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춘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1996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서춘은 1894년 11월 24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고등사범학교 박물학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이후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재학하던 중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9년 1월 도쿄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선독립단의 공동 대표를 맡아 2.8 독립선언서 발표를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금고 9월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토요대학 철학과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한 그는 1920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강연회의 강연단원을 맡아 부산, 동래, 김해 등지에서 강연했다. 1926년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한 그는 1926년 10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경제부장과 조사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언론매체에 경제 시평과 해설, 강연 등의 평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8월 조선일보사로 옮겨 주필 겸 경제부장을 지냈고, 1934년 12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조선일보 주필을 맡았다. 조선일보사에서도 경제 관련 기사를 집필하고 경제 관련 강연에 연사로 활동했다. 그는 이 시기 민족운동단체와 사회운동단체의 강연회 연사로 초빙되거나 직접 참여했다. 1927년 7월 근우회 학술강연 연사로 선임되었고, 1928년 7월 조선농민사교양부가 주최한 농촌문제 대강연회에서 '농민의 지식 계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29년 4월, 서춘은 출판노동조합이 주최한 신춘대강연회에 연사로 선정되었고 5월에는 평양상공회의소가 주최한 경제강연회에 참석했으며, 11월에는 중앙청맹이 주최한 강연회에 연사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34년 5월 조선물산장려회 선전부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1920년대에는 조선인의 경제적 삶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피폐해져 간다는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했지만, 1930년대에는 조선 경제의 계량적 발전에 주목하며, 자본주의 발전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수정과 계획을 중시하는 통제경제론을 선호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적을 벌인다. 1937년 1월 방송교화선전협의회 강사를 맡았고, 7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주최 시국대응강연회 연사, 8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시국강연반과 방송반 강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남경함락 전첩(戰捷) 봉고제’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8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후원을 위해 결성된 목요회에 회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 징병, 의무교육, 총동원 문제로 민간 유지들이 군부와 조선총독부 당국에 문의하는 형식의 좌담회에 참석했으며, 같은 해 5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참사를 맡았고, 6월 조선문학사 사장에, 7월 친일단체인 배영동지회 평의회에 선임되었다. 그해 7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기관지 <총동원>의 편찬의원을 맡았으며, 8월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주최하는 '국민정신 선양 각 도 순회 강연반' 연사를 맡았다.
1940년 1월 조선문화사가 발행하는 잡지 <태양>의 창간사에서 간행 목적을 "신동아 건설 및 내선일체의 구현에 관한 신이론 체제의 창설 확립, 건전한 사상의 양성, 개인 위인의 배출 조성, 시비선악의 준별"이라고 밝혔다. 또한 1940년과 1941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중견청년수련소 강사로 활동했으며, 1940년 8월 평양경제구락부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전시경제와 국민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0년 9월부터 1942년까지는 매일신보사 주필을 지내면서 시국강연 강사로 활동했다.
1940년 10월 <군관민 유지에게서 조선의 신체제와 지도자와 민중 문제를 말한다> 좌담회에 참석했고, 국민훈련후원회가 주최한 '반도 신체제 좌담회'에 참석했다. 그해 11월 매인신보사가 주최한 전국순회시국강연반에 강사로 참여했으며, 1941년 1월 매일신보사 주최 신춘 경제 대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국민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또 그해 2월과 3월 평안북도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활동을 매일신보사 평양지국에서 후원하기 위해 순회강연단을 조직할 때 매일신보사 주필 겸 국민총력조선연맹 간부로서 연사로 참여했다.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상부 참사와 선전부 이사를, 3월 국민연극연구소 강사를,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출판부문 연락계를 맡았다. 1941년 7월 중일전쟁 4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성전 4주년' 기념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총후 국민의 진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0월에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0월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하는 시국선전강연회의 연사로 함경북도 어내진, 길주, 명천, 성진, 청진 등지에서 강연했다.
1941년 11월 지원병 보급선전대 강사를 맡아 지원병제도 취지 보급 강연회에 참석하여 강연했으며, 1942년 5월 인문사에서 창립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징병제 실시 기념논문'을 현상 모집할 때 심사위원을 맡았다. 1943년부터 매일신보사 주필로서 취체역을 겸임했으며, 그해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문화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정익찬회를 모방하여 경성익찬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그 산하 종로익찬위원회의 호별방문대에 참가하여 조선 학생들에게 군대 지원을 직접 권유했다.
1943년 11월 조선문인보국회와 재경잡지사가 공동 주최한 출진학도격려대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강연했다. 이렇듯 친일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던 그는 1944년 4월 5일 매일신보사 주필로 재직하던 중 간암으로 사망했다.
1963년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도쿄에서 시위를 벌인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면서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유족들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를 이장하라는 요구를 오래도록 거부했다. 그러다 2004년 6월 5일 국립현충원 측과 시민단체가 서춘의 묘비를 철거하자#, 결국 유족은 서춘의 유해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데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