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왕

 


1.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왕(독일왕)
1.1. 개요
1.2. 기원과 명칭
1.3. 의미
2. 프랑스 제국의 로마왕


1.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왕(독일왕)



1.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선제후 선거에서 차기 황제로 당선되었으나 아직 교황의 대관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실상의 황제''' 또는 '''황태자'''를 뜻하는 말이다.

1.2. 기원과 명칭


로마왕(로마인들의 왕)과 독일왕(독일인들의 왕)이라는 명칭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919년 독일 왕국이 시작될 때 하인리히 1세가 자신을 '독일인들의 왕(King of the Germans)'이라고 칭한 데서 출발한다. 나중에 '독일왕(King of Germany, German king)' 등의 명칭이 병용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서면서 독일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하게 된다. 제국의 명칭에 '로마'가 들어가면서 하인리히 3세 때인 1039년부터 로마왕이라는 표현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로마왕이라는 명칭 역시 정확히는 '로마인들의 왕(Rex Romanorum, King of the Romans)'이다. 이 역시 '로마왕(King of Roma, King of Roman)' 등의 표현이 병용되었다. 독일왕이라는 표현도 계속 사용되었다. 11세기 후반 서임권 투쟁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황제 하인리히 4세를 'Rex Teutonicorum(독일인들의 왕)'이라고 지칭 것이 라틴어로 표기된 독일왕(독일인들의 왕)의 최초의 기록이다. 실제 다스렸던 지역이 독일 전역에다가 이탈리아는 일부만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역사서적에서는 편의상 일반적으로 독일왕이라는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로마왕의 경우 영어로는 King of the Romans(로마인들의 왕)라고 표기되기 때문에 고대 로마 왕정 기간 통치자들을 일컫는 King of Rome과는 표기상으로 구분된다.
현대 역사 관련 서적에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독일왕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편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Römisch-Deutscher König(로마-독일 왕) 같은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현재 독일어권에서는 이 표기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1.3. 의미


선거군주제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왕 칭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는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식 전까지의 '''사실상의 황제'''를 의미하는 직위이며, 둘째는 차기 황제로 지명된 '''황태자'''로서의 의미였다.
게르만족은 고대 시절 부터 민회를 통해 중요한 자리의 임명을 결정하는 관습이 있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세워진 프랑크 왕국 등 여러 게르만 국가에서는 형식적으로라도 선출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카롤루스 대제 역시 부분적으로 선출 형식을 거쳐 왕이 되었다.
10세기 동프랑크 왕국 후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각 부족(공국)들의 자치권이 강화된 상황에서 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5대 부족 공국 공작들(훗날의 선제후로 이어짐)의 선출에 의해 콘라트 1세가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유력 제후들의 선거로 왕을 결정하는 관습은 독일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선제후들의 선거로 로마왕(독일왕)으로 선출되어 로마왕이 된다. 이후 교황의 대관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제 위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가 교황 대관을 받지 않을 때까지 유지된다.
때문에 초기에는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아직 교황에게 승인(대관식)을 받지 못한, '''사실상의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1] 11세기 하인리히 4세그레고리오 7세를 역관광 태우고 난 후[2]에는 교황 대관식 전 로마왕(독일왕), 교황 대관식 후 황제의 흐름이 정착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제후 선거에서 당선되면, 교황의 황제 대관을 받기 전에 먼저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로부터 독일왕 대관[3]을 받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번의 대관식을 거치게 된다.
또한 아래에 나와 있는 근대 합스부르크 시절과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에도 독일왕이 제국의 황태자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다. 황권이 비교적 강했던 초기에는 황제가 자신의 재위 기간 중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기 위해 미리 선거를 치뤄 아들을 독일왕에 앉히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 오토 왕조 시절 황제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서기 전 독일 왕국 시절부터 이런 방법을 사용해 안정적으로 왕위를 세습해 나갔다. 그러나 이후 교황권 및 제후들의 권력이 강해지고 황권이 약화되면서 황제 생전에 선거를 열어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대공위 시대 이후 선제후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선거를 통한 후계자 지명 시스템은 무력화되어 황제 생전에 후계자가 지명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선제후들은 자신들보다 세력이 약한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에서 황제를 선출했고, 한 가문이 독점적으로 제위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가문별로 교대로 황제를 선출했다. 이런 시스템은 15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세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처럼 독일왕이 의미가 두 가지였기 때문에 두 명의 독일왕이 공존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콘라트 3세 황제 시절, 콘라트 3세 본인은 황제의 대관을 받지 못해 (사실상 황제로서) 독일왕의 지위에 있었으며,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프리드리히 2세 역시 (황태자로서의) 독일왕이었다.
그러다가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와 로마왕의 의미가 다소 달라지게 된다. 서임권 투쟁을 거치면서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의 하나로 대관을 치뤄주지 않는 수법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지자 이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356년 카를 4세금인칙서에서 황제 선출 과정에서 교황권의 배제를 명문화하였다.
나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세습이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식 없이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이 때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의 대관식과는 관계 없이 선출과 동시에 황제가 되었다. 사실 대공위 시대 직후에도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한동안 황제들이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교황에게 대관을 받는 관례가 이어져 왔었다. 그러다가 막시밀리안 1세 때 다시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황제를 칭했고 그의 손자 카를 5세를 제외하면서 이후 교황의 대관을 받은 황제가 없다. 막시밀리안 1세는 아예 황제의 공식 명칙을 '선출된 로마 황제(선출황제)'(Electus Romanorum Imperator)로 바꾸었고 이 칭호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4]
그러나 막시밀리안 1세조차도 자기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황제 선거를 생전에 열만큼 권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황제 생전에 미리 선거를 실시해 후계자, 즉 황태자를 결정하던 제국 초기의 세습 방식은 카를 5세 때 이르러서 부활하게 된다. 카를 5세는 각지에서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서 제위를 안정시키고자 자신의 재임 기간 중인 1530년 미리 후임 황제 선거를 실시하였는데,[5] 그 결과 단독후보였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후임 황제로 선출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카를 5세 퇴위 후 정식으로 황제 자리에 오를 때까지 로마왕(독일왕)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황제의 제위 기간 중 차기 황제 선거를 치루어 그 아들이 로마왕에 오르는 전통이 재확립되었다. 선출된 로마왕은 선황이 승하한 후 곧바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때문에 이후 로마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태자'''를 뜻하는 칭호가 되었다.
목록은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참고.

2. 프랑스 제국의 로마왕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가 태어났을 때 계승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로마왕의 칭호를 주었다. 물론 그 이후 제1제국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이 로마왕은 나폴레옹 2세가 유일하다. 이 로마왕 칭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왕과는 달리 '로마인들의 왕'이 아니라 정식 명칭이 그냥 로마왕(Roi de Rome)이다.

[1] 이것이 처음 쓰인 것은 11세기 잘리어 왕가 시기의 일이다.[2] 서임권 투쟁이 한창이었던 당대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를 까려는 의도로 단순히 '독일왕'(Rex Teutonicorum)으로 칭하였다.[3] 카를루스 대제의 도시 아헨에서 선제후 쾰른 대주교에게 대관 받는다. 그러다가 최선임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의 이의 제기로 16세기 무렵부턴 쾰른대주교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선제후인 마인츠 대주교가 대관을 맡는다.[4] 때문에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들을 선출황제라 부르기도 한다.[5] 카를 5세는 친가, 외가를 통해 상속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본인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각종 반란과 전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벌어진 종교전쟁과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일임했다. 카를 5세는 동생이 독일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여러 제위 중 황제직의 바탕인 오스트리아 대공직을 동생에게 넘겼고, 이어 1530년 미리 차기 황제 선거를 치루어 동생이 차기 황제 자격으로 독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 카를 5세는 만년에 황제직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려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을 회수하려 시도했으나, 이미 독일에서 확고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트 1세에 밀려 실패했다. 결국 카를 5세는 황제직은 동생에게, 스페인과 네덜란드 왕위는 아들에게 양위하고 은퇴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