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헬렌스 화산 폭발
1. 개요
1980년 5월 18일, 미국 워싱턴 주 세인트 헬렌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자연재해.
2. 폭발 전 상황
세인트 헬렌스 화산은 1857년까지 작은 폭발을 일으키고는 하다가 계속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지진계는 1970년대에 와서야 설치됐다. 1980년 3월 15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화산성 지진 다발이 관찰되었는데, 이날 이후 지진활동은 급증했다. 같은 달 20일에는 규모 4.2짜리 지진이 일어났다. 미국지질조사국은 집중적인 관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지진 관측시설을 추가로 설치했다. 3월 말쯤에 이르러 지질조사국과 연구팀은 지진활동이 확실하게 늘어남을 확인하고는 화산 활동의 징조라고 받아들였다.
27일엔 수성분출(phreatic eruption)이 발생해서 2100 m 정도 되는 분연주를 형성했다. 123년 만의 첫 폭발이라 구경꾼 수천 명이 몰려들었고, 장사꾼들이 화산이 그려진 머그컵이나 티셔츠를 판매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심 속에 미국지질조사국 과학자 데이비드 존스턴(David A. Johnston, 1949-1980)을 비롯한 지질학자들은 앞으로 있을 분출의 징조라며 TV에 출연해 경고했고, 지역 보안관은 이를 받아들여 산 정상에서 11 km 내의 도로를 폐쇄하고 주민과 관광객들을 대피시켰다.
29일엔 화산이 다시 잠잠해졌지만, 정상의 눈이 녹고 새로운 분화구가 생기는 등 폭발의 징후는 여전히, 확실히 나타났다. 과학자들은 피해 예상지역을 조사하고는 수직폭발을 예상하였다. 하지만 자문기관인 지질조사국엔 지역폐쇄 권한이 없어서, 미국산림위원회가 지질조사국의 정보를 바탕으로 2단계 출입제한구역을 정했다. 화산 정상에서 반경 11 km 안쪽은 제일 위험한 구역으로 경찰과 과학자만 출입이 가능하게 했고, 반경 24 km는 벌목회사 직원[1] 이 출입 가능했다. 하지만 지질조사국이 화산이류(라하르)의 위험성이 있다 경고한 지역에는 여전히 일반인이 출입 가능했다. 지질조사국이 워싱턴 주 주지사에게 계곡 가는 길을 막아달라 요청했지만, 주지사는 낚시철이 시작되는 때라는 부담, 폐쇄에 따르는 비용과 지역경제를 고려해 거부했기 때문이다.[2]
연구팀은 늘어나는 지진 활동과 지표변위, 화산 가스 활동 감지 등을 종합한 결과 화산이 활동을 재개한다고 판단했다.[3] 그들은 재빨리 지표 변위 관측을 위한 반사판과 지진계를 설치한 관측시설 두 곳[4] 를 설치했다. 이곳에는 USGS의 여러 연구진이 교대로 비번을 섰는데, 그곳에서 마지막 2주 동안 주로 감시(monitoring)를 수행한 사람은 해리 글리켄(Harry Glicken, 1958-1991)이라는 젊은 대학원생이었다.[5]
지표변위는 무척 특이했다. 정단층이 발달하고 산체가 부풀고 변형되어 하부에서 무언가가 밀어올리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특히 북쪽 사면이 크게 변형되어 이곳에서 사태가 발생하여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산체 한 면이 붕괴되면 측면폭발(lateral blast)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6] 세인트 헬렌스 화산이 확실하게 발달한 화구가 없고,[7] 산체가 변형됐기 때문에 측면분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소수의견인 데다가 USGS 소속 학자 주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USGS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층화산 분출은 상부에서 수직분출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과거의 세인트 헬렌스 화산 분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과학자들을 설득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부족했던 모양이다.[8] 인간들이 뭐라고 입씨름을 하든 화산의 예고장은 수도 없이 날아왔다. 산체는 하루에도 1~2 m씩 변형되어 그 속도가 놀랄 만했다. 수성분출활동도 이따금씩 일어났고, 화산 가스에 의한 현상도 종종 보고되었다.
5월 17일 토요일, 미국 전역에 화산에 대한 뉴스가 나갔지만 막상 화산은 여전히 잠잠'''한 듯했다.'''[9] 사람들은 화산이 폭발하리라 예측한 이들을 두고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라고 했다.[10] 또한 주말인 데다가 날씨가 워낙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세인트 헬렌스 화산에 놀러갔다.
한편 16일 저녁에 돈 스완슨(Don Swanson)은 존스턴을 찾아가 18일에 콜드워터 II 기지에서 비번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이유인즉슨 5월 10일부터 내리 관측하던 대학원생 해리 글리켄이 18일에 맘모스(Mammoth)에서 연구 관련으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존스턴은 내키지 않았지만 승낙했다. 글리켄은 떠나기 전날(17일)에 유명한 사진 두 장을 찍었다. 하나는 분출하기 직전 세인트 헬렌스 산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존스턴이 콜드워터 II 야외 간이의자에 앉아 글리켄을 보고 활짝 웃는 사진이었다.[11] 존스턴은 17일부터 산을 돌아보고 콜드워터 II 기점에서 추가적인 변화를 살피기 위해 대기했지만 18일 아침이 되도록 별다른 차이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3. 폭발
1980년 5월 18일[13] 일요일 데이빗 존스턴은 북쪽 사면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4시간 동안 관찰한 후 지질조사국 워싱턴 지국으로 자료를 전송할 예정이었다. 오전 8시 22분, 부풀어 오른 북쪽 사면이 무너져 내리면서 산사태가 발생했고, 산사태가 마그마를 막던 암반을 치워 32분에 드디어 '''산이 폭발했다.'''[14] 폭발은 존스턴이 예상했던 대로 측면폭발이었다. 마그마가 산체를 밀어올리다가 산이 변형되자, 북쪽 사면을 무너뜨리고 감압을 일으켜 터져나온 것이다. 존스턴은 밴쿠버 기지[15] 에 폭발 사실을 알린 뒤 측면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쇄설류에 휩쓸려 무전이 끊어지고 사망했다.'''"Vancouver! Vancouver! This is it!"'''
밴쿠버! 드디어 폭발했어!"'''
폭발 당시 지질학자 데이빗 존스턴이 알린 무전이자 그의 유언.
측면폭발 '''산 정상부 400 m와 북쪽 측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면서''' 엄청난 돌과 흙, 물이 화산쇄설류와 함께 터져나오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당장 폭발 전후 사진만 봐도 나오듯 산 반토막이 날아가버린 거대한 폭발이다. 가장 먼저 대형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이때 무너져 내린 양은 약 '''2.9 km³''', '''여의도 전체를 650 m 높이로 덮을 수 있는 양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인 롯데월드타워의 높이가 고작(?) 554.5 m이다. 이 건물을 덮고도 약 100 m가량 더 덮는다는 뜻이니, 얼마나 엄청난지 가늠할 수 있다. 산사태는 북서쪽 20 km를 시속 200 km로 흘러 노스포투톨 강 상류로 들어가 스피릿 호수에서 길이 270 m, 높이 60 m인 초대형 파도를 일으켰다.
화산이 분화하며 발달한 화쇄난류를 포함한 폭발은 USGS에서 수직폭발이라 예상하고 정한 안전구역을 빠르게 넘어서[16] 산체 북쪽의 약 1150 km² 영역을 초토화했다. 대기로 뿜어져 나오자마자 '''화쇄난류는 1080 km/h까지 가속되었는데''' 지금까지 기록된 화산쇄설성 밀도류 중 가장 (압도적으로) 빨랐다. 그대로 북쪽을 휩쓸면서 잘 자란 나무들을 태우면서 이쑤시개 넘어뜨리듯 쓰러뜨렸다. 완파된 고목들의 모습이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미터 두께로 자란 고목들이 종잇장처럼 찢겨졌다. 심지어 화쇄난류가 휩쓴 곳에서 수 킬로미터가 넘는 곳까지 '''그 열기 때문에 나무가 말라 죽었다.'''[17] 그 '''엄청난 고열의 화쇄난류가 대지를 휩쓸어 호수와 강물은 순식간에 기화해 폭발했고''', 그 소리가 북쪽 320km 떨어진 밴쿠버까지 들렸다.[18] 당시 폭발(blast)은 서울에 비유하자면 관악산(세인트 헬렌스 화산)이 폭발해서 30초 만에 (10 km쯤 떨어진) 남산타워(콜드워터 기지)를 지운 셈이다. 그리고 폭발이 미친 거리가 약 35 km 정도 되는데, 이는 '''하남시에서 일어난 폭발이 김포공항을 날린 것과 같다. 폭발로 인해 박살난 숲의 면적은 서울 면적과 맞먹고, 폭발 자체가 덮은 면적은 그보다 거의 2배 넓다.'''
화산재는 더 멀리까지 퍼지기 마련. 화산재는 화산 주변에 50 cm 두께로 쌓이고 9 km 거리에 있는 400 m 높이 산을 뒤덮은 것도 모자라 오클라호마·와이오밍·노스다코타·사우스다코타·아이다호·몬태나를 뒤덮더니 이후 바람을 타고 15일 뒤엔 전세계를 뒤덮었다. 또한 화산 가스와 뒤따르는 연소 작용으로 인해 산소가 희박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폭발 당일 오전 10시엔 50 km이상 떨어진 벌목회사의 나무들이 흔들리더니 라하르가 강을 따라 흘러들어오며 안전구역에서 낚시하던 이들을 시속 140 km 속도로 덮쳤다. 10시 10분에는 570 km²가 화산재로 뒤덮이더니 잠시 잠잠해졌다. 이 틈을 타서 산림청과 주 경찰·주 방위군·산악구조대 소속 수백 명이 생존자 수색에 나섰다.[19] 결국 사망자 57명, 부상자 1백여 명이 발생했는데, 사망자 중 53명은 안전구역에서 사망[20] 했다. 또한 다리 27곳, 가옥 2백여 채가 붕괴, 선박 31척이 파괴되었고, 재산피해는 약 '''10억 달러'''에 달했다. 이후 폭발은 9시간이나 계속되면서 수백만 톤의 화산재를 22km높이까지 뿜어올렸다.
충격량은 TNT로 환산하면 '''최소''' 20 Mt에서 최대 '''350 Mt'''(TNT 3억 5천만 톤이 폭발할 때 생기는 폭발력)[21] 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탄인 차르 봄바보다 최대 7배 강력했다.'''
폭발이 잦아든 뒤, 해리 글리켄은 헬리콥터로 존스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인근 지역을 수색했지만 존스턴은커녕 콜드워터 II 기점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글리켄은 존스턴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하며[22] , 이후 머리를 잡아뜯는 정신적 트라우마가 생겼다.[23] 글리켄은 이 사건의 충격으로 화산학에 더 집중했지만 불안해 보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 있는 운젠 화산이 활동을 시작하자 프랑스의 유명한 화산학자 부부 모리스(Maurice)·카티아 크라프트(Katia Krafft)와 함께 화산 모니터링을 나섰다.
안타깝게도 '''존스턴과 운명을 바꿨던 글리켄은 1991년 6월 3일, 운젠 화산에서 똑같은 현상(급작스러운 화산쇄설성 밀도류)으로 크라프트 부부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누구도 운명을 속일 수는 없다는 말과 함께 미국의 화산학계에서 이 일화는 유명해졌다.
또한 이 폭발로 당시 무명(사진관을 하면서 벌어먹었다.)이었던 사진작가 로버트 랜스버그(Robert Emerson Landsburg,1931년생. 만 48세)가 찍은 폭발 순간의 사진이 유명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랜스버그 또한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는 마지막에 필름을 카메라에서 꺼내 비닐에 넣은 다음 옷으로 감싸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화산재 앞에서 배낭을 힘껏 안고 엎드린 뒤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17일 후에 발견되었는데, 시신이 화산재로 덮여 심하게 타버려 누군지도 못 알아봤으나, 마지막 힘을 다해 지킨 필름은 약간의 손상을 제외하고 무사히 현상되어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전달되었다. 이 이야기는 2016년 4월 1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었다.
또다른 사진작가 레이드 터너 블랙번(Reid Turner Blackburn 1952년생, 만 27세)도 이 폭발로 숨을 거뒀다. 랜스버그와 달리 사진전에서 상도 받고 촉망받던 사진작가였던 그는 자동차에 탄 채로 화산 폭발을 취재하던 중 갑작스런 폭발에 휘말려 차량과 같이 화산재로 덮여 숨졌는데, 랜스버그와 달리 사진은 남기질 못했다. 니콘 카메라로 현장을 찍었지만, 화산재로 인하여 카메라가 훼손당해 사진을 1장도 인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가 타고 있던 차량이 이후 사진에 찍혀 이 화산 폭발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 되었다.
그밖에 일반 희생자에서 알려진 사람도 있는데 해리 로버트 트루먼(Harry R. Truman, 1896~1980)이다. 당시 만 83살로 사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2년전 아내도 병으로 죽고 이 산기슭 오두막에서 들고양이 16마리를 아끼며 살았고, 화산 폭발 가능성이 있으니 피신하자는 이웃들 권고도 거절하고 마지막까지 산에 남았다가 결국 화산폭발로 오두막은 물론, 16마리 들고양이들과 같이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영화 단테스 피크에 나온 노인 루스가 이 사람을 모델로 한 것.
한편, USGS에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데이빗 존스턴) 캐스캐이드 화산 관측소(CVO)를 설립했다.
4. 관련 문서
[1] 근처에 벌목장이 있었다.[2] 이 때문에 훗날 주지사는 사람을 죽게 한 혐의로 법정에 섰지만 1985년 기각됐다.[3] 돈 스완슨(Don Swanson)이 책임자였던 듯하다.[4] 콜드워터 I·콜드워터 II. 특히 콜드워터 II 기지는 산체 북쪽(!) 약 10 km 떨어진 곳에 있었다.[5] 데이비드 존스턴의 제자였다.[6] 데이비드 존스턴도 그런 주장을 한 지질학자였다.[7] 수성활동에 의한 소규모 화구는 있었다.[8] 세인트 헬렌스 화산은 과거 '''단 1번'''만 제외하고는 모두 수직폭발이었다. 다만 지질학자 존스턴은 1956년 소련의 베지미앙 화산과 마찬가지로 이번엔 측면 폭발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다. 베지미앙 화산도 분출 당시 마찬가지로 측면이 부풀고 증기가 분출되는 현상을 보였다.[9] 5월 16-17일 즈음에 이르러서는 왠지 몰라도 수성활동도 잠잠해졌다. 분기공의 활동은 특별히 관찰되지 않았으나 화산이 지속적으로 변형활동을 했기 때문에, 과학자들 대부분은 산사태나 라하르의 위험성을 고민하였다.[10] 물론 과학자라도 "언제" 터질지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 하루 단위의 예측은 불가능하다. 다만 여러 징후 때문에 과학자들은 화산이 활동을 재개하리라 판단하고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11] 두 사진 모두 데이비드 존스턴을 검색하면 곧잘 나오는 대표적인 사진이다.[12] 당연하겠지만 워싱턴 남부 끝단의 밴쿠버.[13] 바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14] 서머타임 기간 중이라 한국보다 16시간 늦었다. 그래서 세인트 헬렌스 화산이 폭발한 때가 한국시간으로는 5월 '''19일 0시 32분'''이었다.[15] 캐나다의 밴쿠버가 아니라 워싱턴주 밴쿠버에 있는 지질학 연구소이다.[16] 수직폭발과 수평폭발의 화쇄난류 범위는 차원이 다르다.[17] 온도가 거의 1000도에 가까운 거대한 열구름이니 말 다했다.[18] 신기하게도 훨씬 가까운데도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역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를 'quiet zone'이라고 부른다. 지형과 주변 공기의 성질 등 복합적 요인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경우라 한다.[19] 구조대원 한 명은 생존자를 구조한 뒤 헬기를 잠시 돌려 폭발한 화산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20]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안전구역에서 사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분화구 가까이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 폭발에 이은 분출이 북쪽 위주로 진행되었기에 남쪽에 있던 사람 중 살아남은 경우가 생긴 것.[21] 폭발 이외에 라하르, 화산재 등으로 인한 피해를 모두 합쳤다는 얘기가 있다.[22] 아무래도 은사가 자신때문에 희생되었단 생각이 강하게 든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양보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존스턴을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상황과도 같게된 상황 때문에 그 충격이 오랬던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산이 폭발할 것이라고는 신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글리켄을 탓할 수도 없다.[23] 생존자의 죄책감(Suvivor Guilt)이라는 정신적 질환이다. 위험상황에서 주변 사람은 죽고 자신만이 살아남은 뒤, 생존 그 자체에 강한 죄책감을 느껴 강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을 말한다. 흔히 전쟁에서 살아남은 군인들이나 대규모 재해 생존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