었다. 꽤나 아이러니한 곡절이 있는 셈이다.[23] 전장에서 쓰러져도 부상으로 처리되어 수도에서 부활한다. 이외의 장군들은 얄짤없이 전사 처리. 프랑스의 경우 당연하게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24] 토머스 픽튼이라든지 칼 베레스포드 등 괜찮은 장군들도 있다.[25] 빌헬름 2세의 증손녀[26] 아서 웰즐리가 네덜란드의 귀족작위를 받은 이후 벨기에가 갈라져나왔지만 작위의 효력을 마찬가지로 인정해주었다.[27] 근데 웰링턴 공작위는 살리카법인데 시우다드로드리고 공작위는 스페인 법상 현재 절대장자상속제다. 현 공작의 장남의 맏이가 딸이고 둘째가 아들이라 손자대에는 두 작위가 분리될 것이다.[28] 그렇다고 글래스고 시민들이 정말로 동상을 세운게 화났다는 건 아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코틀랜드 연대도 영국군 소속으로 열심히 싸웠고, 그 중에서도 79와 92 하이랜더 연대는 워털루 전투 당시 가장 격전을 치른 부대 중 하나였다. 실제로 글래스고에서 웰링턴 공작의 동상을 부수거나 이전하자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나온적은 한 번도 없다. 이 건은 어디까지나 유머이자 장난일 뿐이다.[29] HMS 푸드로얀트는 1949년 자침, HMS 빅토리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