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민족
바다 민족(Sea Peoples, People of the Sea)
1. 개요
기원전 18세기에서 기원전 12세기경의 기록에 등장하여 당시 강대국이었던 히타이트를 멸망시키고 일대 오리엔트 문명, 그리스, 이집트를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힌 뒤 사라진 '''정체불명의 민족들이다.''' 그 자세한 참상에 대해서는 관련 링크 참조.
2. 흔적과 가설
기원전 13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엽, 그리스 본토, 키프로스, 아나톨리아, 그리고 가나안 등지의 유적에서는 대규모 파괴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성벽의 붕괴, 화재, 건축물의 파괴 흔적 등이 지중해 근처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로 이루어져 이것이 바로 바다 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결과라는 설이 나오게 되었다.
2.1. 이집트의 기록
2.1.1.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700년: 해적 루카(Lukka)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이집트 쪽의 기록에 등장한다. 그들은 다민족의 연맹체였고 주로 배를 타고 해안가에 상륙해 약탈하는 방식으로 주변의 중동 국가들과 이집트에 타격을 입혔다. 이들의 이름은 레바논에 지금도 남아있는 오벨리스크에 기록되어있는데, 가령 루카(Lukka)라는 민족의 명칭이 등장한다.
2.1.2. 기원전 14세기: 루카 용병
연대 측정에 의하면 이 기록은 기원전 20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나온다. 그 뒤 루카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의 기록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들은 아멘호텝 3세가 지배하던 시기의 왕의 편지에서 용병으로 등장한다. 또한 루카인들은 이 시기에 이집트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2.1.3. 기원전 13세기: 세르덴인의 침공과 격퇴
이들은 100년 뒤인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의 재위 때 등장한다. 람세스 2세의 재위 2년차에 이들 민족의 하나인 세르덴인들이 델타 지역을 침공하였다가 격퇴당하는 사건이 생긴다. 이들은 나일 강을 통해 배를 타고 침략하였고,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용맹과 항해술은 바다에서 견줄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람세스에게 생포당해 군대로 편입되어 히타이트 국경에 보내졌다. 그 뒤 이들은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제국이 충돌한 카데시 전투 때 등장하여 델타 부분에서 직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람세스가 카데시 전투에서의 자신의 활약을 새긴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를 기록한 10개 정도의 석조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에 따르면 람세스에게 군대를 넷으로 나누라고 조언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세르덴인들이라고 되어있다.
2.1.4. 기원전 1150년경 람세스 3세 치세: 승전
람세스 3세의 치세 중 기록된 몇 가지 문서에서, 람세스 3세는 바다 민족의 침입에 맞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이를 기념해 더이상 바다 민족은 없다며 승전을 기록했다. 해당 기록에서는 바다 민족이 해안에 침공하였으나 이집트가 강력한 방어를 구축하여 막아내고 모든 무기를 바다에 다시 내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결코 바다 민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결사적인 투쟁 중에 이루어진 사기 고취용 기록으로 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실제로 이집트는 이후 람세스 6세에 이르러 거의 붕괴에 가까운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집트 본토 바깥에 널리 뻗치던(특히 근동 지방, 가나안) 영향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집트의 개별적인 약화가 아니라 서구 후기 청동기 시대 세계 전체의 붕괴의 한 축에 지나지 않는다. 히타이트 제국과 바빌로니아 지방, 그리스가 동 시기에 다 함께 멸망했고,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에 걸친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따라서 해당 기록은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있던 이집트가 연쇄적으로 붕괴하는 국제 무역망의 타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사적으로 발버둥치던 기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후 이집트는 누비아, 리비아, 가나안 등 여러 지역에 대한 외세의 공격과 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람세스는 누비아 전쟁, 1차/2차 리비아 전쟁, 북부지역 전쟁 등에서 승리하는 등 나름 성공적으로 국가를 지켜냈지만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특히 아시아 방향에 대한 영향력 상실은 심대했다.
2.1.5. 기원전 1100년경 Onomasticon 문서 (20~22왕조): 패배
이집트 서기관인 Amenope가 기록했다고 표기된 일종의 편저작으로, 가나안의 도시 이름들을 나열하며 이집트 파라오들이 사실상 해당 도시들을 상실하고 바다 민족들에게 해당 지역을 빼앗겼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일반적인 학계에서는 이집트 역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므로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BAC) 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재미있게도 이집트 학계에서는 거부한다. 명맥이 이어진 건 엄연한데 왜 아예 대가 끊긴 문명들과 엮어서 붕괴라고 하느냐는 식이다.
3. 구성원
바다 민족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이들이 단일 민족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이집트인들은 에크웨시(Eqwesh), 테레시(Teresh), 루카(Luuka), 셰르덴(Sherden), 세켈레시(Shekelesh), 톄케르(Tjeker), 그리고 유일하게 동방(Levant) 지역에 영구히 정착한 부족인 펠레세트(Peleset)를 기록에 남겼는데, 에크웨시는 청동기 시대의 그리스인들의 명칭으로 아카이아인들이며,[1] 테레시는 에트루리아인들의 조상인 티레니아인들, 혹은 트로이(트루이샤)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 . 루카는 에게 해의 아나톨리아인들(터키 남부 지방인 리키아, Lycia의 명칭으로 남아있다),[3] 셰르덴은 사르디니아인들이고, 세켈레시는 시칠리아 섬에 살았던 시켈(Sicel)인,[4] 펠레세트는 필리스티아인들로 본다.[5] 톄케르, 또는 시칼은 크레타의 자크로스(Zakros), 아니면 페니키아의 티레(Tyre)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 이렇게 구성 민족의 후보가 다양하면서도 확실하게 답이 나오지 않고, 대부분 추측인 이유는 '''이들과 만난 문명이 이집트와 아시리아 빼고는 다 전멸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다.'''
그나마 이들조차도 간신히 살아남은 경우로 이들은 바다 민족의 주요 침공 루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 실상을 알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 두 제국에서 남겨진 기록만으로 사태를 파악해야 하니 전체적인 윤곽을 알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나마 히타이트 등의 멸망당한 문명의 점토판이 발굴되면서 점차 정보량이 증가하고 있다. 참고로 이 점토판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다 민족들이 건물을 불태우는 와중에 '''잘 구워졌기 때문이다.'''[6] 이때의 기록들을 보면 '무기로 쓸 금속이 부족하니 신전의 성물과 제기를 몽땅 녹이라'는 다급한 기록과, 동맹을 맺은 도시가 불타는데 자기 도시도 공격당하고 있어 '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기록 등으로 당시의 처절한 상황이 보인다. 위 기록 중 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기록은 채 보내지지도 못하고 작성된 도시의 폐허 유적에서 불에 그을린 채 발견되었다.
의도하지 않게 남겨진 점토 문서들의 정보량을 바탕으로 해서, 현재는 어떤 단일 민족이 침공한 것이 아니라 다민족들의 연합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루트를 통해 대이동해 왔다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고대 로마의 몰락을 불러온 게르만족의 민족 대이동처럼 처음에 이동을 시작한 민족이 침공과 이동을 거듭하면서 현지인을 흡수하고 다민족이 되어 이름만 동일한 다른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링크. 최근 발견된 3천 년 전 비석에 따르면 이들이 소아시아 지역 왕국의 연합 함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들 바다 민족들의 무기와 갑옷 등을 현대에 와서 다시 재현한 모습들을 묘사한 그림들링크링크.[7]
4. 영향
철기는 청동기보다 더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지므로 더 어려운 기술이지만, 당시 청동기는 기술이 충분히 성숙한 반면 철기[8] 는 제련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품질 면에서는 더 조잡했으며, 녹까지 잘 슬어 보관하기도 어려웠던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 여러 국가들의 멸망으로 무역이 끊겨 청동기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값싼 철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고 그 결과 청동을 능가하는 강철을 만들게 되는 등 철기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미케네 문명의 성벽과 황금 장식품이 가득한 무덤 등 찬란한 유적이 남아있으나 엄청난 인명 손실과 주요 도시들이 모두 파괴되고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한 모습을 남겨주었다. 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로폰네스 지방은 거주민의 90%가 죽거나 달아나 무인 지역이 되었고 이 무인지대를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이 차지하여 라케다이몬(우리가 흔히 말하는 폴리스 시대 스파르타)을 세웠을 지경이다. 바다 민족의 대이동이 끝난 직후 겨우겨우 살아남은 도시의 생존자들이 도시의 페허 위에 다시 거주지를 건설한 나라인 리디아를 포함해서 레반트 지역 등에 간간이 남아있었으나, 그마저도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에 점령되면서 사라졌다.
또한 국가 간, 도시 간의 무역도 완전히 끊어지고, 길마다 도적떼가 들끓었으므로 자연히 무역 활동도 없어졌으므로 문명을 복구하려는 노력 자체를 힘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무역로를 복구하려면 아직 바다를 지배하는 바다 민족부터 쓸어버려야 했다. 다시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그리스에 폴리스가 다수 발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사실 폴리스라는 도시문명이 발달하는 이유도 무역 루트가 전멸하면서 파편화된 도시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와중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선문자 B를 포함한 문자 사용도 끊어져서 역사학적 의미 그대로의 진짜 '''암흑시대'''다. 남아있는 기록이란 게 호메로스의 서사시 정도 외에는 없다. 이것도 당대에 문자로 쓰여진 게 아니라 암송을 통해 '''구전'''된 것을 후대인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가 기록한 것이다. 덕분에 지중해와 인접한 문명이 거의 괴멸 상태에 놓이면서 피해가 가장 적었던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아시리아 세력이 막강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문에 한때 이집트, 이스라엘, 시리아 등 전 근동이 아시리아의 지배에 놓였고, 다시 독립하였으나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다시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암흑기로 부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히타이트나 이집트 같은 초강대국이 멸망하거나 쇠퇴하면서 고도의 문명을 지탱하던 사회 시스템이 붕괴하였고 그 때문에 문자를 기록하고 해독할 수 있는 엘리트/사제 계층 자체가 고대 세계에서거의 소멸 수준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동기 시절동안 방대한 양의 자료를 기록하던 문자 유물들이 후기 청동기의 종말과 더불어 뚝 끊겼으며, 철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제국이 다시 사회 시스템을 회복하기까지 수백년 동안 거의 아무런 문자유물들이 남지 않을 것을 볼 수 있다. 서양인들에게 이러한 역사의 공백기는 로마 문명 멸망 후 가톨릭이 유럽을 수습하기 전까지 문화와 기술 수준이 수백년간 뒷걸음질쳤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중국의 요순시대 와 같은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같은 인간의 다섯 시대 를 묘사한 것이 문명이 붕괴하고 과거의 기록과 기술이 속절없이 대가 끊기는 종말적인 시대에서 과거의 찬란함을 추상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5. 청동기 멸망의 반대론
해양민족을 단일세력처럼 여기거나 청동기 문명의 멸망 원인으로 보는 관점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 첫 번째는 이집트 측이 말하는 '해양 민족들'의 습격이 비단 이 시기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원전 16세기 람세스 2세 시기부터 해양 민족들의 습격이 빈번했으며,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가 해양 민족에 대항하여 함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수필루리우마 2세 때는 그러한 해적들과 싸워 이기기까지 했다.
- 두 번째로 이 해적들은 '해양 민족들'이라고 단일하게 부를 수 없는 여러 지역 출신의 각기 다른 무리들이었다. 또한 '해양'이란 말이 암시하듯 섬이나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출신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킬라인들이 기원전 13세기부터 소빙하기로 인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동부 지중해 지역을 약탈해 히타이트의 식량 보급로를 위협했고, 아나톨리아 남서쪽 지역의 루카와 바다 건너 아히야와 사람들(미케네 멸망으로 떠나온 사람들이라 추측됨)도 해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루카의 해안은 기원전 21세기부터 해적들의 도피처였다는 이집트의 기록도 남아있다. 이들의 약탈 행위는 당시 전(全) 오리엔트적 현상이었고, 꼭 해안가에만 한정된 현상도 아니었다.
- 치명적인 것은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2세기경 파괴된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의 파괴 원인과 그 주체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바다 민족의 침입 근거로 알려졌던 도시들 중 일부는 바다 민족에 대한 최종 기록은 기원전 1177년 이후나, 바다 민족의 최초 침공 기록 이전에 파괴된 것으로 보이고, 일부 도시들은 지진에 의한 파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바다 민족의 침입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되어줄 유물이 너무 부족하다.
- 청동기 국가들의 몰락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수세기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다 민족에 의한 청동기 멸망설에 따르면 청동기의 몰락은 바다 민족의 등장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고, 바다 민족의 4침략을 받지 않은 도시들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야 하는데, 기존의 이론으로는 바다 민족이 사라진 이후에도 다른 청동기 국가들이 몰락한 원인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이미 람세스 2세 이전부터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은 가뭄이 시작되어 있었다. 람세스 2세 치세 때는 히타이트에서 빈번한 가뭄으로 인해 이집트에 곡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고, 람세스 2세도 '히타이트와 바빌로니아의 생명은 자신에게 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렇게 각지에서 흩어져 나온 해양 민족이라고 여겨지는 집단들은 터키가 아닌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팔레스타인 등 각기 다른 곳에 정착했다. 이는 기원전 3세기 "켈트족 대이동", 기원후 3세기 "게르만족 대이동", 8세기 "바이킹족 대이동"과도 유사한 경우로 볼 수 있다.
미국의 고고학자인 Eric H. Cline 교수는 청동기 국가들의 몰락은 어느 한 가지의 드라마틱한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청동기의 쇠퇴에 있어서 바다 민족의 이동은 단지 여러 원인 중 하나일 뿐이며, 근동의 청동기 국가들의 몰락은 전쟁이나 기후 변화,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의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6. 바다 민족의 영향
오랜 시간 많은 고고학자들의 연구와 발견, 등에 따르면 바다 민족이라는 이들이 미케네나 히타이트 등 동지중해 문명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게 다수이다. 왜냐하면 '바다 민족' 또는 '해양 민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침략은 그 전부터 있던 일이고, 아무리 이들이 강력하다고 해도 이들만의 힘으로 문명들을 모조리 아작낸 것도 모자라 미케네에는 약 400년간의 암흑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은 약간 지나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케네 문명 같은 경우에는 선무적 사상과 지나친 호전성이 극에 다다라 휘청이는 시기였고, 히타이트의 경우에는 카데시 전투 이후 이집트와 신흥 강대국 아시리아에게 밀려 약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며, 크레타의 경우에는 진작에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히타이트와 크레타, 미케네의 몰락은 원래부터 예정된 것이었으며, 바다 민족은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겼다는 것 외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다는 것.
물론 듣도 보도 못한 해적에 가까운 민족이 저지른 일이라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약화일로를 걷고 있었다고 해도 당시 히타이트는 여전히 인구 120만의 대제국이었고, 미케네 문명의 경우 힘을 길러 히타이트의 세력권이었던 윌루사('''트로이''')를 공격해 정복하는 등 제법 힘좀 쓰던 문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 판도를 본다면 히타이트는 자멸하거나 이집트, 아시리아에게 격퇴될 것이 자명했으며, 미케네의 경우에도 윌루사 정복 이후 힘이 한 풀 꺾여 이렇다 할 정복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바다 민족이 문명을 몰락시키고 암흑기를 가져올 수 있었던 건 시기가 맞았기 때문이지, 이들이 엄청나게 막강하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바다 민족이 히타이트의 최전성기였던 기원전 14세기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에 쳐들어 왔었다면 바빌로니아까지 발아래 둔 히타이트의 막강한 군대에게 가루가 되어버렸을 것이고, 미케네의 최전성기였던 기원전 15세기경 크레타-미케네 전쟁 당시에 쳐들어왔었다면 압도적인 미케네의 호전성에 패퇴했을 것이다.[9]
따라서 바다 민족이 지중해 문명의 멸망에 끼친 영향은 시발점이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복합적인 부담 요소로 작용했거나 나아가서는 청동기 쇠퇴기의 사회혼란 자체가 인구 대이동을 촉발하고, 침략민이 난민을 불러일으켰으며, 난민으로 인한 소요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모든 종류의 집단을 통틀어 결과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7. 창작물에서의 묘사
반론들도 많지만 당대 지중해의 초강대국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그 일대를 초토화시켰다는 행적 때문에 후대엔 훈족처럼 '문명의 파괴자'라는 상징성과 속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스타워즈 레전드에 등장한 외계 종족 유우잔 봉은 바다 민족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되었는데 그 모티브에 걸맞게 스타워즈 세계관의 은하계를 초토화시키고 신 공화국을 멸망시키는 업적을 달성한다.
SCP재단의 세계관에서는 사르킥 숭배의 전신이 바다 민족이라는 설정이다.
[1] 그러나 이집트 쪽의 기록에 따르면 훗날의 그리스인과 달리 할례 풍습이 있었기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만약 그렇다 해도 히타이트 문헌에서 윌루샤 침공과 소아시아 해안 약탈이 언급된 아히야와(Ahhiyawa)는 정황상 아카이아가 거의 확실하므로, 청동기 말기 해적집단들 중 그리스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대로지만.[2] 이 추정이 사실이면, 히타이트의 일부는 자기들을 멸망시킨 이들에 동화되었다는 뜻이 된다. 트로이는 히타이트계 도시 국가들 중 하나인 '윌루샤(Wiluša,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선 일리오스Illios로 지칭)'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리아스에서 보듯이 트로이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바다 민족들에게는 상당히 든든한 동맹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기록에 원래 아나톨리아 반도는 바다 민족계 해적들의 은신처로 자주 애용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므로, 히타이트가 이들을 용병 내지는 사략함대로 써먹다가 통수맞았거나(...), 트로이같은 휘하의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 이들과 결탁해서 배신을 때린 것에 당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3] 멸망한 히타이트 제국의 유민들이다.[4]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으로 추정되며, 라틴어를 포함한 현대 로망스어군의 먼 친척뻘 되는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된다.[5]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원은 불명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가나안 등 셈어파 화자들과 교류하다 셈족화하였는지 셈계 언어로 써놓은 비문만 남아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인명과 출토된 공예품 등을 통해 본래 그리스와 관련이 깊은 민족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구약성서의 사무엘기에 뻔질나게 나오는 블레셋인들이 바로 이들로, 아모스서에선 이들이 캅토르(보통 킬리키아, 키프로스, 크레테 등 지중해 북동부 연안으로 비정)에서 기원했다고 쓰여있다. [6] 점토 제품을 초벌구이한 테라코타만 봐도 단순 건조 과정만 거친 점토 제품이나 생 점토보다 훨씬 보존성이 좋은 것을 알 수 있다.[7] 위에서 8번째 그림은 구약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을 벌이는 모습을 묘사한 삽화인데, 블레셋인들은 그리스~소아시아 근처에서 기원했으리라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골리앗이란 이름을 그리스의 칼리아데스, 카리아의 울리얏 등 인명과 연관짓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8] 하투사스(히타이트)의 한정된 고급 철기만이 청동기와 비견할 수 있었다.[9] 이 점은 중세 초기의 바이킹의 경우와도 같은 부분이다. 바이킹의 발흥 시기도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혼란을 겪었고, 프랑크 왕국이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으로 분열되어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