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말칼덴 전쟁

 

'''Schmalkaldischer Krieg/Schmalkaldic War'''
1. 개요
2. 내용
3. 후속전
4. 결과와 영향
5. 기타


1. 개요


16세기 중반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서 벌어진 종교전쟁. 슈말칼덴 전쟁은 좁게는 1546년에서 1547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뜻하기도 하고, 넓게는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된 1531년부터 1552년 파사우 조약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1531년 개신교 제후들이 황제 카를 5세의 박해에 항의(프로테스트)하며 슈말칼덴 동맹을 맺은 후 1540년대부터 개신교와 가톨릭 제후들 간에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정점은 1546년에서 1547년 사이 독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여기서 카를 5세의 구교파가 승리했다.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Interim)를 선포하였고 1550년 '피의 칙령'을 내려 개신교도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카를 5세의 가혹한 개신교 탄압이 이어지자 신교도 세력의 불만이 팽배해졌고, 이에 1552년 샹보르 조약이 체결되어 독일 신교도 제후들과 프랑스 앙리 2세 간에 반합스부르크 동맹이 체결되어 다시 종교전쟁이 재개되었다. 1552년 5월 인스부르크에서 개신교 지도자인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공격을 받은 카를 5세는 가까스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필라흐로 도주했으나 이후 황제로서의 실권을 사실상 상실했다(인스부르크 전투). 카를 5세는 다시 군대를 소집했으나 종교전쟁에 지친 가톨릭 제후들은 황제의 명에 응하지 않았고, 개신교 제후들도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를 주선으로 양측 제후들은 1552년 8월 파사우 조약을 맺고 화해했다. 뒤이어 1555년 파사우 조약을 확장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맺어지면서 개신교 제후들과 자치 도시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었고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종교전쟁은 종식되었다.

2. 내용


1530년 신성로마제국에서 루터교회를 지지하는 영주(제후)와 자치도시들이 구교의 윤리를 내세워 신교도를 박해하고 폭정을 하는 카를 5세에 반발하여 군사 동맹 성격의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다. 1529년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가 3년 전에 개신교를 인정했던 약속을 모두 뒤엎고 신교도를 관용없이 탄압하겠다고 선언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은 신교파와 구교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공 등으로 해외 정세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슈말칼덴 동맹 체결 직후 당장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540년대에 이르자 양측 제후들은 군사적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되었다.
해외에서 발생한 전쟁이 모두 끝나자 1546년 카를 5세는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할 목적으로 5만2천 대군을 이끌고 신성 로마 제국 영내로 진주하였다. 그러나 신교도측 제후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교도 연합군의 지휘 체계와 규율은 매우 어수선했다.
신교군은 한번에 연합된 군대를 편성하지 못했고 카를 5세는 각 제후국들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승리를 쟁취해갔다. 대부분의 개신교 제후들을 제압한 카를 5세는 개신교파 최대 제후이자 구심점인 요한 프리드리히의 작센 공국으로 쳐들어갔고 마침내 1547년 4월 24일 작센 선제후령 비텐부르크 부근에 있는 뮐베르크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개신교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카를 5세가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일하여 제정한 교리를 따르도록 명을 내렸는데, 내용적으로 사실상 가톨릭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3. 후속전


그러나 전쟁 승리 이후 카를 5세의 신교 탄압이 더욱 가혹해져서 신교도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게다가 카를 5세는 독선적인 통치 방식으로 구교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었다. 또 카를 5세가 1531년 차기 황제인 로마왕으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1세을 내치고 장남인 펠리페 2세를 황제로 앉히려 하자 페르디난트 1세를 따르던 가톨릭 제후들의 민심도 이반되기 시작했다. 이에 작센-마이센 선제후 모리츠는 개신교 제후들을 재결집한 후 비밀리에 프랑스 앙리 2세와 동맹을 맺었다(샹보르 조약). 1552년 1월 마침내 반합스부르크 연합은 군사를 일으켜 남부 독일 일대를 장악했다. 5월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군은 인스부르크에 있던 황제를 공격했고, 카를 5세는 간신히 도망쳐 직접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며 탈출했다.
카를 5세는 알프스 산맥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남단 지역인 필라흐에 머물면서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 다시 군대를 모았으나, 구교파 최대 제후국인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가 황제의 명을 거부하여 황제의 복수전은 무산되었다.

4. 결과와 영향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교 제후들의 의견을 모아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 제후들과 강화를 맺었다(파사우 조약, 또는 파사우 화의; 1552년). 파사우 조약이 맺어지며 독일내 신교와 구교간에 평화가 이루어졌다. 이어 신교와 구교 양측은 종교적 평화를 영구화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에 파사우 조약의 합의 내용을 보완하여 1555년 역사적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다. 이에 개신교측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독일 내에서 종교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한편 고향인 네덜란드에 은거해 있던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체결을 절대적으로 반대했지만, 결국 조약이 체결되자 충격을 받아 이듬해 퇴위를 선언하고 수도원에서 은둔한 채 여생을 보냈다.
한편 프랑스의 앙리 2세가 이 전쟁에서 모리츠가 이끄는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한 대가로 로트링겐에 있는 세 개의 주교령인 베르됭, 메추, 툴 주교령이 프랑스 왕국에 병합(1552년)되었는데, 이로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870년 메르센 조약 이래 그동안 독일의 영토였던 알자스-로렌에 프랑스가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

5. 기타


현대 유럽의 루터교회에서 성상이 상당수 남은 것이 이 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로 인한 결과라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마르틴 루터는 생전에도 성상을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보았고,[1] 개혁파나 츠비카우파마냥 폭력적으로 깨부수는 것은 '연약한 신자'들을 실족시킬 수 있으니 자제하라고 한 적도 있어서 꼭 슈말칼덴 전쟁의 영향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1] 십계명의 우상숭배 금지 계명이 신약 시대 이후 무효화되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