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image]
인민회의 의장

초대

2대
이반 리바르

'''요시프 브로즈 티토'''

라자르 콜리셰프스키

<colbgcolor=#c70125><colcolor=white> '''유고슬라비아의 초대 대통령'''
'''본명'''
요시프 브로즈 티토
(Josip Broz Tito/Јосип Броз Тито)
'''출생'''
1892년 5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1] 쿰로베츠(Kumrovec)[2]
'''사망'''
1980년 5월 4일 (87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류블랴나
'''국적'''
[image]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직업'''
정치가, 군인,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파르티잔 지휘관
'''최종 계급'''
대원수
'''종교'''
가톨릭무종교(무신론)
'''정당'''
→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배우자'''
펠라게야 벨로우소바
(Пелагея Белоусова, 1919-1939)
헤르타 하스
(Herta Haas, 1940-1943)
요반카 부디사블레비치
(Јованка Будисављевић, 1952-1980)
'''신체'''
172cm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초기와 공산당 입문
2.2. 반나치 지도자
2.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건국
2.4. 말년과 사망
3. 사후의 평가
4. 이것저것
4.1. 티토주의
4.2.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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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전 대통령이다. 본명은 '요시프 브로즈'이며, '티토'는 그가 노동운동에 가담하던 시기에 사용했던 가명으로 세르보크로아트어로 "네(Ti)가 이것(To)을 해라"라는 농담구 어조에서 따온 이름이다.

2. 생애



2.1. 초기와 공산당 입문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가난한 크로아티아인 농부 프라뇨 브로즈(Franjo Broz)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인 마리야 야베르셰크(Marija Javeršek)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기술공으로 발칸 반도를 떠돌았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오스트리아 육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러시아군에 생포된다.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하고, 이때부터 공산주의의 이념에 동조하게 된다.

2.2. 반나치 지도자


귀국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당에 입당해 '''티토'''라는 가명으로 활동했고, 각 공장의 파업을 주도하다가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5년 간 복역한다.
이 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3]하는 등 해외를 배회하다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 이탈리아, 헝가리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귀국해 빨치산 부대를 이끌며 게릴라전으로 나치 군대와 맞서 싸운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실이 나치군에게 그리스로 가는 도로를 내주고 세르비아민병대체트니크가 나치와 협력해 빨치산 토벌에 치중하는 등 병크를 범한지라 유고 국민들의 민심은 급속도로 티토로 쏠렸다고 한다. 물론, 1930년대 독일은 '''세르비아인의 용맹함을 높이 평가한 히틀러 때문에'''[4]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경제적 편익을 제공했던 터라 섭정인 파블레 왕자[5]으로서는 독일의 요청을 대놓고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때쯤에는 이탈리아가 배후지원하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운동이 거셌고 헝가리도 슬슬 1차대전 시기 뺏긴 땅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했기 때문에 베니토 무솔리니호르티 미클로시를 제압할 수 있는 히틀러의 도움이 유고슬라비아의 통일 유지에 필수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꽤 고집을 피워서 추축국에 가입하는 대신 그리스로 향하는 군대의 유고 통과를 막는 등, 나름대로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어떤 이유를 들어도 유고슬라비아 왕실이 독일에 협력한 사실은 지울 수 없는 것인지라 실제로 개전 며칠 전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뒤바뀌고, 이에 자극 받은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는 등의 대소동이 있었다.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매우 효율적인 유격전을 벌였으며, 이탈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는 자기네 구역만 지키고 있었으므로 다른 전선에도 병력이 부족했던 나치는 이미 점령했다고 생각한 유고에 30만의 병력을 박아놔야 했다.[6][7] 하지만 어쩼든 간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땅이 가진 실제 가치에 비해서 엄청난 양의 독일군 병력이 이곳에 주둔해야 했고, 전쟁후반에 독일군의 극심한 인력부족에도 이곳에서 병력을 빼낼수가 없었다.[8] 오죽 히틀러가 열받았으면 티토를 붙잡기 위해 오토 슈코르체니가 지휘한 특공대가 투입되어 티토의 본거지를 급습하기까지 했고, 실제로 거의 붙잡힐 뻔 했으나 티토는 여기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후 잠시 아드리아 해의 휴양지 비스 섬에서 기거하면서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군 최고위층 인사들을 만나 파르티잔 임시정부의 지위를 놓고 회담을 하는 등, 거의 동맹국 수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 전에는 무명인사에 불과했던 티토의 명성은 점점 빠른 속도로 높아졌고, 나치 고관인 하인리히 힘러 조차 "독일에 티토같은 지휘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할 정도였다.
추축군 한복판에서 빈약한 장비를 가지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이상의 전과를 올린 한편,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서방측의 지원을 적지않이 받은데다가, 소련과의 관계도 좋지만은 않았던 관계로 양측의 사이에서 정치적 협상도 적지 않이 벌여내었다. 이후에도 티토는 동유럽권에서 냉전내내 서방측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낼수 있었을 정도.(이때문에 마피아들의 밀무역 루트로 애용되었다...200척의 밀수선을 잡는 이탈리아 해경선은 1척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 영토 내로 진입하여 독일군을 몰아낼 때, 수도인 베오그라드 탈환을 소련군과 함께 함으로서 파르티잔의 손실을 줄임과 동시에 독일군을 유고슬라비아에서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소련이 파르티잔 투쟁 기간중 제대로 된 도움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는 것과, 티토 자신의 명성이 서방세계에서도 높다는 점을 바탕으로 해서 '''심지어 소련군이 오래 주둔하면 소련군과도 싸울 생각이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상징적인 병력만 남기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다른 공산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2.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건국


[image]

해방 이후 티토는 연합군 측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유고 과도정부의 수상이 되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 군사적 영향을 행하려는 소련스탈린과 갈등을 빚어 같은 해에 코민포름에서 영구제명되고,[9]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비동맹주의 외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냉전시대 제3세계, 자유진영, 공산진영을 넘나드며 어느 국가와도 극단적으로 척을 지지 않는 실용주의 외교로 고립된 유고슬라비아의 위기를 반전시켰다. 그 일례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방진영의 장 폴 사르트르까지도 남한이 북침했다는 소련과 북한의 발표를 지지했는데도 유고 혼자서 남침설을 고수했고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달리 소련의 참전 요구에도 이를 거절하였다.(6.25 전쟁/전쟁 발발 문서 3. 용어 문단 하단 참고.)[10] 1950년대에는 주력 전투기로 미국제 F-86을 도입했을 정도.
또한 과거의 역사 내내 민족, 종교, 언어의 갈등때문에 툭하면 내부에서 서로 싸우던 유고슬라비아의 사정을 감안해서 형제애와 일치 정책(brotherhood and unity)을 펼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등의 유고 내부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제거하였으며, 각 구성 공화국내의 거주민들이 타 구성 공화국 내에도 거주해서 살아가도록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여 성과를 이룩하였고, 이렇게 민족이 혼합된 상태를 가칭 유고슬라비아 민족이라고 설정하여 해당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킴으로서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를 확립함으로서 더 이상의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위의 구상이 일부분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성과도 있었으며, 티토 사후 지속적으로 각국의 이해를 조율할 정치가가 있었다면 진짜로 그런 가능성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전이 터진 다음에 여러 나라 사람들은 티토 시절이 좋았지 하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실제로 티토 시절엔 여러 민족들이 제법 화합을 이루며 잘 살았다는 증언이 많다.
한편으로 스탈린주의와 소련과의 차별화를 위해 탈권위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다. 1952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기득권화를 방지하기 위해 집권정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정치조직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재편했다. 아울러 공장, 공기업의 경영권을 공산당에서 노동자 자치위원회로 넘기는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를 도입, 실시해, 사적 소유의 철폐와 낮은 생산력 사이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비효율과 국가의 과도한 권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11][12]. 또한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르비아계를 견제하고 낙후된 보스니아 지역 발전을 위해 사라예보 천도를 계획했다, 그리고 민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코소보의 알바니아계와 보이보디나의 헝가리계 주민들에 대한 자치를 허용했으며, 전통적으로 발칸 지역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홀대를 받았던 집시인들에게도 유고슬라비아의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런 행보를 보면 정적에 대한 탄압만 빼면, 그 당시로서는 베트남이나 중국의 개방정책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3] 게다가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동구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첫 모델을 티토가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덤으로, 티토는 유럽의 68혁명 당시 기존 정치체제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운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한 '''유일한''' 국가 지도자이기도 했다.[14] 이 면에서는 급진적인 개혁 요구에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소련의 간섭에 위기를 느끼던 티토의 입장에서 소련군의 프라하 진주에 격렬히 반대하던 68년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가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는 점[15].
비록 티토가 장기집권을 하기는 했지만, 김일성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엔베르 호자, 차우셰스쿠 같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의 종신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적에 대해서도 매우 신사적인 대접을 했다. 1950년대 이래, 당내에서 티토의 반대파들이 추방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처형이나 투옥이 아니라 그저 고액의 연금을 수령하는 야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티토의 과거 부하이자 최대의 정적인 밀로반 질라스는 "티토가 나치독일과 뒷거래를 했다"는 유언비어를 터트려[16] 파르티잔 투쟁을 정통성으로 삼는 티토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여러차례 투옥되었다.[17] 다만 민족주의자나 민주화 인사, 친소파에 대한 탄압은 존재하여 골리 오토크 수용소에서 이들을 분리 수감한 바는 있다. 거기에 인민들에게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UDBA라는 비밀경찰을 조직해서 감시와 국내외를 무론하고 정적에 대한 테러를 하는 추태를 저지르기도 했다.[18] 다만 밀로셰비치나 투지만같은 민족주의 노선을 내세운 지도자들이 인종청소 등 막장행각을 서슴없이 행한저라 묻혀졌다.

2.4. 말년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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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티토 사망 2주기를 맞아 소련 체신청에서 발매한 우표.[19]
1974년 헌법 개정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고, 1980년 다리의 혈핵장애로 입원해 오른발 절단수술을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그해 5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88세 생일이 겨우 3일 앞이었다. 제3세계를 대표하던 지도자라는 생전의 명성답게 그의 장례식에는 4명의 국왕과 22명의 총리, 31명의 대통령, 47명의 외무장관이 참석하여 당시 기준으로 가장 많은 나라의 국가지도자들이 참석한 장례식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20]
티토의 묘지는 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티토 기념관 내에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일며 티토가 격하되고 그의 묘지에 드나드는 인원이 크게 줄기도 했지만 티토 사후에 발생한 각 공화국 간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티토 시절에 대한 향수가 일게 되었고, 종전 이후 과거 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어느 국가에서든간에 존경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참배객들이 자주 드나들곤한다.[21] 다만 이와는 별개로 유고 연방 해체 이후 유고 연방에 속해있었던 각 나라들에서 유고슬라비아 시절의 잔재들을 청산하며 각자 새롭게 자민족 정체성들을 내세우며 국가적 이미지를 바꾸고 있고, 현재 티토의 묘지가 있는 세르비아 국내에서도 티토가 세르비아계가 아닌 크로아티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매장된 티토 기념관의 티토 무덤을 철거, 파묘하고 그의 유해를 본래 출생지인 크로아티아로 다시 이장시키자는 주장도 소수이지만 제기되고 있다.

3. 사후의 평가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소련을 배신하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례로 코민포름 제명 이후 영국 정보국에 소련의 군사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등 뒤끝있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래도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부터는 소련과의 사이는 우방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호전되어서 원만해지기는 했다.
티토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의 논지를 살펴보면 독자 노선을 택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제3세계를 주장하며 그 지도국격의 위치를 누린 점.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서방국가와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유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높았던 점을 든다. 아울러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 소련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배짱있는 외교정책,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양하려고 노력했던 경제정책, 복지정책 등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 각 지역 내에서 학살과 인프라 파괴작전 등이 거리낌 없이 펼쳐졌고, 그러한 전쟁의 결과물로 유고슬라비아가 7개의 소국으로 분리독립했으며, 새로 독립한 7개 국가들은 과거의 유고연방 시기보다 훨씬 못한 경쟁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의 반작용으로 대대적인 티토 재평가가 일어났다. 특히 구 유고슬라비아 남부지역에 위치한 국가일수록, 티토 시절에 대한 향수도 강한 편이다.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는 비교적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제3세계를 대표했던 지도자라는 점이나 비교적 풍족하게 이루어졌던 사회복지 정책 때문에 티토 시절을 좋게 생각하거나 티토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크로아티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지에서 티토에 대한 향수가 더욱 강해져서 이들 지역에서는 티토를 신급으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엔 꽤나 풍족하게 살았으나, 막상 독립한 이후에는 내전과 경제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현재도 청년실업률이 높고 상대적으로 1인당 GDP가 낮은 등 경제적으로 사정이 영 좋지 않다. 주요 기업들과 소규모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티토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해서 광고나 홍보를 하기도 하며, TV프로그램에서도 티토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 구 유고권 국가들의 갈등이나 적대감이 조금씩 나아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그나마 덜 해진 것도 티토 덕택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다만 반대로 구유고권 국가들에서도 티토와 유고 연방 시기를 그리워하는 구유고 각국의 구 유고슬라비아 노스텔지어를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대착오적이며, 개인숭배적인 동시에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 등 구 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동남부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분쟁과 갈등에는 이러한 민족/종교/지역 갈등을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하에 한 나라로 묶어서 억눌러 통치한 티토의 독재정치에 대한 반작용도 한몫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경기침체로 지역별 불균형 발전이 쟁점화 되고 그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등 민족주의 노선의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이들은 티토를 격하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영향으로 구유고권 국가들 각국의 도심과 공원에 있던 티토의 동상이 속속 철거되고, 티토도 과거의 유물로서 한동안 잊혀졌었다. 심지어 티토 시절의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매국노로 내모는 경우도 많았다.[22]
세르비아 우파로부터는 과도정부 수상 당시 유고 내 대표적 우익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를 처형한 점이 비판받는다. 유고슬라비아의 독수리라고 불렸던 이 장군은 체트니크라고 불리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레지스탕스 조직을 이끌고 반나치활동도 했으나, 20만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슈냐크인도 학살했다. 전쟁 이후 그는 신생 유고연방에게 체포된 후 전쟁범죄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23] 자신의 독재노선을 비판한 밀로반 질라스[24] 등에게 콩밥을 먹인 것 등으로 인해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이민자 사회에서도 욕을 많이 얻어먹기도 했다. 또한 어쨌거나 독재정치를 했다는 점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기도 한다.
또 유고 통합을 위해 민족 이주를 통제하거나 행정구역을 마음대로 편입시켰던 것이 오늘날 유고 해체 이후에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항구도시 네움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로 확정지은 것. 이것 말고도 두샨 바타코비치의 《세르비아 역사》에서 언급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코소보나 마케도니아에서 살다가 전쟁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간 세르비아인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귀환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정말 계획대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통합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분할되어 버리자 영토나 거주자를 재조직한 부분에서 분쟁이 발생한 것. 유고연방이 붕괴하면서 내전 당시 인종청소가 빠르게 행해진 것도 이런 이유였다.
후술할 종교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종교에 회의적이었기도 했으며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는지라, 종교인들을 탄압한 행적들이 여럿 있다. 이런 종교탄압 행적 때문에 탈권위주의적이거나 개혁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자잘하게 비판받기도 한다. 1945년 티토하의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한 후, 곧 종교 박해 운동이 시작돼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투옥됐다. 개중에는 가톨릭의 알로지제 스테피나츠 대주교도 끼어있었다. 그는 1946년 9월 체포됐으며 반역죄로 판정받아 16년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그의 재판을 지켜봤던 몇몇 증인들은 그들이 고문을 당했으며 그들 가족들은 위협을 당했다고 말했다. 가톨릭 유아 세례를 받았던 티토는 1951년 12월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사형시키진 않았고, 조건부로 석방했으나 그 대신 그의 고향인 크라식에 억류(가택연금)시켰으며 대주교는 끝내 완전한 자유를 다시 얻지 못한 채 1960년 사망하고 말았다.[25]
실제로 티토는 특히 가톨릭을 반동주의자들의 집합처로 간주하고 탄압했는데, 가톨릭은 유고슬라비아 22개교구 중 14개 교구가 교구장 주교를 잃었다. 약 350명의 신부들이 살해됐으며 다른 2백 명은 투옥됐다. 약 300개의 수도원 및 교회 기관들과 함께 18개의 신학교 중 3분의 2가 폐쇄됐다. 모든 교회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리고 전쟁구호기관(현 가톨릭구제회) 종사자들은 모두 추방됐다. 또한 유고슬라비아는 교황청이 내정을 간섭했다고 비난하면서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해 버렸다.
정교회 탄압도 심해서 전쟁으로 성당이 파괴된 자리에 파르티잔들을 기념하는 건물들을 세웠으며, 정교회가 소유한 토지와 건물 대부분을 압수했다. 정교회의 명망 있는 신부들은 수도원에 강제로 억류되거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 후인 1950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특히 반공주의자이며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코페의 요시프(Josip) 신부가 세르비아 총대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반국가행위 죄목으로 체포했다.
평가와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티토가 재평가 되어도 유고 연방이 다시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구유고권 국가들에서 티토와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유고 연방 해체 이후에 갈라선 국가들이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할 만한 구심점이나 명분이 전혀 없다. 게다가 티토 사망 직후에 각국이 벌인 내전 와중에 종교, 민족, 상대국에 속해 있던 민간인들을 서로 상호 학살, 추방하고 박해하던 각국 국민들의 악감정과 적개심 또한 만만치 않아 이 국가들이 다시 유고슬라비아 같이 통합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구 유고 연방의 종주권을 쥐고 연방을 통제하려던 세르비아와 나머지 타 연방 소속국들이 갈등과 대립을 겪다가[26] 연방에 속해 있던 나라들이 연방 해체와 분리독립을 놓고 참혹한 전쟁을 벌였던 전적 때문인지 이 국가들에서도 티토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통일하자는 주장은 거의 없거나 미약하다. 또 하다못해 이민을 가거나 티토 사망 후 일어난 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전쟁 등을 피해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도피한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같은 구 유고권 국가 출신의 동부유럽 이민자 후손들 사이에서도 전쟁으로 분열된 이 나라들을 유고슬라비아로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나오지 않고 있다.

4.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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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호찌민 전 베트남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티토.
  • 아버지는 크로아티아계, 어머니는 슬로베니아계였으며 두 나라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많은 지역이다. 이와 관련해 티토의 어린 시절에 얽힌 일화로 티토 본인이 회고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 한 번은 미사가 끝난 후 뚱뚱하고 큰 몸집을 가진 신부의 제의를 빨리 벗기지 못했지. 그랬더니 신부가 화를 내면서 나의 뺨을 갈기더군. 그 뒤로는 성당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네.
> - 블라디미르 데디예르와의 회고에서[27]
다른 버전으로는 이러한 이야기도 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어린 티토가 복사로 사제를 돕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티토가 그만 실수로 주수병을 떨어뜨려 포도주를 흘리자 신부가 몹시 화가 나서 티토의 뺨을 후려치며 "당장 나가!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마라!"라고 말했고[28], 그 후 티토는 더 이상 성당을 찾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예화에서는 '말에 관련된 교훈'을 주기 위해서 미국의 폴튼 쉰 대주교[29]의 이야기를 넣으며 상황은 똑같은데, 신부가 그 어린 아이를 잘 타일러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같이 실리곤 한다.
  • 서방과 친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 합작도 많이 진행했었다. 할리우드 영화 철십자 훈장은 당시 현역이었던 유고연방군의 T-34가 소련군으로 대거 출연한다. 파르티잔 투쟁을 다룬 영화 네레트바 전투도 할리우드 배우들을 출연시킬 정도였다.[30] 율 브리너도 나온다. 리처드 버튼이 티토 역할을 수행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여러 번 공중파를 탔는데 화염병으로 탱크를 불태우는 장면은 80년대에는 삭제 방영되었다. 심지어 조지 오웰1984, 동물농장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 마케도니아어, 슬로베니아어로 번역되어 나왔을 정도로 서방과도 적절하게 지냈다.
  • 비단 할리우드 영화 뿐만 아니라 본인의 성향 자체가 전쟁 중 추축국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으면서도 항상 깔끔하게 손질한 정복과 반짝이는 구두,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위의 사진과 같은 활짝 웃는 살인 미소로 사람을 대하며 좋은 와인과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공산주의 혁명가 이전 영화 배우 같은 미중년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호남아 기질이 다분했다. 이념적으로 대치하면서도 티토의 깔끔하고 호방하면서도 세련 된 자기 이미지 관리에 매료된 영국 측의 시선에서는 티토의 라이벌인 체트니크의 지도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전형적인 발칸 깡촌 도적(...)으로 밖에 안 보였고 실제로고 도적떼나 다름없던 짓을 하던 것도 티토를 지원한다는 결정을 내린 요소 중 하나였다. 지금도 구글 등에서 티토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항상 말쑥한 제복이나 정장에 얼짱 각도로, 흔한 공산국가 서기장의 이미지보다는 영화배우에 더 가까운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찍은 티토의 사진들.
  • 다만 체트니크 항목에 나오는 다른 사진 처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도 사실 원래 동시대 발칸반도 최대도시였던 베오그라드에서 자라서 사관학교 나온 당대의 엘리트, 교육 받은 근대인이었다. 사진으로 현대에 유명해진 풍성한 턱수염의 발칸 산도적 룩은(...) 대전 발발과 유고슬라비아 점령 이후 게릴라가 되면서 세르비아 농민들에게 어필하게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이미지였다. 같은 나치 점령하에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미하일로비치는 농민들을 주 대상으로 산도적 코스프레를 한 반면 티토는 반대로 열강들의 외교전에 대뷔하기 위해 오히려 부르주아스러운 깔끔한 신사 이미지를 조성했다는게 흥미로운 역사의 대칭점이다.
  • 그리고 이탈리아와 합작하여 찍은 영화 슬픔은 어느 별 아래(Andremo in Citta)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딸 제랄딘 채플린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 전쟁 때 동지이자 이념으로는 사실상 적이었던 영국 수상 처칠을 보기 위해 영국에도 자주 방문을 했을 정도로 호감을 느꼈다. 반면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경우는 사석에서 비겁한 짓을 하는 것을 티토가 목격하고[31] 같은 공산권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혐오했다.
  • 소련에 반대하는 노선 때문에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레프 트로츠키와 더불어 공산권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불리운 적이 있었다. 소련의 노선에 삐딱선을 타는 정치인을 티토주의자로 매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 전후 남한의 빨치산 및 용공분자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수감자들의 정치활동에 냉소적인 사람은 다른 죄수들이 티토주의자라고 집단 괴롭힘을 하거나 비난을 가했다는 증언도 있다.
  • 한편 티토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한장이 훗날 꽤나 주목을 모았다. 이 편지를 보내기 전에 스탈린이 티토를 암살하려고 자객들을 파견했는데 티토가 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있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Стаљину, прекини са слањем људи да ме убију. Ухватили смо их већ пет, једног од њих са бомбом, другог са пушком... ако не престанеш слати убице, ја ћу послати једног у Москву и нећу морати да шаљем другог.
>스탈린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내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것입니다. 나는 두 번째는 보낼 필요가 없을 겁니다.[32]
해당 편지는 스탈린의 블라즈냐야 별장 서랍에서 발견된 세 편지 중 하나로 그 서슬퍼런 강철의 대원수에게 대놓고 항의하는 편지를 부칠 수 있었던 티토의 배짱과 깡다구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이를 두고 서비스는 깡패가 또 다른 깡패에게 편지를 보내 대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 깡패가 스탈린에게 대들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고도 평가했다.
위 편지는 티토의 무지막지한 깡다구를 보여주는 일화로도 유명하지만 스탈린에게 어찌저찌 남아있던 인간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인들이 스탈린의 집무실 서랍에 고이 짱박혀있던 편지 세 통을 발견했는데 한 통은 자기 아내에게 난폭하고 무례한 짓을 한 스탈린에게 격노해서 사과를 요구한 레닌의 편지, 또 한 통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숙청했던 니콜라이 부하린이 형 집행 직전에 보낸 편지[33], 그리고 마지막이 티토의 편지였다. 다시 말해서, 티토의 편지는 평생 지도자로 섬기고 따랐던 레닌의 편지, 평생의 친구였지만 자신이 배신한 부하린의 편지만큼 스탈린에게 충격을 안겨 준 편지였다는 것.
  • KGB는 티토를 암살하기 위해 페스트를 감염시키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 코키(Koki)라는 유황앵무를 기른 바 있다. 정확히는 손녀 선물로 사준 앵무였다. 티토 사후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러나 이내 곧 차기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며 갈아타기를 했다고 한다. 현재는 크로아티아의 브리유니 국립 공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브리유니 국립 공원의 명물이며 현재까지도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중. #1[34] #2 티토가 이 앵무를 손녀에게 사준 시기는 1977년으로 브리유니 국립 공원측에 의하면 현재 50세를 넘긴 상황이라고 한다. 참고로 유황앵무는 최대 100년까지 장수한다.
  •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독립한 신생국가 몬테네그로의 현재 수도인 포드고리차는 유고 연방 시절 과거 티토의 이름을 따서 티토그라드라는 시명을 사용했다.(1946년~1992년).
  • 티토에 대해 알기위해 읽어볼만한 책은 영국의 작가 재스퍼 리들리가 저술한 평전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 있다. 2004년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했으며, 현재는 절판되어 인터넷 중고서점 등을 통해 구할 수 있다.
  • 시메 브르살코의 증조부가 티토 정권에게 찍혀 처형당했다. 참고로 이 사람과 그의 아들(축구선수 시메 브르살코에겐 할아버지)도 이름이 시메 브르살코.
  • 세르보크로아티아어외에도 독일어, 러시아어, 체코어, 슬로베니아어, 카자흐어 를 구사하였으며 프랑스어이탈리아어도 읽고 이해할수 있었다고 한다.[35]

4.1. 티토주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토의 노선은 티토주의라는 이름으로 분류가 되었다. 워낙에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독특하고 독자적인 노선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특징은 노동자 자주관리, 비동맹노선, 중공업 편향적 산업화 지양, 탈권위주의 등.
다만 이러한 정책과 그에 기반한 노선들이 하나의 '사상'으로 분류될만큼 이론적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티토의 독특한 정치외교 노선이 나름 훌륭한 성과를 이뤄낸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독립된 정치 사상으로써 '주의'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비동맹노선'과 실리주의적인 등거리 외교 정책은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소련의 통제를 받는 위성국의 입장에서 벗어나려 했던 정치외교적 입장에 기인한 것이다. 그냥 무작정 "소련 나가라! 우린 자주노선!" 이라고 하면 일단 국제적 협력상대가 되어줄 대부분의 우방국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여러 수단으로 철저히 보복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굴복시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의 특성상 서구 진영에 합류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따라서 동구권 국가들과도 교류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으면서, 거기서 부족한 부분을 서구권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보충하는 비동맹주의적 등거리 외교 노선을 채택하게 된 것. 그리고 냉전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이러한 외교노선이 '양대 열강이 주도하는 양대 진영에 합류하여 위성국화되는 것'을 원치 않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좋은 전형이 되었기에[36]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자연스럽게 제3세계 비동맹진영의 대표국가 중 하나로 인식된 것이다.
또한 '중공업 편향적 산업화 지양'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고슬라비아가 중공업 중심의 산업화 노선이 아니라 농업, 경공업, 중공업이 균형을 이룬 산업화를 지향한 이유 역시 '비동맹주의적 외교 노선으로 인한 동구권에서의 이탈' 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의 동구권은 (후일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제한 주권론에 이르는)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과 통제력 아래 있었고, 이러한 소련의 영향력은 경제 분야에도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산주의 진영의 <국제 분업론>으로, 전 세계의 형제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진영의 생산력에 맞서기 위해) 경제적으로도 통일된 진영을 이루어 각자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산업영역을 담당, 진영 차원의 분업화를 통해 최고의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 유고슬라비아가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이 동구권의 경제블록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이는 긍정적으로 보면 자국의 입장을 가장 우선시하여 스스로 경제적 노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타국과의 협력이나 교류 없이 자국의 역량만으로 모든 경제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며, 또한 당시 제2세계의 종주국이던 소련의 자본 및 기술적 지원 없이 스스로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중공업 편향적 산업화 대신 1차산업에서 경공업, 중공업까지 균형잡힌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이 듣기는 좋지만... 반드시 좋은 선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자국 내에 균형잡힌 산업 기반을 갖추는 만큼 다양한 위기상황에 대한 대응력이 좋아진다는 강력한 장점도 있지만[37] 당장 한국의 사례에서도 확인 가능한 것처럼 빠른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필요한 경우에는 중공업에 최대한 중점을 두는 노선이 훨씬 효율적인 경우가 많은 것. 즉 중공업 편향을 지양하는 경제성장 역시 정치외교적 독자노선의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자주관리'와 '탈권위주의' 노선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정부와 관료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생산을 포함한 사회 전반을 통제하는 소련식 모델은 일단 '소련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라도 지양할 수 밖에 없었고, 진영 단위가 아니라 국가 단위로 비교적 자급적인 경제구조를 먼저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 또한 인구 2천 수백만의 그리 크지 않은 나라인데도 구성국만 6개에 달하는 연방국가라는 사회적 구조상으로도 전혀 효율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과 특성을 반영한 대안으로 각 생산단위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노동자 자주관리 제도가 도입되고 무의미한 권위주의의 지양이 일어난 것.
결론적으로, 티토의 정치외교 노선은 당시 세계에서는 나름 독특했고 그 성과 역시 상당히 훌륭한 편이었으나 이는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입장'에서 각 사안에 대하여 제시된 대안들의 집합이지 것이지 일관적인 사상적, 이론적 체계로부터 나온 결과물은 아니다. 티토의 노선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표현 역시 폭압적인 스탈린과 소련의 내정간섭에 질린 동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탈스탈린주의, 탈소련화라는 기치를 내걸때 광범위하게 사용한 표현이고 사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을 이끌던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슬로건으로 훨씬 유명하다...
인상주의처럼 티토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티토의 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의도보다는 멸칭으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집권 공산당 보기에 꼴보기 싫은 놈인데 차마 트로츠키주의자라고까지는 부르기 뭐한 반대파를 티토주의자라고 부른 격[38]. 이말의 원조는 이웃나라의 독재자이자 한때 티토와 함께 파시스트와 싸웠던 알바니아엔베르 호자였다. 엔베르 호자는 티토가 자기나라를 유고 연방에 강제합병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국가와 당선전기관을 이용해 티토를 비난했다(...).

4.2. 매체에서


  •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존 티토로 패러디되었다. 그의 비범하고도 개념찬 행각들은 다 미래를 예지한 덕분이라고.
  • 세계정복자 4라는 2차 세계대전 배경 전략게임에서는 누군가가 장군 추천을 요청할때 티토를 추천하는 밈이 있다.
  • Hearts of Iron IV에서 유고슬라비아를 플레이할 때 티토의 공산정권 트리가 가장 강력하다. 또 유고가 연합국이나 추축국에 가입하면 반란이 일어나는데 공산주의일 때는 안 일어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침공[39]으로 추축국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지정학적으로 포위된 상태라 매우 불리하다.
  • 2011년작 크로아티아 영화인 'Josef'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참전한 티토가 군복과 인식표까지 바꿔가며 살아남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 트레일러

[1]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내에서 헝가리 부분에 속해 있었다.[2] 크로아티아 영내에 있지만 슬로베니아 국경과 매우 가까웠다.[3] 이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논란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티토의 내전참가를 부인하였으니. 현재 가장 유력한 주장은 실제로 스페인에서 싸운건 아니고, 국제 여단 지원자들을 파리에서 모아서 스페인으로 보내는 코민테른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관리 차 스페인에 여러번 갔다 왔다는 주장도 있다.[4] 2차 대전때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만에 항복하는 등 졸전을 보였지만 1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는 인상적인 항전을 보여줬다. 1차 대전 발발후 오헝 제국군은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를 점령했으나, 세르비아군은 오헝군의 공세한계점을 포착하여 통렬한 반격을 가했고 전쟁 시작 불과 6개월이 안돼서 오헝군을 세르비아 국경 밖으로 오히려 '''쫓아냈다.''' 이건 영, 불이나 러시아의 지원 없이 세르비아 '''단독으로 이룬 전과다.''' 이듬해인 1915년에는 세르비아 전선에 독일과 불가리아까지 가세함으로써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됐는데, 세르비아의 국왕 페타르 1세는 결단을 내려 국토 대부분을 포기하는 대신 70살의 노구를 직접 이끌고 잔존병력을 그리스로 철수시켜 종전까지 항전을 이어갔다.[5] 당시 왕이였던 페타르 2세의 5촌 당숙이였다. 페타르 2세의 큰아버지인 조르제 왕자가 있었으나 이쪽은 '''원래 왕세자였는데''' 정신병으로 사람을 죽여서 동생에게 왕위를 넘긴 상태라서 섭정을 할 수 없었다.[6] 출처: 위키피디아[7] 하지만 스타브카는 30만이 아니라 7만이라 판단했고, 이쪽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8] 사실 유고슬라비아를 잃으면(또는 이곳에 연합국이 들어온다면), 독일의 유일한 유전이었던 루마니아가 위험해지고, 우크라이나까지의 보급로도 위험해진다. 그 자체는 별로 가치가 없지만, 석유나 보급로 확보를 위해 반드시 점유해야 했다.[9] 이 직전에 베를린 봉쇄가 있었다. 때문에 베를린 봉쇄는 미국의 물량 때문에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유고의 코민포름 제명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려는 스탈린의 쇼였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10] 중공군이 개입한 지 얼마되지 않아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동독, 몽골 등 공산권 국가들도 6.25전쟁에 참전하였고 이는 1.4후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1] 다만 그 덕분에 물품이 풍족하게 생산되었기는 했으나 동시기 타 공산국가와는 다르게 임금 상승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이 상당해서 이 문제로 골치좀 썩혔다고 한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비판으로 흔히 드는 사례이다. 한편 90년대 초반 여러 공산국가들도 체제전환을 하게되면서 이와 비슷한 부작용을 겪게 되었는데, 이경우 당관료들이 국영 기업을 불하받으면서 독과점이 일어나 발생한 것으로 유고슬라비아와는 원인이 다르다.[12]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체 게바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쿠바의 산업정책에 적용을 시도하기도 했다.[13] 실제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을때 적극적으로 참고했던 나라가 헝가리유고슬라비아였다.[14]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도 지지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지지 표명은 아니었다.[15] 특히 68운동 내에서 기존의 공산당 및 소련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16] 위에서 언급한대로 나치는 오만방법으로 티토를 죽이려고 애썼다. 또한 만약 나치와 야합했으면 종전후 티토를 싫어한 스탈린이 당연히 이를 들어 티토를 공격하지 않을 리가 없다.[17] 그래도 처형은 당하지 않았다. 질라스는 티토 사후였던 90년대 초까지 살아있었다가 1995년에 사망했다.[18] 골리 오토크 수용소는 티토가 사망한 직후인 1980년대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다가 1989년에 폐쇄되었다.[19] 사실 스탈린 시절에 앙숙이었다고 해도 1955년에 흐루쇼프와 만나면서 화해했으니 기념우표를 발매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20]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웬만한 나라들의 지도자 및 주요 인사들은 다 참석했다.[21] 옛 구 유고 연방 출신 국가 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의 외국 관광객들도 찾기도 한다.[22] 실제로 티토가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들 구 유고권 국가 출신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티토를 규탄하는 시위 데모가 일어났을 정도였다.[23] 체트니크는 티토의 빨치산과 항쟁과정에서 독일, 이탈리아군과 동맹을 맺고 함께 빨치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트니크를 지지하던 연합국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빨치산을 지원했다.[24] 티토와 같이 게릴라 운동을 같이 한 동지에 초기 권력 2인자였으나 티토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반체제 인사로 돌아선 사람이다. 심지어 질라스는 공산당 비판 작품들을 저술하여 투옥, 가택연금 상황 속에서도 정치 민주화를 주장하는 등 티토와 대립하였고 1980년 티토가 죽자 죽어야 할 독재자가 죽었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다 1995년 의문사했다. 정작 질라스 자신은 평생동안 국제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유지했다고.[25] 스테피나츠가 우스타샤 협력자라며 맥락 자르고 단순화되는 경우가 있으나, 일단 협력자는 아니였으며 오히려 사적으로는 우스타샤를 비판했다. 다만 공적으로는 미온적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Jozo Tomasevich는 저서 ''War and Revolution in Yugoslavia, 1941–1945: Occupation and Collabo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1) 개인들과 집단들을 돕는 사적인 행위에서는 "그의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최고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다(deserves highest praise, although his actions were not always successful, 563쪽)" (2) 그러나 "세르비아 대상 제노사이드와 우스타샤 정권에 대한 스테피나츠의 언행에는 심각한 결핍이 있다.(there are serious shortcomings in Stepinac’s statements and actions toward the Ustashe regime and its genocidal actions against the Serbs and the Serbian Orthodox Church, 564쪽)", "스테피나츠 대주교도 그 나라의 어떤 가톨릭 주교도 ... 공적 저항의 말을 하지 않았다.(neither Archbishop Stepinac, nor any other Catholic bishop in the state...uttered one word of public protest, 537쪽)"[26] 티토 사후이던 1980년대에 각 연방내 국가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번갈아가며 통치하는 집단지도체제로 개헌되었으나, 밀로셰비치의 공작아래 세르비아가 연방내 주도권을 독점하는 형국으로 변질되어 집단지도체제는 유명무실화되었다.[27] 출처: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2003), 제스퍼 리들러, 을유문화사. 54페이지[28] 사실 성만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는것처럼 가톨릭 미사에서 포도주는 예수의 피로써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정말 미사용 포도주를 흘린 것이라면 종교적 의미에서 큰 실수를 한 것이기는 하다. 물론 아이가 실수했다고 뺨을 후려치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 성인으로써(그리고 아이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현명한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29]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의 저자다.[30] 한국에서는 1989년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해준바 있다.[31]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가 루마니아를 방문했을 당시에 집권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차우셰스쿠와 함께 사냥하러 나갔다. 이때 티토는 사냥터에서 산탄총을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으로 동물들을 잡은 반면에 차우셰스쿠는 쏘는 족족 빗맞았다. 그런데 사냥 도중에 갑자기 차우셰스쿠가 달려오더니 티토가 사냥했던 멧돼지 한 마리를 그가 가려채려고 들자 어처구니가 없어져 버린 티토가 "당신의 총알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겠지."라고 차우셰스쿠에게 대꾸한 후에 총탄에 맞은 멧돼지를 챙겨서 갔다. [32] 출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저서 『스탈린 전기(Stalin: A Biography)』. 하버드 출판부, 2005년.[33] 내용은 딱 한 줄이다. '코바, 당신에게 왜 내 죽음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스탈린에게 숙청당해 곧 죽을 상황에서조차 스탈린을 애칭으로 부르면서, 원망하기보다는 왜 굳이 자신을 죽여야 하는지 오히려 의아해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것. 다만 스탈린의 그의 죽음을 고소해하며 다시 편지를 보며 기쁨을 얻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기는 한데, 사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은 로버트 서비스뿐이다. 보통은 <다른 고참 볼셰비키 지도자들과는 달리 부하린은 스탈린과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사이였던 점>이나 <스탈린은 부하린의 편지 뿐 아니라 회고록까지 잘 보관해 놓고 있었던 점>,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경우 재판 직후 바로 처형해버린데 비해 부하린의 경우 재판 이후 숙청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점>, <스탈린의 정적으로써 부하린의 위상은 최강의 강적이던 트로츠키를 일단 격파한 뒤 짬을 내서 격파한 (각각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이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격파한 뒤 남는 짬에 격파해버린 정도로, 굳이 말하자면 '사천왕 중 최약체' 정도였으니 정적을 꺾은 기쁨을 되새기기 위해 뭔가를 남긴다면 차라리 트로츠키와 관련된 것을 남기는 것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는 점> 등의 정황을 감안하여 스탈린에게도 부하린을 숙청하기 전에 상당한 심적 갈등이 있었다는 근거로 해석하는 쪽이 더 일반적이다.[34] 2분 11초에 티토라고 말한다![35]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36] 또한 갓 식민지에서 독립한 저개발 국가가 많던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 비해 유럽국가인 유고슬라비아는 나름 산업화의 역사가 긴 공업국이라는 장점도 있었다.[37] 예를 들어 일본의 작가 요네하라 마리의 증언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경제제제로 인해 사실상 국제교역이 끊겨 난방용 등유 한 통을 사기 위해 한 겨울에도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의 심각한 물자난이 발생한 상황에서도 유고슬라비아 국내에 충분한 농업 기반(특히 석유에 의존하는 기계식 산업화 농업이 아닌 가족 단위의 자영농 중심 농업 기반)이 있엇던 덕분에 어쨌건 굶은 사람은 없었다고 할 정도. 이외는 반대의 예로, 2020년 코로나 범유행 사태 초반, 여러 선진국들을 강타한 심각한 마스크 품귀 사태가 있다. 평소라면 마스크따위 한뭉탱이씩 집어서 코풀고 버려도 상관없었을 이들 선진국에서는 마스크 제조 따위 돈도 안되는 경공업은 그냥 개발도상국에 맡기고 수입해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지만, 전염병 범유행으로 각 국가가 모두 자국에서 사용할 마스크의 확보를 최우선시하면서 국제 거래가 중단되자 그깟 마스크를 구할 수 없어서 쩔쩔매는 사태가 벌어진 것.[38] 간단히 요약하자면 같은 진영이 아닌 상대를 욕하고 싶을때는 "파시스트!" 나 "부르주아지!!" 라고 부르면 되고, 같은 사회주의 진영 내의 상대를 욕하고 싶을때는 불구대천이라 화해고 용서고 필요없다, 기회 되는대로 끝장을 봐야겠다 싶은 상대면 "트로츠키스트!" 라고 부르고, 그정도는 아니지만 얄밉고 싫어서 굴복시키고 싶은 상대라면 "티토주의자!!" 라고 부르면 되는 식이다. 그냥 욕설에 가까운 표현이라 실제 트로츠키나 티토의 노선과는 별로 상관없지만, 그래도 굳이 맥락을 찾아보자면 종교에서 이단을 배척하듯 '네 주장은 단 한마디도 인정해주지 않겠다, 싸우자!' 싶은 상대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부르고, 그정도로 극단적인 적대관계는 아니지만 주류의 입장에서 '말 안 듣는 소수파'에 해당하는 상대를 욕할때는 티토주의자라고 부른다고 보면 대강 적절하다.[39] 이탈리아가 친선하는 선택지도 있지만 거의 반드시 침공한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