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발턴
'''서발턴(subaltern)'''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 [1]
1. 개념소개
서발턴이란 라나지트 구하에서 시작하여 가야트리 스피박을 통해 학계에 퍼진 새로운 개념이며 역사학계에선 포스트 모더니즘 세력들에게 받아들여진 개념이다.
지배세력과 대립하거나 저항하는 개념을 나타내는 말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개념이 그런 것들과 다른 것은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민족주의, 한국의 민중론 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란 것이다.''' 서발턴은 지배세력의 헤게모니에 접근을 금지당하고 부정당한 모든 집단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또한 이 개념은 '저항하는 집단'에 한정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도 다른 점이다. 저항하지 않고 유령처럼 다니는 모든 집단을 가리킨다.
1.1. 예시
서발턴은 한국의 민중론과도 완전 다른 개념이다. 왜냐하면 라나지트 구하가 말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2] 는 질문이기 보다는 회의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서발턴에 대한 당대의 진지한 접근은 지배층과 피지배계층, 심지어 경우에 따라선 ''당사자인 서발턴 계층''의 반발에 동시에 부딛치기 때문에 '''서발턴은 말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역사적 중요성이 커진다.
1.1.1. 제국주의 담론과 서발턴
사실 서발턴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담론에 자주 사용된다.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지의 토착문명과 부족사회에서는 처녀 인신공양이나 납치혼 같은 근현대윤리로선 합의점을 찾기 힘든 인습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지역에선 나름대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의 일환으로 작동되어 왔다. 외부인인 제3자가 개입하기 전 까진 대부분 구성원들의 합의하에 이어진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인습을 격파하는 과정에서 '백마탄 백인의 품에 구해지는 원주민 아가씨'로 재생산 되며 타칭 원주민들의 미개함을 강조하고 유럽 제국주의 질서의 정당성을 강요하는 꼴이 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에 들어서 독립을 되찾은 뒤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한 제3세계 국가의 입장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며, 과거 토착문명과 부족사회의 전통이 재평가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정작 이 과정에서 오랜기간 인신공양에 투입된 처녀처럼 이런 인습에 희생당한 이를 대변할 계급 및 세력은 남지 않았다. 이미 이들은 가해자측인 토착문명의 전통적 인습에 동조해서 자발적으로 희생당했거나, 아니면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아 철저히 서구적 사고를 가지고 전통 그 자체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그들을 대변하거나 그들의 시각을 토대로 본 역사적 사료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경우 이런 인습의 영향권 안에 있던 여성은 서발턴으로 분류될 수 있다.
1.1.2. 바다 민족과 서발턴
기원전 1206년부터 기원전 1150년이라는 50년에 불과한 시간동안 히타이트 일대 오리엔트 문명, 그리스 미케네 문명이 일제히 증발하는 일이 발생했다. 후대의 추가적인 연구 끝에 당시의 청동기 중심의 국제 무역로는 너무나도 길고 복잡했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닥친 각종 천재지변 러쉬로 대규모 유량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걸국 이 대참사 끝에 국제 무역로가 증발하고 문자가 사라지는 등의 커다란 역사적 암흑시대가 발생하기에 이르었다.
하지만 초기 역사학자들이 접할 수 있던 사료는 운 좋게 방화로 인해 잘 구워진 점토판에 남겨진 절박한 각 무너진 문명들의 구원요청과 그나마 살아남은 이집트의 람세스 치세 당시의 반복된 해양민족의 약탈기록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인 '떠돌아다니는 약탈자=당대 유량민족'들은 살아남기도 벅차 자신들의 행적을 따로 기술할 여유 및 이유가 부족했고, 초토화된 환경에서 떠돌아다니는 특성 상 그나마 남아 있었을 파편적 사료조차 수천년의 세월을 버티지 못했다. 그 결과 당대 문명의 몰락은 '''너무 야만적이라 아무 기록도 안남기고, 주변의 문명국가를 맹목적으로 유린하고 불태우는데 성공한 초대형 약탈자 부족= 바다 민족'''으로 구체화 되고 말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바다 민족으로 인식된 여러 유량민과 부족들은 서발턴의 입지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1.1.3. 용산참사와 서발턴
한국에선 "용산 참사"하면 철거민 또는 재개발측 업자측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개발에 희생되던 철거민(피지배계층)이나 특별법에 따라 서울을 재정비하려던 뉴타운 재개발측(지배계층)은 서로를 정당화할 헤게모니와 대변인, 그리고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서발턴이라는 개념은 철거민은 물론 "용역깡패"라 부르는 "철거용역"집단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철거민과 재개발측 사이에서, 직접 철거를 자행한 철거용역은 대중들의 도덕적 멸시와 지배계층의 터부를 동시에 받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들조차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냐' 라는 것 이외엔 어떠한 체계적 반론도 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행동을 수행하는 대가로 꾸준히 수익을 얻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철거용역들에 대해 제3자의 객관적 조사는 철거민의 분노와 당대 정책시행자의 제제 그리고 무엇보다 철거용역 본인들의 거부에 부딛치기 십상이다. 때문에 철거용역 집단은 서발턴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1.2. 중요성
서발턴이 말할 수 없다고 하는데 왜 역사 학자들이 굳이 이런 스스로 말하지도 않고 발언권도 없던 계층의 시각을 찾아내거나 분석하려 하는 것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다. 위에서 보았다 시피 현대 이후 역사학에선 이런 서발턴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역사가들은 그 시기 주류 시각에 왜곡된 뒤 철저한 희생양이나 편리한 도구삼아 휘둘려진 오염된 사료를 그대로 받아먹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손에 적혀진다’라는 흔한 명언 처럼, 당 대에 발언권이 없거나 스스로 발언권을 포기한 계층들은 그 시기 주류 역사가들에 의해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기술되거나 아예 언급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채 누락되기 십상이다. 만일 후세 역사학자들이 이런 뜻하지 않은 사료오염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료분석을 하게 될 경우, 해당 서발턴들은 '''밑도 끝도 모를 비이성적 & 야만적인 집단이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계몽대상 또는 좀 더 문명화된 공동체에게 구원받아야 할 희생양 등으로 오해''' 된 뒤 기존의 역사적 편견만 강화할 결론을 도출할 위험이 커지게 된다.
이 문제점을 고려하지 못한 근대 이전 전통적인 역사학은 반복적으로 잘못된 편견을 누적시켰다. 당연히 이렇게 편향적으로 해석된 역사를 받아들인 당대 지식층과 학생들은 역사에서 누락된 계층에 대해선 실수를 반복하거나 그들의 행보를 자기 입맛대로 오판할 수 밖에 없었다.그 결과 이렇게 누적된 역사적 편견들은 동양권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조공체제의 일부 또는 오랑캐로 취급하며 정권 합리화 및 체제 안정화 수단으로 사용되고, 서양에서는 당대의 주류 사회와 연공되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로 직결하는 근대의 야만으로 증폭되기에 이르었다.
결국 이런 누적된 오판의 결과중 하나로서 제국주의 및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대표되는 전세계적인 대격변이 일어났고, 그 전까지 서발턴으로 인지되던 계층(노예무역으로 유입된 조상을 둔 제1세계의 흑인 계층, 농민과 노동자, 아프리카 이남 부족사회, 여성 등)들이 사회 수면 위로 부상하기에 이르었다. 그 결과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현대에선 이런 서발턴에 따른 역사적 공백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2. 한국에서
한국에서 수입(?)된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 학자인 김택현 박사부터로 2003년에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이란 책을 내며 기존 담론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담론을 제시됐다. 그 뒤 2008년엔 김택현 박사는 라나지트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를 번역하여 정식발매됐다. 2013년에 서발턴이란 개념을 널리 퍼트린 '가야트리 스피박'의 논문이 포함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 번역돼서 정식발매하였다.
한국학계에서도 이 서발턴 개념을 적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김원 정치학 박사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에서 서발턴 개념을 적용해서 박정희 시대를 분석한 바 있다. 이 서발턴이란 개념은 3.1 운동에도 적용된 바 있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출판부에 낸 「1919년 3월 1일에 묻다」에서 일부 논문이 라나지트 구하의 책을 참고해 서발턴 개념을 적용했다.
[1] Spivak, Gayatri Chakravorty (1988). "Can the Subaltern Speak?". In Nelson, Cary; Grossberg, Lawrence (eds.).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Basingstoke: Macmillan. pp. 271–313. #[2]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의 1988년 에세이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