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성 전투

 


'''성주성 전투'''
星州城戰鬪

'''시기'''
1592년 9월 26일 ~ 1593년 2월 15일
(음력 1592년 8월 21일 ~ 1593년 1월 15일)
'''장소'''
조선 경상도 성주목 성주성
'''원인'''
일본군의 성주성 점령.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성주 목사 제말
훈련부정 제홍록
의병장 정인홍
병마절도사 김면
별장 손승의†
가쓰라 모토쓰나
'''병력'''
약 2만 명
약 2만 명[1]
'''피해'''
성주 목사 제말 전사, 그 외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선군의 승리, 성주성 탈환.
'''영향'''
경상우도, 낙동강 서부 지역 수복,
'''일본군의 주요 보급로 차단'''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영향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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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성주성이 점령당하자 성주성(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 예산리 일대 )을 탈환하기 위해서 벌어진 전투이다.

2. 배경


일본군이 점령한 성주는 당시 경상도의 거점 고을 중 하나였고, 대구에서 조령을 잇는 주보급로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성주성을 탈환해서 일본군의 물자보급에 차질을 주고 개령에 본진을 둔 모리 테루모토의 부대를 고립시킬 계획이었다.
원래 성주성을 점령하고 있던 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에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의 휘하 장수인 가쓰라 모토쓰나의 1만 병력과 교대하였고, 나중에는 의병들에게 쫓긴 우도 일대의 일본군까지 합세하여 병력이 2만 명이 넘게 되었다.
김성일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이 성주성을 탈환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5천명을 지원받았고, 화순에서 기병한 의병까지 합세하여 병력이 2만 명에 달했다.
[image]
(전투가 벌어진 전장인 성주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철거되어 임정사 앞에 동북쪽 성곽의 흔적만 일부 남아있던 것을 성주군에서 북문과 성곽을 재건하였다.)

3. 전개


정인홍김면은 8월 21일 주둔지에서 출발하여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하고, 다음 날인 8월 22일부터 공성기구를 마련해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때 일본군의 지휘관이었던 가쓰라 모토쓰나는 조선군의 병력이 수만명에 달하자 개령에 있는 본진의 모리 테루모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증원군은 의병의 후방을 공격하였고, 포위망을 형성하기 전에 기습을 받은 조선군은 대열이 무너져 제대로 된 대항을 하지 못 하고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조선군은 9월 11일 다시 성주성 탈환을 시도한다.
조선군이 공성기구를 준비하는 등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증원군이 의병을 공격했고, 성안의 일본군도 합세하여 조선군을 공격했다. 전투 중에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게 되는 피해를 입고 조선군은 2차 공격도 실패하게 되었다.
3달 뒤인 12월 7일에 3차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8일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지만 피해가 커지자 12월 14일에 철수하게 된다. 일본군은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도 성을 지켜냈지만 1593년에 접어들면서 보급이 줄어 식량이 부족해지는 등 전세가 점차 불리해져 본대가 후퇴해야 할 상황에 이르자 1월 15일 밤에 성주성을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조선군은 3차례의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4. 영향


일본군으로부터 성주성을 탈환함으로서 조선은 경상우도, 낙동강 서부 지역을 수복하게 되었으며, 일본군의 주요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성주성 전투에서 입은 피해 자체는 일본군보다 조선 측의 피해가 더 커서 승전이 맞는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군의 성주성 탈환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했고, 일본군의 보급에 큰 타격을 주었으므로 전략적 승전이라고 볼 수 있다.

5. 기타


이 전투에서 전사한 성주 목사 제말과 정유재란 때 진주성을 지원하다가 전사한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공을 기리기위해 1792년 정조성주성진주성쌍충사적비를 세웠다.[2]

[1] 전투 중 본진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2] 제말은 고성 사람으로 전란 전 수문장을 지냈다는데, 기록이 워낙 적어 출신도 불분명하다. 과거 윤승운 화백은 군공을 세워 면천된 천민 출신으로 그려냈다. 칠원 제씨의 시조라는데 이 사람때 성을 새로 받아 시조가 됐다는 얘기이니 면천설도 일리가 있다. 설령 천민까지는 아니여도 평민 정도의 위치였다고 추정된다. 아무튼 제말은 원혼이 되어 후임 수령들한테 원통함을 호소하고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민담마저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빠르게 잊혀졌다. 그나마 전란 후 2백년이 지나서야 정조대에 복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