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작위)

 

1. 개요
2. 동양에서의 대공
2.1. 중국에서의 대공
2.2. 한국에서의 대공
3. 유럽에서의 대공
3.1. 독일어권에서의 대공
3.1.1. 오스트리아의 대공
3.2. 러시아에서의 대공
3.2.1. 루스 차르국 성립 이전
3.2.2. 루스 차르국 성립 이후
3.2.2.1. 루스 차르국 ~ 초기 러시아 제국
3.2.2.2. 파벨 1세 즉위 이후
3.2.2.3. 1886년 이후
3.3. 폴란드 왕국의 대공 (고공)
3.4. 프랑스어권에서의 대공


1. 개요


대공 大公

1. 유럽에서, 왕가의 황태자나 여왕의 부군(夫君)을 이르는 말.

2. 유럽에서, 소국(小國)의 군주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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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

군주 혹은 귀족의 작위 중 하나.
단어의 조어 형태를 보면 큰 대大에 공작 공公 자를 써서 공작 중에서도 높은 작위를 가르키는 말이 되겠으나, 정작 공公 이라는 말의 유래인 동아시아에서는 대공이란 정식 작위가 쓰인 바가 없고, 현대 한국어 상으로는 유럽의 프린스를 번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프린스가 소국의 군주라는 의미와 큰 왕국의 왕위계승자를 가르키는 말로 동시에 쓰이는데, 프린스를 왕자로 번역하면 그러한 의미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임의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하지만 후술하듯 공작으로 번역되는 DUKE 의 파생, 상위 작위가 유럽에 실존했고 그러한 작위들도 대공으로 번역할 수 있는 관계로(...) 약간의 혼선의 여지가 존재한다.

2. 동양에서의 대공



2.1. 중국에서의 대공


사실 중국에선 정식 작위명이 대공인 군주는 없었다. 중국에서 대공이라하면 춘추시대의 제후 중 상나라(은나라) 왕족의 후예이던 송나라의 공족이 비록 천자에서 제후로 격하되긴 했으나 그래도 과거의 왕족이었던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공(公) 앞에 대(大)를 붙여 자신을 드높인 것에 불과했다.

2.2. 한국에서의 대공


그러나 한국에선 중국과는 다르게 정식 작위명이 대공인 인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려의 마지막 국왕, 공양왕의 아버지인 왕균이다.[1]
과거에 전례가 없던 이례적인 작위를 왜 공양왕의 아버지인 왕균이 받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고려의 정세를 이해해야 한다. 당시 고려는 이성계와 정도전 같이 권신들의 힘이 너무나 강대했다. 방계 왕족[2]인 공양왕이 왕위에 오른 것도 공양왕의 동생이 이성계의 7남, 이방번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양왕은 사돈이자 최고의 권신인 이성계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절대 해선 안되는 입장이었다. 문제는 원래 방계 왕족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사대조를 왕으로 추존해야 하는데 이를 행하면 이성계에게 찍힐 것이 분명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고려의 충신들이 실망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후한의 광무제송 영종의 사례였다. 광무제와 송 영종처럼 공양왕은 자신의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를 각각 공작과 공비로 추존했다.[3] 그리곤 그래도 왕부(王父)인 자신의 아버지를 대공, 어머니를 국대비로 추존하여 적당히 양 쪽의 비위를 전부 맞추는 방법을 택했다. 조선시대로 따지자면 왕이 자신의 친부를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과 마찬가지인 셈.
대한제국 황제가 일제강점기에 이완용에 의해 대공으로 격하될 뻔하기도 했다는 말이 돌아다니나, 이는 사실과 정반대다.[4] 오히려 일본 측에서는 내부적으로 고종과 순종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릴 것을 잠정적으로 결론지었고,[5] 합병 직전 데라우치가 이완용과의 협상에서 고종과 순종을 각각 태공, 공으로 봉하자고 했으나, 이완용이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황제까지 했던 사람에게 공작위는 너무하지 않냐며 왕의 칭호를 고수하여 태왕, 왕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기저에는 민심을 고려해 종실을 보전하는 편이 낫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비록 나라는 팔아먹었지만 유학자로서의 이완용이 자기 딴엔 왕실만큼은 지켜내지 않았느냐는 평가를 받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이완용은 종묘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모셔지길 원했고 이것이 성사되었었던 만큼[6] 자기 나름대로는 조선 왕실의 신하로서 왕실을 지켜낸 공로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7]

3. 유럽에서의 대공


사실 유럽의 작위는 각국의 작위체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정형화된 법칙은 없고 똑같시 춘추시대의 오등작에서 따온 공작을 높인 대공으로 번역되는 작위라도 천차만별이었다.
대공으로 번역되는 대표적인 작위들은 다음과 같다.
1. 프랑스계의 Prince (프랭스)[8]
2. 독일어권의 Großherzog (영 : Grand Duke)
3. 오스트리아의 Erzherzog (영 : Archduke)
4. 폴란드 왕국의 Maximus Dux (영 : High Duke)[9]
5. 루스계 국가의 대공 Великий Князь (영 : Grand Prince)
대공으로 번역되는 작위들의 상하관계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 대공 (Erzherzog/Archduke) > 루스계 국가의 대공 (Великий Князь/Grand Prince)[10] = 독일어권의 대공 (Großherzog/Grand Duke) > 폴란드 왕국의 대공(고공) (Maximus Dux/High Duke) >= 프랑스의 대공 (Prince/프랭스) 순으로 격을 구분한다.
오스트리아의 Archduke는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친왕과 다름 없는 존재였으며 Grand Duke와 Grand Prince는 사실상 일국의 국왕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폴란드의 Maximus Dux (High Duke) 역시 일국의 왕과 마찬가지였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리투아니아 대공(Grand Duke[11])이 폴란드 대공(고공)보다 한 수 위였던 것으로 볼 때 Grand Duke가 High Duke보다 높은 것은 확실해보인다. 프랑스의 Prince는 친왕의 의미를 가진 대공이었기에 일국의 군주였던 High Duke와 비슷하거나 더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에는 Grand Prince와 Grand Duke를 두고 Grand Prince가 더 높다, 아니다 설전이 오갔지만 Grand Prince >= Grand Duke라는 오해를 만든 이유가 영미권-프랑스어권에선 Prince가 Duke보다 높기 때문일 것이다.[12] 그러나 애초에 영미권과 프랑스어권에선 Grand Prince는 물론 Grand Duke조차 존재하지 않으며[13] 독일어권에선 Prince에 해당하는 Fürst가 Duke에 해당하는 Herzog보다 낮긴 하지만 독일어권에는 Großfürst를 군주호로 사용하는 국가가 전혀 없었다. 즉, 영어로 Grand Prince로 번역되는 지위를 가진 군주들은 슬라브족들이 살고 있는 동유럽에만 존재했는데 동유럽의 공작은 Duke가 아예 없고 전부 Prince로 번역되는 보이보드와 크냐즈였기 때문에 동유럽에선 Duke와 Prince가 동격이었다.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이나 키예프 대공, 핀란드 대공, 리투아니아 대공, 그리고 아래에 서술되어있는 러시아 대공은 Grand Prince가 아니라 일괄적으로 Grand Duke라고 번역하는 것[14]을 볼 때 둘은 사실상 동격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세자를 Grand Prince라고 했는데 이 때의 Grand Prince는 대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대공의 장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공세자 (Hereditary Grand Duke)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때는 당연히 Grand Duke of Tuscany가 Grand Prince of Tuscany보다 높다.

3.1. 독일어권에서의 대공


독일에서 대공(Großherzog)은 사실상 독립 왕국의 왕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강한 세력이 큰 제후국의 군주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왜 그런 국가들이 왕을 칭하지 못하고 대공을 칭했는가 하면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본거지가 독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양에선 왕 역시 황제의 제후 중 한 명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서양에선 왕은 각국에선 황제라는 인식이 있었는데[17] 그렇기에 아무리 자신들의 힘이 강하더라도 황제의 신하의 자격으로는 왕을 칭할 수가 없었다. 제국 내에서 유이하게 왕을 칭할 수 있었던 로마왕(독일왕)은 제국의 황태자나 다름없던 존재였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던 독일 왕국의 구성국이던(...)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18]사실상 신성 로마 황제가 겸했기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로마왕(독일왕)=보헤미아 국왕이라는 암묵의 공식이 성립했고 그로 인해 그 누구도 왕을 칭할 수 없었다.
그러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수 백개의 소국들로 산산조각나면서 황제의 권위가 추락하자 또 하나의 왕이 등장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프로이센 왕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던 프로이센 공국에서 시작된 국가로 선제후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프로이센 왕국의 왕을 겸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선 왕이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프로이센 왕국 초창기엔 자신들의 명목상 주인이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눈치를 보느라 프로이센 내부에서의 왕(King in Prussia)으로 외공내왕으로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집권한 이후부터 당당히 왕을 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신성 로마 제국 말기 나폴레옹이 전 유럽에서 깽판을 치자 신성 로마 황제를 배신하고 나폴레옹에게 붙은 국가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국가들이 나폴레옹에 의해 왕국으로 승격하면서 제국 내부에도 왕국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1806년엔 아예 제국이 붕괴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라인 동맹을 거쳐 독일 연방이 탄생했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독일 연맹의 의장이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지라 영국 국왕이 겸했던 하노버 선제후국을 제외하곤 왕국으로 승격되는 국가가 없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와 같이 힘 좀 쓴다하는 국가들은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독일 제국 패망 직전인 1918년 당시엔 바덴, 헤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올덴부르크,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까지 총 6개의 대공국이 존재했었다.[19]

3.1.1. 오스트리아의 대공


대공으로 번역되는 작위 중 가장 상위에 있는 Archduke(독 : Erzherzog)[20]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군주들의 작위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지배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사실상 세습했기 때문에 Archduke는 황실 가문의 구성원을 의미하는 작위가 되었다. Archduke 작위의 적용 범위는 일반 작위와는 다른데, 일반적인 작위는 단 한 명의 후계자(주로 장남)에게만 물려지는데 반해 Archduke 작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적자 후손에게 상속되었다.[21][22]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Archduke 중 한 명인 베토벤의 후원자 루돌프 대공의 경우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이지만 Archduke였고,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Archduchess였다. 때문에 Archduke 작위는 오직 합스부르크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작위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 작위를 가지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시절 황제나 황태자는 Archduke보다 상위 작위인 황제, 로마왕을 사용했으므로, Archduke는 주로 루돌프 대공[23]처럼 제위와는 관련 없는 황자들의 메인 타이틀이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들어선 후에는 황태자는 타국과 마찬가지로 Crown Prince로 불렸고 나머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구성원들은 Archduke,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의 직계 후손들은 Archduke and Prince of Austria라고 불렸다. 다만 우리에게 친숙한 페르디난트 대공은 일반적으로 황태자라고는 하나 확정상속자가 아닌 추정상속자였기 때문에 정식으로 황태자 (Crown Prince)에 책봉된 적은 없기 때문에 기존의 작위이던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Archduke of Austria-Este)[25]으로 불렸다.
Archduke가 오직 합스부르크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작위가 된 것에는 좀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1356년 카를 4세금인칙서를 반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최고 작위이며 수많은 특권을 가진 일곱 명의 선제후를 확실히 명문화했다. 선제후 자리를 두고 힘있는 제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했는데, 카를 4세가 이를 금인칙서로 못박아 버리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장 큰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후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금인칙서 자체가 카를 4세가 자신의 라이벌 세력인 교황 및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을 다분히 견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데서 기인했다. 14세기 당시 카를 4세의 룩셈부르크 가문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돌아가면서 차지하던 가문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비텔스바흐 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사가 짧은 탓에 아직 선제후 가문이 아니었지만 당시 유동적이었던 선제후 자리에 공석이라도 생기면 곧바로 1순위로 들어가게 될 가문이었다. 하지만 카를 4세가 금인칙서에서 제외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표 타이틀인 오스트리아는 이후에 영영 선제후가 되지 못했다.[26] 또다른 강력한 가문인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공작과 팔츠 궁중백 두 개의 선제후 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카를 4세는 한 가문이 두 개의 선제후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면서 바이에른의 선제후 지위를 강제로 박탈해 버린다. 선제후 창단 멤버였던 유서깊은 바이에른을 빼버리고 역사가 훨씬 짧은 팔츠 궁중백을 선제후로 남긴 것에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더 약화시키려고 했던 카를 4세의 세심한 노력이 돋보인다. 반면 카를 4세의 룩셈부르크 가문이 보유한 선제후 자리인 보헤미아 왕국의 경우 거의 억지로 왕국으로 셀프 승격한 후 우여곡절 끝에 선제후가 되긴 했지만 역사가 짧은 데다가 비독일계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입지가 매우 불안정했다. 이에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통해 보헤미아 왕국을 선제후국으로 확정해 버렸다.
금인칙서가 발표되자 루돌프 4세는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건 바로 자기인데도 자신의 작위가 선제후보다 지위가 낮은 그냥 공작(Herzog)인 것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빈번하던 수법인 문서 위조를 통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오스트리아에 특권을 내린 칙서라며 '대특권(Privilegium maius)'이라고 이름붙인 위조 문서를 카를 4세에게 제출했다.[27] 이 문서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공작은 선제후와 비슷하거나 몇몇 부분에선 오히려 선제후보다 더 강력한 특권이 있었다.[28] 그러나 카를 4세는 해당 문서의 진위 여부를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에게 감정해 달라고 의뢰했고 페트라르카는 이 문서가 12세기 문법과 다르다면서 가짜로 판정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100년에 가까운 노력 끝에 다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프리드리히 3세는 제위에 오르자 마자 이 사기문서를 셀프승인하면서 대공(Archduke/Erzherzog)이라는 새로운 작위에 오르게 된다.[29][30] 비록 카를 4세의 금인칙서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영영 선제후국이 되지는 못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유일의 대공국(Archduchy)이 되면서 선제후국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16세기에 보헤미아 왕국까지 지배하게 되면서 선제후 자리도 차지하게 되었다.[31]
실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통치하는 Archduke와 왕자의 의미를 가진 예우상의 작위로써의 Archduke는 군주로써의 Prince와 왕자로써의 Prince의 구별법과 동일하다.[32] 베토벤의 제자였던 루돌프 대공 같이 예우상의 대공위를 지니고 있던 자들은 Archduke 이름 of Austria로, 실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국가원수로서의 대공은 이름, Archuke of Austria로 표기한다. 또한 루돌프 대공과 같은 예우상의 대공들의 정식 호칭은 His/Her Royal[33] Highness Archduke 이름 of Austria로 표기했고 국가원수로서의 대공은 His/Her Roual Highness The Archduke of Austria로 표기했다. 요약하자면 예우상의 대공과는 다르게 정식호칭에 이름이 없었고 Archduke 앞에는 The가 붙였다.

3.2. 러시아에서의 대공



3.2.1. 루스 차르국 성립 이전


루스 차르국이 성립되기 전에 존재하던 루스계 국가인 키예프 공국모스크바 대공국에선 자신들의 군주(대공)를 벨리키 크냐즈 (Великий Князь)라고 불렀다.[34] 중세 당시의 서유럽에선 벨리키 크냐즈를 왕(King)으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론 교황에게 대관을 받지 않은 이민족 군주였기 때문에 그들을 공작(Prince)로 번역했다고 한다.
동유럽계의 공작을 대체로 Prince로 번역하기에 벨리키 크냐즈 역시 Grand Prince로 번역해야 하지만 영미권이나 불어권, 스페인어권에선 Grand Duke/Grand-duc/Gran duque으로 번역하는 문서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그들도 이러한 번역이 명백한 오역이란 것을 알고 있다.
참고로 독일어권에선 동유럽의 공작인 보이보드와 크냐즈를 자신들의 후작에 해당되는 퓌르스트(Fürst)로 번역하기에[35] 벨리키 크냐즈 역시 엄밀히 따지자면 대후작이나 대제후에 해당하는 Großfürst로 번역한다. 이는 아래의 러시아 제국의 대공도 마찬가지이며 라틴어로는 Grand Prince와 동일한 의미인 Magnus Princeps으로 번역한다.

3.2.2. 루스 차르국 성립 이후


참고로 러시아 제국의 대공(Grand Duke또는 Grand Prince)는 실제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가 아닌, 예우상의 작위일 뿐으로 황자, 황녀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따라서 해당 작위는 왕자와 마찬가지였기에 Prince와 Archduke의 활용법과 마찬가지로 Grand Duke 이름 of Russia[36]로 표기하고 정식 호칭은 His/Her Imperial Highness Grand Duke 이름 of Russia로 표기했다.[37]

3.2.2.1. 루스 차르국 ~ 초기 러시아 제국

루스 차르국과 초창기 제정 러시아에선 남성 황족은 차레비치 (Tsarevich)[38], 여성 황족과 남성 황족의 정실 부인[39]차레브나 (Tsarevna)[40]라고 불렸다.[41]

3.2.2.2. 파벨 1세 즉위 이후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고 그녀와 표트르 3세의 장남이던 파벨 1세가 즉위했다. 파벨 1세가 즉위했을 무렵엔 어머니의 쿠데타를 지원한 방계 황족과 귀족들의 권세가 막강했고 갓 즉위한 파벨 1세는 이를 누를 필요가 있었다. 이에 1797년에 1797 Pauline house law라는 황실 규범을 발표했다. 이 법의 효력으로 여성의 제위계승권이 박탈되었고[43][44] 황태자, 황태자비 부부만이 차르에서 따온 체사레비치 (Tsesarevich)[45]체사레브나 (Tsesarevna)로 불리게 되었으며 나머지 황족들은 차레비치, 차레브나의 칭호를 잃은 대신 과거 루스계의 대공들을 가리키던 벨리키 크냐즈 (Великий Князь)[46]벨리키 크냐쥐나 (Великая Княжна)[47]로 불리게 되었다.[48] 동양식으로 따지자면 친왕으로 불리던 황족들을 대공으로 부르게 함으로써 방계 황족들을 견제하고 본인의 권위를 높이려는 정책이었던 것. 여담이지만 파벨 1세 이전의 러시아는 황제가 직접 후계자를 선정하는 지명제로 황태자를 정했었는데 이 때문에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다. 이에 서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야만성을 비웃었는데 특히 볼테르는 예카테리나 2세와 서신을 교환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음에도 지명제가 아니라 점령제가 아니냐며 예카테리나와 러시아를 대놓고 비웃을 정도였다. 즉, 체사레비치 작위를 만들고 시행한 파벨 1세의 정책은 러시아의 왕위 계승은 굉장히 원할하게 세습되도록 만들어 주었다.[49]

3.2.2.3. 1886년 이후

그렇게 약 90년이 흐르자 러시아 황실에는 벨리키 크냐즈들만 20명이 넘어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러시아의 대공들은 매 년 연금으로 25만 루블을 받았고 여대공들은 시집갈 때 지참금으로 100만 루블을 받았는데 굉장히 문란하고 사치스러운 것으로 유명했던 러시아 황족들은 당연히 25만 루블의 연금은 금방 탕진했다.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그러한 방계 황족들의 낭비벽을 굉장히 혐오했다.[50] 또한 계속해서 방계 황족이 늘어난다면 자연스레 황제의 권력이 줄어들 것임을 잘 알고 있던 알렉산드르 3세는 방계 황족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결국 1886년, 벨리키 크냐즈의 호칭은 황제의 아들과 친손자, 벨리키 크냐쥐나의 호칭은 황제의 딸과 친손녀, 그리고 대공의 정실 부인[51]에게만 주어지도록 법을 개정했고, 그 외의 방계 황족들과 그 들의 정실 부인은 일반 공작[52]크냐즈 (Князь)크냐쥐나 (Княжна)을 사용하도록 했다. 해당 법률이 첫 피해자는 니콜라이 1세의 증손주, 이오안 공 (Prince John Konstantinovich of Russia)으로 그는 해당 법률로 인해 대공위를 박탈당한 유일한 인물이었는데 생후 9일 만에 대공위를 박탈당했다. 그 다음 피해자는 알렉산드르 3세의 딸인 크세니야 여대공 (Grand Duchess Xenia Alexandrovna of Russia)과 니콜라이 1세의 손자[53]인 알렉산드르 대공 (Grand Duke Alexander Mikhailovich of Russia)의 장녀인 이리나 공주 (Princess Irina Alexandrovna)로, 비록 어머니가 황제의 친딸이자 여대공이긴 했으나 부계 혈통에 따라 벨리키 크냐쥐나가 아닌 크냐쥐나가 되었다. 참고로 이리나 공주는 라스푸틴을 살해한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의 아내였다.
참고로 러시아의 작위에는 Duke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공작, 여공작(공작부인)을 의미하는 크냐치와 크냐쥐나는 영어로 Prince로 번역된다. 독일에선 러시아 대공은 Großfürst[54], 방계 황족인 러시아 공작은 왕자를 뜻하는 Prinz로, 일반 공작은 Fürst로 번역한다.

3.3. 폴란드 왕국의 대공 (고공)


Maximus Dux[55]라는 작위가 존재했다고 한다. 피아스트 왕조의 볼레스와프 3세는 사망 전 자기 형과의 왕위 쟁탈전으로 겪은 비극적 경험을 자식들에게 대몰림하지 않기 위해 자식들에게 동등하게 영토를 분할해주고 특히 장남에게는 Maximus Dux이라는 지위와 함께 외교, 군사, 교회, 사법, 행정, 입법 등을 관할할 수 있는 특권을 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공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57]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을 맺은 시기가 길어 다들 폴란드의 대공이라면 리투아니아 대공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58] 리투아니아의 대공은 영어로 Grand Duke[59]로 번역되어 High Duke보다 더 격이 높은 대공으로 번역된다.[60]
여담이지만 블레스와프 3세의 계획은 사후 고공직을 두고 아들들 간의 내전으로 폴란드가 여러 공작령으로 분할되는 결과로 이어지며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3.4. 프랑스어권에서의 대공





[1] 삼한국 인효대공(三韓國 仁孝大公). 고려사 예지 제릉조 기록.[2] 방계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명종에서 공민왕 사이에 부계 후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 입장에선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왕균은 방계 왕족임에도 백작위를 받을 정도로 공민왕에게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었다.[3] 본래 공작의 아내는 국대부인의 작위를 받지만 특별히 공비로 추존했다.[4] 구글링해 보면 대부분 이덕일이 한 말로 나온다. [5] 한상일 저,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p367 참고[6] 광복 후 출향.[7] 김윤희 저 <이완용 평전> 참고,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8/13/1993081372206.html[8] 다만 프린스#s-1.3.1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Prince가 대공으로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9] Grand Duke와 구분하기 위해 고(高)공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10] 영미권과 불어권에선 Grand Duke로 번역하는 문서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영어위키에서도 Великий Князь를 Grand Duke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고 언급하고 있다.[11] 더 정확히는 Grand Prince.[12] 혹은 과거 키예프의 대공을 왕에 해당하는 Rex로 번역한 기록 때문일 것이다.[13] 프랑스에선 나폴레옹 1세 시기에 Grand Duke가 등장하긴 했으나 이는 엄밀히 따지면 프랑스 제국의 작위가 아니라 나폴레옹이 자신의 측근들을 프랑스의 위성국 군주로 꽂아넣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지 프랑스 제국의 작위에 Grand-Duc는 없었다.[14] 대공이라는 작위가 생소한 영미권이나 불어권에선 일괄적으로 Grand Duke로 번역한다. 하지만 영어위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Великий Князь를 Grand Duke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에 가깝다.[15]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하는데, 네 개의 제국 뒤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예언 때문에 네 번째 제국인 로마 제국 이후에 새로운 제국은 나타나서는 안됐다.[16] 역사상 옛 로마 강역을 수복한 사례는 없고 단순 영토 크기로 비슷하게 한 사례도 전성기의 나치 독일 외엔 전무하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스페인+프랑스+영국+이탈리아+그리스+터키+이집트+북아프리카+@이니...[17] 유럽에서는 황제가 곧 로마 황제를 뜻하는 것이기에[15] 황제위를 얻기 위해선 로마의 계승자이거나, 옛 로마 강역을 모두 지배 하에 두어서 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후자는 불가능하고[16] 전자도 이미 동로마가 멀쩡히 존재하기에 신성로마제국처럼 우격다짐으로 얻는 방법 외에는 답이 없었다. 따라서 힘 좀 있으면 칭제가 가능한 중국과는 달리 황제 칭호를 얻기가 사실상 불가능했고, 왕이 자연스레 동양의 황제 자리 비스무리한 위치로 승격된 것이다. [18] 따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보헤미아 국왕은 왕보다는 낮고 대공보단 높은 小왕(Petty King) 혹은 제후왕(Vassal King)에 가깝다.[19] 위의 예시가 된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계열의 국가이긴 하지만 독일 제국의 구성국은 아니었다.[20] 여성일 경우엔 Archduchess / 독 : Erzherzogin.[21] 이는 러시아의 Grand Prince와 비슷하다. 러시아의 경우도 1886년 이전엔 황제의 직계 후손이라면 누구나 대공을 칭할 수 있었다.[22] 참고로 독일의 작위는 분할 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게르만족의 전통 탓에 아버지가 공작이면 아들도, 손주도 전부 공작이었다. 다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영지는 장남에게만 물려주었기 때문에 Herzog와 Fürst의 후손들은 Prinz를 칭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대공의 경우 장남만 Großherzog였고 자녀들은 전혀 실권이 없는 예우상의 Herzog를 물려받거나 Prinz를 칭하게 되었다.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 대공은 격도 가장 높으면서 모든 부계 후손들이 칭할 수 있는,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인 작위였다.[23] 레오폴트 2세의 막내 아들이자 프란츠 2세의 동생으로 성직자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 겸 후원자로 더욱 유명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7번은 이 자에게 헌정되었는데 그로 인해 본제보다 대공(Archduke)라는 가제로 더욱 유명하다.[24] 이 때는 아직 루돌프 황태자가 사망하기 전으로 프란츠 요제프의 친척 중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 바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라 그가 물려받았던 것이다.[25]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방계 가문인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의 당주에게 주어지는 작위로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의 대가 끊기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해당 작위를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하사했고[24] 그의 사후 카를 1세가 해당 작위를 물려받았다가 그의 사후 카를의 차남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동생인 루돌프 대공이 해당 작위를 물려받았다. 참고로 현재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의 당주는 루돌프 대공의 아들이자 現 합스부르크 가문의 당주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의 사촌, 로렌츠 대공으로 그는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의 여동생인 아스트리드 공주와 결혼하였고 장인이던 알베르 2세에게 프린스 작위를 받으면서 His Imperial and Royal Highness Prince Lorenz of Belgium, Archduke of Austria-Este로 불리고 있고 그의 자녀들 역시 Prince(ss)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26] 다만 수 백년 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선제후국이던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하면서 선제후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27] 루돌프 4세가 위조한 '대특권' 말고도 '소특권(Privilegium Minus)'이라는 내용의 문서도 있는데 이 '소특권' 문서는 당시 바이에른 산하의 변경백령에 불과했던 오스트리아를 공국으로 승격시켜 바벤베르크 가문에게 수여한다는 내용의 문서로 '대특권'과 달리 1156년에 프리드리히 1세가 내린 진짜 문서가 맞다.[28] 영지의 분할 금지 및 장자 단일 상속제, 황제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입법권 및 사법권 보유 등. 다만 선제후의 최대 특권인 황제 선거권을 얻지는 못했다.[29] 어쨌든 이는 교황 권위의 근거가 되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와 함께 위조문서로 만들어진 권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로마 주교에게 로마시와 서방제국의 모든 권리를 양도한다는 내용의 위조문서이다. 신성로마제국을 로마제국의 정통 후계자로 로마제국과는 상관도 없는 교황이 공인한 것이 인정된 것이 이 때문이다. 게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선거에서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황에게 대관을 받지 못하면 그냥 독일의 왕일 뿐이였다. 한마디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조차 사기문서를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는 단지 정황뿐 아니라 언어의 사용(4세기 문서에 고전라틴어가 아닌 8세기경의 라틴어가 사용되고 있음)이나 인용구절(337년에 사망한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문서에 405년 완성된 불가타의 번역이 인용됨) 등의 문제로 위조문서임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30] 정식 승인이 되기 전에도 합스부르크 측에선 위조임을 부정하면서 Archduke를 자칭했다. 물론 그 때의 정식 작위명은 Duke of Austria였다.[31] 또한 제위계승에 멀어진 아들들에게 종교인의 길을 걷게 한 뒤, 추기경 선제후로 추천하기도 했다.[32] 이는 아래의 러시아 대공 역시 마찬가지이다.[33] 오스트리아 제국 성립 이후의 대공들은 His Imperial and Royal Highness Archduke and Prince 이름 of Austria로 불렸다.[34] 참고로 키예프의 대공은 본래의 의미를 살려 Grand Prince of Kiew로 기술한 문서가 굉장히 많다. 그에 비해 모스크바의 대공은 대부분의 문서에서 Grand Duke of Moscow으로 번역하고 있다.[35] 이 작위는 서유럽에선 Prince로 번역된다. 그러나 서유럽의 Prince가 Duke와 동격이거나 더 높은 과는 다르게 독일어권에선 Duke가 Prince에 해당하는 Fürst보다 높다. 물론 군주의 자녀인 Prinz의 경우 해당 군주가 왕이라면 일국의 왕자가 되므로 일반 공작보다 높은 위치였다.[36] 룩셈부르크의 대공 등 국가원수로서의 대공은 이름, Grand Duke of Luxembourg로 표기한다. (ex/Henri, Grand Duke of Luxembourg)[37] 룩셈부르크의 대공 등 국가원수로서의 대공의 정식호칭은 His/Her Royal Highness The Grand Duke of Luxembourg로 표기한다. 보다시피 러시아와는 다르게 정식호칭에 이름이 없고 Grand Duke 앞에 The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38] 차르+비치(=남자 아들). 차르의 아들 정도의 의미이다.[39] 정실부인이라도 귀천상혼일 경우 차레브나를 사용할 수 없었다.[40] 차레비치와 반대로 차르의 딸 정도의 의미이다.[41] 다만 제정 러시아 시기의 차레비치와 차레브나는 후에 러시아 제국의 황족들이 벨리키 크냐즈와 벨리키 크냐쥐나로 불린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Grand Duke와 Grand Duchess로 번역된 문서도 있다.[42] 실제로는 누가 죽였는지 모른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43] 과거의 러시아는 여성에게도 계승권이 있었지만 근대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남성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었다. 그렇기에 러시아에서 여제가 즉위한 모든 경우는 황후 혹은 공주가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남편이나 친족들을 제거한 뒤 무력으로 오른 것이었다. 파벨 1세는 아무리 황족이라지만 신하된 자가 황제를 함부로 폐위시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하게 여겼고 아버지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랐으며 독살하기까지 한[42]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라는 개인적인 감정과 자신의 부계가 독일계라는 점을 모두 이용해 살리카법을 러시아에 도입하는데 성공했다.[44] 훗날 이 법률은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45] 차르의 맏아들 정도의 의미이다.[46] 남성 황족.[47] 여성 황족과 남성 황족의 정실 부인들. 정실부인이라도 귀천상혼일 경우 해당 칭호를 받지 못했다.[48] 그러나 영국 등 서구권의 매체에선 황태자를 차레비치로 틀리게 부르는 일이 흔했다고.[49]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조건 파벨 1세의 정책이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는 할 수 없다.[50] 알렉산드르 본인은 굉장히 검소하고 가정적이었다고.[51] 귀천상혼은 정실이라도 인정하지 않았다.[52] 이라지만 일반 공작보단 격이 높았다. 황족들은 His/Her Highness The Prince(ss) 이름 of the Blood Imperial 또는 His/Her Highness Prince(ss) 이름 of Russia로 표기하여 일반 공작 (Prince)들과 차이를 두었다.[53] 알렉산드르 3세의 사촌동생이다. 즉, 크세니야 여대공은 자신의 5촌 당숙과 혼인한 것.[54] Grand Prince.[55] 영어로는 High Duke로 번역되는데 이로 인해 고공(高公)으로 번역되기도 한다.[56] 이는 교황이 인정해준 군주만이 기독교 군주, 즉, 유럽의 질서에 들어온 국가의 군주라는 의미이다. 동양식으로 따지면 중국의 황제가 책봉해준 군주만이 정식 국가이고 그렇지 않은 국가들은 오랑캐라는 것과 비슷하다.[57] 당시엔 교황이 왕으로 인정해 준 군주만이 왕을 칭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공작, 대공으로 밖에 칭할 수 없었는데[56], 폴란드를 비롯한 슬라브계 국가의 군주들은 교황과의 불화로 인해 국가의 군주가 왕이었다가 공작이었다가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58] 때문에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고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59] 동유럽의 대공들이 대부분 그렇듯 더 정확한 번역은 Großherzog, 즉, Grand Prince이다.[60] 참고로 리투아니아 대공은 독일어로 Großfürst, 폴란드 고공은 Seniorherzog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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