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1. 개요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한양도성 4대문 중 북쪽에 있다.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북악산) 2-1번지에 있다. 일제시대에는 문루(門樓)가 없었으나[1] 1976년에 복원할 때 세웠다.
2. 유래
원래 숙청문(肅淸門)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 이후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바뀐 이유와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1523년(중종 18년) 처음으로 숙정문이라는 표기가 쓰인 후 혼용되다가 숙정문으로 굳은 것으로 추정된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보'''신'''각을 따져보면 지(智)가 이름에 들어가야겠지만[2] 이곳만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원래 이름을 숙청문 또는 숙정문이 아니라 소지문(昭智門)으로 하려 했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대신 한양도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弘智門)에 지(智)가 쓰인다.
3. 특징
일단 4대 성문 중 북문이지만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산 속에 있는 탓에 실질적으로는 성문의 기능은 하지 않았다. 대신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과 숙종 대에 만든 홍지문이 북문으로 실제 기능을 대신하였다. 사실 지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으로도 북쪽이 음을 의미하기도 하여 기피대상[3] 이던데다가 결정적으로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이 문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며 상소를 올려 그 뒤로 소나무로 길을 막았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자리까지 옮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옮겼는지는 불분명하다.
현재의 현판은 문루 복원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은 한문 가로쓰기다.
4. 여담
1963년 1월 21일 이후로 한양도성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5년이 지나 1968년 1월 21일. 1.21사태가 일어나 봉쇄되었고, 그로부터 38년이 더 지난 2006년 4월이 되어서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오늘날에 들어서도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흥인지문이나 숭례문과는 다르게 산자락에 있는 관문이라 이 곳으로 직행하는 대중교통도 없다. 도로는 이 문 밑에 있는 삼청터널로 통과하기 때문에 자동차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굳이 찾아가려면 종로02번 종점이나 종로11번 종점에서 내려 한양도성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숙정문을 포함하는 부분은 한양도성 성곽 중에서도 아주 가파른 산길이다. 그나마 가장 편한 루트는 안국역에서 서울 버스 종로02를 타고 와룡공원 앞에 내려서 말바위 안내소로 향하는 것이 그나마 오르막길을 조금 덜 걷는 루트이긴 하지만 현재는 성곽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폐쇄되어 약간 돌아가야 한다.
한양도성 성곽부분에서 숙정문을 포함하는 부분은 군사보안 통제구역이라 정해진 시간대에만 출입이 허용된다. 하절기에는 오후 4시, 동절기에는 오후 3시까지 입장이 가능하며 오후 6시까지는 무조건 퇴장해야 한다. 1분만 늦게 가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고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하므로 방문하려는 사람들은 유의할 것.
존재감이 적은데, 숭례문과 흥인지문이야 그렇다 쳐도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서 없어진 돈의문조차 서대문형무소, 신문로, 새문안, 서대문구 등의 지명에 남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살아남은 반면, 숙정문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지만 2020년 7월 이후부터는 아니다.
왼쪽 흑백 사진에 있는 문이 숙정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 창의문을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 사진의 지형과 흑백 사진의 지형을 비교해 보면 흑백 사진에 찍힌 것이 창의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숙정문은 산 위에 있기 때문에 근처에 초가집이 보일 수가 없다.
2020년 7월 10일 오전 00시 01분경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이 근처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세한 것은 박원순 자살 사건 참고. 이 때문에 사실 박원순이 문재인에게 숙청당해 자살한 것이라는 다잉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숙청'''문에서 자살했다는 개드립도 있다.
[1] 문루는 고지도에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문루가 없던 문이 아니었나 생각하기도 한다.[2] 사대문의 이름에는 음양오행사상이 강하게 영향을 주었으며, 인의예지와 동서남북이 서로가 서로에게 대응하도록 작명하였다. 인(仁)의 경우 어질다는 의미에 걸맞게 사계절 중 온화한 봄(春)에 대응하며, 이는 오행사상에 따라 목(木)에 해당하는 동(東)문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의(義)는 엄정해야하기에 계절로서는 가을(秋)에 대응하며, 오행 중 금(金)에 해당하는 서(西)문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예(禮)는 화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여 여름(夏)에 대응하였으며, 오행 중에선 화(火)에 해당하는 남(南)문의 이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智)는 공자의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행 중 수(水)에 대응하며, 계절로는 겨울(冬)이 되고 방위로는 북(北)문의 이름에 사용되어야 맞겠지만, 숙청문(肅淸門)의 청(淸)에 이미 물(水)이 있어 지(智)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3] 한양의 모든 궁궐이 전부 남향임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르다. 이는 정확히는 남향이 채광이나 보온에서 유리해서 남쪽을 선호하던 생활습관이 풍수지리 사상으로 이론화가 된 것이다. 즉 남쪽이 길하다 하여 남쪽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남쪽을 선호하다 보니 남쪽이 길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단순히 그 한가지 때문만은 아니고 북방이 워낙 정묘호란 같은 북방 민족의 침략이 잦아 일반적으로 불길한 곳으로 인식이 굳어진 것이다.[출처] 국토교통부 V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