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조선 제100대 영의정
정인홍
鄭仁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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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中宗 30年 - 光海君 15年'''
'''제100대'''
1618. 01. 18 - 1619. 03. 13

[image]
''''청람사'에 봉안된 정인홍 영정'''[1]
'''이름'''
정인홍 (鄭仁弘)
'''출생'''
1535년[2] (중종 30) 9월 26일
경상도 합천 상왕산(象王山) 아래 남사촌
(현 경상남도 합천군)
'''사망'''
1623년 (광해군 15) 4월 3일 (향년 89세)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형 (참수형)
'''묘소'''
경상남도 합천군 군북면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
'''직업'''
관료, 유학자, 의병장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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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 현감(종6품)
사헌부지평
영천군수
영남 의병도대장
진주목사
제용감정
성주가목
사헌부 장령
사헌부 대사헌
행 용양위 부호군
동지중추부사
공조참판
공조참판
동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
세자시강원 보양관
우찬성
보양관
의정부좌찬성
의정부우의정
서령부원군
정운공신 1등
좌의정
제100대 영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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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좌찬성
의정부우의정
서령부원군
정운공신 1등
좌의정
제100대 영의정
}}}
'''재임 기간'''
제100대 영의정
1618년 1월 18일 - 1619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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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44> '''본관'''
서산 정씨 (瑞山)
''''''
덕원 (德遠)
''''''
내암 (來庵)
'''국적'''
조선
'''종교'''
유교 (성리학)
붕당 ||<(> {{{-1 [[대북|{{{#!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1; font-size: .8em"
'''대북'''}}}]]
[ 역대 소속 붕당 ]
<table width=100%><#fff><(> [[사림파|
'''사림파'''
]] (1573 - 1575)
[[동인(조선)|
'''동인'''
]] (1575 - 1591)
[[북인|
'''북인'''
]] (1591 - 1599)
[[대북|{{{#!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1; font-size: .8em"
'''대북'''
]] (1599 - 1623) ||}}}
'''복권'''
1908년 (순종 2)
'''부모'''
부 : 정륜 (鄭倫, ? - ?)
모 : 진주 강씨 (? - 1582년)
'''배우자'''
남원 양씨
'''자식'''
슬하 1남
정연 (鄭沇, 1571년 - 1592년)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반
2.2. 생애 후반
2.3. 사망
2.4. 사후
3. 평가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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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북인 계열 문신. 호는 내암(來菴).
남명학파이자 조식의 적통 제자로 조식이 말년에 자신의 보물인 경의검을 물려준 인물이다. 강직하고 배타적인 성품으로 유명했다.
영의정으로서 문묘 배향자 지정 때 남인 계통인 이황이언적의 종사를 반대하면서 논란을 자초했으며 성균관 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나면서 북인이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결과적으로 서인과 남인을 손잡게 만들어 인조반정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1535년 경상도 합천 태생으로 정륜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떡잎부터 남달랐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 합천 주변 산의 식물들이 모두 말랐고 그게 3년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현대 한국에서도 합천 출신 씨름 선수들이 기량과 힘으로 유명한데 정인홍 역시 타고난 기백과 힘으로 유명했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어릴 때부터 조식에게 배웠다. 남명 조식은 실천 유학자로서 문무 양도를 갈고 닦는 사람이었는데 정인홍은 평생 스승의 인생관을 지키며 살았다. 유학자이면서도 과거 시험을 보지 않으며 스승 곁을 지키며 살았다.
선조는 인물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과거 시험을 자주 열기보다는 명망있는 학자들이나 기인들을 불러 관직을 제수하고는 했는데 정인홍도 39살이던 1573년 잠시 황간 현감(종6품)을 맡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귀향해 책을 읽고 후학을 길렀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서고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자 다른 남명학파들과 동인 세력에 합류해 송강 정철, 윤두수 등을 탄핵하려 하지만 오히려 해직당했고 다시 낙향한다.
1580년 12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법령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관료들의 부정과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하는 등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탄핵을 가해 관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1592년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성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의 전공을 올린다. 환갑에 가까운데도 의병을 지휘했고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3] 다만 당색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주관이 강해 정적을 많이 만들게 된다. 후대의 송시열과 유사하나 보스형 정치인으로 확실한 파벌의 수장으로 이끌어간 송시열과 달리 정인홍은 애매한 처신으로 대북이 실권을 쥔 내내 정인홍과 이이첨은 어정쩡한 동거를 했다.
1602년 선조는 정인홍을 불러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헌은 왕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자리인데다가 사회 지도층의 비리 등을 잡아내는 검찰총장과 같은 자리였다. 정인홍은 왜군과 화의를 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류성룡을 권좌에서 밀어냈다. 이산해, 이이첨과 손잡은 정인홍은 대북의 중심 인물로서 정국을 주도했다.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의 후계 문제를 놓고 당시 광해군을 밀어내고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으려던 유영경 등 탁소북을 규탄했다. 대놓고 선조한테 '광해군한테 빨리 왕위 넘겨줘. 너 때문에 나라 절단나게 생겼다.'로 해석될 만한 문장이 들어갔다. 역시 그 스승에 제자. 선조는 분노해 유배형을 내렸는데 선조는 대놓고 "아주 미쳤구만. 미친 놈이니까 이딴 소리를 했지. 딴에는 나라 생각한다고 한 모양인데 불충도 이런 불충이 없다."하며 신랄하게 깠고 "광해군은 천자의 인정도 못 받았는데 무슨 놈의 세자냐?" 덧붙여서 광해군이 울면서 맨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사죄해야 했다. 정인홍이 유배지로 떠나기 직전에 선조가 죽어서 형이 집행되지는 않았고 덕분에 광해군 재위 내내 탄탄한 위치가 보장됐다.

2.2. 생애 후반


광해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다 쿠데타인조반정으로 축출되어 인조 정권이 정인홍을 간신으로 윤색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크게 재평가되었다. 애초에 유배를 불사하면서까지 할 말을 했다는 점만 봐도 권세를 좇은 이이첨과 비교하기에는 확실히 부당하며,[4][5] 그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소신이 강한 강경파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정인홍이 정적들에게 어그로를 끈 최대의 이슈라면, 스승의 추존을 위해 문묘에 종사되기로 결정된 이황과 이언적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자기 스승인 조식을 집어넣자고 우겨대다 빡친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에서 제명당한 사건[6]인데, 이로 인해 다른 학파로부터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매우 거세게 들었다. 정적인 서인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같은 범동인계인 남인을 적으로 돌려버렸다. 정권에 들어서 있는 관리들뿐 아니라 전국의 유생들이 반발을 일으켰고 급기야 국가 공식 교육 기관이자 당대 엘리트들의 집궐지인 성균관에서는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에서 빼버리기까지 했다. 이는 정인홍을 선비, 나아가 유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 표시였으며 성균관에서 퇴출되어 젊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계기였다. 이에 광해군이 정인홍을 옹호하며 성균관 유생들을 엄벌에 처하려 했으나, 오히려 유생들은 권당[7]을 실시해 파업에 들어갔다. 이항복이 나서서 그들을 처벌하려는 광해군을 만류하여 최악의 결과는 피했으나, 이미 정인홍은 학문적 지지를 모두 잃은 상태였다.
스승을 높이려는 것은 유학자로서 당연한 일이니 참작이 되지만, 이황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리기보다는 조식 또한 문묘에 종사되기 합당하다는 식으로 온건하게 주장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이황은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 계열이 이이의 스승격으로 올려 학문적 정통성을 이어갈려 했을 정도로 조선 성리학의 거두 중의 거두였다. 물론 정인홍이 공격한 시기에는 그만큼 언터처블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그때에도 성리학의 대가로 많은 유생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기에 너무나 많은 정적을 만들게 되었다. 이언적 역시 이황의 스승격 존재로서 성리학의 계보를 성립해갔던 유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미 둘 모두 문묘에 올라간 상태에서 너무 무리수적인 발언이었다. 결과적으로 인조반정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 유학 흐름의 중요한 방점을 찍었을지도 모를 인물.[8]
이황을 비판한 "정맥고풍변"[9]이라는 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글 자체의 내용을 떠나서 잘 쓴 글이라서인지 훗날 노론의 수장인 송시열도 읽어보고 '이거 잘썼네'라고 칭찬했다고 하지만 발견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연구가 안되고 있다고 한다.
폐모에는 찬성했지만 인목왕후를 죽이자는 허균 일파의 주장에 대해서는 "서모도 어머니는 어머니인데 어떻게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는가?"라고 반대했다.

2.3. 사망


내 열 다섯의 어려서부터 스승 남명에게서 학문을 배워 군신부자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아! 슬프다. 구원에 물러나 있은 지 지금 20여 년! 어지러운 세상일을 듣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90세의 모진 목숨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마침내 폐모의 죄명을 얻으니, 이제 한번 죽음에 돌아봐 서운한 것은 없으나. 장차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을 뵙겠는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정인홍의 유언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바로 체포된 뒤 3월 28일 한성부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국문당했다.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그에게 이러한 이유로 체포했다.
  • 첫째, 사림 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품관(品官)이었다는 것
  • 둘째,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무단을 위세를 부렸다는 것
  • 셋째, 괴귀한 학문을 퍼뜨렸다는 것
  • 넷째, 이언적, 이황을 배척하고 그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는 것
  • 다섯째, 폐비를 반대한 동료요 후배인 정온, 이대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
국문에서 정인홍은 자신은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변을 하였으나 서인 정권은 정승을 지낸 인물과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참수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어기고 그를 참수했다. 향년 89세.
참수된 이후 가사은 모두 몰수되었고 그가 속해있던 대북은 몰락하게 된다.

2.4. 사후


경상남도 합천군 군북면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형되었으며 가산이 몰수되었으나 의외로 그의 후손들은 살아남았다. 1629년 합천군은 정인홍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합천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년 후인 1644년(인조 22년) 다시 합천군으로 회복되었다.
정인홍은 의를 숭상하는 청렴한 인물에서 음험하고 포악한 인물로 격하되었다. 이후 조선 왕조 내내 정인홍은 대역 죄인 취급을 받았다. 1864년 늦가을에 합천군 군북면에 있던 정인홍의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가야산 해인사입구 각사 탑동으로 이장하기 위해 후손들이 그의 관의 뚜껑을 열었을 때, 정인홍의 시신은 입고 있던 수의도 썩지 않고, 머리칼, 피부도 살아생전 그대로이며 어깨와 목은 피 자국이 은은하게 그대로였다 한다. 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627)에 개장되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고종 즉위 전까지 출사길이 막혔으며, 제자이자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을 지지한 것에 반발한 동계 정온의 학맥 일부만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고종 때 가서야 그의 후손들과 북인 계열 유생들이 복권 상소를 올렸다. 1863년 12월 고종 즉위 직후 흥선대원군이 사색타파를 선언하자 정인홍의 후손 유학 정기덕을 중심으로 첫 신원의 요구가 있었으나 노론계열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1864년 다시 정인홍의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노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08년(대한제국 융희 2년) 4월 30일이 되어서야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좌의정의 직위가 내려졌다. 대한제국 멸망 후 1911년에 문집이 재간행되었다.

3. 평가


서인들에 의해 간신배로 오랫동안 평가절하 당했으나, 간신배라기보다는 너무 강직하고 독단적이었을 유학의 대가라는 인식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순종 황제 때 복권되었으나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진정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1911년 정인홍 문집이 전 15권 7책 실기 1권으로 발간되었다.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1931년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쓴 편지를 통해 그를 높이 평가했음을 밝혔다. "정인홍공약전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며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한국의 역사 상 삼걸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으며, 특히 정인홍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서인들이 왜곡한 것은 거의 없다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 정인홍의 구체적인 정치적 행보 자체가 대북의 악명높은 정권 독점과 수많은 숙청에 기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학자로서 그가 남긴 행보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정계의 당상관들이 자신의 파벌을 늘리기 위해서 벌이는 유소년 정치파벌 육성로서 당대에는 권신들이 자주 벌이던 정치적 행보에 가까운 것일 뿐이었다.

4. 여담


현재는 고향인 합천군 가야면에 그의 고문서 및 서적과 묘소가 정비되어 있다.
전술했듯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조식의 수제자이기도 했는데, 원래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려 했다가 이황이 그의 완고한 성품을 보고 '너무 대쪽 같아서 유연성이 없다'는 자못 괴한 이유로 퇴짜맞았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거의 사실 무근인 얘기. 자세한 것은 이황 항목 하단의 에피소드와 본 링크의 분석글을 참조하자.
참고로 곽재우와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동문이며 곽재우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의병장을 지냈다. 그러나 꼬장꼬장하긴 했어도 정인홍처럼 배타적이진 않았던 곽재우는 큰 이미지 훼손 없이 지금도 의병장으로서 유명하지만, 계속 정계에 머물며 특유의 배타성으로 정적을 양산한 정인홍은 반정 이후 철저히 소독되어 의병장으로서의 활약마저 묻힌 감이 있다. 그러다 조선 멸망 후 신채호처럼 그의 활약에 크게 주목한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지금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인 조식처럼 점점 조명이 이뤄져가고 있다.
특히나 정인홍은 의병 가운데서도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경상도 지역의 의병장으로써, 경상도의 모든 의병들은 정인홍의 지휘 아래에 있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높았다. 전재산을 바쳐 의병을 지원하였고, 아들 정연이 전쟁도중 병사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 업적에 대해 평가절하된 것은 역사의 오점이 아닐지 싶다.
남인의 영수 류성룡과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 같은 정적 관계였는데, 결국 이산해와 함께 류성룡을 정계에서 축출한다.[10]
정인홍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로 남명학 연구원에서 2010년 8월에 펴낸 《내암 정인홍(예문 서원)》이 있다. 정인홍 관련으로는 가장 체계적으로 각 잡힌 책으로, 여러 대학의 역사학 교수 및 연구자들이 집필에 참가한데다 정인홍과 남명학에 대한 풍부한 사료와 철저한 고증에 빛나는 명저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일독해보기 바란다. 다만 이 책은 정치가, 학자로서의 정인홍에 대한 연구는 풍부하지만 의병장 정인홍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으니 유의.
위에 올린 영정은 후대의 상상화이고, 조선시대때 그린 영정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정인홍이 참수당한 후에도 합천 사람들은 외경의 마음을 담아 정인홍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봉안했는데, 훗날 부임한 어느 군수가 역적을 모셔 무엇하느냐 하면서 사당과 영정을 태웠다. 그 직후 군수와 일가족 모두 병에 걸려 죽자 천벌을 받았다며 수군거렸다.[11]
88세까지 장수한 정인홍과는 달리 아들 연과 손자 능은 모두 30세도 채우지 못하고 '''정인홍보다 먼저''' 죽었다.[12]

5. 대중매체에서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의병장 시절을 다루기 때문에 대북파를 이끌던 시절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평가가 호의적인 편.
사극 서궁에서는 배우 서상익이, 왕의 여자에서 최동준, 화정에서는 한명구가 맡았다.

6. 둘러보기





[1] 2021년 1월 기준으로 접속되지 않음.[2] 153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생년도는 불명으로 1536년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3] 명나라군이 대규모로 참전해 육군의 주력이 되고 남부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조명 연합군이 공략하는 양상으로 바뀌었으며 전쟁이 길어져 물자가 부족해 의병을 유지하기도 힘들어 정유재란 때는 의병 활동이 뜸해진다.[4] 이이첨이 화살받이로 그를 자주 내세운 것도 한몫했다. 무슨 말만 하면 "이거 정인홍이 시켰다." "정인홍도 나와 뜻이 같다." 주장했고 아예 정인홍 이름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정인홍에겐 사후에 알렸다.[5] 이 때문에 정인홍의 제자인 정온은 정인홍이 이이첨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며 정인홍과 사제의 연을 끊었다. 인조반정 이후 정온은 정인홍 사형을 반대하면서 정인홍이 나이 80세가 넘은 이후에 정신이 흐려져서 이이첨에게 속아서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6] 두 사람의 호가 회재(이언적)와 퇴계(이황)이었던 것으로 인해 이 사건을 회퇴변척이라고 부른다.[7] 간단히 풀어쓰면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요컨데 대학생들이 대학 출석을 거부하며 시위를 하는 것인데 당대 성균관의 위상을 생각하면 권당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500년 조선 역사에서 96회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조선 후기에 남발된 권당이 다수를 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 붕당이 심화되기이전인 조선 중기에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다. 앞뒤에서 계속 설명하듯 그를 파멸로 몰고가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8] 이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명종 시기 이미 퇴계의 이름이 조선팔도에서 유학의 종주격에 있었기에 문묘에 쉽게 종사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남명은 약간 비주류에 가까웠다. 이에 괄괄한 남명의 제자들은 '''문묘에 종사된 이언적과 이황이 명종 시기 외척들에게 굴복한 절의가 없는 인물인 것에 비하여서 우리의 남명선생은 절의를 잃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주장하였는데, 퇴계의 제자인 남인들은 말할 것이 없고, 서인들 역시 자신들의 학통이 이언적-이황을 거쳐서 율곡에게 이어졌다고 주장하던 터라 기를 쓰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9] 정확히는 이황과 조식의 문하를 오가며 수학했던 한강 정구가 동문인 동강 김우옹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시(晩詩)에서 '퇴계는 정맥이고 남명은 고풍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라고 깐 내용이다. 근데 말은 정맥고풍이라는 말에 대한 변무-인데 사실 내용을 보면 회퇴변척소랑 비슷하다.[10]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의 비판을 보면, 전쟁중 류성룡이 왜군과 내통하거나 자기 수하의 사람들로 관직 독점을 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룬다. 특히 권력독점 문제를 "류성룡의 조아, 응견"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과격하게 비판했다. 왜군과의 내통설은 헛소문으로 취급되었지만 권력독점 문제는 선조도 인정하였고 결국 류성룡 파직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산해와 류성룡은 서로를 왜군과 내통했다고 고발하여 한번씩 퇴출시킨 전례를 남긴 셈이다(물론 먼저 시작한건 류성룡이지만...). 그런데 왜군과 내통설이 사실이 아니라도 류성룡이 다소 정직하지 못했던건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애초에 통신사가 일본을 탐방하고 왔을 때도 김성일이 거짓말을 했다는걸 "류성룡은 처음부터 알았다."는 주장이 서애일기에 나와 있고, 선조 역시 류성룡을 신임하면서도 "류성룡이 왜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볼 때 어느정도 왜란의 책임을 지닌 인물이 류성룡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11] 이인좌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인홍의 증손도 연루돼 장살당했는데, 그때 사당과 영정도 피해를 입은듯하다. 후대 인물 이옥의 기록에 따르면 정인홍은 굉장히 늙은 여우와 닮았다고 한다.[12] 당시 평균수명이나 시대배경을 따지면 정인홍이 비정상적으로 오래 산 것이다. 전란까지 겪은데다가 인조반정만 아니었으면 더 살았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묵재일기(설공찬전이 여기서 발견됐다), 양아록의 저자 이문건이 있는데 74세로 장수한 이문건과 달리 이문건의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단명했고 이문건이 애지중지 키운 손자도 할아버지만큼은 못살았다. 특히 정인홍이 살았던 시기를 보면 90대 가까이까지 산 것이 참 신기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