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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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터교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처음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교회[1] 이다. 흔히 국내에선 종교개혁으로 처음으로 생긴 개신교 교단이니 우리가 흔히 아는 동네 교회의 분위기와 비슷할 거라 여기겠지만 그 이후 생겨난 장로회, 침례회 등의 교단들과는 상당히 다르고, 성공회처럼 천주교와 전례, 교리, 교회의 구조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2]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루터회 또는 루터교회로 칭하고 있으나, 유럽에서는 나라에 따라서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독일과 핀란드에서는 한국처럼 루터교회라고 부르지만 핀란드를 제외한 북유럽에서는 보통 스웨덴 국교회(Church of Sweden)처럼 그냥 국교회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3] 아이슬란드의 경우 '국교회(Þjóðkirkjan)'와 '복음주의 루터교회(Hin evangeliska lúterska kirkja)'란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
본래는 루터란(Lutheran)이라고 불렸다. 즉 '루터 추종자' 정도의 뜻이었고, 당연히 이는 천주교 측에서 부르던 멸칭이다. "너네는 루터의 말을 따르니까, 기독교도가 아니라 루터 추종자다!" 이런 느낌. 게다가 루터는 본래 자신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기독교'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가르침은 본래의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자신이 새로운 생각을 해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이름을 종파에 붙이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우 불경한 일이라 여겨 반대하였다.
하지만 루터교회 교인들은 계속 루터 추종자라는 욕을 먹자, 급기야 토라진 나머지 "그래, 우리 루터 추종자다! 어쩔래?"라는 식으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루터교회(Lutheran Church)가 그대로 교회의 이름으로 완전히 굳어지고 말았다.
참고로 위의 문장은 마르틴 루터의 문장으로, 루터교회들은 위 문장을 간략화하거나 약간 바꾸어서 교회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간혹 백조를 상징으로 쓰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는 초기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했던 얀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 붙잡혀 화형당하기 직전 남긴 다음 유언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늘 당신들은 한 마리의 거위(Husa)[4]
를 태우지만, 당신들이 태우지 못할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날 것이다."(Dnes pečete hus, ale přijde labuť, kterou nebudete moci upéci.)
《자유의지 논쟁》 55~56쪽에 따르면 얀 후스에게 화형을 선고한 주교는 죽은 뒤, 아우구스티노가 새겨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는 에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성당 지하에 묻혔다. 아우구스티노는 그 성당의 중앙홀을 보도록 새겨졌고, 그 중앙홀 바로 밑에 묻힌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홀에서 마르틴 루터가 사제서품을 받았다.
참고로 기독교 교파 중에서는 루터교가 이슬람과의 적대적 접점이 제일 작은 교파이다. 다만 마르틴 루터 본인은 개인적으로 이슬람을 몹시 싫어했다.
2. 특징
루터교회는 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형해화로 사실상 왕과 같은 권력을 지닌 독일의 대영주들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의 군주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북유럽의 군주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 세속 군주의 왕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의 영향도 크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루터교회는 국교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그 영향으로 현재까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5] , 그리고 독일 북부와 동부 전역에서 루터교회는 국교회(國敎會, state church)로서, 왕과 왕족들, 그리고 인구의 70~90%가 국교회 루터교회 교인들이다.
한편, 네덜란드[6] , 독일, 프랑스, 체코[7] 등지에는 개혁주의(칼뱅주의) 교회들과 한 교단으로 통합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United Church 라고 한다.
2.1. 루터교회의 예전
2.2. 주요 교리와 그 흐름
초기 개혁(교회의 본질 회복)에 대한 교리의 기초는 마르틴 루터와 필리프 멜랑히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멜랑히톤에게 아우구스티노의 칭의론과 개혁의 방향을 가르치고, 멜랑히톤은 루터에게 코이네 그리스어를 가르쳐주었다.
마르틴 루터는 강력한 예정설을 주장하며, 아담을 통해 유전된 원죄로 자유의지가 완전히 타락하여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노예의지론으로 설명한다.[8] 따라서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구원의 핵심이다. 또한 하느님은 믿는 자들을 고난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게 한다는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며, 당시 상선벌악에 치중하여 주님의 마음에 들수록 모든 것이 좋아진다는 스콜라 철학에 맞섰다. 이외에 성체성사과 세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중시하고, 이신칭의 교리를 주장했다. 다만 츠빙글리와의 일치에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성체성사론을 공재론[9] 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상징설을 주장하던 스위스의 외콜람파디오, 츠빙글리 등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어권 개혁자들과 루터가 연합을 위해 만난 마르부르크 화의가 깨진 것은 이러한 성체성사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이러한 루터의 독창적인 견해로 인해 루터와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자들을 만나도록 주선한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부처와도 끝끝내 합의하지 못하다가, 마르틴 부처가 중재한 비텐베르크 합의문에는 서명했으나 스위스의 취리히 교회를 중심으로 한 독일어권 교회들은 서명하지 않았다. 성체성사에 대한 공재론은 예나 대학교를 중심으로 등장한 강경 루터교회에게 이어졌다. 결국 루터교회 내부에서의 일치 문제가 다루어 질 때, '''일치신조'''의 필수 조항에 공재론을 넣었다. 공재론에 동의한 개혁자들은 오늘날 독일의 주류 루터교회가 되고, 동의하지 않은[10] 부류는 대부분 개혁교회와 일치를 이루었으며, 독립루터교회로 존재하기도 했다.
멜랑히톤은 루터에 비해 온건한 어조로 《신학총론》[11] 을 저술하며, 개혁자들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는 천주교에서 루터에게 동조한 다양한 성직자들에게서 불거진 전례 문제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면서도 장 칼뱅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12] 칼뱅의 이중예정설에는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지만,[13] 이외에 교리에서는 일치 했다. 멜랑히톤 스스로도 '''"스위스인들이 와서 말한다. 멜랑히톤은 칼뱅처럼 생각하고 칼뱅은 멜랑히톤처럼 생각한다."'''고 제자들에게 말했을 정도. 멜랑히톤의 제자들과 동료들은 필립히스트라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멜랑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성체성사 부분을 비루터교회 개혁자들의 상징설, 성령임재론[14] 과 조화될 수 있는 온건한 어조로 수정하자[15] , 비밀 칼뱅주의자라는 멸칭으로 강경 루터교회에게 배척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멜랑히톤을 중심으로 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진은, 공재론을 강력히 밀던 강경파 루터주의자들의 본산인 예나 대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현재 루터교회의 뿌리가 되는 개혁가들과 마찰을 빚었다. 멜랑히톤이 죽은 후, 강경 루터교회가 비텐베르크 대학을 장악했다. 멜랑히톤의 대표적인 제자인 우르시노가 칼뱅주의자인 올레비아노, 에라스토 등과 함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만드는 등, 대부분의 멜랑히톤에게 배운 제자들은 스위스의 츠빙글리파, 칼뱅파와 함께 개혁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극소수가 주류 루터교회에 잔류했다.
2.3. 천주교/정교회/성공회와의 유사점과 차이점
가장 오래된 개신교이자 이름이 주는 상징성처럼 자타공인 장자 교단이라 할 수도 있으며, 그래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예배의 전례적 특성이나 교회 제도 등은 천주교와 유사한 면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터교회보단 성공회가 천주교와 좀 더 가깝다, 루터교회의 예배를 처음 본 사람은 좀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또한 천주교 신부들과 같이 사목자[16][17] 들이 로만 칼라를 착용하며,[18] 주교의 모자인 '주케토'도 쓰는 등 천주교 비슷한 모습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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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통적 양식은 북유럽의 루터교회에서 더욱 크게 드러난다. 스칸디나비아 루터교회의 경우 모두 국가 정책으로써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고 그 교리를 교회에 녹여 교황의 수위권에서 탈피시킨 뒤 국왕이 장악하는 전형적인 국교회적 특성에서 출발했다. 이런 점은 사실 개교회적 측면이 강조된 원래의 루터교회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성공회와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교리적인 내용만 루터교회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며 전례적, 제도적 측면에서는 훨씬 국교회 조직 유지측면에서 유리한 전통적 요소들과 교계제도가 유지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도 북유럽의 각 루터교회는 국교로서의 위상을 가지며 천주교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교계제도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다만 각 나라간에 미묘한 차이는 있는데, 스웨덴이 가장 전통적인 요소가 많은 편이며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는 평신도 경건주의 영향으로 좀 약한 편이다. 또한 덴마크의 경우 특이하게도 주름진 칼라를 성직자 복장으로 사용한다. 덴마크와 인접한 북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나 함부르크 일부의 성직자들도 (드물지만) 주름진 칼라를 착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성모 마리아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성모 공경도 인정한다. 대한민국의 루터교회도 8월 15일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기념일로 해놓았다.[19][20] 성공회도 영국에서의 '세속 군주의 교회 지배'를 목적으로 국가 주도하에 전통적 교계제도에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정치적 위치는 북유럽의 루터교회와 비슷하다. 사실상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성공회나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이며 성공회와도 이런 공통점을 서로 감안해 '포르보 공동체'를 결성해 스칸디나비아의 국교회와 성공회 간의 성사 교류를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하나의 공동체로 합쳐진 것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다.
허나 엄연히 천주교와는 좋지 않은 일로 생겨난 교파인 만큼, 루터교회만의 특징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마르틴 루터가 '''지역교회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관구제를 채택한 성공회와 달리 '''개교회의 개성과 자치를 존중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또한 '준성사'란 개념을 만들어 7성사를 사실상 모두 유지하는 성공회와 달리 루터교회는 다른 개신교들처럼 세례와 성찬, 두 가지 성사만을 인정한다. 성인이나 순교자에 대한 공경도 어디까지나 축일로 기념하여 그들의 믿음과 순교 정신을 기억하고 본받자는 정도이지, 천주교처럼 '우리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들'로 보는 게 아니다. '''애초에 루터 본인부터'''가 마리아를 포함한 성인들에게 통공기도를 드리는 것과 성유물 개념에 대해 우상숭배라며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가 그가 죽고 나서 멜란히톤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했는지 천주교 전통을 조금 손봐서 재도입한 것에 가깝다.[21] 결정적으로 루터교회가 우세한 국가들은 '''마르틴 루터부터가 수도원 무용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남녀 수도원을 각 국가별로 모두 개혁 과정에서 없애버려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고[22] 천주교, 정교회 국가에서 지금도 존재하는 길거리 십자고상(Wayside cross)이나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위령비를 세우는 행위, 세례명을 주는 제도 등을 모두 개혁 과정에서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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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전통적 전례복도 마찬가지로 20세기 전반까지는 일반적인 복장이 아니었다. 원래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묘사한 것처럼 까만 사목자가운에 하얀색 'ㅅ'자형 칼라를 두른 복장이 일반적이었고[23] 1960년대까지는 국교회 성향이 강한 북유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교회 일치 운동과 함께 고교회 루터교회 운동이 활성화되며 기존의 개신교적 정체성보다는 전례적인 분위기를 중시하게 되면서 천주교와 비슷한 복장 체계가 도입된 것. 국가나 지역, 교파에 따라서 아예 사복 정장 차림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교회 제도 측면에서는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와는 차이가 꽤 크다. 유형적 보편교회론을 강조하고 반드시 어딜 가나 주교제를 실시하는 위 교회들과는 달리 루터교회는 국가 혹은 각 교단들마다 교회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북유럽과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루터교회는 역사적인 이유로 주교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고, 미국이나 독일 등지의 루터교회 교단들 중에서도 주교제를 실시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24] 그러나 구교회나 성공회의 주교제와는 매우 거리가 먼 장로제, 회중제와 비슷한 형태의 교단 구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하단에 언급된 미국의 WELS(위스콘신 시노드)의 경우 회중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LCMC(Lutheran Congregations in Mission for Christ)[25] , 아시아에서 가장 큰 루터교회 교단인 인도네시아 바탁 루터교단 등의 교단들도 회중제를 실시하고 있다.
또, 일부 교단들은 주교제를 실시하더라도 회중제적 요소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어서[26] 다른 주교제 교회보다 개교회의 권한이 강한 편이다. 반대로 회중제를 실시하더라도 주교제적 요소들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 루터교회의 모체인 미국의 LCMS(미주리 시노드)[27]
예배 형식도 천주교나 성공회의 장엄 미사가 연상되는 장엄한 형태[28][29] 에서 다른 개신교와 별 차이 없는 형태, 그 중간적인 형태 등 다양하다. 전례를 최대한 준수하더라도 성호를 아예 안 긋는 경우가 있을 정도. 다만 상술했듯이 대다수의 루터교회의 예배 양식은 루터교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하더라도 침례회 등 개신교와 비교하면 여전히 엄숙하고 전례적인 편이며, 침례회나 오순절교회 등과 비슷한 양식의 미사'''만''' 드리는 경우는 확실히 드물다. (특히 미국 등지의) 루터교회에서는 개방적인 분위기의 미사와 전례적인 미사를 병행하는 경우도 꽤 많다.[30]
다만, 성공회에서도 교의적 고교회파와 전례적 고교회파가 어느 정도 구분되고 전례적 저교회파와 교의적 저교회파가 어느 정도 구분되듯이 루터교회 내에서도 양식적으로 엄숙하고 전례적이더라도 신학, 신앙관에서는 천주교와 차이가 뚜렷하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경우도 있으며, 후술할 미국의 LCMS내부의 고교회파나 보수적인 군소 교단 등지[31] 에서도 전례적,양식적으로는 상당히 장엄하나, 신학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천주교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양식적으로 고교회적이라고 반드시 신앙관 측면에서 천주교, 정교회에 가깝거나 에큐메니즘에 유화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양식적으로 매우 장엄하더라고 신학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복음주의이고, 본래 루터교회적인 입장을 강경하게 대변하며, 에큐메니즘에도 부정적인 경우도 존재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루터교회에서는 저교회/고교회의 구분이 성공회보다 많이 흐릿한 편이다.
덧붙여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루터교회 수위 주교들은 다음과 같다.
- 웁살라 대주교(스웨덴 교회)
- 니다로스[32] 의장주교(노르웨이 교회)
- 코펜하겐 주교(덴마크 교회)
- 투르쿠 대주교(핀란드 복음주의 루터교회)
- 아이슬란드(레이캬비크) 주교(아이슬란드 교회)
- 페로 제도 주교 (페로 제도 교회)
2.4. 성상 등 전통적 구습에 대한 관점
사실 마르틴 루터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며 성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칼슈타트[33] 나 '츠비카우 예언자들' 등 과격파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되도록이면 '''구습에 물든 연약한 신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당분간은 성상을 존치시키되, 절차를 밟아서 하나 둘씩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또한 루터는 '복음적 자유'(Die Evangelische Freiheit)라는 개념을 강조했는데, 이는 갑작스럽게 기존의 분위기를 바꾸고 이를 강요하는 것은 결국 천주교의 교황적 권위주의와 다를 게 없다는 논리이다.[34]유일하고 거룩한 교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고 성사를 올바르게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 교회이다. 교회의 참된 통일을 위해서는 복음의 가르침과 성사의 집행에 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족하다. '''인간의 전통, 곧 인간에 의하여 제정된 의식과 예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7조 - 교회에 관하여
그리고 마르틴 루터 항목의 후반생애 문단에서 알 수 있듯 성상을 제한적으로(?) 용인한 데는 '''정치적 타협'''이 필요했던 이유도 컸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로 인해 루터교회는 천주교, 정교회처럼 성화상이 의식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교리적으로 강제하지 않으며, 제대 방향을 제외하면 '''성상에 직접 기도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35] 따라서 각 국가별, 지역별, 개교회별로 교회 내부의 인테리어는 천차만별이다. 한국의 루터교회도 교회별로 십자고상이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네덜란드와 체코 등 일부 국가들은 'United church'라고 해서 루터교회와 칼뱅교회가 통합되어 있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런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건물 인테리어는 개신교 쪽과 비슷한데 예배를 루터교회 식으로 드리는 경우가 간간히 존재한다.
교회 뿐 아니라 가정집이나 회사 등에서도 천주교나 성공회는 십자고상이나 성모상을 들이는 경우가 많은 반면[36] , 루터교회는 일반적인 개신교처럼 십자가 틀만 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 등과 비교했을 때 미묘한 차이는 의외로 많은데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 차이로 인해 성상은 있어도 제단에 감실[37] 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루터 본인이 수도자 겸 대학강사 시절부터 수호성인,[38] 성유물, 성수, 성염(聖鹽) 등에 대해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풍습이라고 거세게 비판했으므로 당연히 이런 전통들은 사라졌다.[39]
3. 세계의 루터교회
발상지인 독일과 루터교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교로 삼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 지역에서 교세가 강성하다. 독일계 이민자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미국(주로 북부나 중서부)에도 적지 않은 신자가 있다. 영국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 전래되어 웨일스에서 꽤 세가 큰 편이다.
다만 본진이던 유럽과 북미에서는 성공회처럼 대체로 교세가 위축되어 가는 형편이다. 루터교세계연맹은 2020년 발표한 ‘2019년도 루터교회 신자 통계’에서 전 세계 루터교회 신자 수는 7,749만 3,989명으로 집계됐다. 단일교단으로는 '에티오피아 복음주의 교회 메카네예수'가 전년대비 폭증하여, 가장 많은 1,040만여명으로 1위였고, 탄자니아 루터교회가 790만여명, 스웨덴 교회가 590만여 명 순이었다. 하지만 전체 교인 수로 합치면 1,081만여명인 12개 교단연합 독일 연합 개신교회가 최대였다. 1990년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유럽의 탈기독교 현상으로 조만간 그 지위를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헌금이란 개념 대신 아예 교회세를 강요한 유럽 루터교회들의 책임도 큰데, 현대 유럽인들이 더 이상 교회를 다니려 하지 않는 데는 바로 세금 부담 탓도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유럽 및 아메리카 지역에서 신자 수가 줄고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성장세를 보이는 판국이다. 그렇다고 유럽에서 감소세를 손 놓고 있지는 않으며 어느 정도 신앙을 지켜내려는 신자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한편으로 국교회가 '자유주의화'되는 것에 반발한 성직자들이 대거 탈퇴한 뒤 보수파 독립교단을 설립하거나 아예 천주교로 넘어가기도 했다.
3.1. 유럽의 루터교회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회는 독일 루터교회에서 유럽 루터교회로 발전하였다. 1525년 이후 프로이센, 1527년 이후 북구 제국 스웨덴과 핀란드, 1537년 이후 덴마크와 노르웨이, 1539년 이후 아이슬란드와 그리고 발트 해의 여러 국가들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그 외 일부 동부 유럽 지역으로 전해졌다.
독일에서는 ‘일치서’ 이후로부터 17세기 말까지는 루터교회 정통주의의 시대이다. 이후 정통주의는 경건주의로 대체되었고, 경건주의 다음으로는 계몽주의가 뒤따랐다. 19세기 이후로 루터주의는 여러 다양한 신학 조류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곤 했다. 북유럽의 루터교회는 고교회파의 전통을 따르며 모든 면에서 사실상 성공회와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북유럽의 루터교회는 사도전승의 교계제도를 유지하여 주교제 교회로서 운영되며 주교, 사제, 부제의 삼성직을 유지한다. 성직자는 신부라는 호칭을 쓴다. 독일에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Pfarrer라는 호칭을 교단의 구분 없이 독일에서 양측 성직자에게 모두 사용하는데 이것은 어떤 구역을 담당한다는 의미의 표시이다. Priester라는 표현은 호칭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설명할 때 쓰며, 호칭은 바로 이 Pfarrer를 쓴다. 즉, Pfarrer. Schimidt, 이런 식으로 부른다는 것. 이것은 미국에서 천주교, 성공회 신부는 Rev.Fr. 혹은 Fr.로 호칭하고, 루터교회 사목자와 개신교 목사는 Rev.로 호칭하는 것과는 다소 다르다.
3.1.1. 옛 동구권의 루터교회
마르틴 루터의 주 활동지가 구 동독지역이고, 프로이센의 건국과도 관련이 있는 만큼 옛 독일 영토였던 폴란드 서부지역과 남부 실롱스크, 치에쉰에도 극소수의 신자들이 존재하는데, 역사적으로 독일과 스웨덴이라는 두 신교국가와 대립하던 폴란드였기 때문에 루터교도들은 숲 속에서 몰래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아일랜드에서처럼 폴란드에서도 민족적, 역사적 이유 때문에 개신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긴 하지만 루터교도들 중에는 오히려 나치에 대항해서 폴란드 편을 들다가 수용소에서 순교한 사목자 율리우시 부르셰도 있었다. 체코의 구 주데텐란트 지역에 있는 교회들도2차대전 이후 체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교회[40] 이 그대로 접수해서 현재까지도 잘 남아있다(예시) 슬로바키아의 경우 산악지대라는 특성상 노르웨이처럼 목조 루터교회를 자주 볼 수 있다. 소수 교단으로서 구 동구권 국가의 루터교회는 '''복음주의 아우크스부르크 고백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한편 옛 슐레지엔 지역에는 SCEAV라는 독립된 지역 교단이 존재하며 표준 폴란드어나 체코어가 아닌 실롱스크 방언으로 예배가 진행된다.
라트비아 루터교회는 유럽의 전반적인 트렌드와 역행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소련 시절인 1975년부터 민주화 직후인 1992년까지는 여성 사목자 안수가 허용되어 있었지만 1993년 리가 대주교[41] 가 보수 성향으로 바뀌면서 이를 모조리 취소 및 금지했다. 또한 동성애 및 동성결혼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라 2005년에 커밍아웃한 사목자를 면직처리한 적도 있었다.[42]
리투아니아는 전통적으로 '리투아니아 마이너'로 불렸던 클라이페다 주변 지역에서 루터교회가 강세였으나, 2차대전 직후 소련의 탄압과 주류 천주교교도들의 눈치 탓에 서독으로 대거 추방되다시피 했다.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와 반대로 루터교회 교인이 얼마 없는 상황이며 교단 성향은 중도-진보에 가깝다.
3.1.2. 레스타디우스파(Laestadianism)
루터교회 내의 경건주의 운동이며, 북미에서는 '사도루터교회'(Apostolic Lutheran Church)로도 알려져 있다.
루터교회에서 파생되었지만 복음주의적인 면이 더 강조되고 예배 의식도 극히 단순하며[43] 극도로 보수적인[44] 특징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북유럽에서 교회에 자주 출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부류이기도 한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3.2. 북미의 루터교회
3.2.1. 미국의 루터교회
미국의 루터교회는 크게 '메인라인 교파'이자 유럽 루터교회들과 가까운 진보적 교단인 미국 복음주의 루터회(ELCA)와 보수적 교단인 미주리 시노드(Missouri Synod)로 구분되어 양대 산맥 체제이다. 다만 신학적 노선 차이 등으로 위 두 교단에서 갈라져 나오거나 통합되지 않은 수많은 군소교단들이 공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모든 교단을 통틀어 총 780만명 정도의 신자들이 있으며, 침례회, 오순절교회에 이어서 미국 개신교 교파 중 3위의 규모이다.
다만 미국 내에서의 위상은 다소 애매하다. 일단 규모로는 각각 3,800만 명 정도의 신자 수를 가지고 있는 침례회, 1,000만 명가량의 규모인 오순절교회가 압도적이다. 사람들의 인식 역시 개신교 하면 침례회나 오순절교 등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대표성을 가진다. 위 두 교파와는 격차가 상당하다. 더군다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부터 성공회와 칼뱅주의의 역사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사회 주류층이 WASP로 대표되는 영국계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성공회나 장로회 같이 영미권에서 유래된 개신교 교파들의 문화적 영향이나 사회적 대표성이 좀 더 높다.[45]
예를 들어 장로회, 성공회, 감리회 등은 루터교회보다 규모면에서는 작지만,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위 3교파의 신자였던 사람들은 많으나 루터교회 신자가 대통령이 된 적은 없었다.[46] 한마디로 말해서 규모면에서는 침례회등에 밀리고, 대표성이나 문화적 영향등으로는 아무래도 영미권 개신교 교파인 장로회, 감리회 등에 밀리는 등 살짝 포지션이 애매하다. 하지만 천주교 수준으로 차별받은 건 아니었고 이들도 엄연히 WASP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신자들 중에 독일, 스웨덴, 핀란드 등 루터교회가 주류인 국가들 혈통인 경우가 많으며, 이들 이민자들의 후손이 많이 분포하는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미네소타, 위스콘신, 미시건 등 중서부, 북부에 신자수가 많은 편이다.
가장 규모가 큰 교단은 '메인라인' 교파에 속하는 '''ELCA'''(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로), 대략 360만 명 정도의 신자가 등록되어 있다. 역사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은 편으로, 1988년 3개의 다른 루터교회 교단이 통합되면서 생겨단 교단이다.[47] 후술할 교단들에 비하면 굉장히 진보적(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교단으로, 여성의 사목자안수 등에도 굉장히 적극적이며, 2009년부터는 사목자가 동성 커플에 대한 결혼 주례를 서는 것도 허용되었으며, 동년도부터 금욕맹세를 하지 않아도 동성애자들에게 사목자 안수를 줄 정도로 굉장히 진보적이다.[48] 더불어 트랜스젠더 사목자도 있는 등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편.
다만, 이런 과정에서 점점 교단 자체가 '자유주의'화 되어 간다는 비판과 반발이 교단 내외부에 존재했고, 실제로 보수적인 신자들과 사목자들 일부가 교단을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세우기도 했다. 일부 보수 교회 언론에서는 ELCA자체가 쪼개진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곤 했으나 실제로 분리되어 나간 신자들의 수는 탈퇴전 ELCA 전체 신자의 10%도 안된다.[49] 애초에 성향 차이가 있는 3개의 서로 다른 교단이 합병되어 생긴 교단이니 만큼 진보적 성향 일색인 것은 아니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목자와 신자들이 공존한다. 그 중 보수적인 사목자들은 교단 내부에서 하위 그룹을 조직하고 있기도 하며,[50] 이렇듯 내부에서도 몆 차례 분열이 있기도 했고, 백인계 메인라인 교파에 속하는 다른 교단들이 그렇듯이 신자 수는 점점 감소하는 추세이다. 진보적 교리의 교파들은 주로 미국 동북부와 중서부에서 큰 세력을 자랑했는데, 이 지역이 1970년대 이후 급속도로 세속주의화 되어가며 무종교 내지 이름만 기독교 신자인 인구들이 대다수를 차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바이블 벨트라 불리는 남부는 여전히 종교 근본주의가 우세인 상황이기 때문에 보수적 교리의 교파들이 상대적으로 강해진 것. 그러나 미국 전체적으로 봐도 기독교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 교단이라고 부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교회일치운동에도 굉장히 적극적인 교단으로, 천주교과의 '의화 교리 합의(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이쪽이다.[51] 더불어 장로회(PCUSA), 성공회 등과도 공동 미사를 드리는 등 개신교 교단들과도 교류가 많다. 이 때문인지, 전통적 교계제도인 주교제를 따른다.[52] 다만 의식면에서는 오히려 상당히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예배도 병행하는 경우가 좀 있는 등, 전례적 미사만 드리지는 않는다.
반면, 진보적인 ELCA와는 대조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대표적인 교단으로 '''LCMS'''(루터교회-미주리 총회)가 있는데, 1840년대에 작센왕국 출신 독일계 미국인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미주리주에서 조직되어, 역사가 상당히 긴 편이다. 작센왕국이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간의 교회 일치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에 반발한 보수적 목회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으로 집단이주하였고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현재는 약 200만 명 정도의 신자들이 등록되어 ELCA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ELCA와 대조적으로 꽤나 보수적인 성향이며, 이 때문에 여성 사목자 안수나 동성결혼 주례 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 교파 세례교인에게도 성체성사 참여를 허용하는 ELCA와 달리 LCMS는 교단 소속 신자에게만 성체성사를 허락한다는 차이도 있다. 다만, 보수적인 교단치고는 온건한 편이라 ELCA와의 대화나 협력도 좀 있는 편이고, 천주교이나 다른 개신교 교파와도 교류가 좀 있는 편이다. 특기할 만한 사안으로는 '''한국 루터교회의 모체'''라는 점. 이 때문에 한국 루터교회와 교류가 많은 쪽은 이쪽이다.[53] ELCA에 비해 교회 일치 운동에는 부정적인 편으로,[54] 천주교와의 의화 교리 합의에 동의하지 않은 대표적인 교단이다. 또한, 독일 루터교회에서 분파된 배경 때문인지 주교제를 실시하는 ELCA와는 대조적으로 회중제를 채택하고 있다.[55] 한편, 원래 LCMS 소속이던 일부 진보적 성향의 사목자들은 1988년 ELCA가 출범할 때 교단을 탈퇴하고 그 쪽으로 가기도 했다. 신학교는 Concordia Theological Seminary이며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에 있다.
한편, 두 대형 교단들을 제외하고도 꽤 많은 수의 군소 교단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 가장 큰 교단이 WELS(위스콘신 복음주의 루터교회 총회)라는 교단으로, LCMS보다도 더 보수적인 성향을 띄며, 역사도 1850년대에 위스콘신주에 정착한 독일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상당히 오래된 편. 대략 40만 명의 신자들이 있으며 두 대형 교단 다음으로 3번째로 큰 교단이다, LCMS와 유사하게 독일 루터교회에서 파생된 교단이라 회중제를 실시하고 있다. 여담으로, 원래 LCMS와 협력 관계에 있었으나, LCMS가 ELCA의 모체 중 하나인 ALC(American Lutheran Church)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자, 이에 반발하여 1960년대 말에 사이가 멀어졌다.
그 외에 2001년 ELCA의 보수파 사목자들이 교단을 탈퇴하고 신설한 LCMC(Lutheran Congregations in Mission for Christ)라는 교단에 약 30만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 특이한 점으로는 주교제를 실시하는 ELCA를 모체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중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례적으로도 전례적인 편이다.
더불어 2010년에 ELCA에서 동성애자 사목자 안수와 결혼 주례 허용에 반발해 ELCA를 탈퇴한 NALC(북아메리카 루터교회)라는 교단도 있는데,다른 군소교단와는 다르게 백인계 주류 교파로 분류된다. 다만, ELCA의 진보적 결정에 반발해 떨어져 나온 교단이니 만큼, 백인 주류 교단중에서는 보수적인 편이며, LCMS와 ELCA의 중간 정도 성향의 중도적 성향을 띈다. 더불어 교회제도로는 ELCA와 비슷하게 주교제와 회중제를 혼합한 형태의 제도를 채택한다. 신자 수는 14만 명 정도로 크지는 않은 편.
군소교단 중에는 '자유루터교회연합'(AFLC)라는 교단도 있다. 신자 수는 약 4만명. 1897년에 설립된 루터교 자유교회(LFC)가 전신으로 1963년경 ALC(현 ELCA)와의 통합을 반대했던 교회들이 따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 교단은 루터교 신학을 따르지만 목사가 정장을 입고 예배를 진행한다.
3.2.2. 캐나다의 루터교회
개신교 위주인 미국과는 달리 천주교가 좀 더 우세한 데다가, 역시 마찬가지로 개신교계에서 장로회, 감리회, 성공회 등 영미권 개신교의 우세가 미국보다도 더 두드러지는 곳이라, 미국 루터교회에 비해 위상은 떨어진다. 캐나다 전역에 약 47만명의 신자들이 있으며, 캐나다 연합교회[56] , 천주교, 성공회, 다음으로 4위에 해당한다.
캐나다의 루터교회 역시 진보적인 캐나다 복음주의 루터교회(ELCIC)와 보수적인 캐나다 루터교회(Lutheran Church-Canada, LCC)가 있으며, 각각 미국의 ELCA,LCMS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한편, 미국의 루터교회 교단들 중 캐나다까지 관할 지역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57]
3.3. 중남미의 루터교회
중남미의 경우 역사적으로 이탈리아계 못지 않게 독일계나 북유럽계 이민자들이 꾸준히 건너온 덕분인지 브라질 남부의 히우그란지두술과 산타카타리나주 등에서 볼 수 있고[58] 아르헨티나에서도 루터교회를 좀 볼 수 있다. 다만 아프리카, 아시아와 달리 제3세계권임에도 감소세를 띄고 있다.
3.4. 아프리카의 루터교회
에리트레아에서 유럽으로부터 유입된 기독교 종파를 탄압할 때 예외로 둔 게 바로 루터교회였다.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벌일 당시 미국과 서구권, 이스라엘이 노골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지원할 때 북유럽 나라들은 중립을 지키면서도 미국과 서구권의 지원을 부정적으로 보였기에, 이에 대한 작은 감사로 극소수이긴 해도 에리트레아에 있던 루터교회는 탄압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가 강하므로 루터교회를 사실상 북한 봉수교회마냥 어용화시킨 것에 불과하고, 당연히 반정부 성향을 가진 신자들은 타 개신교도들처럼 탄압당하곤 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신자 비율이 높은 나라는 나미비아인데, 독일이 아닌 핀란드 선교사에 의해 전해졌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참조) 탄자니아 등에서도 루터교회 교세가 꾸준히 늘어나는 중이다. 의외로 에티오피아에서도 활기를 띈다. 에티오피아 복음주의 교회 메카네 예수 교단 단일 신자 수가 약 1000만여명으로 스웨덴교회를 제치고 1위였으며 이 교단이 혼자서 전체 루터교회 교인 증가의 절반을 차지했다.
3.5. 아시아의 루터교회
아시아에서 가장 루터교회 비율이 높은 나라는 의외로 '''인도네시아'''다. 당연히 주류 민족인 자바인보다는 비교적 소수인 바탁족(Batak)들이 많이 믿고 있긴 하다.(인도네시아 바탁 루터교회). 참고로 인도네시아 기독교인은 중국계 아니면 소수 민족들이며 자바인은 100% 무슬림이고 발리인은 거의 힌두교도다.
말레이시아 등에 교세가 꽤 큰 편이며 베트남은 중국처럼 종교를 공식적으로 규제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루터교회가 들어가지 못했다. 인도에서도 루터교회의 성장세가 꽤 괄목할만한 수준으로 특히 안드라프라데시 주에 신자가 제일 많다.
중국인이 다수인 싱가포르는 홍콩과 비슷하게 웨일스에서 전래된 루터교회가 흔하다.
3.5.1. 중국의 루터교회
중국어에서는 루터교회를 신의종(信義宗)이라고 호칭한다. 홍콩식 광둥어로는 루터를 음차한 '路德會'로 칭하기도 한다.
영국령이었던 홍콩에는 웨일스에서 전래된 루터교회가 흔하지만, 종교를 공식적으로 규제하는 사회주의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은 루터교회가 들어가지 못하였다.
3.5.2. 대만의 루터교회
대만에서는 1950년대에 미국,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4국 루터교회 교단의 전도로 대만신의회(台灣信義會)가 설립되었다. 대만 각지에 30여 채의 교회을 둔다.
3.5.3. 일본의 루터교회
일본은 한국과 달리 루터교회가 메이지 시기부터 들어왔으며, 여러 교단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마이너한 일본답게 교회보다는 유치원이나 학교 운영으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한다.
특이하게 'ルター教会'라 하지 않고 'ルーテル教会'(루-테루 쿄우카이)라 부르는데 이는 최초에 Luther를 음역할 때 '루-테르'로 했기 때문이다.
- 일본 복음 루터교회(JELC) - 일본에서 가장 존재감이 있는 루터교회 교단으로 ELCA의 영향이 크며 규슈, 그 중에서도 구마모토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유치원도 꽤 많이 운영하고 있다.
- 일본 루터교단(JLC) - 한국루터교회처럼 미국 미주리 시노드의 영향을 받은 교단이며 34개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세이보가쿠엔(聖望学園) 중고등학교와 우라와(浦和) 루터 학원이 바로 이 교단에 소속된 학교이다.(둘 다 사이타마에 위치한다.)
- 서일본 복음루터교회(WJELC) - 노르웨이와 핀란드 국교회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교단.
- 긴키 복음루터교회
- 일본 루터 동포교단 - 여타 루터교회들과 달리 복음주의적 성향이 강하며 내부 인테리어나 집기, 사목자 복장도 장로회 스타일과 더 비슷하다.
3.6. 대한민국의 루터교회
4. 창작물에서의 루터교회
- 늑대와 양피지에서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장면에서, 작중 배경인 윈필 왕국이 섬나라라서 영국의 성공회가 연상된다는 평이 많으나, 토트 콜의 모델이 마르틴 루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루터교회가 연상된다고도 볼 수 있다. 현실에서도 성공회와 루터교회가 유사점이 많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루터교회와 성공회를 어느 정도 버무린 설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1] 사실 개신교를 가리키는 단어들 중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하는 자들)'이란 명칭 자체가 바로 마르틴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들이 스스로 그렇게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2] 다만 일부 국가에서는 다른 개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실제로 체코나 네덜란드 같은 경우 개혁교와 루터교회 교단이 통합되어 있다.[3] 아이슬란드를 제외하면 국교회 명칭을 쓰는 나라들은 모두 왕실이 존재하는 나라들이다. 이유는 후술[4] 체코어로 거위 혹은 기러기를 'Husa'라고 부른다.[5] 다만 에스토니아의 경우 최근에는 오히려 정교회 인구가 루터교회 인구를 추월한 상태이며, 전통적으로 에스토니아의 주류 종교였던 루터교회는 소련 시절 국가무신론의 영향으로 신자들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6] 역사적으로 개혁주의가 압도적으로 우위인 나라이기 때문에 국교회 내부에서도 개혁주의가 주류이지만 소수의 루터교회 교단이 존재해서 2004년에 그쪽과 합쳤다.[7] 1918년 출범한 체코 복음주의 형제회(ECCB)[8]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지은 저작 가운데 《소요리문답》, 《대요리문답》, 《노예의지론》을 남길 만하다고 꼽았다. 요리문답들에서는 기본적인 교리와 삶의 문제, 《노예의지론》은 이신칭의와 예정을 설명한다.[9] 예수의 승천 이후 그의 인성과 신성이 모두 편재하기에 성체성사의 빵은 그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의 피라는 이해.[10] 멜랑히톤파.[11] 최초의 개혁적 조직신학서다. 루터는 성경에 비견할 만큼 높게 평가했고 루터교회 교의의 기초가 되었다.[12] 칼뱅 자체가 융통성 있는 인물이었다. 폴란드 개혁파에 감독제를 권유하고, 존 낙스의 과격한 저작을 출판 금지하기도 했고, 성공회의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와도 서신 왕래를 했다. 다만 공재론을 거부하여 강경 루터주의자들과 사이가 나빴는데, 루터에게는 예의를 갖추며 맞대응을 조심했다. 또한 멜랑히톤의 《신학총론》을 출판했다.[13] 칼뱅의 이중예정설은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예정설의 원액에 가깝다. 멜랑히톤은 전적인 타락과 예정에 동의하되, 지옥으로의 예정은 언급하지 않거나 조심스럽게 본다. 단, 루터는 칼뱅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참고.[14] 칼뱅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 독일어권 개혁자들이 주장하던 상징설과 루터의 공재론을 조화시키기 위해, 성령의 임재로 성체성사에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고 이해한 성체성사론이다.[15] 이것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수정본이다[16] 한국, 독일, 북미 일부 루터교회의 성직자 호칭, 그 외의 유럽에서는 엄격히 삼중성직제도를 지켜서 부제, 사제, 주교가 있고, 사제들은 신부님이라 호칭한다. 다만 스웨덴에서도 비공식적으로는 pastor라고 부를 때가 많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인 <겨울 빛(nattvardsgästerna)>에서도 주변인물들이 주인공을 사목자(Pastor)라고 부르지 신부(Präst)라고 부르지 않는다.[17] 그러나 덴마크나 핀란드 등에서도 성직자를 '사목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핀란드에서는 교구 목회자를 seurakunta'''pastori'''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고, 영어로도 'pastor'로 번역되는 경우가 꽤 많다.[18] 다만 이 경우엔 개신교회가 먼저 착용을 시작한 것을 천주교가 나중에 따라 도입한 것이다.[19] 정확히는 루터교회에서 나눠주는 달력이 그러하다.[20] 천주교와 성공회, 정교회에서는 이 날을 성모승천대축일/성모안식축일로 기념한다.[21] 초기에는 7성사를 다시 도입한다는 무리수까지 내놓을 정도였는데, 그나마 이것도 후술하겠지만 교리적인 이유보다는 당대 혼란상 탓이 컸다.[22] 19세기~20세기에 와서야 수도회 개념이 다시 부활하긴 했다.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가 설립한 '다름슈타트 마리아 자매회(Evangelische Marienschwesternschaft Darmstadt)'가 그런 경우이다[23] 지금도 독일 루터교회에서는 이렇게 입는다. 그나마 뉴스 등에서 인터뷰를 할 때는 사목자 가운 없이 정장에 넥타이 맨 차림으로 나오기도 한다.[24] 그리고 이들 교단들은 북유럽 루터교회들처럼 사도전승을 회복한 경우도 있다.[25] ELCA(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에 속했던 일부 보수파 사목자들과 교회들이 교단의 자유주의화에 반대해 2001년 떨어져 나와 신설한 교단이다.[26] 예를 들어 ELCA가 이런 경우며, ELCA에서 분리된 NALC(북아메리카 루터교회)라는 교단도 이런 식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27] 여담으로 한국 루터교회도 주교제는 아니다. 다만, 침례회나 장로회보다는 중앙집권성이 훨씬 강하다.[28] 실제로도 스웨덴 루터교회에서는 장엄미사(högmässa)라 부른다. 미국의 일부 루터교회에서도 미사(holy mass)라고 부르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29] 심지어 극도로 고교회적인 소수 교회들의 경우 미사 때마다 향을 피우거나 트리엔트 미사가 연상될 정도로 엄숙한 형태를 띠는 미사를 집전하는 경우도 있고, 제대 디자인도 매우 전통적인 경우가 있는 등 외견상으로는 천주교과 차이를 찾기 힘든 경우도 있다.[30] 오전 예배는 장엄미사, 오후 예배는 간략화된 형태로.[31] 심지어 대예배를 미사(holy mass)라고 부르며, 교회 내부 인테리어도 상당히 전통적인 경우도 있다[32] 현 트론헤임(Trondheim)[33] Andreas Rudolph Bodenstein von Karlstadt(1486-1541) 츠빙글리와 칼뱅 이전 개혁파 0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인물. 모세의 율법이 신약시대 이후에도 그대로 유효하므로 우상숭배 금지도 유대교처럼 철저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성상 없는 '말씀만의 교회'를 주장했다. 즉, 츠빙글리와 칼뱅의 선배격이라 볼 수 있다. 루터는 처음에 동의했으나, 얼마 안 가 1522년에 이루어진 비텐베르크 개혁은 자신이 원하던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격렬한 언쟁 끝에 그와 등을 돌려버렸다.[34] 출처: "마틴 루터의 신학", 베른하르트 로제, 정병식 譯, 한국신학연구소 215페이지[35] 애초에 루터의 주장부터가 교회에서 성화나 성상을 만들거나 그려서 둘 수는 있지만, 그런 것으로 문자적인 율법과 말씀을 대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위의 책 217페이지)[36] 천주교뿐만 아니라 성공회 성당도 성물방에서 다양한 그리스도교 신앙 증진에 유익한 물건들을 판매한다. 이를테면 이콘, 십자고상, 묵주, 성모상,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현관문 종 등이 있다.[37] 성공회에서는 감실을 성막이라고도 한다.[38] 종교개혁 직후 "그때 왜 내가 성 안나, 성모 마리아한테 기도했었지? 그리스도께만 기도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한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39] 성공회는 성유물, 성염 등의 전통은 해외의 Anglo-Catholic 교회에서도 흔하지는 않지만, 성수는 거의 모든 성당에 비치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세례명(홍길동 프란시스, 심청이 카타리나, 하는 식으로)을 가지며, 기도를 할 때에도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40] 1918년 루터교회와 칼뱅교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연합교단.[41] 여담으로 라트비아 복음 루터교회는 원래 독일처럼 비교적 '저교회적' 루터교회가 먼저 전래되었으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영향을 받아서 주교제를 도입하고 사도전승을 회복하는 등 '국교회'와 비슷한 방향으로 바뀐 경우다[42]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에는 라트비아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동성결혼이 금지되었다.'''[43] 일반 루터교회에 비하면 회중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점도 그렇다.[44] 물론 미국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므로 근본주의라 부르지는 않는다.[45] 미국 건국 과정에서 칼뱅주의의 영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나, 청교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사상이 미국 독립 혁명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쳤고, 하버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등의 미국 최초의 대학들 중 상당수들이 칼뱅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세워진 점 등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초부터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반면 미국 루터교회는 영미권 칼뱅주의 교파들이 주류를 차리한 이후, 170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래가 되었고, 수적으로도 다수가 아니었다.[46] 최근에도 마찬가지.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도 장로회 신자이며, 그와 대선에서 맞붙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감리회 신자다.[47] 참고로 통합 당시 한 분파는 '세미넥스'라 하여 후술할 LCMS의 진보적인 사목자들이 탈퇴한 그룹이다.[48] 이게 굉장히 파격적인 게, 천주교 등 다른 교단이나 교파에서 성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동성애자들에게는 영성체 참여 등을 허용하는 경우는 있었고, 성생활을 하고 있는 동성애자들도 일반 신자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은 많지만, 사목자 안수까지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조치다.[49] 후술할 LCMC(Lutheran Congregations in Mission for Christ)가 2001년에 분리되었고, NALC(북아메리카 루터교회)가 2009년의 성소수자 사목자안수 관련한 결정사안에 불만을 가지고 2010년에 분리되었다.[50] 사실 이런 현상은 구미권의 대형, 진보 교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상이다.[51] 추후에 감리회도 여기에 동의했다. 다만 루터교회 내부에서도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교단들이 꽤 많은 편이다.[52] 다만, 회중제적인 요소도 동시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주교과 같은 수준의 중앙집권은 아니다.[53] 한국 루터교회가 LCMS에 비하면 좀 더 진보적인 편이다.[54] 신학적 성향이 충돌할 수 있다고 보아서인지, WCC나 미국 NCC에 가입되어 있지 않고 가입 의사도 없다. 한국 루터교회가 NCCK 소속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55] 완전히 회중제는 아니고, 주교제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주교제를 베이스로 하고 회중제적 요소를 포함한 ELCA와는 반대[56] United Church of Canada, 캐나다 감리회를 위주로 장로회와 회중교회가 통합된 교단[57] 대표적으로 상술한 NALC(북아메리카 루터교회) 등.[58] 사실 이 지역에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