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
1. 개요
한양도성의 동쪽 문. 일명 동대문이다. 숭례문과 함께 한양도성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2008년 숭례문이 불타면서, 흥인지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그대로 남아있는 문이 되었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처음 지어졌으며, 이후 단종 1년(1453)과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2]
2. 특징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인 숭례문과는 다르게 흥인지문의 누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석축 역시 숭례문에 비하면 보다 실전적으로, 반달형의 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이유인 즉, 흥인지문이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는데,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북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기 때문에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은''' 것이다.
또한, 대문과 소문을 막론하고 한양도성에 존재하는 다른 문의 명칭은 세 글자로 되어 있지만(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홍지문, 동소문 등) 흥인지문만 유일하게 네 글자와 정사각형 현판으로 되어있다. 이는 한양 동쪽 다른 삼면에 비해 물이 흘러나가므로 전체적으로 토대가 우묵하게 낮아 지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그 기운을 북돋는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넉 자로 지었던 것이다.
3. 이모저모
원래 흥인지문은 1943년 경성부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7개 구인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가 설치될 당시 동대문구 관할이었다. 이후 1975년 동대문구 관할이었던 숭인동, 창신동(흥인지문 바깥 지역) 일대가 종로구에 편입되면서 동대문 역시 종로구 관할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이 때문에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3]
"유명세나 중요도에 비하면 국보가 아닌 보물 1호라는 점이 좀 의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문화재 당국에서 숭례문을 조선 보물 1호, 흥인지문을 2호로 지정했던 데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에도시대와 조선시대의 쌓아올린 일본과 조선의 성곽 및 문을 모두 헐어 옛 모습을 없앤 후 새로운 도시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려 했고, 조선 서울의 사대문 역시 모두 철거하려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장소인 동대문과 남대문은 그대로 놔둬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동대문과 남대문은 남게 된 것이다. 광복 이후 1962년 우리 정부에서 문화재 보호체계를 만들고 국보와 보물을 지정할 때 일본 관리체계를 벤치마킹하면서 굳어진 듯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듯하다.
석축 전면부를 보면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당시 기관총 탄흔으로 추정된다.[4]
2011년 7월 중부지방을 강타한 호우로 인해 지붕의 기왓장과 내림마루 일부가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한양도성 복원의 일부로 낙산의 한양도성과 흥인지문을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복원공사를 처음 시작할 때 개신교 측과 마찰이 있었는데, 성곽 바로 앞에 있는 교회를 철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단에서는 1892년 처음 교회를 세운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 근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있으므로 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시의 조사 결과 남아 있는 교회 건물은 1973년에 신축한 일반 건물로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철거한 후 성곽 복원 공사를 진행했다. 이 교회는 감리교 동대문교회였는데, 물론 그냥 쫓겨난 것은 아니고 수백억 원의 보상을 받았다. 이후 교회를 옮기자는 서기종 담임목사와 계속 그 인근이라도 남아야 한다며 서기종의 목사직을 인정하지 않는 신도 및 교단 간의 분쟁이 있었으나 법원에서 서기종 목사의 손을 들어주며 일단락되었다. 이후 동대문교회는 2017년 성남시 분당구의 분당새롬교회와 통합해서 분당으로 이전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기운다는 전설이 있다. 광해군 말년에 북서쪽으로 기울었다든가, 임오군란 때 남동쪽으로 기울었다든가...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되며 단순한 설일 뿐이다.
2018년 3월 9일,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에 의해 화재가 발생해 숭례문의 악몽이 재현될 뻔했으나, 다행히 4분 만에 조기 진화되어 담벼락이 조금 그을렸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니스로 불을 붙인 숭례문과는 다르게 종이 박스에 불을 붙였기에 불이 쉽게 번지지 않았으며 우연스럽게도 숭례문 방화범이 출소한 다음 달이다. 구속 후 초기 경찰수사 때는 교통사고 보험금을 못 받아서 저질렀다고 범행 이유를 밝혔으나, 2차 취재진이 물어봤을 때는 불을 지른 것이 아니라 불을 피웠고 동대문은 자기 구역이니 뭐니 하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불이 옮겨붙지 않아 방화로 구속하기 어렵다고 판단, 방화미수 혐의로 범인을 구속했다.
4. 같이 보기
[1] 숭례문보다도 완공시기가 빠르다.[2] 다만 숭례문의 경우도 기단부분과 1층 문루는 원본이고, 조선초기의 방식 그대로라 현재도 논란이 많다.[3] 심지어는 일부 동대문구 주민조차도 동대문이 동대문구에 있는 줄 안다. 인근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동대문구에 산다고 하면 흔히 동대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동대문구는 신설동역 부근부터 시작하며 북쪽 끝인 이문동은 동대문에서 상당히 멀다.[4]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6201420733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