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림 1세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제9대 술탄. 별칭은 Yavuz(야부즈, 냉혈한).[4]'카펫 한 장은 두 명의 수피교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크지만, 이 세상은 두 명의 왕을 받아들일 만큼 크지 않다.
-셀림 1세[3]
2. 왕위쟁탈전
아버지인 바예지트 2세와 마찬가지로 셀림 1세 역시 아버지보다 더한 왕위쟁탈전을 했다. 상대는 형 아흐메트였다. 바예지트 2세는 아흐메트를 차기 술탄으로 정한 상황이었기에 셀림에게 트라페준타를 영지로 하사했다. 하지만 1511년 셀림은 흑해 북쪽에 있는 크림 칸국과 동맹을 성사시켰고 그 다음 바예지트 2세에게 유럽령 술탄 직할지를 요구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는데 당시 왕위법상 먼저 이스탄불을 개선한 자식이 차기 술탄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관할지역인 트라페준타에서는 부왕의 사망시 아흐메트보다 개선이 늦었고 극히 불리했기에 유럽, 즉 도나우 강 근처에 있는 직할지를 받아야 아흐메트와 경쟁할 수 있었다.
권력기반이 위협적이었던 셀림은 아버지 바예지트 2세에게 직할지를 얻어냈다. 동시에 소아시아에서 대규모 시아파 반란이 일어난다. 아흐메트는 소아시아 쪽에서 권력 기반을 쌓은 상황이었고 유능한 재상 알리 파샤를 붙여 소아시아의 시아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오스만 제국은 군공이 중요했기에 반란을 진압하는 전공은 차기 술탄위에 영향을 미쳤고 바예지트 2세는 아흐메트에게 술탄 직을 주고 싶었기에 나름의 강수를 둔 것이었다.
1511년 6월 진압군을 이끌던 알리 파샤가 전사했지만 그와 동시에 반란군 우두머리가 전사하며 반란은 끝났고 바예지트 2세의 예상대로 아흐메트의 권력 기반이 강화됐다. 셀림은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버지 바예지트 2세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예니체리와 바예지트 2세를 공격한다. 1511년 8월 바예지트 2세의 기병대에 참패한 셀림 1세는 동맹인 크림 칸국으로 도주한다. 시아파 반란을 마무리한 아흐메트는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했으나 코스탄티니예의 귀족들은 예니체리를 얻지 못한 아흐메트를 차기 술탄으로 확정하는 것을 유보한다. 실망한 아흐메트는 무력한 아버지와 결별하고 소아시아의 영지들을 무력으로 점령한다. 바예지트 2세의 권신들이 아흐메트의 봉신이 되어버렸고 따라서 바예지트 2세는 군대를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점을 노린 셀림은 코스탄티니예를 재공격하고 결국 1512년 4월, 셀림 1세는 코스탄티니예를 점령하고 아버지의 술탄 위를 찬탈한다. 1513년에는 소아시아를 장악한 아흐메트와의 내전 끝에 승리하고 아흐메트를 생포, 처형한다.
이후 부황 바예지트 2세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다. 바예지트 2세 또한 양위한 후 1달이 지난 다음 사망했는데, 일반적인 학설은 셀림 1세에게 독살당했다는 것. 역시 권력 앞에서는 형제간에도 비정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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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디란 전투
1514년 그는 이스마일 1세와의 전투를 위해 출정한다. 결국 사파비 왕조와의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를 패퇴시킨다. 내친 김에 타브리즈까지 돌진해 이스마일 1세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타브리즈 인근의 영토를 모두 정복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스마일이 다시 군사를 모아 오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포위당하는 형국이 된다는 군부의 반발로 인해 그냥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1516년에 알제를 근거지로 한 해적 집단의 수장인 우르지를 신하로 삼았다[6] .
1517년에 이집트를 병합하여,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 때,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가 자신의 칼리파 칭호를 셀림 1세에게 양도하였다.[7] 이거 굉장히 중요하다. 시리아-이집트 정복으로 인하여 오스만 제국은 '''처음으로 인구 비율 중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압도하게 된다'''. 이 이전에 오스만 제국이 영유하고 있었던 아나톨리아 해안지대, 그리스, 발칸 반도는 근본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유산이 강력하게 남아 인근 유지, 정복 전 귀족 가문 자제 같은 엘리트들은 개종을 하고 데브시르메 제도로 제국의 파워 엘리트에 편입됐지만 일반 주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관용 정책에 따라 딱히 개종을 하지 않고, 피지배민도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칼리프의 칭호를 받으면서 오스만 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수니 이슬람권 전반의 슈퍼파워급 위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셀림 1세 시기에도 오스만 제국의 관용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아토스 성산의 수도원들을 수리하기 위한 비용을 대고 교회에 많은 혜택을 주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인 수도원 및 성당들을 보호해야 하며, 이를 훼손 및 파괴를 엄격히 금지하며, 이들이 천재지변 등의 원인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리더라도 제국은 이를 복원할 책임이 있다.''' 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실제로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정교회 성당의 명문들을 보면 셀림 1세를 칭송하는 문구가 붙은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1520년에 새로운 군사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급사[8] 하였다.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서 오스만 제국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만든[9] 뛰어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업은 아들 쉴레이만 1세가 계승[10] 해 성공적으로 추진한다.
여담으로, 냉혈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계승 문제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신하들을 함부로(?) 다루었기 때문.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이 제대로 수행된다면 충분히 포상했지만,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중벌은 물론 처형하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까지 전해진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넘긴 몰트케급 순양전함 괴벤에 오스만 해군은 이 황제의 이름을 붙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까지 터키 해군의 대표적인 함선이었던 야부즈 술탄 셀림이 바로 그것. 2016년 개통한 보스포루스 해협의 세 번째 교량인 야부즈 술탄 셀림 교 역시 이 황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11]신하 曰: (농담조로) 폐하. 혹시 신을 처형하실 때가 되면, 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갈 수 있도록 사전에 미리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셀림 曰: (역시 농담조로) 실은, 짐은 오랫동안 그대를 처형하리라고 생각해 왔노라. 하지만 아직 그대의 뒤를 이을 적임자를 찾지 못해 그대를 살려두는 것이니라. 만일 적임자를 찾게 되면, 그대의 말을 기억하도록 하지.
3. 가족
후궁으로는 먼저 쉴레이만의 모친인 하프사 술탄(Hafsa Sultan. 원래는 하프사 하툰(Hafsa Hatun)인데 16세기부터 hatun이라는 칭호를 sultan이라는 칭호가 대체함.)이 있다.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인 크림 칸국의 공주라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는 사실 무근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는 추세. 한편 다른 후궁으로는 아이셰 하툰(Ayşe Hatun)이 있다.
4. 평가
'''조부 메흐메트 2세 이상의 군사적 능력을 갖춘 정복자'''[12]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작인 군주론의 제1권 19장에서 그를 조부의 명성을 능가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고 평한 바 있다.[13]
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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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 - 예니체리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왕자였으나, 바예지트 2세의 차기 술탄 내정 때문에 예니체리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쿠데타 떡밥으로만 나오다가 막판에 직접 등장해주신다. 이때 아흐메트 왕자가 예니체리들에게 "너희들은 셀림이 아니라 술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술탄은 어디 있는가?!"라고 소리치자 "지금 네 앞에 서 있다네. 형제여."라면서 형인 아흐메트 왕자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려 버린다. [14][15] 그리고는 에치오에게 쉴레이만 왕자가 말리지 않았으면 지금 죽여버렸을 거라면서 다신 오지 말라고 한다.[16] 이 말을 듣고 빡친 에치오가 칼을 빼드는데 그 뒤에 예니체리 군대 수백 명이 붙어 있었다. 소피아가 당신의 싸움이 아니라면서 말리는데 안 말렸으면 정말 예니체리하고 정면승부 한번 붙을 뻔했다.
- 국내 판타지 순정만화 'The Tarot Cafe'에 셀림 1세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BL이다... 셀림 1세는 즉위할 때 이미 40대였지만 순정만화적 허용인지 젊은 왕으로 나온다. 작중시점에선 이미 고인이지만 본작이 판타지인지라 혼령으로 등장한다. 어릴 때 그리스 노예였던 레어드라는 소년을 사랑해 자기 옆에 두고 함께 자랐고 즉위하고 나서는 요직을 주며 총애했다. 그러나 레어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집착이 심해졌고, 레어드가 고향을 그리워하자 그가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정벌해 고향사람들을 학살하게 하는 초특급 병크를 저지르면서 둘 사이는 완전히 박살난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레어드는[17] 충격에 셀림을 떠나겠다고 하고 셀림은 그런 레어드의 발언에 배신감을 느껴 그를 고문하는 등 얀데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레어드는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피신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얼마 못 가 죽었고 셀림은 그가 죽은 후에야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고 자책한다.[18] 이후 셀림은 미친 듯이 일과 전쟁에만 몰두하다 얼마 못 가 죽었고, 사후 주인공을 찾아와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뒤 레어드에게 전하는 편지를 남긴다. 사실 레어드는 살아있었는데 그를 피신시킨 주변인이 그를 도주시키려고 죽었다고 일부러 거짓말한 것. 레어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저지른 짓이 있어 차마 데려오지 못했거나 죽고 나서 유령이 되어서야 레어드의 생존을 알게 된 듯하다. 레어드는 주인공이 전해준 셀림의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주인공은 셀림을 부러워하는 것으로[19] 에피소드가 끝이 난다.
[1] 그동안 크림 칸국의 공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크림 칸국 공주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2] 둘카디르 왕조 11대 군주 보즈쿠르트 베이의 딸.[3] 셀림이 직접 쓴 페르시아어 시 가운데 하나. 그는 Mahlas Selimi('마흘라스 셀리미' 정도 되는 듯.)라는 필명으로 페르시아어로 된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고 한다.[4] 이 'Yavuz' 라는 별명을 어떻게 번역하느냐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골치아파하는 부분인데, 터키 원어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릴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없는 탓이기 때문인 듯. 일단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근엄하다거나 완강하다는 정도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강인한 황제' 라고 창작에 가깝제 의역하는 경우도 있다.[5] 다만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형제살해"라는 것이 기본적인 관행으로 정착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그가 반포한 법에다가 대놓고 다음 대의 술탄의 형제들은 다 세상의 질서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써놓았다. 16대 술탄 아흐메트 1세 때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관행이 바뀌는데, '이러다 술탄이 후계자 없이 급사라도 하게 되면 다음 황위는?' 이라는 등의 이유로 형제 살해에서 감금으로 방식이 바뀐 것. 참고로, 이때 술탄의 형제를 가두어두는 방을 카페스(Kafes)라고 하는데, 터키어로 새장이라는 뜻.[6] 그리고 우르지의 친동생으로 우르지가 1518년에 스페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이름도 유명한 '''하이르 앗 딘'''. 프레베자 해전이나 레판토 해전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성기 시대의 오스만 제국은 해적들을 해군으로 썼는데, 그 해적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하이르 앗 딘이라는 점으로 보아 셀림은 오스만 해군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고 볼 수도 있다.[7] 당대에는 소규모 군주들 역시 칼리파의 칭호를 사용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 학자들은 셀림 역시 이집트 병합 이전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했다고 보며, 영문판 위키백과(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sultans_of_the_Ottoman_Empire) 같은 곳에서는 오스만의 3대 군주인 무라트 1세부터 칼리파 칭호를 쓴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8] 이전 버전에서는 로도스 섬 공략 준비라고 했지만,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헝가리라고 예측하는 자가 많았다. 다만 로도스라는 예측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아들인 쉴레이만이 로도스와 헝가리 모두 정복하는 데 성공.[9] 역대 황제들 가운데, 가장 많은 영토를 정복하거나 합병했다. 물론 지명도 면에서는 워낙에 엄청난 일을 해낸 할아버지에게 밀리지만.[10] 어려서 죽은 경우를 제외하면, 쉴레이만은 셀림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며, 오스만 제국 역사상 이전 황제의 외아들이기에 황위계승분쟁 없이 즉위한 경우는 쉴레이만이 유일. 사실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쉴레이만 이외에 위베이스라고 한 명 더 있기는 한데, 문제는 위베이스의 생모가 아들을 낳기 전에 하렘에서 쫓겨나 재혼을 했다는 것. 이 경우는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혈통상 동생인 것은 맞으므로 쉴레이만이 보호해주어 이후 바그다드 대총독에까지 오른다.[11] 현대건설과 SK건설 컨소시엄에서 시공.[12] 사실 메흐메트 2세의 군사적 능력치는 그렇게까지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실제로 메흐메트 2세는 다 망해가던 동로마는 손쉽게 정복했지만 동유럽의 죄르지, 후녀디, 블라드를 상대론 압도적인 국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고전했다. 오히려 군사적으로 뛰어났던 건 메흐메트 2세의 아버지인 무라트 2세이며, 무라트 2세는 메흐메트 2세가 고전한 후녀디 야노시가 있던 바르나 십자군을 패퇴 시키고 이후 후녀디가 다시 헝가리-왈라키아 연합군을 이끌고 왔을 때도 코소보에서 패퇴 시킨 전과가 있다.[13] 나약한 군주가 두 명 이상 나란히 재위하면 나라가 기운다고 주장하며, 이스라엘, 로마 제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의 예를 들었다. 메흐메트와 셀림의 사이에 낀(...) 바예지트 2세는 나약한 군주라고 평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셀림이 즉위하지 않았던들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 이라고 썼다.[14] 덤으로 1509년에도 바예지트 술탄의 자리를 넘보기 위해 코스탄티니예를 포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는 실패해서 크리미아 칸국으로 도망갔지만서도.[15] 다만 이때는 셀림 혼자서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형인 아메드가 아버지가 가실 때(...)가 가까워 오므로(당시 바예지트의 나이 63세였다) 선수를 친 것에 응한 것. 참고로 바예지트는 처음에 아들들이 코스탄티니예에 들어오는 것을 모두 저지했지만 얼마 뒤 셀림을 후계자로 낙점, 코스탄티니예로 불러들였다.[16] 자신의 친구인 타릭 바레티를 죽인 것 때문으로 추정된다[17] 너무 어릴 때 고향을 떠났는지 고향이 정확히 어딘지도 기억하지 못했었다. 정벌 나갔다 돌아온 후에야 자신이 짓밟은 곳이 고향이라는 걸 알게 된다.[18] 주인공은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색했으며 특히 감정의 흐름 같은 정신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셀림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19] 애인 따라 죽는 게 소원인데 불사의 몸이라 어떻게든 죽을 방법을 찾아다니는 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