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조형물)
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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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聖人)이나 임금의 화상(畫像)이나 초상(肖像) 또는 그리스도나 성모의 상(像).
영어로 icon 자체는 성화나 성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이콘이라 함은 성화 혹은 작은 지물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경향이 있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 그 외의 성인들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그린 것을 말한다. 성상은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공경한다. 다만 정교회는 예전 성상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조각은 잘 사용하지 않고 성화를 주로 사용한다. 성공회도 성모 신심이나 성인 공경 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고상과 성모상 같은 성상들을 인정하며 다양한 이콘을 사용하지만, 천주교에 비해서는 사용빈도가 다소 떨어진다.[1]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천지창조 등이 대표적인 성상이다.
성상숭배인지 성상공경인지는 상당한 어감의 차이가 있으므로, 본 항목에서는 숭배나 공경 등의 표현을 최대한 피하여 중립적으로 서술한다.
성상을 이야기할 때 역사적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초기 기독교 시절에는 단순히 비둘기, 물고기, 닻, 배, 태양 등의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박해와 우상숭배 금지사상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성화상이 등장한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부터인데, 성화상은 처음부터 성서를 읽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교리교육 수단으로서 여러 성미술의 장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4-5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그리스도나 성인들을 형상화한 성화상은 6-7세기에 이르러 교회, 카타콤, 수도원은 물론 개인주택에까지 그려지면서 공경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방 교회에서도 성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계기가 된다. 4세기 후반 훈족에 의해 밀려난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사회로 흘러들어오자, 무지몽매한 이교도를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교보재(…)가 필요했고, 이때 선교사들의 SOS로 교회가 성상을 장려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흐른 뒤, 이슬람교의 등장과 함께 발생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상은 우상숭배라고 주장했고, 동로마 제국 동부 속주들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소수의 이단운동에 불과했겠지만, 이슬람 세력에 맞서 제국 동부를 군사적으로 수호하던 황제들이 이들의 입장에 동정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황제들은 시민에 대한 영향력의 측면에서 교회와 경쟁하였으므로, 성상파괴론을 장려하는 것은 매력적인 정치적 도구일 수 있었다.
성상파괴론의 논리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다'면서 결국 그림은 불완전한 인성(人性)만을 그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화상 옹호론자들을 죄다 신성(神性)과 인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로 비난했다.[2] 무엇보다 성상 자체가 기존 그리스-로마 전통 신앙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산물인 만큼 굳이 이슬람교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성상 반대파는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교도 감화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가진 성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성 스테파노 등 수도원 등에서 활동하던 성화상 옹호 교부들도 지속적으로 성화상에 대해 그 정당성을 설득하였다.
특히 출애굽기(탈출기) 20장의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조상(彫像) 제작의 무조건 엄금이 아니고, 다만 이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행위를 금한 계명이라는 게 옹호 측의 설명이다. 즉 '조각상을 신으로 섬기지 마라'는, 어찌 보면 매우 상식적인 우상숭배 금지계명이라는 것.
또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이 당연한(?) 계명을 하느님이 굳이 내린 이유에 대해 "유다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경향이 심하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미신의 오류를 면하고 진리를 알게 되어 하느님을 모시고 오직 그분께 흠숭지례를 드릴 줄 알며,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더 완전히 더 풍부히 가졌으므로 어린 시대를 지나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아이가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식별 능력을 받아, 형상 표시의 가능 불가능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탈출기 25장에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커룹(그룹)의 형상'을 만들도록 시킨다. '''즉 '형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죄라서 금지시켰다면, 이는 하느님이 모순을 행한 셈이 된다(...)'''[3]
성 스테파노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 한 닢을 황제에게 내밀며 "폐하,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라고 묻자 황제는 "짐의 초상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스테파노는 동전을 내던지고 그것을 짓밟았다. 당연히 사형선고가 떨어졌고, 형장에서 그는 "아, 내가 한 국왕의 모습을 모욕하여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태워 없앤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하고 말하였다.
성화상을 기본적으로 초월적 신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창문으로 생각한 이들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으며[4] ,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같이 붙어다니므로 그림을 그려도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함께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상파괴론자들을 당시 치명적인 이단의 낙인이었던 단성론자로 몰아 반박한다. 이후 동로마 제국 내에서의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성상 허용과 금지가 번갈아 벌어지면서 애꿎은 인류의 문화유산들만이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서방 교회에서는 동방 교회와는 달리 딱히 성상파괴론을 자극할 만한 떡밥이 없었으므로, 서방 교회 입장에서는 동방에서 갑툭튀한 성상파괴론에 뜨악해서 동서 교회의 사이가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성상파괴론의 탄압을 받은 많은 이콘제작자들이 서방 교회로 망명함에 따라 서유럽의 성미술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안에 있는 아야 이리니[5] 가 바로 성상이 금지된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다.[6] 링크를 보면 이콘은 하나도 없고 '''십자가와 육각별 모양(다비드의 별)'''만 천장에 달랑 그려진 걸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도 '''저 모습 그대로''' 톱카프 궁전의 내부 시설로 편입되어 무기고, 보물창고, 궁중 보물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었고 터키 공화국시기인 1909년부터 1978년까지는 전쟁기념관이었다. 지금은 각종 행사를 위한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결국 여황제 이리니에 의해 소집된 제7차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은 성화를 통해 표현된 교리와 성인의 행적에 대한 공경이지, 성화 그 자체에 대한 공경이 아니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동방 교회는 다시 과거의 성화 사용 전통으로 복귀하였다.
이후로 정교회는 매년 사순 시기의 첫째 주일을 정교 주일로 지정하고 전세계 모든 정교회에서 성화(이콘)를 들고 행렬 의식을 거행하면서 성상 논쟁에서 정통 교리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즉 성화는 지금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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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성상파괴가 집중적으로 벌어진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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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해지나 싶었던 성상 파괴 운동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동방이 아닌 서방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1522년 안드레아스 칼슈타트에 의해 비텐베르크에서 성상이 철거된 것을 시점으로 1523년 취리히, 1535년 제네바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성상 파괴 사건이 일어났는데,[7] 그중에서 1566년 저지대 국가들에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은 시기상으로만 보면 가장 늦게 일어났지만,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발단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8] 가장 유명해졌다.
다만 먼나라 이웃나라등을 통해 알려진 것과 달리 남부에서[9] 북부로 올라가는 식이었고, 당시만 해도 신성모독적 행위라며 거세게 비난하는 반응이 많았던 데다 침묵공 빌럼도 처음에는[10] 오히려 성상 파괴를 진압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현재 네덜란드의 개신교 예배당들은 남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상이 제거되어 있는데 이는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80년 전쟁 도중 침묵공이 루터교회에서 칼뱅교회로 개종하고 남부를 제외한 현 네덜란드 지역의 대다수가 개신교 진영으로 들어가면서[11] 각 지방 의회의 동의 아래 성상 철거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12]
이는 검소하고 문자주의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장 칼뱅의 영향으로 당시는 상당한 사치품이었던 성상을 꺼리는 성향이 이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일단 소재부터 대리석에, 하느님과 교회의 권위를 보여야 하는 만큼 보석이나 금은으로 치장하는 경우가 많고 2차원 성화의 경우 거진 계란 노른자를 쓰는 템페라화가 대부분이라 식량 낭비 문제도 있었다.[13] 거기다 인부의 품삯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돈지랄이 따로 없는 것. 게다가 개신교에서는 출애굽기 사건에서 나온 금송아지를 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주신 하나님을 억지로 형상화한것임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오로지 보이지 않는 존재로만 경배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더욱이 "우상을 훼파하고 찍어 없애버려라"라는 구절이 있고 열왕기나 역대기를 보면 구약시대에도 헤즈키야나 요시아 왕처럼 닥치는 대로 우상을 모두 가루가 될 때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린 사례[14] 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근거로 당시 칼뱅파, 츠빙글리파, 급진주의 재세례파들은 성상파괴를 정당하다고 여겼다. 이후로 루터교회를 포함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시각적인 요소보다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활자적, 청각적''' 요소를 더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는 '''문해율 향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근대적인 공교육 개념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15]
또한 이러한 성상에 대한 태도로 당시 네덜란드와 유일하게 교류하고 있던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던 후미에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달리 일본과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 포교에 대해 별 관심없이 행동했던 네덜란드의 태도도 그 이유 중 포함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루터교회가 주류였던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교회 안에 있는 성상과 조각상들은 그대로 남겨두었지만 야외에 설치된 십자고상과 성모상들[16] 은 보이는 대로 뽑아버렸다. 애초에 루터파도 칼뱅파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것일 뿐 성상에 대해서는 원래 회의적이었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성상이 남은 것에 가깝다.(이에 관해서는 마르틴 루터의 후반생 문단 참조)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 교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상 파괴에 소극적이었다. 가톨릭과의 단절 선언을 한 헨리 8세는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성모상은 철저히 부수었지만, 그외의 성상들에 대해서는 (가톨릭을 강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니면)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우상숭배라고 공격받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에,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도 나름의 기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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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인(聖人)이나 임금의 화상(畫像)이나 초상(肖像) 또는 그리스도나 성모의 상(像).
영어로 icon 자체는 성화나 성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이콘이라 함은 성화 혹은 작은 지물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경향이 있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 그 외의 성인들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그린 것을 말한다. 성상은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공경한다. 다만 정교회는 예전 성상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조각은 잘 사용하지 않고 성화를 주로 사용한다. 성공회도 성모 신심이나 성인 공경 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고상과 성모상 같은 성상들을 인정하며 다양한 이콘을 사용하지만, 천주교에 비해서는 사용빈도가 다소 떨어진다.[1]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천지창조 등이 대표적인 성상이다.
성상숭배인지 성상공경인지는 상당한 어감의 차이가 있으므로, 본 항목에서는 숭배나 공경 등의 표현을 최대한 피하여 중립적으로 서술한다.
2. 성상 파괴 운동
2.1. 동서교회 분열 시기
성상을 이야기할 때 역사적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초기 기독교 시절에는 단순히 비둘기, 물고기, 닻, 배, 태양 등의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박해와 우상숭배 금지사상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성화상이 등장한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부터인데, 성화상은 처음부터 성서를 읽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교리교육 수단으로서 여러 성미술의 장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4-5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그리스도나 성인들을 형상화한 성화상은 6-7세기에 이르러 교회, 카타콤, 수도원은 물론 개인주택에까지 그려지면서 공경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방 교회에서도 성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계기가 된다. 4세기 후반 훈족에 의해 밀려난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사회로 흘러들어오자, 무지몽매한 이교도를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교보재(…)가 필요했고, 이때 선교사들의 SOS로 교회가 성상을 장려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흐른 뒤, 이슬람교의 등장과 함께 발생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상은 우상숭배라고 주장했고, 동로마 제국 동부 속주들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소수의 이단운동에 불과했겠지만, 이슬람 세력에 맞서 제국 동부를 군사적으로 수호하던 황제들이 이들의 입장에 동정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황제들은 시민에 대한 영향력의 측면에서 교회와 경쟁하였으므로, 성상파괴론을 장려하는 것은 매력적인 정치적 도구일 수 있었다.
성상파괴론의 논리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다'면서 결국 그림은 불완전한 인성(人性)만을 그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화상 옹호론자들을 죄다 신성(神性)과 인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로 비난했다.[2] 무엇보다 성상 자체가 기존 그리스-로마 전통 신앙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산물인 만큼 굳이 이슬람교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성상 반대파는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교도 감화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가진 성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성 스테파노 등 수도원 등에서 활동하던 성화상 옹호 교부들도 지속적으로 성화상에 대해 그 정당성을 설득하였다.
특히 출애굽기(탈출기) 20장의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조상(彫像) 제작의 무조건 엄금이 아니고, 다만 이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행위를 금한 계명이라는 게 옹호 측의 설명이다. 즉 '조각상을 신으로 섬기지 마라'는, 어찌 보면 매우 상식적인 우상숭배 금지계명이라는 것.
또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이 당연한(?) 계명을 하느님이 굳이 내린 이유에 대해 "유다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경향이 심하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미신의 오류를 면하고 진리를 알게 되어 하느님을 모시고 오직 그분께 흠숭지례를 드릴 줄 알며,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더 완전히 더 풍부히 가졌으므로 어린 시대를 지나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아이가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식별 능력을 받아, 형상 표시의 가능 불가능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탈출기 25장에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커룹(그룹)의 형상'을 만들도록 시킨다. '''즉 '형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죄라서 금지시켰다면, 이는 하느님이 모순을 행한 셈이 된다(...)'''[3]
성 스테파노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 한 닢을 황제에게 내밀며 "폐하,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라고 묻자 황제는 "짐의 초상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스테파노는 동전을 내던지고 그것을 짓밟았다. 당연히 사형선고가 떨어졌고, 형장에서 그는 "아, 내가 한 국왕의 모습을 모욕하여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태워 없앤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하고 말하였다.
성화상을 기본적으로 초월적 신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창문으로 생각한 이들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으며[4] ,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같이 붙어다니므로 그림을 그려도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함께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상파괴론자들을 당시 치명적인 이단의 낙인이었던 단성론자로 몰아 반박한다. 이후 동로마 제국 내에서의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성상 허용과 금지가 번갈아 벌어지면서 애꿎은 인류의 문화유산들만이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서방 교회에서는 동방 교회와는 달리 딱히 성상파괴론을 자극할 만한 떡밥이 없었으므로, 서방 교회 입장에서는 동방에서 갑툭튀한 성상파괴론에 뜨악해서 동서 교회의 사이가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성상파괴론의 탄압을 받은 많은 이콘제작자들이 서방 교회로 망명함에 따라 서유럽의 성미술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안에 있는 아야 이리니[5] 가 바로 성상이 금지된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다.[6] 링크를 보면 이콘은 하나도 없고 '''십자가와 육각별 모양(다비드의 별)'''만 천장에 달랑 그려진 걸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도 '''저 모습 그대로''' 톱카프 궁전의 내부 시설로 편입되어 무기고, 보물창고, 궁중 보물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었고 터키 공화국시기인 1909년부터 1978년까지는 전쟁기념관이었다. 지금은 각종 행사를 위한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결국 여황제 이리니에 의해 소집된 제7차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은 성화를 통해 표현된 교리와 성인의 행적에 대한 공경이지, 성화 그 자체에 대한 공경이 아니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동방 교회는 다시 과거의 성화 사용 전통으로 복귀하였다.
이후로 정교회는 매년 사순 시기의 첫째 주일을 정교 주일로 지정하고 전세계 모든 정교회에서 성화(이콘)를 들고 행렬 의식을 거행하면서 성상 논쟁에서 정통 교리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즉 성화는 지금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2. 종교개혁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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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성상파괴가 집중적으로 벌어진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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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해지나 싶었던 성상 파괴 운동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동방이 아닌 서방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1522년 안드레아스 칼슈타트에 의해 비텐베르크에서 성상이 철거된 것을 시점으로 1523년 취리히, 1535년 제네바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성상 파괴 사건이 일어났는데,[7] 그중에서 1566년 저지대 국가들에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은 시기상으로만 보면 가장 늦게 일어났지만,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발단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8] 가장 유명해졌다.
다만 먼나라 이웃나라등을 통해 알려진 것과 달리 남부에서[9] 북부로 올라가는 식이었고, 당시만 해도 신성모독적 행위라며 거세게 비난하는 반응이 많았던 데다 침묵공 빌럼도 처음에는[10] 오히려 성상 파괴를 진압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현재 네덜란드의 개신교 예배당들은 남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상이 제거되어 있는데 이는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80년 전쟁 도중 침묵공이 루터교회에서 칼뱅교회로 개종하고 남부를 제외한 현 네덜란드 지역의 대다수가 개신교 진영으로 들어가면서[11] 각 지방 의회의 동의 아래 성상 철거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12]
이는 검소하고 문자주의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장 칼뱅의 영향으로 당시는 상당한 사치품이었던 성상을 꺼리는 성향이 이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일단 소재부터 대리석에, 하느님과 교회의 권위를 보여야 하는 만큼 보석이나 금은으로 치장하는 경우가 많고 2차원 성화의 경우 거진 계란 노른자를 쓰는 템페라화가 대부분이라 식량 낭비 문제도 있었다.[13] 거기다 인부의 품삯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돈지랄이 따로 없는 것. 게다가 개신교에서는 출애굽기 사건에서 나온 금송아지를 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주신 하나님을 억지로 형상화한것임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오로지 보이지 않는 존재로만 경배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더욱이 "우상을 훼파하고 찍어 없애버려라"라는 구절이 있고 열왕기나 역대기를 보면 구약시대에도 헤즈키야나 요시아 왕처럼 닥치는 대로 우상을 모두 가루가 될 때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린 사례[14] 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근거로 당시 칼뱅파, 츠빙글리파, 급진주의 재세례파들은 성상파괴를 정당하다고 여겼다. 이후로 루터교회를 포함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시각적인 요소보다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활자적, 청각적''' 요소를 더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는 '''문해율 향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근대적인 공교육 개념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15]
또한 이러한 성상에 대한 태도로 당시 네덜란드와 유일하게 교류하고 있던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던 후미에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달리 일본과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 포교에 대해 별 관심없이 행동했던 네덜란드의 태도도 그 이유 중 포함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루터교회가 주류였던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교회 안에 있는 성상과 조각상들은 그대로 남겨두었지만 야외에 설치된 십자고상과 성모상들[16] 은 보이는 대로 뽑아버렸다. 애초에 루터파도 칼뱅파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것일 뿐 성상에 대해서는 원래 회의적이었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성상이 남은 것에 가깝다.(이에 관해서는 마르틴 루터의 후반생 문단 참조)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 교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상 파괴에 소극적이었다. 가톨릭과의 단절 선언을 한 헨리 8세는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성모상은 철저히 부수었지만, 그외의 성상들에 대해서는 (가톨릭을 강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니면)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3. 기준
우상숭배라고 공격받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에,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도 나름의 기준이 존재한다.
- 공경을 표하는 것은 오로지 축복받은 성상에 한한다.
- 축복받지 않은 것은 교회법상 신앙의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성상은 하나의 도구라는 뜻이다. 개인이 만든 단순한 형상이나 그림에 함부로 공경을 표해서는 안 된다.
- 특정한 성상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 예를 들어 발등 위에 장미꽃이 얹혀 있는 루르드의 성모상이라면 루르드의 성모님이 의미하는 은총을, 어디서 누가 만든 성상이든, 해당 성인을 의미하는 지물 등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고 사제에 의해 적법하게 축복받았다면 모두 신앙의 도구로서 똑같이 드러낸다는 것이 교회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즉, 교황한테 축복받은 묵주이든 동네 성당 보좌신부한테 축복받은 묵주이든 동등한 성물이라는 것.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 등을 무슨 부적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 이단인 나주 성모동산(마리아의 구원방주)는 이 기준을 위반했다.
[1] 성공회는 가톨릭의 전통을 따르려는 고교회파 외에도 개신교의 개혁정신을 따르려는 저교회파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광교회파가 있기 때문에 성상이나 이콘의 활용 정도는 각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다.[2] 실제로 네스토리우스파는 성상을 사용했다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상을 꺼리게 되었다.[3] 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을 음식 규례처럼 한때에만 유효했으며 현대에는 폐해진 부분이라고 여긴다.[4] 이를 '강생'이라 한다.[5] 그냥 '''성스러운 평화'''라는 뜻이고 밑의 성상을 용인한 여제와는 관계 없다.[6]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상 없는 정교회 건축물이기도 하다.[7] 심지어 루터교회 지역이던 코펜하겐에서도 벌어졌다.[8] 정확히는 성상 파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측과 스페인측 의견이 충돌했고, 알바 공이 잔혹한 종교재판을 펼친 것이 발단이다.[9] 저지대 지역에서 성상 파괴 사건이 가장 먼저 터진 장소는 現 프랑스령인 옹쇼트(Hondschoote, 네덜란드어로 혼트스호터)성당이었다.[10] 이 당시 빌럼은 루터교도였고 칼뱅교로 개종한 건 나중의 일이다.[11] 가장 마지막으로 개신교 진영에 편입된 곳이 다름아닌 암스테르담(1578년)이다.[12] 출처: Andrew Spicer 《Calvinist Churches in Early Modern Europe》, 116-124페이지[13] 종교개혁가들과 성상파괴론자들 눈에 템페라화는 '''먹을 것 갖고 장난치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으로 비춰졌다.[14] 불지옥을 뜻하는 게헨나(=게힌놈)가 이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다. 항목 참조[15] 실제로 루터와 칼뱅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최소한의 교육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호세아 4장 6절'''(백성들에게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을 인용하여 문맹이 우상숭배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16] 지금도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 구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길거리에 십자고상과 성모상, 혹은 이콘이 모셔진 사당 비스무리한 것을 길거리에 설치해 놓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