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조선의 좌의정
《第 101 代》
송강 정철
松江 鄭澈 | Jeong C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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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宣祖 23年 - 宣祖 - 24年
제101대
1589. 02. 08 - 1590. 02. 01

이름
정철 (鄭澈)
출생
1536년 (중종 30) 음력 12월 6일
(그레고리력 12월 18일)
한성부 종로방 장의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사망
1593년 (선조 25) 음력 12월 18일 (향년 58세)
(그레고리력 1594년 2월 7일)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송정촌
(현 인천광역시 강화도)
질병으로 인한 사망
직업
시인, 정치가, 유학자
종교
유교 (성리학)
재임 기간
제101대 좌의정
1589년 2월 8일 - 1590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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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44> 별칭
총마어사 (驄馬御史)
시호
문청(文淸)

계함 (季涵)

송강 (松江)
칩암거사 (蟄菴居士)
국적
[image] 조선
붕당
서인]] (1575 - 1593)
작위
인성부원군
가족 관계
부모
부 : 정유침
모 : 죽산 안씨
배우자
문화 류씨
첩실 2명
자식
슬하 4남
정기명(장남), 정종명(차남)
정진명(삼남), 정홍명(사남)

1. 소개
2. 파란만장한 일생
2.2. 기축옥사 이후
3. 성격
4. 평가
4.1. 백성들의 악평
4.3. 교과에서
5. 대중 매체에서
6. 기타
7. 둘러보기


1. 소개



조선 중기의 정치가, 문인.
요즘은 거의 문인으로 언급되지만, 선조 중기 당시에는 정적들에게 자비없는 잔혹하고 비열한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조선 정치사에 가장 잔혹한 피바람을 불러왔던 기축옥사를 주도했다. 물론 기축옥사는 무엇보다도 선조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지만, 실제 이를 진행한 것은 정철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거기에 실록에 기록된 심각한 직무유기와 무능력 때문에, 잔혹함과는 별개로 관료로서의 평가도 좋지 못한 인물이다. 관료가 아니라 서경덕이나 김삿갓처럼 일반 선비였으면 후대에도 예술가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가사 작품 4개인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은 현존 중인 당대의 흔치 않은 언문 고전 문학 작품에 속한다.[1] 그런 점에서 이 네 작품은 문학성과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적어도 한 편 이상 실리고 있다. 유감이지만 자동으로 수험 공부에 필수 코스 당첨.
모든 고등학생, 특히 고3 수험생들에게 불구대천지원수 취급을 받는다. 바로 이 사람이 쓴 관동별곡 때문이다. 남녀노소,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인 경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 수능 국어 문학 파트에서는 한번 나온 작품은 최소 3년은 출제하지 않으며[2] 별로 유명하지 않은 건 다시는 안 나온다고 봐도 되지만 정철 작품은 반드시 다시 출제된다. 수능 뿐아니라, 대부분의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도 높은 확률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사 공부를 곁들이거나 국어(문학) 공부 때 정철 및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덤으로 공부하게 되면, 간신권신, 무능 이미지까지 겹쳐져서 정철에 대한 혐오가 더욱 극대화된다. 배우는 정철의 시조들이 전부 아첨하는 내용이라서 부정적 이미지가 안 생길 리가 없다.
흔히 가사 문학의 정석으로 알려졌지만, 원래 시조에 능했다. 흔히 배우는 조선문학은 크게 한시, 시조, 가사, 고전 소설인데, 한시나 고전 소설은 현대 국어 해석을 중심으로 나오지만 시조와 가사는 토 나오는 원문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가사의 달인 박인로나 시조의 달인 윤선도와 달리, 정철은 두 분야 모두 정점이라 그야말로 답이 없다.
또한 조선 후기 유행했던 사설시조의 시조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국문학의 작가들이 그렇듯, 현실에서의 인물상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서정적인 인간. 시조, 가사, 사설시조까지, 중시조 겸 시조를 맡고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위인. 물론 작품의 주 내용이 선조의 뒤 닦아 주는 내용이지만...

2. 파란만장한 일생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집안의 자녀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누나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었을 정도로 권력과 친밀한 집안이었다.[3] 그러나 아버지 대부터 가문이 기운 후[4] 그의 벼슬살이는 선조와 파벌들의 당쟁에 휘말려 계속해서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으며 그런 와중에 정여립의 난 (1589년)에서 선조의 부탁으로 위관이라는 수사 책임자로 활약했다. 이것이 피해를 입은 동인에게 악독한 인간으로 평가 받는데 영향이 컸다.

2.1.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당초 기축옥사의 위관은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이었으나 그가 정여립과 9촌지간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정철로 교체되었다. 정철은 병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선조는 내관을 3차례나 보내 입궐을 재촉했다. 결국 선조는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목숨을 버리는 예를 들며 가마에 실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며 기어이 위관에 임명한다. 그리고 1천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동인의 당대 영수이자 정철과 정적 관계였던 이발[5]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붙잡혀 죽게 된다. 전라남도 함평광산 이씨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 이라 외칠 정도라서 지금도 기일에 이 주문을 들어볼 수 있다.[6] 다만 정철 본인은 이발, 이길, 백유양 등의 이름이 여러 차례 진술에 나왔지만 그것이 정여립과 역모를 꾀한 증거는 아니라고 이발을 변호하였다.
당시 일으킨 기축옥사에 의해 정여립은 물론 그와 관계한 호남의 유지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동인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천여명이 죽고 수백명이 유배갔다고 엄연히 선조수정실록에 명기되어 있다.[7] 심지어 선조수정실록은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때 만들어졌으니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희생되었을수도 있다. 호남의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던 이발 형제들은 곤장을 맞다 참혹하게 최후를 맞았고 그의 어린 아들과 80이 넘은 노모 윤씨도 곤장을 맞다 숨졌다. 이발과 친분이 두텁던 진주의 선비 최영경도 정여립의 두령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쓰고 희생당했다. 이때도 정철은 노인이라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 받은 사실을 잊어버렸으며 최영경이 선조를 비난했다는 시구도 최영경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변호했다. 정승까지 하고 있던 정언신은 사건 직후 "이게 다 이이의 제자들 때문이다!"라고 정여립을 옹호하다가 정여립의 역모가 기정사실화되자 버로우했고 정여립과 편지를 19장이나 주고받은 사실이 들키고 만다.[8] 이때도 정철은 정언신이 정여립과 친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대신을 죽여선 안된다고 말려 정언신은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생 양형이 정언신이 고변한 자를 죽이려 한다고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정언신을 사사하려 했고 이번에도 정철은 재상을 함부로 죽여선 안된다고 말렸다.
여담으로, 을사사화(1545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청년 정철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9]에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김윤제[10]의 도움으로 공부도 하고 그의 외손녀와 혼인도 하면서, 출생은 서울 태생이지만 사실상 호남 출신이나 다름없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정여립의 난을 다루면서 자신의 사적인 원한으로[12] 관계된 인사들을 처벌[13]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향이라 아는 사람이 많았기에 엮기는 쉬웠고[14] 심지어 전라도 유생 정암수를 사주해 이산해마저 엮으려 했으나 실패한다.[15]
이게 결코 그냥 가볍게 넘길만한 사실이 아닌 것이 이 사건과 연루되어 까딱하면 이순신[16]을 비롯해 휴정, 유정 같은 인물들까지 줄줄이 엮여 숙청될 뻔했다. 만약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다면 조선의 앞날은...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정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체제비판적 성향인 호남의 유력인사 정여립이 모반을 꾸몄다고 조작하여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조 동인들의 시각이기도 했다. 당시 정철이 전라도로 사람을 보내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냈다는 식의 명백한 기록 또한 남아있다. 하지만 정철의 혁혁한 기여 덕에 전라도에는 '반역향' 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는 건 완벽한 오해로 정여립 사건으로 몰살당한 사람들은 이발을 위시한 호남 동인 강경 인사들 뿐 사건을 부추기고 확대시킨 것 역시 정철을 위시한 같은 호남의 선비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호남엔 동인 세력의 씨가 말렸고 이후로 호남에는 서인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서인의 기호지방(경기, 충청) 양반 만큼은 아니지만 호남의 서인 양반들도 서인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 득세한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결국 최종적 지휘자는 선조였다. 오히려 정철 본인은 이발, 정언신, 최영경 등을 변호하며 사건을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 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노인과 아이를 법에 따라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17] 이발 가문을 개발살내고[18]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고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19] 정언신의 경우, 선조는 처형시키려 했으나 정철이 재상을 함부로 죽여선 안된다고 말려서 유배로 감형한다. 후일 선조가 정철을 버린 과정을 볼 때, 서인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동인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2.2. 기축옥사 이후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오른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에서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하고 만다. 후사 논의를 조심스러워하는 선조의 의중을 모르고 서둘러 광해군으로 세자 책봉을 해야 마땅하다는 읍소를 올린 것.(송강연보의 기록) 이를 정철의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 한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선조는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빨리 후사를 명확히 해 두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 이에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와 서인의 대표인 정철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철과 원한이 있었던 동인 측이 도중에 빠지는 바람에, 정철만 혼자 나서는 모양새가 되어 정치 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이산해는 아예 나서지 않았고 류성룡은 나섰어도 입을 다물어 버렸는데, 정철만 홀로 후계 책봉의 정당성을 열을 내며 주장했던 것이다.[20][21]
정여립 모반 사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인은 정철에게 카운터로 '신성군 목숨이 오락가락' 드립을 날린다. 물론 이전의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정계의 밉상인 정철을 탄핵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선조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적극 활용, 세자책봉 논의 자체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지나치게 입지가 커진 서인 세력을 손보기 위해 모르는 척 받아들인다. 이것 역시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완전히 동일한 수순이었다. 이 건저의사건으로 정철, 성혼, 윤두수, 윤근수, 이해수, 홍성민, 이산보[22], 박점, 황정욱, 백유함, 유공진, 장운익 등 서인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한 동인이었던 이성중과 우성전[23]도 이 건저의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철을 밟아 버리기로 결심을 굳힌 선조는 정여립의 난에서 정여립의 수괴 길삼봉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남명 조식의 제자 최영경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철을 비난했다. 선조는 이 구실로 정철을 지근지근 밟아 버렸는데, 실록에는 조회에서 정철을 가리켜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 이라고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24] 또한 윤근수는 삭탈관직, 양천경, 양천회 등 최영경 등을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웃긴 것은 양천회, 양천경 등의 무고를 보고 선조는 처음엔 "이런 상소를 이렇게 늦게 올리다니!" 라고 한탄할 정도로 띄워 줬다는 것이다. 선조도 최후의 양심인진 몰라도, 역모 조작자로 몰릴 수도 있는 정철에게 추가적인 죄를 내리진 않았다.[25] 이때 동인이었던 홍여순김성일이 어떻게든 정철을 죽이려고 했으며 특히 김성일은 양천경의 인척인 기효증에게 무고의 배후가 정철이라는 것을 밝히면 양천경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덕형이 정철을 옹호하였고 양천경과 강해가 끝내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만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당시 동인이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갈등하던 것은 이산해의 강경파이자 광해군의 지지 기반인 북인, 류성룡의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호남+영남 서부)였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인 경상도 일대였는데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가 호남 동인 인사들의 씨를 말렸던 만큼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심하게 당한 북인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여겼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을 간 사람들도 풀어주어 활용하기 위한 결정들에 의해 복직되었지만, 임진왜란 중 선조를 수발하는 과정에서도 니나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술처먹고 긴급작전회의 불참 등 막장짓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또 미움을 샀다.
그리고 인생 마지막에 초 대형 사고를 치는데...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는데, 명나라 정부에 일본군이 모두 철군했다는 초특급 거짓 문서를 올려 버린 것이다. 이것 때문에 조선 정부와 명나라 파견군에서 난리가 났고,(선조 26년 11월 19일 기사) 정철은 이 사건으로 파직당했다. 결국 낙향한 정철은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강화도에 은거한지 한달만에 58세의 나이로 굶어죽어 생을 마감했다. 통상적으로는 낙향한 관리에겐 주변에서 먹을 것을 대어주지만 워낙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은 터라 굶어죽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임진왜란 관련 업무에서 사고를 쳤으니 백성들이 정철을 살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일 지경이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예전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감히 받지 않았는데,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도 약간의 것인즉 마음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3. 성격


정철은 강직한 성미로 인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 선조수정실록

기록에 따르면 한마디로 막장. 매우 아집이 강하고 속이 좁아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서지 않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이렇듯 대인관계가 개판이었던 그에게도 온건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인배가 더러 있는데 하나는 율곡 이이[26][27], 또 하나는 서애 류성룡. 특히 류성룡은 당파가 남인이었는데도 정철과 무난한 관계였으니 류성룡이야말로 진정한 대인배일지도.[28] 그 외에 노선이 일치하여 친밀했던 인물로는 같이 서인을 이끌어갔으며 정철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욕을 먹은 성혼도 존재한다.[29]
한때 정철의 부관이자 지금은 의병장으로 유명한 중봉 조헌 역시 특기할 만한데 조헌은 그 다혈질에 성깔 더럽기로 악명 높은 정철이 자신의 상관으로 부임하자 사퇴를 청원했으나 정철은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일해보고 그래도 싫으면 가라"며 조헌의 스승인 이이를 통해 극구 말린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이후 둘은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가 되는데 그 이유는 조헌 또한 기축옥사 당시 앞장서서 정여립의 측근들과 동인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격파였기 때문. 이렇게나 정치적 노선이 비슷한데 으르렁댔다니 이건 아무래도 일종의 동족혐오인 듯 싶다. 또한 같은 서인으로 정여립을 혐오해 정여립을 중용하면 사림 전체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이경중하고도 사이가 안좋았다. 심지어 이경중은 병사할 정도.
참고로 선조실록에서는 그를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卒)하였다. 【철은 논박을 받고 강화(江華)에 가 있다가 졸하였다. 】

사신은 논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의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에는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전대(專對)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선조실록이 쓰일 당시는 정철이 이미 몰락한 시점임을 염두에 둬야겠지만, 정철이 선조에게 그토록 충성을 바친 결과가 이 모양임을 생각하면 안습하기도 하다.
하지만 선조실록은 철저하게 동인, 그것도 강경파인 북인의 시각에서 쓰였으며 심지어 평생 동서인의 화합에 힘썼던 율곡 이이마저도 매우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정철에 대한 (서인의 시각에서 쓰인) 선조수정실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전(前)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하였다. 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왜적이 이미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고 속여 말했으므로, 본국의 주문(奏文)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철(鄭澈) 등이 돌아온 뒤에 병부(兵部)가 주문(奏文)하기를,

"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언 비어가 비등하여,

"정철이 북경에 가서 오로지 성궁(聖躬)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사(醜詞)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정철은 강화(江華)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향년은 59세였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그의 누나는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되고, 누이동생은 계림군(桂林君)의 아내가 되었다. 을사년의 화에 부형(父兄)이 관여되었으나 정철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 때 동궁(東宮)을 드나들었는데,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 정철과 유희(遊戲)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정철이 장원에 등제한 방목(榜目)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액문(掖門) 안에서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리라고 명하니, 정철이 사양하기를,

"이미 출신(出身)한 이상 남의 신하된 입장에서 감히 이런 사례(私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명종(明宗)이 주찬을 내릴 것을 중지시키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은권(恩眷)이 특별하였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중(臺中)에서는 바야흐로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사건을 논하면서 법대로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었다. 명종(明宗)이 친속으로 하여금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정철은 파면되어 광주(光州)에 돌아가 있게 되었는데, 여러 번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되었으나 3년 동안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당론이 갈라지자 그는 한쪽만을 극력 주장하다가 시론(時論)에 원수시 되었는데, 상의 권애(眷愛)를 힙입어 구제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에 이르러서는 상의 권애도 식어서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구제해 준 덕분에 조금 완화되었다. 그 뒤 변란을 인하여 폐고(廢錮) 중에서 기용되었으나 또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는 처신을 너무나도 모가 나게 하였으므로 유성룡(柳成龍)이 평소에 그를 미워하였다. 정유년에 유성룡이 탄핵을 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이 뇌물을 탐했다고 무고하면서 미오(郿塢)에 비유하자, 유성룡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논자들이 계함(季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탐비(貪鄙)로는 지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처신이 저 계함에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 하였다.

언젠가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에 대해 말하자 종사관(從事官) 서성(徐渻)이 그렇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계함이 항상 떳떳하게 스스로 이 일을 해명하였으나,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귀로 그 말을 듣고도 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사람은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숨기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흠(申欽)은 논하기를,

"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風調)가 쇄락(灑落)하고 자성(資性)이 청랑(淸朗)하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였다.

한때 정철을 논한 자가 간적(奸賊)으로 칭하자, 풍문이 퍼져 모든 사람이 뇌동하여 정철을 정말 소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평소 정철을 아는 자들도 여론에 현혹되어 그가 정말 소인인가 하고 의심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소인이라 칭할 때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고총(固寵)이요, 둘째는 첨미(諂媚)요, 셋째는 부회(附會)인 것이다.

정철이 적소(謫所)로부터 소환되어 언젠가 빈청(賓廳)에 앉아 있을 때 참판(參判) 구사맹(具思孟)과 지중추(知中樞) 신잡(申磼)이 동좌했었는데, 별감(別監) 한 사람이 안에서 주찬(酒饌)을 가지고 나와 말을 꾸며 이야기하기를,

"안에서 모든 재상들이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구사맹과 신잡이 모두 궁금(宮禁)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귀인(貴人)이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사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성중(李誠中)이 그 자리에 있다가 소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음식을 정승 앞에 나눠 드리도록 하자, 정철이 말하기를,

"이 음식은 구 참판과 신 지사가 먹어야 마땅하니, 대신이 참여해선 안 된다." 하고는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말이 대내에 들리자 정철이 그 이튿날 체찰사(體察使)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첨미·고총을 하지 않았다는 밝은 증거라 하겠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한때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로서 정철은 그들의 친구였으니,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참고로 수정실록이 편찬되었다면 양쪽 다 봐야 한다. 어차피 시선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건 똑같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동인 강경파인 북인 중에서도 대북의 주도로 작성되어서 심지어 남인들 마저 비판하고 있고, 반대로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이후에 작성되어서 이쪽은 이쪽대로 자기들 편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얼핏보기에는 반대당파인 동인 일부인 남인도 호평해준 수정실록이 괜찮아보이는데 이건 남인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정국운영이 어려웠던 인조 시기 정세를 무시한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남인은 서인을 더 높이기 위한 장치로 동원된거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 단적으로 수정실록은 유성룡이 정철을 싫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런 유성룡이 정철이 청렴한 처신에 있어서는 자기보다 더 낫다고 하는 장면이나 역시 정철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을 넣어서 정철을 높이고 유성룡을 낮추고 있다. 이 때문에 양측이 모두 똑같은 평가를 했다면 양측 모두에게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위치가 아닌 경우 한정으로 명백한 사실인 것이고, 만일 특정 부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어느 쪽이 사실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 된다.
다만 수정실록 내에서 정철이 권신과 악독한 정치인이 아니라고 한 근거들은 전부 정철의 개인적인 일화나 사관의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다시말해 검증이 불가능한 일화만으로 정철이 악독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거기에 실록에는 소인배의 요소로 고총(固寵 : 변하지 않는 총애를 받음), 둘째는 첨미(諂媚 : 아첨함), 셋째는 부회(附會 : 억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을 들면서 정철은 이에 해당하지 않으니 소인배가 아니라고 평가하는데, 사실 정철은 이 요소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행적을 보여준다. 다 재껴두더라도 자기가 쓴 관동별곡 하나만 따져도 선조에게 지나치게 아첨을 하고 있으며[30], 자신의 관람 때문에 벌어진 직무유기, 행정력 낭비를 자연에 대한 찬양과 조화로 합리화하고 있다. 같은 시대 같은 파벌의 조헌은 왕에게 지부상소를[31] 올릴 정도로 강직했고, 좀 먼 뒷날이지만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관람다니면서 직무유기나 백성들 방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정철의 행동은 선비로서도 지방관으로서 완벽히 실격점이다. 그리고 이런 행보와 (비록 논란은 많지만)[32] 기축옥사를 공식적으로 주도하고 진행한 인물은 정철 자신이었고 그 과정에서 10살짜리 어린애나 80대 여성이 고문사하는 등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악독한 정치가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사건들과 행보들이 즐비했다. 때문에 수정실록에서도 정철을 세간에서 악독한 신하로 평가받는다는 점은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수정실록의 기록 중 명종과 경양군의 기록은 명종실록에는 당시 정철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경양군 처벌뒤에도 정철은 승진해서 홍문관 부교리라는 요직까지 승진한 점등 모순되는 기록이 너무나도 많다. 다른 것은 몰라도 승진내역은 조작이 힘든 점을 생각해보면 수정실록의 신빙성은 더 떨어진다. 거기에 원래 수정실록은 당파적 왜곡이 심각한 실록이고 그중에서도 정철 기록은 너무나도 왜곡과 은폐가 많아[33] 평가도 믿기 힘든게 현실이다.
결국 정철의 평가를 모아보면, 유능한 문인이자 술주정이 심했던 무능한 관료이고 고집이 강했던 인물이라는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양쪽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쪽의 차이는 정철이 권신이자 악독한 정치가였는가라는 부분으로 모아진다. 선조실록은 정철의 처신을 정치적 권력욕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고, 수정실록은 정철의 행동을 결벽증에 가까운 곧은 인사로 묘사하면서 쉴드를 친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건으로 따지면 기축옥사는 배후가 있긴했지만 표면적인 주도자는 분명 정철이었고, 전쟁으로 한참 몽진하던 중에 술을 마시고 업무에 불참했던 행보나 본인이 쓴 시조들의 내용과 전후사정을 따져보면 악독한 정치가로 평가받을 만한 행보를 자주 보여주었고, 때문에 정철을 옹호하는 수정실록에서도 이런 세간의 평가는 인정하고 있다.
선조는 정철에 대해서 총애할 때는 한 마리 매와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한 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쳤다고 평가했다.

4. 평가


임진왜란 직전 서인 중신들을 살펴보면 행정, 외교 등 실무관료로서 두각을 보인 쪽은 윤두수, 윤근수 형제고 정철과 성혼(정철의 문인, 성혼의 학자로서 위상은 별도로 치고)목소리 높여 동인과 싸움박질하는 싸움꾼, 선봉대장에 가까웠다. 정여립 일파와 정적인 동인에 대해 피비린내나는 잔혹한 탄압과 견제를 가하고 이후 서인의 분열에도 한몫을 한 사람, 정치적인 업적은 별로 없지만 정치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기묘한 위치에 있다. 또한 성격이 극단적이고 독선적이며 알콜 중독자이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가 틈만 나면 탄핵당한 이유는 정적의 모함 이상으로 그가 민심을 못 샀기 때문이다. 거기에 임진왜란 도중에는 술처먹고 작전회의에 불참하고 명나라 정부에 일본군이 철군했다는 가짜정보를 뿌리는 등 초대형 사고들을 처셔 객관적으로도 높게 평가해줄수 없는 인물이다.
당대 사대부들의 유학적 세계관 상 상소나 조정회의에서 신나게 왕을 까는 것과는 별개로 사대부들은 왕을 찬미하는 시나 문학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정철은 뛰어난 글솜씨를 가지고 시를 지을 때 화려한 미사어구와 여러 수사들을 말 그대로 도배한 가사를 다수 남겼는데, 우리 역사에 남아있는 문학 작품이 희소하다 보니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문학적으로 평가를 받아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래도 젊은시절에는 나름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정철이 젊은 시절이던 명종 21년(1566년)에 왕족인 경양군[34]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친척이 관여된 일이므로 정철을 설득시켜 조용히 넘어가려 했으나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하고 만다. 이로 인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하기도 했고… 허나 사실 이 기록은 선조수정실록 정철졸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정작 명종실록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당시 경양군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선것은 당시 우부승지였던 윤두수이고 정철은 일말의 기록도 없다. 그리고 수정실록에는 정철이 이일로 파면당했다고 말하는데 정작 명종실록에서 정철은 몇달만에 빠르게 승진하고 병조참의로 함경도에 경차관으로 임명되는 등 나름 승승장구하다가 명종이 죽은 뒤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실록 편수관까지 담당한다. 그래도 선조에게 "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 당한 적이 있기는 하다. (참고)선조수정실록 3권, 선조 2년 6월 1일 계유 3번째기사 또한 서인 쪽의 변호에 따르면 정철이 자기 관리를 못해 망가진 것은 사실이나 간적이라 할 정도로 무슨 세도를 부릴 위상은 아니었다고 한다.[35]

4.1. 백성들의 악평


정치인으로서의 악명은 민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강원도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들에선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것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능력보다 인성을 중시한다는 유교와 그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는 가짜 선비. 예를 들면 어느 마을에 갔더니 주민들이 바위를 섬기니까 바위를 쪼개버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는데 왠지 강원도 관찰사 시절 강원도 백성들한테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철 같은 놈' 은 한동안 탐관오리를 상징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웃기는 건 본인은 <관동별곡>에서 '급장유와 같은 좋은 정치를 하겠다'라고 큰소리친 전력이 있다는 것. '선정에 대한 포부'라고 배운 그 부분 맞다.
좋은 평가도 있기는 한데, 징비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가 왜란 발발 후 5월 1일에 개성에서 몽진을 갈 때 길가의 백성이 "정철 정승을 불러 쓰소서." 해서 정철을 복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실은 개성의 유생들이 선조가 사람을 천거할 것을 명하자 정철을 청한 것으로 당시 개성은 유생들의 절반이 성혼과 이이의 제자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기호학파의 세가 강한 곳이었다. 정철이 성혼과 이이의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니 이 사건은 이를테면 '동인들 때문에 나라 꼴이 이렇게 됐잖음 우리 사숙어른 복귀 좀요 징징' 정도의 사건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러니까 양반(그나마 같은 당색의 유생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좋은 평가를 내렸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화다. 그리고 사실 백성의 청원은 전후관계와 선조실록과 비교해보면 완벽한 역사왜곡이다. 임진왜란 직전 정철은 강계에 유배가 있었는데 당시 선조가 강계로 피난갈 계획을 잡았고, 이것 때문에 강계 지역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어서 강계로 유배가있는 고위관료인 정철을 부른 것이다. 실제 정철은 선조를 만나자 마자 첫 어두부터 강계이야기로 시작했으며 백성의 추천로 정철이 등용되었다면 무슨 정치적 전략적인 토론을 벌여야 하는데 정철과 선조는 만나자 마자 오로지 강계의 상황에 대해서만 묻고 답한다.

4.2. 술고래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어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 류성룡, 운암잡록(雲巖雜錄)에서[36]

사헌부에서도 정철 관련해서는 술이 빠지지않고 언급되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도승지 정철은 술주정이 심하고 광망하니 체직시키소서. 원접사의 종사관은 그 재주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때의 극선인 인물이어야 하는데 고경명은 전일에 권간에게 붙었었으니 다시 차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연일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13년 9월 13일

사헌부가 아뢰기를, "예조판서 정철은 술을 좋아하고 실성하여 지난날 승진 발탁했던 일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물의가 많은데 반년도 채 못 되어서 또 갑자기 종백으로까지 초수하니 물정이 온편치 못하게 여깁니다.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않았다.

<<선조실록>> 16년 4월 1일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주당으로 폭음에 따른 주사를 부려 낭패를 본 일도 많았다고 한다. 작품 중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라는, 장진주사라는 작품도 있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왕인 선조가 정철의 애주에 감탄(?)해 하사한 술잔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조가 '그대가 술을 좋아하나 너무 과함이 걱정되니 앞으로 이 잔으로 하루에 한 번만 마시라, 즉 술 좀 작작 마시라는 의미로 하사한 은잔을 이 작자가 한 방울이라도 더 마셔보겠다는 집념으로 망치로 두드려 펴서 사발로 만들어 마셨다나. [37] 이 이야기는 성종 시절의 재상이자 술고래 손순효가 원조이며,[38] 정철이 이 이야기를 주워듣고 술잔을 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철과 친분이 있던 류성룡조차도, 정철의 술버릇에 대해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밤 이경에 급보가 평양으로부터 왔다. 임금께서 여러 대신을 빈청으로 불러서 회의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정철은 술에 취하여 오지 않았다.

이는 1592년 7월 25일자 선조실록 기록이다. 즉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의주까지 몽진을 온 상태로 조승훈의 명군이 평양성에서 패전했다는 급보가 왔는데도 저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놓고 관동별곡의 결사 부분을 보면, 신선이 화자에게 술 한잔 권할 때 한다는 대답이 "백성들을 먼저 마시게 한 후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마시겠다."라며 선우후락인 듯 선우후락 아닌, 위선의 극치를 적어놓았다.

4.3. 교과에서


후세에 남긴 대표작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이 있다. 관동별곡은 제7차 교육과정의 국정교과서 시절 고1 국어과정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등학생들을 괴롭혔다. 교사들이 얼마든지 이것을 꼬아서 기출문제로 낼 정도다.
얼핏 보면 사모하는 님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어 마치 그리운 연인을 묘사하는 게 아닌가싶지만 국어 시간에 졸지 않은 학생들이면 다들 알다시피 이게 전부 당시 선조에 대한 묘사다. 보통 유배를 간 선비는 본인을 다시 불러달라고 이런 식의 러브레터를 보내기도 한다.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대자'로 표현하고 있는 중.
예시로 다음은 사미인곡의 일부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골수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名醫)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힌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다시 말하지만 이거 왕한테 쓴 시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이 고평가했던 작품이다.[39] 동방(조선)의 이소라고 평가할 정도.[40] 그런데 조금 짜게 식을 내용을 추가하면 김만중은 정철 후대의 서인으로[41], 자신도 정쟁 중에 유배가서 쓴 서포만필에 저 이야기가 나온다. 김만중이 속미인곡을 높이 평가한 것은 우리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가사와 소설로 이어지는 문학 장르적 성향도 그렇고, 결국 풀어주세요로 대표되는 작가의 마음 등 김만중이 공감할 여지는 엄청나게 많았다.
아마 고등학생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정철을 떠올릴 때 국사 과목에 묘사되는 선조대 서인을 대표한 권력 투쟁의 화신이라는 기억보다는 국어 과목을 통해 수능 언어영역에서 외계어에 가까운 문장으로 한층 더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악독한 이미지로 각인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정철의 아부와 탐관오리 행보를 아는 사람들은 이런 아부성 시조를 교과서와 수능시험에 올리는거를 두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일단 문학 자체는 사람의 인성과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42] 정철의 시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정철의 아부와 직무유기를 단순한 충섬심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포장하는 교사와 시험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인간을 포장해서 가르쳐야하는지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김만중과 달리 대표작인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모두 정철이 욕먹는 아부, 직무유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조라 더 논란이 크다.[43]
학교대사전에서는 수험생을 괴롭히는 사천왕으로 꼽기도 했다. 그가 쓴 시가의 극악한 난이도와 오글거림으로 인해 문, 이과 상관없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존재. 실제 7차 교육과정[44] 시절 고1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관동별곡' 은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며 7차 개정 교육과정 고 1 국어 교과서에서도 16종 중 8종에 관동별곡이 수록되어 있다.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만난 진옥이라는 기생과 나눈 화답시조가 있다. 꽤나 로맨틱하면서도 야한 시조다. '옥이 옥이라커든...'
그리고 위에 정철의 술고래 관련으로 언급된 장진주사도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걸 시조로 보는 입장과 가사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시조로 보는 좀 더 보편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이 사설시조의 원형, 혹은 최초의 사설시조가 된다.

5. 대중 매체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소설문학상인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자이며 남한산성, 칼의 노래 등으로 유명한 작가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입을 빌려 정철을 대차게 디스하는 부분이 나온다. '우의정 정철의 그 피의 국면을 주도했다. 그는 민첩하고도 부지런했다. 그는 농사를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살육의 틈틈이, 그는 도가풍의 은일과 고독을 수다스럽게 고백하는 글을 짓기를 좋아했다. 그의 글은 허무했고 요염했다.' 언급한 부분처럼, 정철의 정치적 행보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엄청나게 혹평했다.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홍민우가 담당하였다. 자기 고집을 밀어붙이는 성격으로 나오지만 머리는 좀 안돌아가게 묘사된다. 덕분에 이산해와 유성룡이 세자책봉문제에 소극적인데도 이들을 자기 멋대로 동의시키고 선조에게 세자책봉을 건의했다 제대로 당한다.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윤주상이 열연했다. 거기서는 우직하고 기가 드세고 올곧은 선비 중의 선비의 모습으로 나온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안대용이 연기했다. 안대용이 그간 맡아왔던 역할[45] 때문인지 다소 권신 캐릭터와 비슷해 보인다. 여기서도 건저 사건으로 인해 실각하는 모습까지 나온다.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주진모가 연기했다. 주인공인 광해군을 지지하느라 처신을 소홀이 한 대가로(!) 쫒겨나는 길에 광해군에게 "그런 식으로 보이는 호의는 반갑지 않다."며 일침을 듣는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선동혁이 열연하였다. 성혼과 함께 서인 강경파로 나오며 건저문제로 잠깐 퇴장했다가 임란이 일어나자 복귀. 이후 선조의 행각에 질린 다른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선조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듯. 이제는 오히려 선조보다는 광해군을 지지하고 있다.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일본과의 강화[46]를 핑계로 공격을 멈추자, 만력제를 알현하여 적극적으로 진격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됐다. 하지만 석성 역시 핑계를 대며 거절하자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왔고, 대간들은 그를 탄핵하였다. 결국 선조가 마지못해 그를 삭탈관직시킨다. 돌아왔을 때는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앞둔 상태[47]였기 때문이 선조가 나름 배려를 해준 셈. 이후 윤두수를 만나 훈민가 16수를 읊고 나레이션과 함께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삼국지 11의 유즈맵 아이돌 대전에서는 드라마 상에서의 정철 캐릭터가 군주로 등장한다. 지바냥, 후도 유세이, 키라 츠바사, 시마다 마유와 함께 최약의 4대 진영 중 하나로 휘하에는 귀문 특기를 가진 송익필뿐이다. 귀문이 사기 특기이긴 한데 소모되는 기력이 너무 많아서 백출 특기를 가진 무장이 없으면 있으나마나하는 기술인데다 바로 인접한 선조랑 만력제가 동맹 관계라 둘이 같이 쳐들어온다면 디펜스만 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패치로 선조랑 서로 시작위치를 바꿔 계양으로 옮겼지만 어려운건 여전하다. 그래도 유세이보단 잘 버티는 편이다. 대개 시나리오에서 가장 먼저 망하는 게 유세이라서...
웹툰 오성X한음에도 실제 역사에 근거한 모습으로 기축옥사편에 등장, 선조를 대신해 반대파들을 숙청할 때 눈동자가 시뻘겋게 묘사되면서 제대로 폭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훗날 광해군 세자 책봉문제로 선조에게 팽을 당하고 나서야, 그간의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광기에 물들어 폭주하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고한 인물이었던 이항복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말라고 충고하며 귀양길을 떠나며 퇴장한다. 이 때 선조에게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한 마디를 남기는데..

"하~ ㅅㅂ 그동안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웹툰 매지컬 고삼즈에선 고3들을 고어로 깔아뭉개는 요괴로 등장한다.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서 등장한다. 파직 당해 북방으로 전가사변되는데 같이 전가사변 된 양반들은 향군장 노릇이라도 하는데 혼자서 맨날 술먹고 시만 쓴다. 오죽하면 노비들에게조차 술만 먹지말고 땔감거리라도 주워오라고 타박받을 정도. 다만 여진족의 난이 터지자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올려 그 공으로 전가사변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주인공도 권력을 주기엔 위험한 걸 아는지라 책이나 다루는 사전청 도제조로 임명하는데 그야말로 덕업일치되어 술조차 끊고(!) 서양 서적들을 번역하는데 영혼을 불태운다. 사전청 관원들은 제사일 아니면 무조건 휴일 없이 출근이고 본인은 아예 그런 것도 없이 무조건 출근. 이후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이 끝나자 전범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처형조차 막아내면서 전쟁 당시 기록을 편찬한다. 이렇게 과로했지만 그래도 술은 끊은 덕에 원래 수명보다 더 살고 죽었다.
소울 칼리버 6황성경의 스토리 모드에서 이름이 언급된다. 소울 엣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서인의 우두머리로 동인 쪽에 소속된 인물인 성한명과 그의 친구이자 해군 제독 이순신의 동인과 대립하고 있으며 틈만 나면 동인 쪽 방해꾼들을 숙청하려고 드는 강경파 인물로 그려졌다. 그리고 게임에서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되는 걸 보면 이 소울 칼리버 세계관에선 정철이 "있지도 않는 동인의 반란을 꾸며내서 동인 쪽 사람들을 숙청했다"는 음모론을 정사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지만 수성에 본 문서의 인명에서 유래한 '정철'이라는 이름의 크레이터가 있다. 1979년에 승인된 이름이라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적용한 'Chŏng Ch'ŏl'이라는 철자로 등록되어 있다. #
  •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48]에 이 송강을 기념하는 송강마을이 있다.
  • 현재도 정철의 시조가 중요 시험문제로 출제되고 있다. 특히나 고3 수험생들에게 과거로 돌아가면 제거해야할 대상 1순위일 정도로 관련 문제들이 악명높고 어렵다.

7. 둘러보기




[1] 구운몽의 저자인 조선 시대의 문인 김만중은 여기서 성산별곡을 제외한 세 작품을 좌해진문장(우리 나라의 참된 문장)이라며 극찬하였다.[2] 결국 수능 빈출 문학 작품을 찾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3] 어린 시절 명종과 정철은 궁궐에서 함께 뛰어다니며 크기까지 했다.[4] 을사사화로 계림군이 사망, 그의 가문이 계림군과도 연관되어 있던지라 그의 친형이 곤장을 맞다 죽었다.[5] 동인의 강경파로서 서인인 심의겸, 박순, 송익필, 이항복 등을 탄핵하며 서인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인물이다. 특히 정철과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는데, 한 번은 언쟁을 하다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야사가 존재할 정도다.[6] 실제로 이 소리를 들어보면 외친다고 하기보다는 고기를 다지면서 중얼대는 식이다. "정철정철정철정철..." 대충 이런 식. 여기다 특유의 전라도 억양까지 더해져서 실제 발음은 "증철증철증철..." 또는 "증철이 조사라(전남 방언 '조수다(다지다)' 의 명령형. 즉, '다져라') 증철이 조사라..." 혹은 성을 떼고 "철철철..." 이라고 한다는 일화도 있다.[7] 《선조수정실록》 25권, 24년 5월 1일[8] 본디 선전관이었던 이응표가 그와 친해서 정여립의 집에 들어가서 정언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없앴는데 하필 문인들이 당시 멋을 부려서 이름 대신에 다른 걸 집어넣기도 했는데 이응표가 무신이라 그걸 몰라 그 19편은 없애지 못했는데 이응표가 다 없앴다는 말을 믿은 정언신은 부인했다.[9]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지실마을. # 이 곳은 현재도 연일 정씨의 집성촌이다.[10] 충장공 김덕령의 작은 할아버지.[11] 하지만 당시는 출신지와 당파는 관계가 없었다.[12] 정개청을 역모에 엮은 이유는 정여립의 집터를 봐줬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철이 젊었을 적에 훈계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그 내용은 정철처럼 술 마시고 노는 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라고 말한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건 정개청의 제자들의 주장이고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고, 박순과 친했던 정철은 그를 비루한 자라고 여겨 가혹하게 고문하여 죽게 만든다.[13] 역모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예가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단순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1,000여 명 이상을 희생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14] 선조가 이 점을 고려해서 정철에게 사건 처리를 맡겼다는 시각도 있다.[15] 선조는 이산해, 유성룡, 정인홍 등 동인 수장격 인물들을 탄핵한 상소는 아주 강하게 거부하며 상소한 자를 깠는데 특히 조헌의 상소에는 그를 간귀라 부른다.[16] 이순신은 류성룡과는 지기이기 때문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순신은 당파는커녕 중앙 정쟁과는 관계없는 무관에 기축옥사 당시는 임란대비를 위해 초고속 승진을 하던 시기라 숙청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애초에 무장은 정치와 별 연관은 없다. 적어도 정여립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야지 숙청감인데 그것도 아니니(...)[17] 설령 진짜 군사적으로 역모를 일으켰다 진압되었다고 해도 최소한 어린애와 노인은 안죽인다.[18] 이 집안은 이발의 8대조부터 9대동안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호남의 넘버 원 가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이발+그 동생들+일가 친척이 다 죽어서 완전히 파멸했다.[19] 하지만 후일 동인 계열에선 정철이 어차피 선조가 최영경 죽일 것을 알고 일부러 멋 부린 것이라고 폄하했다.[20] 엉뚱하게도 선조는 "내 나이 젊거늘 그 무슨 말인가?" 라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 선조가 이런 말을 했다면 왕 자격이 정말 없다고 봐야 옳다. 우선 세자는 왕이 젊은지 늙은지와는 연관없이 책봉된다. 대게 원자의 나이 8살이면 성균관 입학례와 세자 책봉례를 치러 세자가 된다. 즉 나이랑 책봉은 관계없는데, 억지 쓴 것. 당장 세종대왕만 해도 26세에 세자를 책봉했다. 물론 대군이 아닌 군을 책봉하는 첫 사례인 만큼 조심스레 할 필요도 있었지만, 40대에 접어든 선조가 할 말은 아니었다.[21] 이 과정이 이산해의 계산이라는 설도 있다. 건저의 문제에 대해 선조의 의중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철의 성격이 급한 반면 유성룡의 성격은 침착해서 절대 입을 먼저 열지 않을 것이므로 이산해마저 입을 다물어 버리면 성격이 급한 정철이 먼저 입을 여는, 즉 총대를 메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22] 동인 영수인 이산해와는 사촌형제로 이이와 친했기 때문에 서인이 되었다.[23] 동인 영수 허엽의 사위.[24] 이때 같이 까인 인물이 정철과 함께 당시 서인을 이끌었던 성혼이었다. 때문에 간혼독철이라고 같이 붙어서 표현된다.[25] 어쩌면 또 기축옥사같은 일이 생기면 써먹으려고 남겨놨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선조는 대신이라 해도 가차없이 쳐버렸지만 각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뭐가 되든지 간에 보호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기축옥사때 심문받던 이들에게서 유성룡의 이름이 나오자 유성룡이 피혐을 했는데, 선조가 "금옥같은 선비" 라 부르면서 옹호했다.[26] 정철도 이이에 대해서는 고마워했는지 이이가 죽자 "나하고 친해봐야 좋은 거 없었을 텐데 율곡 그 친구는 30년간 관대히 대해주었다. 내 안 좋은 성격 때문에 골치 꽤 앓았으니 절교할 만도 했을 텐데..." 라고 추모하기도 했다.[27] 사실 이이는 정철을 지조 있는 선비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사실 율곡이 정철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게 그 당시에 고독했던 율곡의 가치를 인정해주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과 같은 서인 계열에 속한 백인걸, 박순, 성혼, 정철 정도였다. 실제로 정철은 귀양을 가면서도 이이를 걱정하기도 했다.[28] 아무리 남인이 온건파라지만 정철이 남북을 망라한 범동인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인식됐는지 생각해보면... 남인 내부에서도 정철과 관계를 끊지 않는 류성룡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북인은 아예 대놓고 류성룡을 깔보고 씹어댔다. 또한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노련한 정치가들은 반대 당파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많이 쓰거나, 현대에도 정당이 달라서 국회에서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으르렁거려도 사적으로는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 정치인들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류성룡이 정철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안배도 있었을 것이다.[29] '재#s-2 너머 성권농 집에 술익었다는 말 어제 듣고' 로 시작하는 정철의 시조에 등장하는 성권농이 바로 당시 권농관의 직책에 있었던 성혼이다.[30] 다만 선조의 심기를 거스르는 상소와 직언도 상당히 많이 했다. 옳은 직언을 하다 선조의 심기를 건드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세자건저 문제에선 실각의 위험을 알고 이산해와 류성룡이 발을 빼는 와중에도 건해서 결국 유배까지 갔다.[31] 도끼를 들고가서 상소를 올리는 것으로 진짜 사형당할 각오를 하는 행동이다[32] 사실 선조가 주도해 동인을 숙청했고 정철은 바지사장이라는 논란이 많다[33] 일례로 정철이 말년에 저지른 일본군 철군 거짓정보 사건은 명나라 유정이 항의한 일로 알려진 것이라 신빙성이 있는데 정작 수정실록에는 일말의 기록도 없다[34] 성종의 손자로 성종의 서자 이성군 이관의 아들이다[35] 당시에는 이산해, 류성룡 등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보기에도 정철은 그냥 선조에게 놀아난 수준으로 밖에 안 보이고.[36] 류성룡은 위에도 언급되었듯 대인관계가 개판이었던 정철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던 인물임에도 그의 주벽만큼은 넘어가지 못했던 것 같다.[37]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다. 송강 정철 13대 후손 왈 : 송강에게 절주하라고 선조대왕께서 은대를 내리셨는데 그걸로 자시다보니 적어서 더 먹었으면 해서 망치로 두드려서 늘렸다고 하는 일설이 있는데, 확실한 얘기가 아니고, 자국이 조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만드는 과정에서 두드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망치 자국이 보이는 것이지 일설과 같이 술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망치로 두드렸다고 하는 건 신빙성이 없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 다만 실제 은잔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술잔이라고 하기엔 사발만큼 매우 크며, 망치질된 모양새가 왕의 하사품 치고는 매우 조잡하다. 물론 안 그래도 정철이 속 좁기로 유명한 선조에게 찍힌 마당에 왕이 하사하신 물건에 이런 짓을 하다가는 목이 남아 났을지도 의문이다.[38] 하지만 손순효가 재상으로서 발휘한 능력은 정철 따위가 비빌 레벨이 아니었다. 성종이 평소 말술인 손순효를 걱정하여 은으로 만든 주발을 하사하고 "이걸로 하루 한잔만 마시게" 라고 어명을 내렸지만, 손순효는 그것을 대장간에 맡겨 거의 세숫대야 사이즈로 늘려서 술을 부어 원샷하고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취중이던 차에 성종이 명나라에 보낼 외교문서를 쓰려고 손순효를 불렀다. 그러나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입궐한 손순효를 본 성종이 "하루 한잔만 마시라고 했는데 과인의 말을 어긴겐가?" 라고 책망하자 크게 늘린 주발을 보여주며 "즈언하 신은 분명히 이것으로 딱 한잔만 마셨사옵나이다" 라며 답했고, 어이가 털린 성종은 외교문서를 다른 신하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손순효가 부득부득 자기가 쓰겠다며 우겨서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는 명문이라 성종도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성종 또한 소문난 술꾼이었는지라 틈만 나면 손순효와 허리띠 풀고 부어라 마셔라 할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39] 김만중의 저서 '서포만필'에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 작품이 우리말로 아름답게 표현한 점을 높게 평가하였으며, 우리의 참 문장은 이 세 작품 뿐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고평가한 작품은 속미인곡이다.[40] 이소는 초나라의 현실을 개탄하여 멱라수에 몸을 던졌던 굴원이 쓴 시다.[41] 김만중의 증조부인 김장생과 조부인 김반은 모두 정철의 친구인 송익필의 문인이었다.[42] 젊었을 적에는 친일 활동에 앞장서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에 아부하여 후세에 갖은 비난을 받고 있는 서정주의 시가 문학 교과서나 수능 지문에 버젓이 나오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43] 김만중이 환국 문제로 비판을 먹긴하지만 적어도 정철처럼 학살 수준의 옥사나 전쟁 중에 이적행위 수준의 직무유기를 한 적은 없고 김만중의 대표작인 구운몽은 어머니를 위해 쓴 소설이고 사씨남정기도 당파색이 있긴하지만 정철의 시처럼 심각하지는 않다.[44] 학교대사전은 6차에서 7차로 교육과정이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에 쓰였다.[45] 안대용은 용의 눈물에서는 조박, 그 후속작인 왕과 비에서는 정창손으로 분했고, 그보다 조금 뒷시기를 다룬 여인천하에서는 홍경주 역할을 맡았다. 조박이나 정창손, 홍경주는 모두 공신에 책록된 바 있고, 드라마에서의 이미지 역시 권신의 이미지가 강한 역할이었다. 다만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의 스승인 범교 역할을 맡기도 했다.[46] 정확히 말하자면 고니시 유키나가심유경이 벌인 국제 사기극으로 맺어진 강화.[47]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년이 지난 1593년에 사망했다.[48] 행정동으로는 원신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