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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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11대 군주. 휘는 우위거 혹은 위궁. 위궁은 진수의 삼국지를 따른 것인데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본 것이 증조부인 태조대왕과 닮았기 때문에, 그의 휘인 궁(宮)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3] 아명은 교체(郊彘). 교제(郊祭, 제사)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다.[4]
삼국사기에서는 동양왕(東襄王)이라는 다른 존호도 전한다.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소후인 후녀이며 후녀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213년에 태자로 책봉된 후, 227년 5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1년간 재위하였다. 참고로 동천왕 시기부터 부자 세습이 확립되기 시작한다.[5] 중천왕(동천왕의 장남) → 서천왕(중천왕의 차남) → 봉상왕(서천왕의 장남) 순으로 부자간의 세습으로 이어진다. 그후 봉상왕 → 미천왕은 질백간의 세습이지만[6] 미천왕 이후 아들 고국원왕부터는 모두 직계로 세습되어 쭉 그의 후손들이다.
2. 성격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의붓어머니인 왕후 우씨가 궁녀를 시켜 일부러 뜨거운 국을 그의 옷에 엎지르게 했는데도 궁녀에게 벌을 내리지도 않았고, 다음 번에는 왕후 우씨가 동천왕이 아끼는 말의 갈기를 잘라버리게 하자 말을 쓰다듬으면서 "말이 불쌍하구나."라고만 했다고. 심지어는 즉위한 이후에도 계속 왕후 우씨의 괴롭힘에 시달렸는데 동천왕은 오히려 우씨를 왕태후로서 모시기에 이른다. 고구려 시대에 있던 진정한 대인배 본좌인 임금이었던 셈.
그런데 이것은 동천왕의 착한 본래 성격도 있었겠지만 성씨도 전하지 않을 만큼 한미한 집안 출신의 소후 소생인 동천왕이 고국천왕의 왕후이자 산상왕을 스스로 선택해서 왕위에 앉혔으며 왕후가 될 만큼 여걸이었던 왕후 우씨에게 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권력의 오묘한 역학 관계 때문인 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천왕의 친어머니 후녀는 삼국사기에는 '주통촌의 여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유력가가 아닌 일개 촌에서 살던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니 자연히 동천왕 역시 행동 자체를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수틀리면 반대 세력이 "촌 출신이 설친다."라며 들고 일어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승하하자 따라 죽으려고 한 사람들 역시 많았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신민들에게는 꽤 존경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적어서 그렇지 당시에는 성군으로 제법 존경받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동천왕이 단순하게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며 번영시킨 타입의 성군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저런 존경심은 괴이해 보일 정도이다. 동천왕은 재위 말기, 그러니까 죽기 2년 전에 위나라한테 괜시리 선빵을 쳤다가 역관광을 당해서 수도인 국내성-환도성까지 털리고 동천왕 본인도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어찌저찌 위나라군이 물러나면서 살아남았다.
한마디로 임금 한 사람의 오판으로 나라가 망할 뻔했는데 위나라가 물러가고 나서 동천왕이 승하할 때까지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동천왕이 고구려에서 전국적인 지지도를 회복했다는 뜻이 된다. 자기 나라의 왕이 옆나라 선빵쳤다 되레 털려가지고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결국 지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라가 망할 뻔했다. 그런데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왕이 승하할 때 다수의 신하랑 백성들이 임금의 뒤를 따라 자살했다는 것이다. 동천왕이 그전에 쌓아온 인덕이 워낙 컸거나 아니면 전후의 수습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 금방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이때 관련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나 역사학 연구가 되어서 동천왕의 내정 관련 자료가 더 발견된다면 평가가 올라갈 가능성도 꽤 높다.
일단 위나라와의 전쟁 부분에서 밀우와 관련해서는 밀우가 자신을 구하다 다치자 직접 다리에 눕혀 돌보아주었다는 점을 보면 아랫사람을 잘 봐주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역시도 정치적인 면이 있었을지도.[7]
3. 내정
재위 4년째 되던 해, 국상 고우루가 사망하고 국상의 자리에 명림어수를 앉혔다.
4. 외교
4.1. 위나라와 충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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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초기에는 위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 했는데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사신들을 잡아 가둬버렸다. 이 사신들 중 일부가 탈출하여 도망친 끝에 고구려까지 왔는데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하고 보물과 호위 무사(조의라는 언급이 있음)를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돌아오자 손권은 기뻐하며 공손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시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손권이 동천왕을 흉노 선우로 책봉한다. 하지만 234년에 위(魏)나라와 화친하고 236년에는 오왕(吳王)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를 처형한 뒤 목을 보냈는데 이는 오나라 사신들이 연나라에서처럼 통수맞을게 겁나 인질을 잡으며 행패 부린 점이 한몫했다. 238년에는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지원하기도 했다.[8] 허나 이것은 위나라를 정탐하려는 다른 꿍꿍이로 벌어진 것이었는데 실제 공손연의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악화 일변도를 걷게 된다.
238년 시기의 중국은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삼국시대로 촉한의 제갈량이 사망(234년)한 직후의 시점이다. 다시 말하면 위나라의 기세가 점점 오르던 시기였다는 것. 조예는 239년에 죽고 위나라가 촉한한테 개털리는 낙곡대전은 244년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동천왕과 관구검이 충돌하던 시점은 위나라의 최고 전성기였던 것. 특히 고구려는 공손연 토벌을 지원하고도 위나라한테 받은 보상이 하나도 없다보니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242년에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에 분노한 위나라는 244년 8월 유주 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시기는 244년 4월 낙곡대전에서 위나라가 촉한한테 개털린 직후였는데 당시 위나라 최대의 척신인 조상이 대대적으로 촉한을 침공했음에도 실패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 처음에는 고구려가 관구검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에 들뜬 나머지 관구검을 추격하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처참하게 역관광을 당했다. 당시 전사를 다루고 있는 많은 책들에서는 동천왕이 "기병 > 보병"이라는 생각에 빠져 위나라 보병들의 기병에 대한 전법을 몰랐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당시 도읍이었던 환도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고구려는 평화 시기에는 평지성인 국내성, 전시에는 산성인 환도성을 도읍으로 했는데 이 둘이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환도성을 내줬다는 건 사실상 국내성도 내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245년 재차 관구검이 밀고 내려오자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망쳐야 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동천왕을 추격하였는데 246년에 이르러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위나라의 장수[9] 를 죽이고 역습을 가해 왕기의 위나라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유유는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군에 제공하고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라고 제안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과 함께 동귀어진했다. 하지만 환도성으로 돌아오자 성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어서 도읍을 임시로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으며 태자인 중천왕이 왕위에 오르고서야 다시 국내성으로 환도했다. 이 평양성이 평양에 있는 대성산성이라는 주장 등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10] 동천왕 때 큰 피해를 입은 고구려는 70여 년 후 위나라의 뒤를 이은 서진이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미천왕 시기인 313년에 비로소 서안평, 낙랑군 등을 공격해 싸그리 집어삼키면서 확실히 앙갚음하게 된다.
248년 신라와 화친했고[11] 그 해에 동천왕이 승하하자 신하나 백성들이 크게 슬퍼한 나머지 동천왕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후임 중천왕은 이것은 예가 아니라고 금지했지만 결국 장례일에 장지에서 왕을 따라 죽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때 백성의 시신들을 죄다 땔나무로 덮어버려서 동천왕릉이 있는 곳을 땔나무 시(柴)를 써서 시원(柴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아들인 중천왕이 왕위에 올랐고 아버지의 수난에 빡친 중천왕이 위나라 소속의 선비족 군대가 침공해왔을 때 양맥 전투에서 이를 물리치고 선비족 8천여 명의 수급을 베어버리면서 아버지인 동천왕의 원수를 제대로 갚았다.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임금이 예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금하였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을 시원이라고 이름하였다.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삼국사기》 동천왕 22년(서기 248년)조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태왕북벌기의 담덕으로 패러디된다. 너그럽지만 의외로 싸움은 잘한다나. 그리고 최훈은 위나라가 낙곡대전에서 왕평에게 처발린 걸 숨기기 위해 관구검을 높이 띄워줬다고 평했다. 물론 이건 최훈의 개인 설정으로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관구검 열전에서 언급이 되었다. 맹획, 답돈, 호주천, 히미코 등 삼국시대에 중국과 엮인 적 있는 주변국 군주들이 장수로 많이 등장하는 게임이지만 아직 동천왕 및 고구려 장수가 등장한 삼국지 시리즈는 없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동천왕 본기'''
一年夏五月 동천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단행하다
二年春三月 우씨를 왕태후로 삼다
四年秋七月 명림어수를 국상에 임명하다
八年 조위가 사신을 보내오다
八年秋九月 태후 우씨가 죽다
十年春二月 오의 손권이 사신을 보내오다
十一年 조위가 연호를 개정한 것을 축하하다
十二年 조위를 도와 공손연을 공격하다
十六年 서안평을 공격하다
十六年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사면을 실시하다
十九年春三月 동해의 미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다
十九年冬十月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二十年秋八月 위의 유주 자사 관구검이 침략해오다
二十年冬十月 위의 관구검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二十一年春二月 평양성을 쌓고 천도하다
二十二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오다
二十二年秋九月 동천왕이 죽다
7. 기타
2000년대 중반 동천왕 벽비, 동천왕 양위 벽비라는 정체불명의 유물이 나왔지만 전부 위작으로 밝혀져서 사료적 가치는 없다. 동천왕 11년명 벽비, 또다른 자료. 애초 근래 이전에 사용되지 않는 한자가 쓰인 점을 미뤄보면 20세기에 조작된 걸로 추정되고 있다.
[1]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차피 고구려어 이름을 한자로 가차한 이상 연우보다는 우위거가 위궁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지만, 삼국지의 기록을 인정할 경우 고국천왕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삼국지에서는 차대왕의 존재도 누락되어 있기에, 고국천왕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삼국지에서 동천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이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동천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이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산상왕 본기에는 산상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이라 한다. 이 무슨...[2] 아명(兒名).[3] 그런데 이 내용은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 기록에 똑같이 나와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는 산상왕의 이름을 연우 또는 위궁이라 한다. 정작 산상왕의 다른 이름인 이이모란 이름은 고국천왕 즉위년 기록의 주석에 딸려있다.[4] 달아난 제사에 쓸 돼지를 후녀가 잡아줬고 이를 들은 산상왕이 후녀와 만나 후녀와의 사이에서 동천왕을 낳았다. 그래서 교체는 한자 뜻 그대로 '들돼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5] 사실 부자 상속이 정해진 시기는 이보다 전대인 고국천왕 때였으나 고국천왕 본인부터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승하한 탓에 또 한 번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져 동천왕의 부왕이자 고국천왕의 셋째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를 이었다.[6] 이는 봉상왕은 폐위된 군주이며 미천왕이 추대되었기 때문이다.[7] 일단 실제로 동천왕의 목숨을 구해준 밀우와 밀우를 구출한 유옥구는 식읍을 받는 것으로, 위나라 장수와 동귀어진한 유유는 유유의 아들 다우가 대사자로 임명되는 것으로 보상받기는 한다. 이는 기본적인 논공행상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못해 말아먹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동천왕에게 기본적인 정치력은 있다고 봐야 할지도.[8] 신채호는 수만(數萬)여 명이라고 주장하였다.[9] 왕기는 고구려 침공 이후로도 활동하기에 이 때 죽은 위나라 장수는 왕기의 부하로 추측된다.[10] 일단 우리가 아는 평양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그 당시 그 지역은 낙랑군의 영역이었던 데다가 이름도 평양이 아니라 조선현(朝鮮縣)이었다.[11] 245년 10월 신라 북쪽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