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도다나

 

Śuddhodana / Suddhodana
1. 개요
2. 상세


1. 개요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의 아버지이자 샤카족 지도자. 한자로는 정반왕(淨飯王), 백정왕(白淨王), 진정왕(眞淨王)으로 번역하며, '정반왕'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음역으로는 수도타나(首圖馱那), 수두단나(輸頭檀那), 열두단(閱頭檀, 悅頭檀)이 있다.
카필라 성(Kapila-vastu/팔리어 Kapilavatthu)의 영주. 마야부인과 결혼하였으나, 마야 부인이 싯다르타를 낳고 7일 만에 산욕열로 죽자 마야 부인의 여동생, 즉 처제인 마하파자파티 부인과 재혼하였다.

2. 상세


아들 싯다르타가 출가하는 것을 막고자 하여, 왕의 힘으로 온갖 쾌락을 제공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 하여도, 석가모니가 "늙는 것, 병드는 것, 사람과 헤어지지 않는 것,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을 요구하자 그것은 왕의 힘으로도 들어줄 수 없다며 탄식하고, 대신 출가를 하더라도 대를 이을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라훌라였다. 숫도다나 왕으로써는 아내에 아이까지 생기면 혹시나 아들이 마음을 달리 먹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싯다르타는 그 생각은 나라의 후사를 생각하는 국왕으로서의 의무감에 기인한 결정이었다고 받아들이고, 결국 모두가 자고 있는 밤중에 성벽을 넘어 출가하였다. 숫도다나 왕은 아들이 출가하게 되자 다섯 비구를 보내서 그 수행을 지켜보도록 했다.
석가모니가 정각에 이르러 카필라 성에 돌아와 설법을 하자 카필라 성의 왕족들이 대부분 출가해 버렸는데, 그 가운데는 석가모니의 아내였던 야쇼다라 공주, 석가모니의 아들 라훌라, 석가모니의 이복 동생인 왕자도 있었기 때문에, 자손이 모두 출가해버린 상황 앞에서 숫도다나 왕은 매우 슬퍼하였고, 부왕의 부탁으로 석가모니는 앞으로 '''부모의 허락 없이는 출가하지 못하도록 계율을 정했다'''고 한다.[1] 사망한 후에 석가모니가 직접 장례를 주관했다고 한다. 슈도다나 왕이 사망한 뒤엔 석가모니의 사촌인 마하나마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숫도다나 왕 사후 원한을 품은 이웃한 코살라국에 의해 샤카족은 멸망하고 말았다.
사실, 전대에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도다바 왕자의 아버지 파세나디 왕이 샤카족에게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국이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경멸하던 샤카족은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도다바인 것. 비도다바가 아직 왕자일 적에 샤카족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뒤에서 모친 얘기를 꺼내며 몰래 비웃는 것을 듣고는 앙심을 품었다. 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샤카족을 침공했다. 이 때 석가모니는 세 번에 걸쳐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군대를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다시 군대를 보내자 4번째에는 또 물릴 수 있음에도 결국 치러야 하는 업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막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도다바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 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살라국이 샤카족을 학살하자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는 코살라국의 왕에게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코살라 왕은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자신의 몸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
슈도다나(한자로는 백정)는 굉장히 장수했다고 한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76세에서 80세, 혹은 9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들 석가모니도 전해오는 기록에는 팔순까지 살았다는데 그 시대치고 장수했다는 점에서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은듯.
신라 때는 석가모니 가문과 신라 왕실을 동일시하여, 진평왕의 이름을 백정, 즉 이 문서에서 소개하는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라고 지었다. 거기에 부인의 이름은 마야부인, 동생에겐 백반, 국반 등 석가모니 삼촌 이름을, 딸 덕만 등에게도 석가모니의 누이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부처님의 노여움을 샀는지 정작 석가모니가 될 왕자가 태어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무려 54년이나 그랬던 것. [2]

[1] 그래서 숭유억불의 기조로 건국된 조선 시대 내내 유학자들에 의해 "'''불교 자체가 남의 아이를 꼬드겨 집안의 대를 끊게 한다'''"라는 레퍼토리로 많이 까였다. 한국의 고승인 성철 스님의 경우는 스님의 아버지가 아들이 출가한 뒤에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라며 집 앞에 흐르는 강에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마구 잡아 먹었다고.# 이렇게 가문에서 종교인이 나오는 것을 두고 ''''내 사랑하는 가족을 종교가 빼앗아 간다''''고 본 인식은 서양도 비슷했던 건지, 초대 교부 가운데 한 명인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어머니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라서 사제가 되겠다는 아들을 향해 "'''이 어미를 두 번 과부로 만들 셈이냐!'''"라고 반대했다고 하고(출처: 루돌프 브렌들레, 이종한 역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고대 교회 한 개혁가의 초상>).[2] 진평왕은 10대 초반에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럼 60대에 죽은 거다. 고대에 산 사람 치고는 그럭저럭 오래 산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