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털링 헤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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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


Sterling Hayden (1916년 3월 26일~1986년 5월 23일)
미국의 배우,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잭 리퍼 장군역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16년 뉴저지 주에서 태어났고, 친부가 그가 어렸을 때 죽은 후 어머니는 그가 9살 되던 해 제임스 헤이든이란 사람과 재혼했고 그도 계부의 성인 헤이든으로 바꾸게 된다. 16세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범선에서 친구와 같이 일을했다, 1938년 우연히 파라마운트 픽쳐스가 자신이 선원시절 찍은 사진을 보게 되고 스털링의 스타성을 눈여겨 본 파라마운트 영화사는 그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제안하게 된다. 테스트를 통과한 그는 1941년 Virginia란 영화로 할리우드에 데뷔하게 된다.
2편의 영화를 더 찍은 후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의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헤이든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총기를 전달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고 유고와 파시스트 정권이 장악한 이탈리아를 통해 획득한 물품과 정보를 미 전략사무국에 전달하는 핵심역할을 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교우관계를 깊게 맺기도 했다.[1] 그러나 이런 경력 때문에 그는 훗날 곤경에 처하게 된다.
종전이 된 후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속에 매카시즘이 대두되어 하루아침에 그는 공산주의 협력자로 매도당해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됐고 결국에는 누명을 벗기 위해 밀고자 노릇까지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2] 또한 스털링의 이러한 모습을 본 티토에게 의절까지 당했다.
매카시즘이 끝난 후 스털링은 한동안 미국을 떠나야 했고, 동료들을 팔아먹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일자리를 거의 찾지 못해 사실상 할리우드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스털링은 반할리우드계 감독들인 스탠리 큐브릭,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등이 배역을 줘서 어렵사리 연기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영화 대부맥클러스키 서장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잭 리퍼 장군같은 작지만 중요한 배역 등이 그러하다. [3][4]
이후 1986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망했다. 향년 70세.

[1] 전후에도 서로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2] 정작 유고슬라비아가 서방측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미국은 엄청난 사고를 저지른 셈. 사실 동유럽 공산 정권의 수장과 개인적 친분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귀한 정보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귀중한 휴민트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로 인해 미국이 제발로 걷어찬 것이다.[3] 여담으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헤이든의 연기를 독려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주로 보여줬다고 한다.[4] 출처:스탠리 큐브릭-장르의 재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