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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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칸국(Crimean Kha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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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rimean Khanate/Къырым Ханлыгъы.
1430년, 킵차크 칸국의 후손인 하츠 게라이(Hacı Geray, خاجى كراى)가 세운 국가.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었으며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러시아에 의해 망하기 전까지 강대국 오스만의 비호를 받았던 나라이다. 1771년에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보낸 러시아 제국 군대가 정복할 때까지 하지 기레이의 가문이 통치했다. 크림 칸국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 남부와 크림 반도 인근을 지배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부의 소수 민족인 크림 타타르족이 바로 크림 칸국의 후예이다. 이들은 몽골 침략 전부터 흘러들어온 튀르크계 유목민인 쿠만인의 후예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중앙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쿠만인과 몽골 제국 침략 시기 새로 유입된 몽골인이 오스만 제국에 영향을 받으며 현재 크림 타타르인이 되었다.
2. 역사
원래 크림 반도는 고대에는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와 스키타이계, 캅카스계 민족들이 서로 교역을 하며 살고 있었으나, 중세에는 하자르 칸국이나 페체네그, 폴로베츠 등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은 몽골 제국이 모스크바 공국을 침략하기 오래 전부터 우크라이나 초원지대로 진출을 노리며 키예프 공국과 대립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킵차크 칸국이 건국되기 전에도 이 유목민족들은 타타르인이라고 뭉뚱그려져 불렸다.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이 침략하여 킵차크 칸국이 건국된 후에는 이 일대로 이주한 몽골인 귀족층이나 몽골 제국의 원정대원으로 온 타 튀르크 부족들 역시 타타르에 동화되어 킵차크 칸국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으나 킵차크 칸국이 쇠퇴하게 되자 크림 반도 일대를 다스리던 몽골인의 후손 하츠 게라이(Hacı Geray)[3] 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원을 얻어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크림 칸국을 세우게 된다.[4] 이후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은 크림 타타르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모스크바 대공국,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위험한 독립을 유지하던 크림 칸국은 1466년 하츠 게라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그중 장남인 누르 데블레트(Nur Devlet, نور دولت)가 킵차크 칸국의 지원을 얻어 칸의 자리에 오르자 대다수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 있던 하츠 게라이의 육남 멩리 게라이(Meñli Geray, ۱منكلى كراى)가 반란을 일으켜 잠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곧바로 형한테 패해 크림 반도 남쪽의 제노바 식민지였던 카파로 쫓겨났다. 그리고 쫓겨난 멩리는 카파의 제노바인들과 손을 잡은 후 1469년 다시 수도로 진격해 형을 제노바의 감옥에 가둔 후 다시 칸의 자리에 올랐다.
멩리 게라이는 당시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제노바와 테오도로 공국와 손을 잡았는데 이것이 메흐메트 2세의 심기를 건드렸고 1475년 대규모의 오스만 함대가 대대적으로 크림 반도를 침공해 테오도로 공국을 멸망시키고 카파를 정복했다. 당시 멩리 게라이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칸 자리를 다른 형인 하이데르(Hayder, حيدر)에게 막 빼앗긴 참이었는데 칸 자리를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인 제노바가 위협받는 걸 보고 오스만과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깨지고 오스만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오스만 제국은 내친 김에 크림 칸국까지 공격해 하이데르를 몰아내고 누르 데블레트를 칸 자리에 앉혀 크림 칸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477년 킵차크의 칸 아흐메드 칸의 사촌 야니베그가 침공해 크림 칸국은 일시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지배 하에 들게 된다.
한편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간 멩리는 칸 자리를 되찾게만 해준다면 오스만에 복속하여 앞으로 영원히 술탄의 봉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고 때마침 킵차크에 멸망한 크림 칸국의 귀족들이 오스만에게 킵차크를 몰아내고 멩리를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하면서 1478년 멩리는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킵차크를 몰아내기 위해 출정한 오스만군와 함께 크림 반도에 돌아왔다. 그리고 멩리는 오스만군의 도움으로 킵차크군과 누르 데블레트를 같이 몰아내고 칸 자리를 되찾으면서 이로서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번국이 되었다.[5]
그러나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사실은 오히려 멩리와 그의 후계자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그 이유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들이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북쪽의 러시아인들과 서쪽의 폴란드인 및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인들이 그들을 상대할 때 더욱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 일찍이 복속되어 의존한 결과, 크림 칸국은 다른 타타르 국가들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1552년과 1556년, 각각 러시아에게 멸망당할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6]
크림 칸국의 위상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얼마나 높았는지 도널드 쿼터트의 <오스만 제국사>와 Simon Montefiore 의 Prince of Princes: The Life of Potemkin. London, 2000 에 따르면 오스만의 왕통이 단절될 경우 제국의 술탄위를 게라이의 가문이 이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니까 오스만 왕통이 단절되었다면 보르지긴 씨족 출신 술탄이 나오는 것도 가능했단 얘기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일이 없었지만, 그만큼 크림 칸국의 위상이 높았다고 보면 되겠다.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를 깨뜨린 건 러시아 제국이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던 러시아는 처음에는 발트 해에 관심을 보였지만 여러가지 한계가 있던 발트 해보다는 흑해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흑해 북쪽 해안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크림 칸국을 정복하기로 방침을 정했던 것이다. 과거 러시아는 오스만보다 약했으나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화 정책에 의해 유럽 국가로 변모하며 국력을 키워 나갔다. 발트 해에 관심을 보인 것도 러시아-스웨덴 전쟁으로 스웨덴을 제압하고 핀란드를 빼앗아 오면서 관심을 가졌으나 발트 해 역시 결빙일수가 꽤 되어 완전히 남쪽 바다를 찾게 되었던 것. 또한 크림 칸국이 수세기 동안 동유럽을 습격해 수백만 명에 달하는 정교회 신도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버리면서 화를 자초한 것도 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크림 칸국 정복은 타타르의 멍에의 마지막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흐름 속에 러시아와 크림 칸국의 종주국인 오스만과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도발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게 되는데, 이것이 러시아-튀르크 전쟁[7] 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1768년에서 1774년까지 계속된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 1774년 러시아와 퀴췩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하여 카파를 할양하고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8]
하지만 1783년,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정복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조약 위반이라며 러시아에 항의해보았지만,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항의에 총칼로 답변해 이에 1787년부터 1792년까지 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지나 역시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고, 1792년 러시아와 이아시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인정하고 추가로 예디산[9]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
덧붙여 마지막 칸으로 서유럽식 군제 개혁을 시행하는 등 나름대로 개혁에 힘썼던 샤힌 게라이의 최후도 비극적이었다. 1783년 크림 칸국이 무너지자 러시아군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끌려가 1787년까지 감금당했다가 이후 감금에서 풀려나 자신의 고향인 에디르네로 귀향했지만 이내 러시아군을 끌여들였다는 죄목으로 오스만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가 같은 해 로도스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2.1. 노예 무역
러시아 입장에서는 크림 칸국 정벌이 생존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 부동항이고 뭐고 떠나서 크림 칸국의 주요 약탈지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그리고 유럽 부분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특히 약탈 목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예였는데, 오스만 제국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각지에 공급되는 백인 노예의 상당수는 크림 칸국이 강제로 잡아온 러시아나 폴란드-리투아니아 혹은 체르케스 출신 노예였다.
16, 17세기 크림 칸국의 약탈은 러시아, 체르케스 뿐만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의 동부에서도[10] '''무척''' 심각했는데, 이들의 노예 사냥이 하도 기승을 부려서 지주들까지(...) 전부 노예로 끌려다가시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한동안 드네프르 강 일대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공백지가 되다시피 했다. 카자크들은 이 공백지를 접수한 후에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온 도망 농노들을 받아들인 후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노제가 대단히 악랄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의 반란이나 소요가 적었던 이유가 '''노예로 납치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노로 사는게 나을 거 같아서....'''였으니 할 말 다했다. 주로 상품 가치가 높은 처녀들이 납치의 주 타겟이 되었고, 어린아이들은 어차피 끌고 가봤자 병들어 죽기 쉽다는 이유로 납치하지 않고 바로 말발굽으로 밟아죽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만 해도 1474년부터 1694년까지 '''매년 평균 2만명''' 가까이가 크림 타타르 전사들에게 납치되거나 살해당했다니 당시 차라리 농노로 살기를 택했던 사람들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모양새이다보니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입장에서는 국력 성장을 막는 주요 요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기독교 국가만 약탈한 것은 아니고 같은 무슬림인 체르케스인들도 심각한 수준으로 약탈했는데, 체르케스인들은 15세기 이후 부족 대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불구 체르케스인 군인 노예들이 몸값이 비싸고 여성들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체르케스인 노예들은 주로 이집트의 맘루크로 팔려가거나 아니면 오스만 제국 황실이나 유력자들의 하렘으로 팔려갔기 때문
노예 납치 산업이 얼마나 흥했는지 카파의 부유한 타타르 유력자들은 가난한 크림 타타르족에게 말과 무기를 빌려주고,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납부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사업까지 번성했다.[11] 심지어 같은 무슬림인 체르케스인들까지 마구 납치하고 약탈하고 다녔다.
이들의 등쌀 때문에 러시아인들 및 폴란드-리투아니아인들은 방비를 위해 방책을 세우는 등 엄청난 고생[12] 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3세기 동안 수백만 명이 노예로 잡혀 갔다. 1571년, 크림 칸국은 러시아 제국의 수도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기습하여 크렘린 요새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약 10만 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을 포로로 끌고가기도 했다.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가 갈릴 만도 하다.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의 크림 타타르인들은 납치된 러시아, 우크라이나인 여성들과 타타르족 남성들의 자손이므로, 우크라이나인들은 현대 크림 타타르인에게 악감정을 갖지는 않고 있다.[13] 체르케스인들의 경우 같은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숱한 약탈과 납치를 당했지만 러시아 제국에 정복되어 탄압받은 동병상련[14] 의 역사를 공유한 이유로 과거사는 뭍혀가는 분위기이다. 다만 체르케스인들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우리가 침략해서 잘못했다' 라는 식으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문학 작품에서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들로 묘사되는데 비해, 크림 타타르인한테는 그런 거 없다...
비교하자면 카잔과 아스트라한에 살던 친척뻘인 볼가 타타르인들도 크림 타타르처럼 러시아인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버린 전과가 있었고 격렬한 저항 끝에 이반 뇌제가 잔인하게 정복했으며 러시아어 강요와 강제 개종 등을 통해 강압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로 동화를 시도했으나 차차 러시아 제국 내에서 새로 정복한 무슬림 민족들을 관리하는 중간관리자 민족으로서 대우도 좋아지고 어느 정도 자치권도 인정받으면서 러시아와 사이좋게 융화되었으며 이는 소련과 러시아 연방 등에서도 존중되고 있다. 당장 이들은 자치공화국인 타타르스탄 공화국도 갖고 있다. 그러나 지중해 진출을 가로막는 숙적의 제1번국이자 수세기동안 자국민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치우면서 변경을 위협하던 불구대천지 원수인 크림 타타르는 그딴 거 없었다. 이는 크림 반도가 러시아 제국의 수중에 떨어지자 수많은 크림 타타르인들이 터키로 망명가는 계기가 된다.
2.2. 멸망 이후
이후 크림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와 중간관리자로 파견한 카잔의 볼가 타타르 관리들 사이에서 이중고를 겪으며 19세기에 들어 몇차례 대대적으로 고향에서 시베리아나 캅카스,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 제국의 변방이나 오스만 제국령인 도브루자 등으로 강제추방 당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았다. 크림 타타르인들이 떠난 빈 자리는 크림 반도로 이주한 러시아인이 대신하여 결국 크림 반도는 러시아인 다수 지역이 되었으며 20세기 들어와서는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기에 위험 민족으로 낙인 찍혀 아예 민족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며, 이 와중에서 1/4 정도가 굶거나 얼어 죽는 큰 참극을 겪어야 했다. 크림 타타르인들은 1991년 소련이 망한 이후에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15]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마저도 비교적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종종 크림 칸국의 노예 납치에 가담하던 이웃 노가이 칸국의 경우 어느날 갑자기 칼미크인들이 들어와서 이들을 몰아내고 학살하는 바람에 졸지에 원래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 살아남은 노가이인들은 쿠반 강이나 다게스탄 일대로 탈주하였는데 러시아 제국에서는 쿠반 강 유역에 거주하던 노가이인들을 오스만 제국 국경 가가우지아와 부자크 일대에 이주시킨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말썽피지 말라는 의미로 이들의 천막을 수거하여 싹 태워버렸는데, 이 때문에 상당수의 노가이인들이 얼어죽고 나머지는 간신히 오스만 제국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한다. 척박한 다게스탄 산악지대로 도망갔었던 일부를 제외하면 노가이인들은 사실상 멸족당했다. 또다른 유사 사례로 중앙아시아에서 노예 납치 및 피지배 민족들에게 성상납 강요로 악명 높았던 준가르 칸국의 경우는 청나라가 준가르 칸국을 정벌할 당시, 준가르 칸국에 갖은 약탈과 괴롭힘에 시달리던 이웃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 우즈베크인들이 준가르족이 제노사이드를 당하는 동안 팔짱끼고 안 도와주는 바람에 거의 멸족당했다. 청군의 학살을 피해 도망가려던 준가르족들은 복수심에 불탄 카자흐족들에게 막혀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청군에게 당했었다. '''즉 오스만 제국의 뒷받침이 아니었다면 크림 타타르인 역시 멸족에 가까운 수준으로 망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유로마이단과 돈바스 전쟁을 겪으며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꿀꺽하면서 다시 위태로운 상황이다. 당장 러시아인들이 이들 크림 타타르를 상대로 가시적인 폭력을 동반한 박해를 다시 시작했다는 확증은 없지만 우크라이다 중앙 라다[16] 에서 크림 타타르인들을 대표하며 쿠릴타이 의장이었던 무스타파 체밀레프는 터키에 출장 가 있는 사이 러시아가 집어먹은 크림 공화국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가 떨어지며 졸지에 망명객이 되어버렸다. 크림 타타르인들은 친우크라이나적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이것을 기회로 러시아는 현재 공공연히 크림 타타르인들을 박해하고 있으나 반러 성향 인물 및 단체들과 이슬람주의자들[17] , 범튀르크주의자들, 우크라이나인[18] , 반러 성향 인물 및 단체, 인권 운동가들을 제외하면 국제적 관심이 전혀 없다.[19]
3. 군사 및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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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림 칸국의 수도였던 바흐치사라이(현재 크림 공화국)에 남아있는 칸의 궁전. 바흐치사라이는 크림 타타르인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크림 칸국의 주민들인 타타르족들은 평상시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오면, 급히 소집되었다. 그들은 옛날 몽골의 군사들처럼 십진법에 따라 조직되었다. 모든 병사들은 각자 코스(kos)라고 불리는 열 명의 분대에 속했고, 각각의 코스에 타타르인들은 소집이 되면 자신의 말과 호루라기, 해시계, 송곳, 부싯돌, 바늘을 포함한 장비들을 스스로 장만해서 갖추고 나타나야 했다.
이 코스들은 모여서 백 명, 천 명, 혹은 만 명까지의 부대가 되었다. 종군할 때, 타타르 병사들은 오로지 기장이나 분말 상태가 된 고기와 마늘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들은 또한 행군하다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말의 고기를 작게 잘라서 자신이 타는 안장 밑에 넣어두었다가, 따뜻해지면 날로 먹기도 했다.[20] 자신들의 조상처럼 그들도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내는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크림 칸국의 칸들은 천 명이 넘는 수행원을 거느렸고, 궁정의 대신들과 하급 귀족들은 그보다 적은 수의 수행원들을 보유했다. 이 수행원들은 직업적인 군인과 비슷한 것으로, 출정을 위해 전 백성들에게 징집된 국민을 보강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칸에게 직접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족을 통치하는 부족장이나 귀족에게 충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도 먼저 귀족과 부족장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칸이 이끌 때의 병력은 8만이나 그 이상에 달했다.칼가들은 5만 명을 거느리고, 칼가의 부장인 누르 알 딘은 4만 명을 지휘했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족의 공격은 영토를 얻기 위한 정복이 아니라, 대부분 약탈을 위한 것으로서 그들의 병력은 그보다 더 적었다.[21]
대부분의 타타르 군대는 활과 칼로 무장한 경무장 기병이지만 화승총을 가진 병사들도 있었다. 칸은 6백 명의 총병을 20개 중대로 나누었고, 출정한 경우에는 그만큼을 다시 모집했다. 총병은 두 발로 걸어다니며 싸웠지만, 이동 시에는 대부분 말에 타서 기동성을 높였다.
타타르인은 출정할 때, 개인당 최소한 말 세 필은 가져와야 했다. 프랑스인 여행가인 기욤 보플랑은 그가 직접 크림 칸국을 방문하여 목격한 1630년대, 자신의 책에 크림 타타르인들의 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 그들(타타르족)이 바크마테스라고 부르는 말은 몸체가 길고 추하게 생겼으며, 야윈 데다 갈기는 무성하고 꼬리는 길게 땅까지 늘어졌다. 그 대신, 속도가 빠르고 이동 중에는 지치지 않아서 자신을 태우고 있는 기수를 온종일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를 수 있었다. 또, 겨울에 눈으로 덮인 땅에서도 나뭇가지나 식물의 싹, 짚 등 먹을 수 있는 먹이들을 발굽으로 눈을 헤쳐 찾아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타타르인들이 작고 야윈 바크마테스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보플랑에 따르면 부유한 타타르인 족장들은 투르크와 아라비아에서 들여 온 좋은 말들과 경주용 말까지 따로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별다른 갑옷이나 투구를 걸치지 않았지만, 부유한 타타르인들은 투구를 쓰고 사슬 갑옷을 입었다. 라멜라 아머나 브리건딘(사슬 갑옷) 같은 갑옷 대신에 사슬 갑옷을 사용한 것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타타르인들의 주요 무기는 합성궁이었고, 보플랑에 따르면 각자의 타타르 병사들은 18개에서 20개까지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휴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의 몽골인들이 최소한 40개에서 60개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합성궁 이외에도 타타르인들은 굽은 기병도와 허리에 찬 단도, 또는 굽은 단도와 창과 방패를 휴대했다. 드물었지만 권총이나 화승총 같은 화약 무기도 소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화약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생산된 화약들은 오스만 제국에 수출했다. 그들은 총기의 느린 장전과 연사 속도 때문에 총보다는 활을 더 선호했다.
귀족들은 자기 말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죽으로 만든 긴 양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보통 크림 칸국의 말들은 발굽에 편자를 박지 않았다. 그래서 타타르족은 눈으로 말발굽을 보호할 수 있는 겨울에 원정을 떠나기 좋아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눈이 없는 건조한 겨울에는 원정을 하지 않았다. 타타르족은 강의 폭이 아무리 넓어도 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 병사들은 갈대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장비들을 놓고, 말꼬리에 묶어서 말들을 주인들의 인도하에 강 건너편으로 헤엄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칸과 귀족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타타르족은 전원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고 느린 병참로가 없어서 진격 속도가 굉장히 빨랐는데, 1689년 카플란 기레이가 거느린 타타르 군대는 늪이 많은 지형에서 엿새 동안 190킬로미터를 진군했다. 타타르의 말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기수가 말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소변을 보지 않았다. 군대의 정지 신호와 행군 신호는 모두 호루라기로 내렸다. 타타르 병사들은 밤새 엄밀하게 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기습하기란 대단히 어려웠고, 장소가 좁은 곳이나 강어귀의 수로가 아니라면 그들을 패배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일대는 유목민 침입에 취약한 평야 지대 특성상 코사크가 본격적으로 방어에 나서기 이전까지 무력하게 당했다.
약탈이 끝나면 타타르 병사들은 약탈한 물건을 수레나 말에 싣고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다.
3.1. 소수민족
소수민족으로 테오도로 공국의 그리스-고트인들의 후손 우룸인, 제노바 무역선을 타고 레반트와 이집트 일대에서 건너온 카라임 유대인, 카라임파가 아닌 일반적인 유대교를 믿던 크림차크인,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였다. 우룸인들의 경우 대부분 척박한 산지에서 자급자족하던 농민이었으나 카라임 유대인들,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서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이탈리아 도시들과 교역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크림 칸국의 소수민족들은 크림 타타르어의 방언연속체에 해당하는 우룸어, 카라임어, 크림차크어 등을 사용했으나 크림 칸국의 멸망 이후 해당 언어의 사용은 감소, 축소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극소수의 카라임어 사용자만 남아있는 수준이다.
[1] 타타르어로 '크름'이라고 읽는다.[2] 크림 타타르어로 바으차사라이(Bağçasaray). 우크라이나어로는 바흐치사라이(Бахчисарáй).[3] 케레이트족의 후손이다.[4] 하지만 쇠퇴기에 처한 킵차크 칸국이 몰락하고 크림 칸국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리투아니아는 영토의 많은 부분을 크림 칸국에게 약탈당하고 의도와는 다르게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국력이 쇠퇴하는 계기가 된다.[5] 봉신국으로 복속한 것에 대한 오스만의 대우는 상당히 좋았던 편으로 동전을 주조하고 고유의 문장과 법을 사용하는 등 독립이나 다름없는 자치를 누렸으며 칸은 제국의 재상 위이자 술탄 다음으로 2인자 취급을 받았다. 후에 칸의 반란으로 위치가 강등되기는 하였으나 재상과 동급이 된 것 뿐이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들 가운데 이슬람 국가가 크림 칸국 뿐이었다는 데에서 기인하는데, 실제로 오늘날 루마니아 및 몰도바에 해당하는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헝가리 등은 모두 기독교 국가였다. 이 외에 바르바리 해적들도 있기는 했지만, 이쪽은 '신하' 는 틀림없었지만 '신하국' 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조직을 이루지는 못했다.[6] 물론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 군대를 보내주어야 했는데, 크림 칸국이 보낸 타타르 기병대는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오스만을 군사적으로 돕는 것은 유별난 것이라기보다 왈라키아, 몰다비아 등 오스만의 다른 신하국들에게도 의무화된 것이었다. 특이한 부분은 다른 신하국들보다 군사를 더 보낼 의무가 있었지만 연공은 바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만큼 크림의 기병대가 오스만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7] 줄여서 러-투 전쟁[8] 다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칼리프를 겸했고 크림 칸국은 이슬람 국가였기에, 종교적인 영향력은 남았다.[9] 드네스트르 강과 남부그 강 사이에 위치한 현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 연안 지역.[10] 현재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곳으로 우크라이나인은 이 크림 칸국 기마부대의 직접적 피해자이다.[11] 원래 이슬람에서는 이자가 불법이지만 농사를 지을 때 소나 말을 빌려주면 수확량의 20%를 가져가는 페르시아 관습법을 적용하여 합법화했다고 한다.[12] 16세기 초를 예로 들면 흑해도 아니고 발트 해 연안의 빌뉴스에서 성벽을 지속적으로 보강해야 했을 정도였다.[13] 정작 토크타미쉬와 함께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들어온 립카 타타르인들은 근대까지도 현지인들과 별로 혼혈이 되지 않았다. 다만 립카 타타르인 중에서도 폴란드에 살던 이들은 현지인들과의 혼혈이 잦아진 것 때문에 리투아니아 및 벨라루스의 립카 타타르인들에 비해 완전한 백인에 가까운 외모다.[14] 물론 크림 타타르 같은 경우에는 화를 자초한 경우이지만...[15] 공교롭게도 고려인들과도 강제 이주 당한 지역이 비슷했다.[16]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로 의회를 뜻한다. 모스크바도 라다라고 한다.[17] 이슬람 근본주의 및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포함.[18] 친러+반서방 성향 우크라이나인 제외.[19] 사족이지만 미얀마의 로힝야인과 중동의 쿠르드인, 중국의 위구르인 역시 그들과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관련이 깊은 국가 및 민족, 인권 운동에 적극적인 사람들 및 서방권 국가들을 제외하면 러시아의 크림 타타르인들과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다.[20] 이것이 타르타르 스테이크의 원조이다고 한다.[21] 주요 약탈 대상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그들에게 복속된 카자크 족이었다. 단 카자크 족은 크림 칸국에 대한 약탈원정을 여러번 벌이기도 했다. 솔직히 사회경제적인 실질적 생활상의 역사적 발전으로선 타타르와 카자크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영향을 주며 서로를 만들어 준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