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본관은 고령이고 평생을 고령에서 보냈다. 성리학자이며 의병 도대장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4] 의병의 관군화로 경상도의 의병을 총괄하는 위치까지 올라간다.[5] 금산과 개령으로 진주하여 선산의 왜군을 공격하려던 중 갑자기 병사했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
1593년 3월 13일,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며 숨을 거뒀다.#"다만, 나라있는 줄 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 只知有國 不知有身(지지유국 부지유신)
만석꾼이라고 불릴 정도의 많은 재산을 의병 활동에 기울이는 바람에 남은 가족들은 문전걸식을 해야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면은 죽기 전까지 전장에 머물며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가족들을 채 한번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2. 직위 / 사후 추증
3. 당시 조선군 병력 통계 : 김면 생존 시기[8]
1593년 음력 1월 11일(병인), 조선왕조실록 선조 34권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의병장 김면의 군사는 5,000 명이었다.
4. 임진왜란
김면이 5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5월 11일, 그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28일만에 기병하였다.
연려실기술[10] 에는 김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11]
그는 임진왜란 중 여러 달 동안 의갑(依甲)을 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문안 드리고자 하였으나 정인홍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하므로 면이 드디어 고령에서 군사를 모았다. 김면은 고령은 군세가 작다고 여겨 거창으로 달려갔는데 그때 거창의 선비와 백성이 이미 약간의 군사를 모아 가지고 있다가 합세하였다. 김면은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을 참모로 삼고 박성을 시켜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 4일 - 5일 동안에 군사 2000명이 모였다.
4.1. 의병 도대장 김면(金沔)과 후기 의병 조직
조선의 정부는 의병의 반란을 사전에 막기위해 의병을 관군화 시킨다. 그 계획의 중심에 김면이 있었다. 경상 우병사로 임명된 김면은 경상우도의 관군과 의병을 총괄 지휘하게 된다.
4.2. 전투
김면은 처음에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중지하였다. 고령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김면은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면은 2,000여명의 대군을 모았다. 그는 명망있는 사족들에게 유사(有司)라는 직책을 맡겼다. 관군과도 협조하는 등 원만하게 의병을 운영했다.
그는 남명 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을 이용하여 의병들을 모았다. 김면은 사족들이 상호간의 중첩적인 통혼을 하여 유대 관계가 강하는 면도 직시하면서 서당이나 향교를 통한 교우 관계 등을 바탕으로하여 백성들을 동원했다. 그는 의병을 지휘하여 거창·고령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전과를 거두었다. 또 관군과 연합하는 작전도 많이 벌였는데 적의 선봉을 지례에서 공격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면은 무계에서도 승전했으며, 후에는 성주·금산·개령 부근에서도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임란 다음년인 1593년에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김면은 왜군을 맞아 학연(學淵)·예천·문경 등지의 전투에서 연전 연승했다. 일본군은 김면을 몹시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진다. 왜군은 김면과 만나 싸우기를 꺼렸다. 왜군은 김면을 두려워하여 그 반대 급부로 고령의 종친들의 상당수를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
김면은 경상도 북부 지방을 제압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4.3. 전투 목록
4.3.1. 우척현 전투
1592년 8월 16일, 임란초기 왜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김면, 정인홍이 싸운 전투이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정암진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 이어 우척현에서 거창을 통과여 전라도로 진입하려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김면과 정인홍을 만나 크게 패한다. 이 전투를 끝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전라도 진입을 포기한다. 당시 김면 측의 병력은 2,000명이었고 고바야카와 측의 병력은 1,500명이었다. 당시 김면은 매복하여 고개를 넘어오는 적군을 상대로 3면에서 활을 쏴 격멸하였다고 한다.[13]
4.3.2. 성주성 전투
4.4. 지례 전투
4.4.1. 무계 전투
5. 인물들과의 관계
5.1. 스승과 동문
5.1.1. 남명 조식과 김면
김면이 19세에 남명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은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3권에 있다. 다른 기록인 '남명선생년편'에는 1560년에 남명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는 서술되어 있다. 1560년에 남명은 60세였다. 그런데 남명이 덕산으로 이주한 것은 김면이 21세 때 일이라고 한다.[15] 송암은 24세 때는 율례지(律禮志) 2권을 지었다. 송암은 율례지를 남명에게 보여 수정을 구하였는데 남명이 이를 보고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송암연보는 전하고 있다. 김면은 28세 때 재실을 짓고 남명에게 이름을 부탁했다. 이에 남명은 '송암(松庵)'이란 현판을 자필로 써 주었는데 김면은 이것을 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5.1.2. 퇴계 이황과 김면
1551년, 김면은 11살의 나이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배웠다. 1560년, 김면은 퇴계 이황이 있는 도산으로 찾아가 그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20살 때의 일이다.
5.1.3. 곽재우
곽재우는 "영남을 보존할 분은 이 분 뿐이다" 며 그의 인품에 탄복하였다고 한다.[16] 김면이 죽은 후 준관화된 의병을 곽재우가 이끌었다. 그리고 곽재우는 그 의병으로 정유재란을 맞는다.
5.1.4. 김시민
임진왜란 당시 김면은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우두령을 넘으려 한다는 정보를 습득한다. 의병장 김면은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관병과 의병을 이끌고 산에 매복하여 왜병 1천500명을 급습하여 전투에서 승리한다.[17] 다른 문서에서는 김시민이 김면의 요청을 받아 병력 1,000여명을 이끌고 김면의 2,000여 병력과 합류하여 전라도 방향(사랑암 ~ 금산)으로 내려오는 왜군을 맞아 승리했다고 전해진다.[18] 이 사건으로 김시민은 진주판관(목사 대리)에서 진주 목사로 승진한다.[19]
5.1.5. 김성일
5.2. 제자와 부하들
5.2.1. 곽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감찰사인 김성일의 천거를 받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라는 직책을 맡았다.[20] 존재실기라는 저서가 있다. 1597년, 정유재란 시기 곽준은 안음현감(安陰縣監)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체찰사 이원익은 당시 호남과 영남 사이의 요충지인 황석 산성을 곽준에게 맡긴다. 세 고을의 군사를 모아 곽준에게 위임하였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에 맞서 싸우다가 황석산성전투[21][22] 에서 전사한다. 과거 김면의 부하였던 함양군수 조종도도 같은 날 황석 산성에서 전사한다. 당시 안음 현감이었던 곽준은 식솔들이 계책을 청하자 죽음을 예감한 듯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겼다.[23]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운단 말인가.’"
5.2.2. 문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김면이 병사하자 뒷일을 맡아 처리했다고 한다.[24] 임란 후 동몽교관(童蒙敎官),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한다. 인조반정 뒤 공령현감이 된다.
5.2.3. 조종도
1558년, 생원시에 합격한다. 이일로 안기도찰방이 된다. 1585년, 양지 현감이 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며[25]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생이다. 곽준과 함께 김면의 휘하로 들어가 우척현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곽준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맞서 싸우다가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사한다. 대소헌집(大笑軒集)이라는 저서가 있다.
5.2.4. 여대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의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26] 생존했을 당시 지례현감, 대구 판관, 사헌부지평, 합천 군수 등의 관직에 있었다. 정자 여응구의 아들로 남명 조식의 제자였다. 권응성과 함께 김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27] 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8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임란 당시 공적으로 형조 좌랑, 지평(持平) 등으로 올라선다. 1607년(선조 40년), 같은 지역에 거주하던 정인홍이 우의를 맺고자 하였으나 아래와 같은 시로 답하였다고 한다.[28] 참고로 김면과 정인홍은 김면이 살아있을 당시 사이가 안좋았다.
또한 여대로는 이이첨과 정인홍이 광해군을 옹립하고 변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광해군의 폐모를 반대하던 오장이 귀향가자 부채에 아래와 같은 시를 써주며 읊었다고 한다."“가야산 일찍 내린 서리에 닥나무는 말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듯한 더위 이 산중에도 이르네(倻山霜早 楮木盡枯 世間炎熱 亦到山林).”"
"“술병 차고 다리에서 옛 벗을 전송해도 타다 남은 풀 봄 오는 것 못 막네. 대장부 세상에 나뉜들 혀야 없으랴만 지사는 세상일 걱정해 몸을 돌보지 않았네. 복숭아꽃 오얏꽃은 훈풍에 생색을 내지만 소나무 대나무는 눈을 이고도 정신 새롭네. 큰 빛은 만고에 근원을 어둡게 못하는 법 머물러 바라보려네 구름 걷히고 옛빛 되살아 남을(佩酒橋頭送故人 燒餘殘草不禁春 丈夫在世誰無舌 志士傷時不爲身 桃李帶風生氣色 松篁擎雪更精神 大陽萬古元難晦 佇見雲收舊彩新).”"
5.2.5. 서예원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김면군의 중위장이었다.
1591년, 서예원은 김해 부사로 발탁된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 초기에 김해 부사로 있던 서예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죄로 삭탈관직 당한다.[29] 이후 김면에게 발탁되어 중위장으로 활동한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진주 목사 김시민 (金時敏)을 도와 수성에 참여했다고 한다. 김시민이 죽자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순찰사인 김성일 (金誠一)에게 발탁되어 진주 목사로 천거된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왜군은 그의 수급을 김시민의 머리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하였다.[30] 서예원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해석으로 논란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 그를 재조명하자는 부류들도 있다.[31] 그를 김면의 정신적인 후계자 또는 직계 부하급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32] 그를 재조명한 소설인 '진주성 비가'라는 소설도 출판되었다.
5.2.6. 윤경남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의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 군의 참모장서기였다.
5.2.7. 박정번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의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 군의 참모장서기였다.
5.2.8. 유중룡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의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 군의 참모장서기였다.
5.3. 기타
5.3.1. 배설
합천 군수였으며 이순신과 원균의 부하인 인물이다. 일명 도망의 달인. 1592년 9월,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를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33] 로 임명된 상태였다.
참고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34]""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 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 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종2품)[35] 로 승진한 뒤였다.
1597년 8월 28일, 경상 우수사로 재직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명령을 무시하였다가 12척의 군선과 함께 살아남는다. 1597년 10월 25일, 아이러니 하게 배설이 대피시킨 12척의 군선은 이순신의 지휘로 들어가 명량 해전에서 조선을 구하게 된다. 1599년, 선산에서 권율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한다.
6. 유적과 유물
6.1. 송암실기
1772년 (영조 48년), 한방윤(韓邦胤)이 도암서원에서 고령 김씨 문중의 서책이 보관된 함을 발견한다.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김면의 시문과 일기, 문모계(文矛溪), 수서일기(手書日記)가 있었다. 한방윤은 이것을 채록한다. 이것을 최재억(崔載億)과 이회근(李悔根)이 제선생유집급문견신록(諸先生遺集及聞見新錄)에 수록하였다. 1774년(영조 50년), 현감 김수묵이 서문을 추가하여 1권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출간하지 못한다. 1785년(정조 9년), 김면의 후손이나 고령 김씨들이 이것을 보충하여 정리하였다. 다른 정보로는 동 시기에 김상보(金尙普)의 발문과 현감 김중조의 서문이 추가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36]
6.2. 간찰(편지)
6.3. 유적 성역화
김면 장군 유적지의 일부인 도암서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 있다. 유적은 그외에도 신도비, 도암사당, 묘소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면 장군 유적 성역화 조성 사업 공사는 총 6천 769㎡의 부지에 유적의 보수와 시설의 건립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09년 6월에 사업이 시작됐다. 공사는 약 2년의 기간이 걸렸으며 2011년 6월에 완료가 됐다.[38]
6.4. 관련 문서
(국역 국조인물고)김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면
(국역 국조인물고)김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송암실기
(향토문화대전)김면 장군 유적
(브리태니커) - 김면(金沔)]
(한국어 위키백과)김면
(인명사전)김면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6) 영남 3대 의병장 김면의 충절(고령)
6.5. 관련 항목
[1] 곽준(조선)[2] (디지털고령문화대전)임진왜란[3] 선조 34권, 26년(1593년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월 11일(병인) 15번째 기사[4] 1541년 (중종 36년) ~ 1593년(선조 26년)[5] (부경역사연구소)임진왜란 시기 경상 우도의 의병 조직의 변화와 의미[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72084&cid=2941&categoryId=2941[7] 임진왜란 당시의 직위로 조선 팔도 중 1도의 전체 의병들을 통솔하는 권한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정인홍과 김호 등이 의병 도대장으로 임명됐었다.[8] 선조 34권, 26년(1593년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월 11일(병인) 15번째 기사[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5365&cid=49345&categoryId=49345[10] 연려실기술 (이긍익 역사서) <燃藜室記述>[11] 송암 김면 장군 유적지[12] 이 학술 자료의 저자인 (부경역사연구소) 김강식은 "『松菴集』의 壬辰倡義同苦錄과 『濯溪集』의 壬癸別錄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두 자료에는 문제되는 부분이 있지만, 의병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라고 첨언하며 상기의 자료를 보고서에 첨부했다.임진왜란 시기 경상우도의 의병 조직의 변화와 의미[13] http://ko.wikipedia.org/wiki/%EC%9A%B0%EC%B2%99%ED%98%84_%EC%A0%84%ED%88%AC[14] 출처, 훗날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12척을 이끌고 한산도로 도망친 그 배설이다. 이순신은 그 12척으로 왜군에 맞서 싸우게 된다. 이후 배설은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수배령을 내렸고, 결국 1599년에 권율에게 잡혀 참형된다.[15] 남명학 연구원 - 김면(金沔)[16] (야후) 김면 장군 유적지[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219339[18]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8B%9C%EB%AF%BC[19]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8B%9C%EB%AF%BC[2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4226&cid=40942&categoryId=33383[2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1043&cid=1592&categoryId=1592[22] http://ko.wikipedia.org/wiki/%ED%99%A9%EC%84%9D%EC%82%B0%EC%84%B1_%EC%A0%84%ED%88%AC[23] 선조수정실록 31권, 30년(1597년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8월 1일(기미) 1번째 기사[2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5487&cid=40942&categoryId=33383[25]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A2%85%EB%8F%84[2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5989&cid=40942&categoryId=33383[2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81103&cid=46622&categoryId=46622[28]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3200876&local=gimcheon[2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0872[30] http://ko.wikipedia.org/wiki/%EC%84%9C%EC%98%88%EC%9B%90[31] http://book.interpark.com/blog/postArticleView.rdo?&blogName=ilsimyes&listType=B&listSize=3&contentLayoutNo=1&postSkinStyle=null&categoryNo=null&postNo=2788367[32] http://blog.naver.com/hind1204/16668656[33]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는 조선 시대에 있던 관직으로 중추원에 속하는 정삼품의 무관이다. 출처 [34] 조선의 품계[35]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으로 병사라고도 함[36] http://goryeo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900712&local=goryeong[37] 김면 선생의 간찰 - 한국국학진흥원 임진란 7갑주기(420년)[38] (대구) 되살아난 '의병 대장 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