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1. 원삼국시대 한강 이남에 있던 '대한'의 어원이 된 세 국가
1.1. 개요
1.2. 한의 의미
1.3. 중국의 기록
1.4. 야요이와의 연관성
1.5. 삼한정통론 또는 마한정통론
1.6. 용어 사용사례
1.7. 삼한시대 문화재
1.8. 교과서내의 내용
1.9. 같이보기
1.9.1. 정통론 목록
1.9.1.1. 한국
1.9.1.2. 중국
1.9.1.3. 일본
1.10. 둘러보기
2. 삼국시대 '세 나라'의 의미
2.1. 개요
2.2. 용어 사용사례
2.2.1. 한국
2.2.2. 일본
2.3. 같이보기
3. '한민족, 국가, 문화권'의 통칭
3.1. 개요
3.2. 용어사용 사례
3.3. 기록
3.3.1. 금석문
3.3.1.1. 한국
3.3.1.2. 중국
3.3.1.3. 일본
3.3.2. 서지문
3.3.2.1. 한국
3.3.2.1.1. 고려사
3.3.2.1.2. 조선왕조실록
3.3.2.2. 중국
3.3.2.3. 일본
3.3.2.3.1. 일본서기
3.4. 삼한갑족(三韓甲族)
3.5. 같이보기


1. 원삼국시대 한강 이남에 있던 '대한'의 어원이 된 세 국가




1.1. 개요


[image]
각 숫자는 마한, 진한, 변한 문서 참조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쪼개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 서문 中


'''삼한'''(三韓)은 고대 한반도에 거주하던 농경민족으로 고대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반농반목 수렵민족인 예맥(濊貊)족과 함께 현 '''한민족'''의 주류 조상이되는 한(韓)족의 나라들을 말한다.
삼한이라는 개념의 시작은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에서 쫓겨난 준왕이 새로 자리잡아 왕에 오른 한(韓), 혹은 진국(辰國)에서 나뉘어진, 고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서 형성된 소국들의 연맹체인 마한, 진한, 변한 등이 탄생하면서 시작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편의상 3개의 국가로 분류하지만 실상은 각 문서 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수많은 소국이 난립하고 있었으며, 같은 정체성으로서 서로 단결할 때도 있었고 서로 열심히 싸우기도 하며 서로 세력을 넓히려고 했던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마한 54개, 진한 12개, 변한 12개로 흔히 통칭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라 개수와 목록의 근거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인데, 목록을 자세히 보면 당시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가 쉬운, 서해남해 바다에 인접한 지역 위주이다. 따라서 한반도 내륙에도 여러 성읍국가가 있었는데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국립청주박물관은 2019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충북 지역에서도 1~3세기 마한계 소국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면서 충북지역 소국들이 삼국지 기록에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고고학 연구를 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관련 유물이 나오다보니 학자들조차도 몇 개인지 모른다고 쓰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마한 목지국의 왕을 진왕이라 불렀다는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고 마한 내 소국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각자 소국들의 크기는 지금의 , 한두 개, 커봐야 몇개 정도 묶어놓은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된 국가라기보다는 성읍 국가나 지역들의 연맹체에 가까운 형태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연맹이라는 것도 거대 국가인 중국이나 한반도 북부 지역과의 교류에 있어 그런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지 내부의 국가들끼리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포상팔국의 난이 대표적. 따라서 원삼국시대의 삼한이 생겨난 시기는 한국사판 춘추시대[1]라고도 볼 수 있으며,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수수께끼의 나라들이다.
사서에 따르면 진국(辰國)에서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 졌다고 하지만 진국이라는 실체는 불분명한 측면이 많아 잘 인정되지 않으며, 마한과 진한, 변한의 각 나라들은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온조가 남하했을 때에도 긴 시간 동안 마한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고 보고 있고(최대 5세기 ~ 6세기에도 전남 지방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존재), 수혈식 고분과 석곽 등을 볼땐 마한, 변한, 진한은 상대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서로 비슷한 양식과 문화를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진한과 변한은 서로 거의 비슷한 문화 양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명확한 구분도 불가능하다.
대체적으론 '''마한백제의 남하로 인해 백제국에 병합되고, 변한은 후에 가야로, 진한은 후에 신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다만 이렇게 말하면 마치 금세 일어난 일 같지만 '''이들은 실제로 백제와 신라의 건국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그 세력이 남아있었다'''. 교과서에서도 잘 다루지 않으니[2]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신라와 백제는 현재 쉽게 접하는 삼국시대 지도처럼 건국하자마자 한반도 동부와 서부를 다 가진 그런 영토 국가는 아니었다.
가령 신라는 맨 처음에는 수많은 진한 지역 소국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는데, 신라만 해도 경주에서 말 그대로 바로 옆인 울산, 안강, 영천에도 각자 우시산국, 음즙벌국, 골벌국이 존재했을 정도니 초기 신라(사로국)가 얼마나 작은 나라였는지 알 수 있고, 이후 이런 작은 나라들을 하나하나 연합하고 복속해나가면서 경상도 일대, 나아가 충청도와 강원도 등 바깥까지 지배하는 영역국가 신라가 된 것이다.
백제 역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는 백제가 건국된 이후 곧 마한을 복속시켰다고 나오나, 고고학 연구 상으로는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자치력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7차 마지막 개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 추정이 공식적으로 삽입되어, 마한이 천안, 익산, 나주 등을 중심지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사실과는 또 거리가 있다. 실제로는 백제국이 천안 청당동에 위치한 목지국을 타도하고 목지국 대신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으며, 이후 왕도에 가까운 소국들부터 서서히 자치권을 빼앗고 직접 지배로 전환했던 것이다. 물론 한강변의 백제에서 거리가 먼, 지금의 충청-전라 지역의 마한 소국들은 공납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스렸다. 마한의 중심지는 때문에 정확하게 굳이 따지면 결국은 백제국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되 독자적인 운동력을 잃지 않은 만만찮은 소국들이 익산, 나주 등지에 있었던 것인데, 그 소국들마저 백제의 강력한 견제 탓에 일정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못한 정황이 고고학적으로 관찰되며, 거리가 상대적으로 백제국과 멀었던데다 본디부터 부강했던 나주의 신미국조차도 최전성기에조차 전남의 1/3밖에 통할하지 못했을 정도다. 독자 세력이니 뭐니라고 하기엔 쑥스럽고, 아예 한동안 신라, 백제 등과 대등한 외교/경쟁 상대였던 가야와는 물론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 마한 같은 경우 워낙에 영역이 넓고 독자적 수계도 다섯이라, 목지국 같은 맹주격 국가가 있었고 수많은 마한계 소국들이 연맹체로 있거나 세력을 넓히거나 하였는데 어떤 식으로 밀려나고는 최고(最古) 사서가 삼국사기밖에 남아있지 않는 등 기록이 워낙 일천해 알기 어렵다. 하지만 백제 고이왕 시기에 통역 오류로 인해 마한과 한군현이 정면으로 충돌한 기리영 전투의 기록에 따르면 대방태수가 전사하는 등 일부 소국들은 상당한 세력을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신분활국이 주로 임진강에 소재한 북부 마한 소국들의 리더였던 걸로 추정되는데 한군현의 반격으로 신분활국은 아예 멸망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문구에 예인(穢人)들과 함께 나오는 한인(韓人)들이 바로 삼한인(三韓人)들이다.
삼한은 각각 백제, 신라, 가야로 판도가 정리되어 북쪽을 장악한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만들게 된다. 사실 고구려도 처음엔 압록강 중류 척박한 산악지역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해[3] 부여나 낙랑, 옥저 등을 전부 정리하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고구려가 될 때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4] 이 무렵 백제는 이제 막 목지국을 밀어내고 맹주국이 되어 경기도나 겨우 추스르는 수준이었고[5] 신라는 겨우 경주시 및 경북 동부 일대나 다스리는 부족 국가 수준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한사군, 마한, 가야를 병합하면서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하는데 고구려는 4세기 초(314년)에 이미 이 임무를 끝냈지만 백제와 신라는 각각 6세기 초(520년경), 6세기 중후반(562년)에서야 이걸 끝낸다.

1.2. 한의 의미


삼한의 한(韓)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마찬가지로 당시 그 지역에 사는 집단들을 일컬어 부르는 명칭의 음차(音借)이다. 빌릴(借) 음(音)에 해당되는 한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신라, 고구려, 백제와 달리[6] 원삼국시대의 삼한은 거의 대부분 스스로 음차 한자를 선택할 수 있을 만큼 한자 문화가 흡수되기 전에 멸망했다.
음차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의 원래 발음 및 의미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음차자를 스스로 선택하든 중국의 음차자를 쓰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 나라도 학자들의 수많은 가설만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 완벽하게 정확히 밝혀진 건 없다.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가설로는 다음과 같다.
1. '우두머리' 및 '지도자'를 뜻하는 '(干, 刊 등으로 표기)'과 같은 단어라는 설
2. '큰(크다)'의 고어인 '한'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국내외 일부 학자들은 한국 한자음 연구를 통해 고대 한국어 시기에 /k/와 /h/의 구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1과 2가 결국 같은 말이었을 가능성도 생긴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거서간, 마립간 등의 '간'이 이 '한'과 연관이 있다는 첫 번째 가설을 제시했으며, 더 나아가서 이것이 몽골어의 '(khan)'과 연관이 있고, 최종적으로는 원시 튀르크어족의 '가한'으로 거슬러간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1.3. 중국의 기록


삼한은 연대가 일러 고대사가 부실한 한국 사서의 현황 때문에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 그래서 서지학적 관찰은 중국 사서들에 곁다리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후한서 동이전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 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嚾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학계에서는 이를 지게로 해석한다.[7]
그리고 삼한 소국의 지배자는 신지라 하는데 그중 일부에 호칭을 더한다고 쓰여 있으며, 삼한을 대표하는 목지국 진왕 이외에도,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사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부례(濆臣離兒不例) 구사진지렴(狗邪秦支廉)" 즉 (해석에 따라 조금 차이가 나지만) 신운국의 견지보, 안야국의 축지, 분신리아국의 불례, 구야국의 진지염이 있다라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각각 마한의 신운신국(전남 지방의 침미다례국), 신분활국(백제 이전 경기 북부에서 가장 강했던 나라로 봄), 변한의 구야국(금관 가야의 전신), 안야국(아라 가야의 전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백제와 신라가 흥하기 이전에도 각 지역별로 나름 주변 지방에 영향을 미친 강성했던 나라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이러한 나라들의 발전이 3세기경 있었는지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 문제이다. 대표적으로 안야국)

1.4. 야요이와의 연관성


고고학적으로 야요이인들은 한반도 남부에서 도래한 민족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삼한은 지리적으로 왜와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형성되었고, 고대 일본에서 왜의 기원과 삼한의 기원이 같다고 기록된 책을 간무 덴노가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을 보면 언어도 풍습도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말갈의 전신 읍루가 부여와 이웃동네라도 언어도 문화도 달랐듯 한반도 남부에서 삼한과 함께 발생한 다른 민족이 일본으로 도래했을 가능성 역시 있다. 당시 한반도 하나만 봐도 고구려, 진, 예, 옥저, 낙랑국, 삼한 등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있었지만 석기, 청동기, 철기는 비슷한 편이었고 도래인인 야요이인도 이는 거의 비슷하다.

1.5. 삼한정통론 또는 마한정통론


삼한정통론 참조

1.6. 용어 사용사례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8]

에 드날렸다.

부여융 묘지명, 682년

부여융 묘지명을 보면 굳이 삼한과 함께 예맥을 따로 구분하였다. 양맥은 두 예맥족이란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뜻한다. 만약 신라도 예맥으로 본다면 양맥이 아닌 삼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맥이라고 하였다.그러나 이당시로 가면 고구려 백제 신라를 묶어 삼한으로 호칭하였기에 오늘날의 지역구분 처럼 삼한이란 집합속의 소집합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요나라가 국서에서 숙종을 언급할때 삼한(三韓)과 오부(五部)의 주인으로 불렀는데 오부란 고구려의 비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 계루부를 의미하여 곧 고구려의 지배계층을 뜻한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배하는 고구려 지배계층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7. 삼한시대 문화재



1.8. 교과서내의 내용


  • 마한: 처음에 고조선을 공부할때 진국의 언급이 마한의 등장을 암시한다. 54개국이 있었다라는 내용은 잘 나오지 않으며 마한의 소국중 백제가 있었다는 것만 주로 다뤄진다. 그나마 삼한 중 유일하게 목지국이 초기 마한의 맹주로 언급되는데 백제 8대 고이왕에게 멸망당했다고 되어있다.
목지국 이외에는 침미다례 등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친 나라도 일체 나오지 않는다. 삼한 중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적혀있기라도 한데 13대 근초고왕이 4세기 중반에 마한의 남은 세력을 병합했다 라고 나온다. 물론 이 내용은 오직 문헌학적 내용이며 고고학과는 관련이 없다.
  • 변한: 12개 나라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으며 변한의 땅에서 가야가 일어났다 와 철이 많았다 가 끝이다... 양은 진한과 비슷하지만 왜곡이 없다는 점에서 그나마 낫다.
  • 진한: 왜곡이 매우 심하다. 진한의 소국중 하나인 사로국이 후에 신라가 된다 는 내용까지는 괜찮으나...
그 이외에는 일체 언급되지 않다가 신라 17대 내물 마립간에게 멸망당한다는 내용이있다. 이게 왜 심각한 문제냐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대 탈해 이사금의 우시산국 병합을 시작으로 5대 파사 이사금 때 이미 진한 12개국 중 7개 나라를 차지한다! 12대 첨해 이사금에 이르면 이서국을 제외한 모든 진한의 나라는 이미 신라에 멸망했으며 이서국마저도 14대 유례 이사금때 멸망한다. 한마디로 내물왕이 진한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해서 고고학적으로 보는 것도 아닌게 고고학적으로 보면 5세기 중후반까지도 진한의 자취가 남아있다.[9] 한마디로 이도저도 아니게 교과서에서 이상하게 왜곡한 것이다.
  • 문화: 소국을 다스리는 군장으로 신차,읍차 등이 있고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소도를 다스린다는 것, 5월과 10월에 제천 행사가 있다는 내용정도가 있다.

1.9. 같이보기



1.9.1. 정통론 목록



1.9.1.1. 한국


1.9.1.2. 중국



1.9.1.3. 일본


1.10. 둘러보기







2. 삼국시대 '세 나라'의 의미



2.1. 개요


사실 1번 항목처럼 삼한을 삼국 정립 이전 한반도 중남부로 보는 관점은 실학자들의 고증이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 중,후기 이익, 한백겸,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후부터다. 원삼국시대 당시의 사서인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위 항목대로 마한, 진한, 변한을 삼한으로 설명했지만,[10] 삼국통일전쟁이 벌어지는 삼국시대 후반부쯤 가면 '삼한'이라는 개념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인식되어 삼국의 다른 표현으로 여겨졌고, 그것이 천 년 이상 계속되었기 때문.
즉, 현대인들은 과거 기록을 토대로 백제, 신라, 가야를 삼한과 연결짓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삼한과 별도로 예맥 계통의 국가로 인식하지만, 이것은 근현대 역사학 지식이 축적된 결과물이고, 그전에는 천 년 넘게 삼한 = 고구려 + 백제 + 신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고증해내기 전까진 마한, 진한, 변한은 고구려, 신라, 백제로 발전 및 대체되었다는 것이 전근대 지식인들의 인식이었다.
이는 비단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오랜 시기가 지난 뒤에 생긴 인식도 아니고,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에도 그랬다.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남긴 고진 묘비명, 고현 묘비명을보면 고구려인들부터가 스스로를 삼한인으로 여겼다는 것이 드러난다.[11] 단지 진한 = 신라는 거의 확실한데 마한과 변한 중 어느 쪽이 고구려이고 어느 쪽이 백제인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을 뿐. 신라 문무왕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피난민을 받아들일 때 하필 고구려와 별로 상관없어보이는 금마저(전북 익산) 땅을 내 준 것도 고구려가 기자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기자의 후손(으로 당시에 알려져 있었던) 준왕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평양을 떠나 마한 땅으로 남하해서 한왕이 되었다는 전승에 근거해서 이에 연결시켜 고구려 유민들이 마한과 자신들을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있었기에 익산지역의 땅을 내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12] 그러나 정림사지5층석탑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새긴 唐平百濟國碑을 보면 형국공(荊國公 소정방)이 삼한을 평정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어서, 적어도 이 시기 까지는 삼한을 고구려를 포함한 개념으로 통용 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즉,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진 신라 가야 백제를 통치하거나 그 하삼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고대 삼한(三韓)이란 정체성은 마한, 진한, 변한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로서 이어져 왔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역사학적 고증은 다른 대답을 내놓지만, 고대인들이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계승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와 별개로 정신적으로는 삼한을 계승했다는 인식이 존재한 것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오나라초나라 등은 각각 스스로를 오족과 초족이라 부르면서 '한족(漢族)'과는 구분짓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국시대 말기와 초한쟁패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이러한 개념이 희석되고 만다. 따라서 고구려도 초중기까지는 스스로를 예맥 계통으로 인식하고 한인들과 구분짓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이게 희미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인(韓人)'에 동화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것.
어쨌든 당대의 인식은 이랬기 때문에 중국의 사서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위지동이전과 다르게 수서(隋書), 당서(唐書)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칭하고 있다. 최소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된 이후에 '삼국 = 삼한'으로 칭하는 관점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이라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때 쓰던 정치적 구호나, 당대의 사서, 더불어 고구려의 묘비명 등을 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도 자신들을 삼한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고려시대에도 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최치원의 삼한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와 연결된다는 의견을 정론으로 삼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도 권근동국통감을 통해 이어진다.[13]

2.2. 용어 사용사례



2.2.1. 한국


况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조 기사 中

11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 (高宗)이 조서(詔書)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칼과 도마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 (金法敏)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갔던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 나라 환공 (桓公)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 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하게 되어, 사녀(士女)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 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651년 당 고종이 내려보낸 조서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中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민(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기사


2.2.2. 일본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일컫는 말로 진구 황후삼한정벌 문단에서 등장한다. 물론 당시 왜국의 국력으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정벌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진구 황후의 기록은 후에 정한론에 악용되기도 했다.
진구 황후 자체가 일본서기에 의하면 (스이닌 덴노(垂仁 天皇) 3년 3월 조)에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라는 신라 또는 가야 왕자가 일본 열도로 도래하여 하리마노쿠니(播磨國)에 정착하여 천황이 오미와노 오토모누시(大三輪 大友主)와 이치시노 나가오치(市磯 長尾市)를 하리마노쿠니에 파견하여 아메노히보코에게 왜 왔냐고 질문하니 왜국에 성황(聖皇)이 있어 왜국에 귀속하길 원한다고 하여 정착하여 낳은 후손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 후손이 천황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 진구 황후로 되어 있어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천황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일 창작된 글이라는 견해도 있고 진구 황후가 벌인 삼한정벌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백제 근초고왕과의 동맹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벌인 마한(침미다례국)과 변한(가야)의 전쟁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전쟁으로 각색되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2.3. 같이보기



3. '한민족, 국가, 문화권'의 통칭



3.1. 개요


후대에는 의미가 더 확장되어 통일된 국가임에도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삼한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의 요동처럼 '''한민족의 영역 혹은 세계관을 뜻하는 관용적인 말'''로 쓰였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할때 즈음이면 아예 이런식으로 한민족의 강역 자체를 의미하는 뜻이 되었다.
이런 표현은 구한말 민중 사이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1909년 위안스카이안중근을 위해 써 준 시에도 시적 표현으로 삼한이 등장한다. 이것은 '한국'의 공식 국호에도 영향을 끼쳐서 대한제국의 국호를 정할 때 이 삼한에서 기인한 '대한'(大韓)을 택하였고, 이후 공화제 국가인 '민국'으로 바꿀 때도 마찬가지로 '대한'을 택하여서 대한민국이 되었다.

3.2. 용어사용 사례


고려시대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이라는 공신위가 있었으며, 고관대작의 아내에게 내리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라는 작위도 있었다.[14]
여요 전쟁 이후 요나라가 포로로 끌어간 고려인을 모아서 내몽골에 삼한현(三韓縣)을 편성하기도 했다.
고려 숙종을 삼한(三韓), 오부(五部)[15]의 주인으로 불렀다.
제2차 입성책동 당시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명명한 통치기구의 설치를 검토하였다.
충선왕의 왕비였던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 결혼하면서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로 봉해졌다.
공양왕의 아버지 왕균은 사후 삼한국 인효대공으로 추존되었다. 왕균의 대공 작위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대공 작위이기도 하다.

3.3. 기록



3.3.1. 금석문



3.3.1.1. 한국

[최사전이 이르기를]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삼한의 삼한(三韓之三韓)이니, 폐하의 삼한(陛下之三韓)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상께서 오랬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넌(汝)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

(중략)

상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삼한(三韓)을 바로 되돌리고 종사(宗社)[16]

를 안정시킨 것은 공의 힘으로 한 것이다."

- 최사전 묘지명 中.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오니, 위세가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에 용서하시며 넉넉히 예로써 맞아주시니, 표정을 고치고 웃는 낯으로 온갖 무기를 거두시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갑옷, 도성의 남녀가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께서 은사를 베푸심이라. 황제께서 군사를 물려주시니 우리 백성들 살게 되었네. 흩어진 우리 백성 불쌍히 여겨 농업에 힘쓰도록 하여 주시니, 금구(金甌)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단은 나날이 새로워라.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은혜로다.

숭덕 4년(1639) 12월 8일 세우다 - 삼전도비


3.3.1.2. 중국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고현 묘지명, 691년 中.


3.3.1.3. 일본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 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 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 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의 명문

만국진량의 종[17]에서 만국진량은 세상 모든 나라를 연결하는 가교(架橋)라는 의미인데, 각국과 교역하던 류큐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종은 1458년(조선 세조 재위기)에 쇼 타이큐(尚泰久, 상태구) 왕의 명으로 주조된 것으로 류큐를 주변국에 비교하며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조선을 삼한으로 적고 있다. 이 글에서 삼한이 외국 중에 제일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류큐인들이 조선을 가장 좋아했던 게 아닌가(?) 짐작하기도 한다.

3.3.2. 서지문



3.3.2.1. 한국


3.3.2.1.1. 고려사

짐(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고려사, 세가, 예종, 예종의 유조(遺詔) 中.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3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고려사, 세가, 인종, 인종의 유조(遺詔) 中.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18]

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며 왕이 있는 건 오직 삼한[19]뿐이다.

고려사, 권 33, 세가, 충선왕 中.

(중략) 伍允孚嘗痛憤, 以爲, “此藥不宜胎産, 使三韓攴胤不蕃者, 必此人也.” (중략)

(중략) 오윤부가 분통해 하여 말하기를, “이 약은 아기를 가지는데 좋지 못하므로, 삼한의 왕실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자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중략)

고려사, 열전, 비,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원성공주가 충렬왕에게 미녀를 바친 김중경을 순마소에 하옥하다. 中.


3.3.2.1.2. 조선왕조실록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20]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21]

《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3번째 기사


3.3.2.2. 중국

삼한(三韓)은 정말로 망하였구나.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

효정경황후 대공보 1910.9.21[22]


3.3.2.3. 일본


3.3.2.3.1. 일본서기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23]

,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4]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25]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3.4. 삼한갑족(三韓甲族)


삼한에서 인 씨족이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으뜸가는 씨족이라는 뜻이다.

3.5. 같이보기



[1]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왕을 천자라고 부르며 봉건 체제를 유지한 상황에서 구성국끼리 치고 박았다. 전국시대로 넘어가면 '''주나라가 망한다.''' 삼한 지역의 경우 마한 지도국인 목지국의 왕을 진왕이라 부르며 높여 칭했던 것이 구성국들이 치고 박으면서도 주나라 천자를 높여 칭했던 춘추시대와 유사하다.[2] 고대의 강역 자체가 불분명한 측면이 너무 많은데다 흐름 자체가 명확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런 설도 있고 저런 설도 있다는 식으로 대부분이 결론나는데 이런 부분은 각종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도 그냥 출제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고 수업시간에 가르치기도 애매하다.[3] 흔히 고구려 하면 떠올리는 만주의 평야지역은 이 때는 부여의 영역이었다. 고구려의 스타팅 압록강 중류는 강원도를 능가하는 산악지역이다.[4] 다만 그럼에도 고구려의 국가 발전이 백제와 신라보다 훨씬 빠르긴 했다. 이미 1~2세기경 만주 남부와 함경도 영역을 거의 확보해 국가의 기본 체급을 갖췄고 막 백제가 국가꼴을 갖추기 시작한 3세기 후반~4세기 초에는 아예 한사군을 축출하면서 요동, 평안도, 황해도 거의 전역을 차지했기 때문.[5] 마한 안에서야 가장 강력했지만[6] 예를 들어 신라는 사로, 시라, 서야, 서나 등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모두 당시의 신라 고유어(순수 신라말)를 음차한 것이다. 이는 이탈리아(Italia)를 이태리(伊太利, イタリー), 의대리(意大利, Yìdàlì) 등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후에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새로울 신(新)에 망라할 라(羅)를 써서 신라라 하였다. 신라처럼 이렇게 음차할 한자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 한 나라는 중국에서 한자로 가차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7]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한반도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분은 대부분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인 만큼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8] 두 개의 맥족이라는 뜻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의미함[9] 내물왕은 4세기 후반의 군주이다.[10] 단, 마한, 진한, 변한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중국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이를 한전(韓傳)이라고 쓰고 있지 삼한이라고 기록하고 있진 않다.[11] 고요묘 집안은 진변(辰卞)에서 존귀했고 명성은 순기(珣琪)처럼 두터웠다, '''고진'''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 '''고현'''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 '''고모''' 군의 휘는 모요 자는 구이고 안동사람이다. 가문은 진한에서 융성하고 다른 명문의 명예를 모두 압도하였다. 부여융 공은 이름이 융이고 자도 융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다.[12] 현대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실제 마한의 중심지가 경기도 광주나 충청남도 천안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고고학이 없던 조선시대까지는 준왕이 남하하 자리잡은 곳이 익산이라고 알려져 있었다.[13] 다만 진한이 신라로 이어진다는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당시의 부족한 인식 때문에 마한, 변한 중 어디가 각각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진다는 데는 이견이 있었는데,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로 이어진다는 게 최치원의 주장이었고 마한이 백제, 변한이 고구려로 이어진다는 것이 권근의 주장이었다.[14] 대표적으로 최영의 어머니 지씨(智氏)가 삼한국대부인이었다.[15] 오부는 옛 고구려의 비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 계루부를 의미한다.[16] 종묘사직.[17] 일본 정부에서 정식으로 등록한 명칭은 구 슈리성 정전종(旧首里城正殿鐘)이다.[18] 원무종을 뜻한다.[19] 고려를 뜻한다.[20] 여기서 공은 이성계를 부르는 것이다.[21] 최영이성계한테 한 말이다.[22]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직후 한 발언이다.[23]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24]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25]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