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S

 



1. 개요
2. 한국과의 관계
3. 기타


1. 개요


전략 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북아프리카,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던 미합중국 육군의 첩보기관이자 특수작전부대. 여기서 복무했던 많은 이들이 훗날 육군 특전단(그린베레)CIA(중앙정보국)의 창설 멤버가 된다. 오늘날 CIA(중앙정보국)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2.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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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OSS 부국장 굿펠로우를 만나 한국 청년들을 연합군에 편입시켜 대일 전쟁을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권을 얻으려는 참전 외교를 전개했다. 그러한 일환으로 1941년 가을부터 38명의 한국 청년들이 미국 정보조정국(COI)과 전략첩보국(OSS)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미군 소속으로 대일 전쟁을 벌이도록 준비하였다. 그리고 재미 한인 청년들로 하여금 한인 자유부대를 창설하여 대일 전쟁에 동원하고 광복군을 미군에 통합시켜 대일 전쟁에 투입하자는 내용을 OSS에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고, 대신에 1945년 냅코작전독수리작전 한반도 침투 작전에 따라 한인 청년 70여 명을 비밀리에 모집해 특공대원으로 훈련시켰다.
하지만 예상보다 일본의 빠른 항복 선언으로 무산되었다.[1] 장준하김우전[2] 같은 광복군들이 OSS에서 훈련을 받았다. 광복군 장군인 백파 김학규나 철기 이범석이 소개시켜줬다고 한다. #
광복군 창설 70주년에서도 나오듯이, 광복 후 국내 진공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김우전은 OSS에서 부대 파견에 큰 힘을 쏟았다. #
다만 OSS는 임시정부의 가능성을 크게 점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임시정부 내부의 분파주의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고, 이는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하여 대표성의 의문으로 확대되었는데, 그 요지는
1) 임시정부의 분파주의가 심각하며
2) 대중적 지지 기반이 취약하며
3) 임시정부을 우대할 경우에 발생하는 여타의 독립 단체에 대한 파급 효과
등을 고려할 때 한국에는 현실적으로 수권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임시정부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OSS의 견해에서 출발한 것이며, 1920년대 상해임시정부엔 27개의 분파가 난립하고 있었고 이러한 기류는 해방 직전까지 이어가 해방 직전에 작성된 OSS의 보고서에선 임시정부의 분열에 대한 불신과 해방후 임시정부가 해방 한국을 맡을 능력이 부재하다는 설명들로 가득했다. 이러한 입장은 미군정의 한국 통치 등에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3]

3. 기타


  • 1992년에 안두희가 OSS 중령이 김구 암살을 지시하고 나중에는 장택상이 사주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안두희가 워낙 증언을 자주 바꿔서 믿기는 힘들다. OSS는 1945년 9월에 해체되었고, 장택상은 1948년 11월에 영국 대사에 임명됐는데 거절하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그리고 권총 테러를 당해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당시 특무대장인 김창룡이 시켰다는데, 김창룡은 당시 소령이었고 특무대장은 1951년에 되었다. 아들 김신은 어떻게 당시 소령인 김창룡이 단독으로 암살을 지휘하냐고 비판했다(...)
  • 호치민과 인연이 깊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의 OSS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OSS는 호치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치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또한 종전 직전인 1945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치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4]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치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세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이 선택은 결국 훗날 큰 화를 부르게 된다.

[1]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묘사된다.[2] 광복회 회장을 지냄. 1944년에 일본군 탈영 뒤 광복군 입대[3] 한국 분단사 자료집 II 34쪽, 신복룡(편), 한국분단보고서(상) 43-44쪽, 신복룡,김원덕 (역)[4] 사실 호치민은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1942년 8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스파이로 오인받다, 1943년 9월 까지 중국에 있는 감옥에서 생활했고, 미국 또한 동남아시아 문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기에, 1945년이 돼서야 서로 협력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