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리소스토모

 


1. 생애
2. 평가
3. 기타
4. 같이보기

Johan Chrysostomos(349년?~407년 9월 14일)

1. 생애


δόξα τῷ Θεῷ πάντων ἕνεκεν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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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선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자 교부로 그리스도교의 성인 가운데 한 명이며, 정교회에서의 축일은 11월 13일. 가톨릭에서의 축일은 9월 13일. '크리소스토모'는 그의 뛰어난 설교를 뒷받침 해주는 별명(칭호)인데, 그 뜻은 '금구(金口)', 즉, 황금 입이라는 뜻이다.[1] 때문에 '''연설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교회 개혁가이기도 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47년, 안티오키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리바니우스에게서 수사학을 배워 변호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생각을 바꾸어 372년세례를 받았으며, 안티오키아의 디오도루스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가서 성서 주석을 배우고 수행하였다.[2] 이후 안티오키아를 떠나 4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으며, 그 후 2년 동안은 홀로 동굴에서 지내면서 날마다 성경을 되새김질하며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성경을 통째 외우게 되었다고 한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뒤 부제 서품을 받고 5년 동안 부제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다가, 38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넥타리우스의 뒤를 이어 398년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에페소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 성직을 사고 팔며 돈벌이하던 주교 6명을 면직시키고, 세속적인 욕심에 가득 차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누리던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부잣집만 골라 다니며 호사를 누리던 수도승들을 소속 수도원으로 돌려보냈다.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의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썼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활동적인 삶과 관상생활을 하나로 일치시키려 노력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된다. 평신도들도 복음에 따라 살아갈 것을 권유했고, 성서 읽기에 몰두할 것을 요청했다. 거의 700여편에 이를 만큼 신약과 구약에 관한 설교를 남겼는데, 특히 사도 파울로스 서간집을 애독해, 그의 성서 인용에서 사도 파울로스는 거의 단골로 등장하며, 요한 크리소스토모 자신이 사도 파울로스 서간집을 주해하기도 했다.
당시 동로마는 아르카디우스의 친위대장으로 동로마의 정치판을 흔들고 있던 루피누르가 395년 동고트 출신의 장군 가이나스(Gainas)에 의해 암살되고, 루피누스가 행사하던 지위는 동로마의 환관이자 의전관인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무능한 황제 아르카디우스를 조종하면서, 자신의 지위강화를 위해 자신이 교육한 프랑크족 출신의 미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Aelia Eudoxia, ? - 404년)[3]와 아르카디우스를 결혼시켜 그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그런데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역시 야심이 만만치 않았기에 에우트로피우스를 배제하고 자신이 황제를 조종하고 싶어 했고, 400년 초에 가이나스와 결탁해 그가 막후 공작으로 에우트로피우스를 실각시키고 아르카디우스로부터 군 사령관 직을 빼앗다시피하여 얻는데 일조했다.[4] 자연히 동로마의 고관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게르만족 군대의 세력 강화에 불쾌하게 반응했고, 결국 400년 7월 12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게르만 족 병사들이 학살당하고 가이나스 역시 실각하여 추방되어, 동로마 내에서의 게르만 족 군대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후, 새로운 권력은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였던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가 되어 새로이 권력을 쥐게 된 아일리아 에우독시아가 근위대장 아우렐리아누스와 함께 궁정에서 반(反) 야만족 파를 이끌며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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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강단에서 사치와 부도덕을 들었는데,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로써는 그것이 자신의 정치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비난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가난이 말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난하게 파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완전한 자유로 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는 강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해나 손상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들, 황금, 재산, 일, 끝없는 욕심, 사회적 야심, 끝없는 필요 등 모든 것이 그를 억누르고 사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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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18, PG 63,137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재물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탓에 가치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누가 행복하다는 말은 그가 돈이 있다는 뜻이요, 누구를 동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게 없다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누가 재물을 모으려고 어떻게 했다거나, 다른 누구는 어찌하다 파산에 이르렀다거나 하는 것들뿐입니다. 누가 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무슨 직업을 가지려 할 때는, 그것이 빠른 시일 안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인지 분명할 때만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우리는 이러한 악을 어떻게 쫓아버릴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여러분을 종으로 삼고 있는 맘몬을 언제까지 재갈을 물리지 않은 채 방치할 작정입니까? 여러분은 언제까지 돈의 종 노릇을 할 작정입니까? 언제가 되어야 여러분은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까? 만일 사람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얻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겠지만, 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여러분은 이 무서운 종노릇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돈이라는 폭군에 잡힌 삶은 사람의 종 노릇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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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강해> PG58, 790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은 것을 볼 때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바깥 거리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시는 그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곳(성당)에서 비단옷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5]

라고 말씀하신 분이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6]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은 분입니다.

제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비단으로 된 제대보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필요로 하시며, 거리에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에 금잔들이 즐비하지만 그분 자신이 굶어 죽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먼저 배고픈 이를 먹여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로 식탁을 장식하십시오. 여러분은 금잔을 만들게 하면서 배고픈 이에게 물 한 잔을 주지 않습니다. 이로써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제대를 금으로 된 제대보로 꾸미면서 헐벗은 이에게 필요한 옷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그네로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보거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나그네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당의 바닥과 벽과 온 기둥을 장식합니다. 등경에다 은으로 된 사슬을 매달면서 감옥에서 사슬에 매여 있는 그분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성당을 이런 물건들로 장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물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예물을 바치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 협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고소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떨어지게 되고 악마들과 함께 고초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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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강해> 50, 3~4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제정한 모든 법률과 규정이 선한 것이요 따라서 이의 없이 복종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

결국 에우독시아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파면시키기 위해 교회 안에 있던 그의 정적들과[7] 험담가들과 손을 잡고, 403년 처음으로 총대주교 파면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404년부터 끊임없이 시도되어 결국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우스는 아내의 뜻에 따라 느티나무골 주교회의(Σύνοδος ἐπί Δρῦν, Synodus ad Quercum)에 압력을 넣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교를 실각시켜 추방했다. 이 주교회의에는 키릴루스도 참석했다.[8] 이때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추방에 반대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일으킨 404년 6월 20일 폭동으로 하기아 소피아가 소실됐다.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다.[9]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곧 아르메니아의 작은 마을로 유배되었으나, 그의 영향력을 여전히 두려워한 반대자들이 황제를 부추겨 다시 흑해 동쪽 해안에 있는 피티우스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결국 유배지에 다다르지 못한 채 가던 도중에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선종했다. 407년 9월 14일, 향년 60세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선종 5년 뒤인 412년에 서방 교회의 교황(로마 총대주교) 인노첸시오 1세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그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와 438년 콘스탄티노플 사도교회에 안치했는데, 1626년 5월 1일부터 바티칸으로 옮겨져 성 베드로 성당의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었다.

2. 평가



정교회 전례에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이름을 붙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찬 예배(Η Θεία Λειτουργία του Χρυσοστόμου)가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말기에 동방 교회의 표준 양식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가장 많이 집전된다.
키릴로스에게 찍혀 밀려난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나 그 후임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는 공교롭게도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나 키릴로스 사이의 대립은 넓게 보면 안티오키아파와 알렉산드리아파라는 초기 기독교의 두 신학 파벌 사이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알력도 있었다(성서해석학 문서 참조). 두 파벌은 예수를 대하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알렉산드리아 파가 '로고스로써의 예수'를 말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성경 구절을 은유적, 신비적으로 해석하고 '비유'에 중점을 두어 해석했다면, 후발주자격(애초에 안티오키아파가 알렉산드리아파의 성서 해석 방법론이 자의적으로 빠질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생성, 발전했다)인 안티오키아파는 '역사적 예수'를 말하면서 예수의 인성을 보다 강조하고, 성경 구절의 문자적 의미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냥 은유만 찾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자료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자의 학문적 토대는 모두 그리스 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리아는 플라톤 철학에, 안티오키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더 가까웠다.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던 기독교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중세 서방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때의 일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남긴 저서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학자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중 총 6권으로 된 「사제직」(De sacerdotio)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대표적 저서로 꼽히는데 우아한 문장과 숭고한 신학적 사상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그외 수도생활에 관한 「테오도로에게 권고」 「진정한 참회」 등이 있으며 236편의 서간도 전해진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저서 대부분은 미뉴(J.P.Migne)의 교부 전집에 18권 분량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개인적 명성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높은 가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저서들은 서방 교회의 아우구스티노와 비교될만 하다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
한국에는 아침이슬에서 지혜의우물 시리즈 두 번째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어록이 <단순하게 살기>가 반역되어 있고, 388년(혹은 389년)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대해 연속적으로 설교한 내용이 2009년과 2019년에 각기 『부자』와 『라자로에 대한 강해(1-7편)』로 번역되었다. 분도출판사에서 『참회에 관한 설교/자선(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7)』를 번역 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분도출판사에서는 앞서 2016년에 루돌프 브렌들레가 쓴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기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고대 교회 한 개혁가의 초상』을 번역 출간하였다. 번역자는 이종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고 싶은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3. 기타


한국의 천주교 안동교구 3대 교구장 3대 권혁주 주교의 세례명이 요한 크리소스토모였다. 소설가 한수산 역시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세례명을 요한 크리소스토모로 삼았다.

4. 같이보기




[1] 때문에 주교들 가운데 '요한 금구'라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도 많으며, 본 항목도 '요한 금구'라고 입력해도 들어올 수 있다.[2]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학파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맞서 문헌 실증을 외치며 은유보다는 집필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정황들을 교차 검증하는 것을 중시했다.[3] 발렌티니아누스 2세 암살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아르보가스트의 누이로 아르보가스트 본인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죽었다.[4] 가이나스는 서방의 스틸리코와 같은 권력을 동로마에서 누리려 했지만 루피누스나 가이나스나 모두 자질이나 능력면에서 스틸리코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인물들이었다.[5] 마르코 복음서 14장 22절[6] 마태오의 복음서 25장 45절[7] 그 중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수장인 키릴루스도 있었다.[8] 더해서 이 일의 결과는 형제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간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호노리우스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지지하며 아르카디우스 부부에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형제는 408년 아르카디우스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고, 에우독시아는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하기 2년 전인 406년에 출산 중 사망했다.[9] 이것도 120여 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하기아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약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