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

 


1. 개요
2. 배경
2.1. 미국의 사회주의와 전후 상황
2.2. 반공정서의 확산
3. 전개
3.1. 매카시의 등장
3.2. 매카시즘 열풍
3.3. 몰락
4. 부작용
5. 공산주의자 침공 사건
6. 문화계에 미친 사례
7. 미디어에서의 매카시즘
8. 매카시즘의 피해자
9. 재평가 논란
10. 관련 문서


1. 개요


[image]
"이것이 내일인가 - 공산주의 하의 미국!"
소련군에게 유린당하는 국민들을 묘사한 미국의 프로파간다 포스터.

Ted-Ed '매카시즘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한글자막 있음
McCarthyism
1950년대 초반 미국 전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 근거 없는 무분별한 주장이나 고발을 비판하는 용어로도 사용한다. 이름은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상원의원에서 비롯되었다. 실상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이다. 간혹 자신의 혐의를 부정했던 공산 간첩 엘저 히스도 목록에 들어 있었으므로 마녀 사냥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몇 명이 실제 간첩이었다고 해도 결국 간첩이 아니었던 사람이 간첩이였던 사람보다 월등히 많으며, 오히려 저 정도 대규모로 조지는 와중에 어쩌다 하나 걸린 거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현재에 와서는 지식인들을 대거 숙청하고 문화계를 박살낸 미국판 문화대혁명으로 여겨진다.

2. 배경



2.1. 미국의 사회주의와 전후 상황


1941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각각 바르바로사 작전, 진주만 공습을 일으키면서 소련과 미국은 나란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놓고 이념적으로 달랐던 둘이었지만 독일과 일본이라는 더 큰 적들을 앞두고 둘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과 함께 독일을 물리치면서 미국의 사회주의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차 대전 때는 반전여론을 주도했던 이들이었지만 2차 대전에는 더 큰 적인 파시즘이 있고 소련과 미국이 동맹국으로 전쟁을 했기에 미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싸우는 소련을 옹호하는 기사를 쓰거나, 할리우드에서 소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승전국이면서 본토에 아무런 피해가 없는 미국은 명실상부 최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시에 가동되었던 경제 체제를 평시로 돌리는 것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군수품은 전쟁이나 그에 대비할 때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하등 쓸모가 없는 물건인지라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군수공장들은 사라지거나 품목을 전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근로자들이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근로자나 타 분야의 근로자들도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이 발생했다. 1945년 1만여명의 영화 제작진들이 파업을 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 말부터 1946년 말까지 도합 430만~460만명의 근로자들이 파업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파업 파동이 벌어진다. 1945~1946년 파업 파동. 이 파업은 이념에 상관없이 전쟁이 끝나면 으레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의 사회주의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위기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무렵 해외에서도 공산주의의 위협이 대두되고 있었다. 1946년 3월에는 소련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처칠이 철의 장막으로 빗대서 말하고, 국공내전이 발발하며, 한국 등 세계 곳곳에서 분할과 이념갈등이 있었다. 이에 트루먼 행정부는 경제적으로는 페어 딜 정책을 펴는 한편,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대두시켜 전시가 평시로 해제되면서 발생하는 반동을 줄이고자 하였다.

2.2. 반공정서의 확산


1947년 3월, 트루먼은 새로운 대외 정책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세계에 뻗어나가는 소련과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히기 위한 목적으로 터키, 그리스 등에 엄청난 군사, 경제적 지원을 했다. 이런 대외 정책을 펼치면서 자연히 국내에는 반공정서가 싹트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내의 파시스트들의 활동을 조사하고 감시했던 하원반미활동위원회(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는 공산주의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8년 6월에는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고, 1949년 8월에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 1949년 12월에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이동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며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공포와 위기감이 극도로 커졌다. 이에 HUAC는 이런 위기감에 더욱 박차를 받아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반공활동에 전념했다.
매카시가 하도 임팩트가 있기 때문에 보통 매카시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의 출발점은 매카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1947년 말부터 시작됐다. 1947년 10월, 2차 대전 때 소련에 우호적인 영화를 낸 점 때문인지 HUAC에서 할리우드를 조사했다. 약 40~50명의 영화 관계자들을 조사하면서 11명의 사람들을 최종적으로 남겨 1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10명을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 일명 할리우드 10으로, 할리우드에서는 이들에게 어떤 일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48년에는 앨저 히스 간첩사건이 벌어진다. 앨저 히스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루스벨트 때 여러 정책에 참여하며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인물로, 1945년에 자수한 공산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넘긴 자료에 히스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 조사를 받았다. 이때 훗날 대통령이 되는 하원의원 리처드 닉슨이 청문회를 주도했다. 히스는 잘생긴 외모와 좋은 말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간첩과 연관이 없다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혐의에서 빠져나갔고, 이후 자수한 다른 간첩의 증언을 통해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는 얄타 회담에서도 동행했던 루스벨트의 측근이었기에 그가 간첩이라는 사실은 전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3. 전개



3.1. 매카시의 등장


1950년 2월, 조지프 매카시 미 상원의원은 공화당 당원의회에서 "중국공산당에게 빼앗긴 미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며 '''"미국에서 활동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1]라는 발언으로 관심을 모았고 이는 반공주의로 긴장상태에 돌입한 미국에 화젯거리가 됐다. 그 다음날 매카시는 연설에서 "미 국무부에 57명의 공산당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카시는 1946년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던 인물로, 언론을 이용해 대중들의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에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능력을 이용해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지만 곧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한 명예훼손, 경력 위조, 음주 문제 등에 휘말려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겪던 차에 반공주의 열풍이 들이닥치기 시작해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어 위에서 언급한 연설로 기사회생에 성공한다. 매카시의 폭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긴장하던 미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일약 공산주의에 맞서는 애국자로서 미국의 대 스타로 떠오른다.

3.2. 매카시즘 열풍


1950년 6월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한국전쟁이 발발히고, 같은 해 여름에는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이 발생하면서 매카시의 활동에 제트 엔진을 달아준다. 당시 매카시와 HUAC의 활동을 대충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매카시나 고발자가 간첩이나 공산주의자일 것 같은 인물을 지목.
  2. HUAC는 고발된 사람을 청문회에 소환해 조사.
  3. 의심스러운 증거는 청문회에서 확증으로 쓰이고,[2] 결국 고발된 인물은 지위나 명예를 잃고 추방되거나 활동을 중단.
  4.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고 국민들은 공산주의로부터 미국을 지켰다고 환호, 매카시와 고발자는 다른 인물을 지목해 1번부터 반복.
이런 식으로 HUAC와 매카시가 서로 돕는 무한동력(?)이 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혐의로 체포되거나 심문 받았으며 유명인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매카시가 등장한 이후 첫 1년동안 HUAC의 공개 청문회에 소환된 인물은 214명이었는데 반해 비공개 청문회에는 395명이 소환되었으며, 녹취록은 공개 5671페이지, 비공개는 8969페이지에 육박한다. 거의 하루에 1~2명 꼴로 조사하는 것을 반복했다는 의미.
이 과정 속에서 할리우드 등의 영화계는 반공주의적 성격의 영화를 찍어내며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하려고 노력했고, 미국 공산당 등 사회주의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은 스스로 자신의 활동을 자성하는 수기나 글을 쓰면서 열풍을 피해가려 노력했다. 이 광풍에 힘입어 매카시는 1952년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고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자 상원 감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면서 더 큰 권한을 얻었다.

3.3. 몰락


하지만 이런 과정이 몇 년씩이나 지속되자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차츰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매카시는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목하려 했다. 매카시는 점점 그 대상을 확대하다가 나중에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이젠하워 정부도 매카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1953년 10월, 한 공군 장교가 갑자기 강제 퇴역을 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 사건의 전말은 어떤 인물이 그 공군 장교를 아버지의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고발했고, 군 당국은 해당 장교에게 '''가족을 고발할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강제로 퇴역시킨 것. 이 과정에는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었다. 억울하게 퇴역당한 장교는 이를 에드워드 머로프레드 프렌들리에게 알렸고 머로와 프레들리는 방송사와 군 당국의 중단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기있게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이 보도가 알려지면서 철벽같던 매카시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언론과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차츰 정신을 차리고 매카시즘을 비판했다. 이 무렵 매카시는 미군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아이젠하워는 군 장성 출신 대통령이었고 공화당에서도 결국 참지 못하고 매카시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카시를 지지하는 여론은 만만치 않았으며 매카시는 미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머로와 프레들리는 <See It Now>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매카시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준비한 그들은 1954년 3월 9일에 방송하여 매카시의 주장의 거짓과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비판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매카시는 공포심을 이용할 뿐이며 우리는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자 매카시는 머로의 방송에 대한 반박문을 보냈는데 1954년 4월 6일에 방송된 반박문은 머로의 폭로에 비하면 초라하면서 근거 없는 인신공격성 내용이 많았고 결국 여론도 하나 둘 매카시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한, 뒤이어 매카시는 미 육군을 공격하며 청문회를 열었는데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소속되었던 군을 공격하는 매카시를 보고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1954년 4월 22일부터 1~2달 정도 진행된 이 청문회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매카시에게 대응하였고, 결국 근거 없이 육군을 고발했던 매카시는 육군 측의 조지프 웰치에게 설전으로 대패했다. 더욱이 매카시는 청문회 도중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멸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언 밥 호프(Bob Hope)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 200만 명의 명단을 공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매카시 의원이 모스크바 시내 전화번호부를 막 손에 넣은 모양이다.'''"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마침내 1954년 12월 2일, 매카시의 비난 결의안이 의결되고 매카시에 대한 견책 결정이 내려지면서 4년간 지속된 매카시즘은 막을 내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3]은 매카시의 비난 결의안이 의결되고 나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셨'''즘이다."


4. 부작용


미국이 스스로 생사람을 때려잡고 필요없는 적을 만들었던 역사. 매카시즘은 정말 쓸모없는 삽질로 미국의 흑역사 정도로 여겨지는데, 소모적인 공산주의자 논쟁을 일으킨 것 뿐 아니라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에 대 소련공산권 관계를 극도로 경직시켜 국가 정책에도 실질적인 피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특히 정보전에 있어서 막심한 손해를 끼친 사례로는 영화배우인 스털링 헤이든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헤이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 요원으로 자원하여 독일점령지 유고슬라비아에 잠입, 당시 반독게릴라를 이끌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지원하는 임무에 종사했고 그때의 인연으로 티토와는 개인적 친분을 쌓게되어 전쟁이 끝나 귀국한 뒤에도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공산 정권의 수장이지만 반소 성향이 상당히 강했던 티토였으니 이 인맥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상당히 믿을 만한 정보망이 저절로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매카시에게 알려지자 그는(나라를 위해 적지에 단신 잠입하여 작전을 수행하고는 은성장까지 받은 전쟁 영웅에게) 공산주의자의 협력자로 매도당했고 결국에는 누명을 벗기 위해 밀고자 노릇까지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른다.
헤이든은 매카시즘 종식 후 할리우드에서 사실상 쫓겨난다. 그나마 반할리우드감독들인 스탠리 큐브릭,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등이 배역을 줘서 연기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큐브릭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 《킬링》에서 주연을 맡았던 인연으로 주변의 만류와 고사에도 불구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사이코 광신도(수도물 불소첨가가 성불구를 만들려는 소련의 음모라는) 핵 우월론자 잭 리퍼 장군 역을 맡기기도 했다.[4] 헤이든은 죽는 순간까지 이것 때문에 고통에 시달렸다. 또한 티토에게도 의절당했다. 미국은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영국SIS냉전 중 동구권 무기의 정보를 얻기 위해 주로 사용한 창구가 유고와 체코였다. CIA가 동구권 무기의 정보를 얻지 못해 발만 구르고 있을 때 SIS는 외교행낭에 넣어간 달러 뭉치로 무기 매뉴얼까지 입수하고 있었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또한 당시 칼텍 항공우주공학과 교수였던 첸쉐썬 박사 또한 매카시즘 때문에, 중국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5년간 수감상태에 있다가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 병사들과 교환되어 중국에 귀국했다. 첸쉐썬 박사는 미국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5] 중국의 우주개발과 핵개발을 주도, 중국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ICBM을 개발하고, 다섯번째로 인공위성을 발사, 핵무기 클럽에도 가입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중국의 핵개발 및 미사일 개발은 1960년대까지 미국의 안보환경을 악화시켰다. [6]
이미 1960년대부터 매카시즘은 반공적인 한국에서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정희 후보는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는 야당에게 "매카시즘적인 공격을 멈출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전 해병대 참전 용사이자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G 마나,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무부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웨슬리 피셸 교수[7]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1930년대, 1940년대를 걸쳐 쌓아 온 제3세계 전문 지식인 집단으로써, 매카시즘으로 인하여 미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숙청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베트남 전쟁 참전을 비롯한 이 후 미국외교 정책이 잘못된 가정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근시안적 삽질성 대외 개입을 연발하게 된 원흉이며, 크나큰 해악을 남긴 실책이였다는 것이다.
피셸 교수의 경우 당장 본인이 196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대표적인 주전파이자 미국베트남에서 판돈을 점차 키워 나간 것에 직접적으로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 "그러니깐 나도 잘못 된 정보를 받았기에 잘못 된 판단을 내렸던 거다"라는 식의 자기 변호성 발언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1950년대 이전 까지 미국은 물론, 서구권 전반에서 중국유라시아 변경사 최고 권위자였던 오웬 라티모어 박사를 비롯하여 이 시기 사상을 불문하고 '''중국, 소련측에 직접적인 연줄이 조금만 있어도 의심, 밀고 당하는 분위기''' 때문에 영향력이 큰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미국에서 대거 추방당했다.[8][9]
오웬 라티모어가 책임자로 있었던 2차대전기 미국의 중국통 싱크탱크였던 China Hands의 구성원 모두 매카시즘 열풍으로 인해 뭐 막상 중국에 대해서는 아는 바 하나도 없는 일자무식 정치인들과 선동꾼들에게 '''당신들이 일을 똑바로 못 했으니 중국이 공산화 당했을 것이다'''라고 매도당하며 미국에서 추방당하거나 본인들이 활약했던 업계에서 억울하게 매장당했다. 상원의원이자 상원 대외관계 위원회장이었던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10]는 완고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숙청당한 외교관 존 패튼 데이비스, 존 스튜어트 서비스 같은 사람들에게 훗날 1970년대국회에 다시 초청하여 "당신들은 대중이 받아 들이지 못한 진실을 말해서 핍박 받았다"라고 말할 만큼 대아시아, 특히 대중국 외교와 정보계에서는 확실하게 매카시즘을 통해 위축되었다.[11] 라티모어 못지 않게 당대 중국학의 권위자였던 존 K 페어뱅크 박사의 경우 자기가 속한 하버드 대학의 라인이 워낙 강철이라 추방은 면했지만 이 사람도 청문회에 종종 끌려갔고, 무혐의로 풀려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훼방을 당했다. 위의 매카시즘 옹호자들의 주장과 다르게 '''오히려 매카시즘 자체가 미국의 안보정보 태세에 큰 해악을 끼친 셈이다.'''
베트남 전쟁 사학자인 데이비드 마는 그의 저서에서 베트남전 개입 이전 미국의 국무부 자료를 보면 막상 베트남 현지의 사정이나 배경은 아예 관심조차도 없이, 오로지 '''중공을 막아야 한다'''는 편집증적인 집착만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베트남의 뿌리 깊은 불신의 역사, 당시 월맹 지도부측의 미국으로 향한 유화적 메세지 같은 당장 눈 앞에 뻔히 보이는 정보는 마치 일부로 무시한 양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12][13], 이에 대한 원인으로 베트남전 개입 직전 세대에 터졌던 매카시즘 때문에 애초에 얼마 안 됐던, 그나마 미국과 월맹이 일제에 대항해 동맹이었던 OSS 시절부터 베트남과 관계를 맺었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싹 사라졌던 것을 주목했다.[14] 이는 베트남전 직후에 벌어진 중국-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이 중국-베트남 관계에 대해 무식했음이 증명되었다. 역시 베트남전 관련 언론, 학술 활동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현대도 대외 정책 전문가로 활동 중인 작가 제프 스타인은 2010년대 현대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 행정부가 베트남 시절과 똑같이 '''현지의 현실과 복잡한 권력 관계는 하나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주제에 미국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며 이에 따라 삽질성 개입을 반복하는''' 근시안적인 인지부조화를 미국의 대외정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은 바가 있는데[15], 이 두 학자들이 베트남전과 현대 테러와의 전쟁을 두고 한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미국이 비서구권 세계와의 대외정책에서 저지르는 삽질에는 '''구조적이고 의도적인 무지함'''이 가장 큰 원인이고, '''이런 반지성주의의 씨앗이 미국 외교가에 퍼진 근원은 매카시즘'''이 된다. 일이 이런 식으로 굴러갔으니까, 매카시즘은 미국 사회 전반을 아주 개박살 냈다. 그 후유증은 2017년 1월 시점에서도 있다.[16]
당연한 소리겠지만 현지 사정이고 뭐고 깡그리 무시하는 건 결코 좋은 게 아니다. 하다못해 내부분열을 유도하려고 하려고 해도 내부 사정은 잘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적을 알고 싸우면 백전 백승이랬거늘 상대방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이기기를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도둑인데 미국은 진짜로 이 도둑짓을 하려고 했다.

5. 공산주의자 침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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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나오는 랄프 E. 크로넨웨터 시장.

1950년 5월 1일, 위스콘신 주의 작은 마을인 모사이니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침략당했다. 대부분 트렌치코트를 입은 '침략자'들은 모사이니 시장과 경찰서장을 체포하여 침공을 알렸다.

그들은 이 마을의 주요 교차로로 행진했고, 광장 이름을 '붉은 광장'으로 바꿨으며 인민재판을 했다.

수녀들은 체포되어 철조망을 둘러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을 도서관을 장악했고, 대부분의 책을 압수했다. 그들은 지역 영화관에 소련 선전영화를 보여주라고 협박했다.

현지 식당들조차도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메뉴에서 빼고 거친 흑빵과 감자 수프로 대체하도록 강요받았다.

수십 명의 미국인 및 국제 언론인들, 심지어 소련의 국영 언론사인 TASS의 언론인조차도 모사이니 '침공'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 '침공'은 반공주의를 심어주기 위한 연극이었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재향군인회 구성원이었다. '''

이 사건은 모사이니 해방과 지방정부의 복구로 끝났다. 그리고 '침략'을 목격한 언론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에서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여담으로, 이 일 때문에 '''랄프 시장은 뇌졸중으로 5일 뒤 향년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장을 진찰한 의사는 흥분과 피로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현지 재향군인회 지부장이었던 프랭클린 베이커는 "끔찍한 우연의 일치였다."라고 말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침공해 올 경우 성경을 교회 오르간에 숨기는 법을 언론에 시연했던 '''성직자 Will La Brew Bennett(72)는 '붉은 광장' 근처에 있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리고 5월 7일 밤에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시장이 죽은 지 하루 뒤였다.

참고자료

http://alphahistory.com/coldwar/reds-under-the-bed/

http://m.dcinside.com/view.php?id=war&no=231655

https://mobile.nytimes.com/1950/05/08/archives/mayor-minister-dead-after-mock-red-coup.html?referer=https://en.m.wikipedia.org/

http://archive.is/2fLi4

작성자:granit, 1950년, 미국에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아카이브 (군사 마이너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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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침공 연극을 하다가 산 사람 2명을 죽인 일까지 있었다.

6. 문화계에 미친 사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참조. 이 밖에도 매카시즘 광풍이 불었을 때 게리 쿠퍼[17] 그리고 영화배우 출신의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월트 디즈니 등은 '''미국의 이상 보존을위한 영화 동맹''' 일명 (MPAPAI) 를 만들어 반공기조를 이어갔다.[18] 앞에서 말했던 스털링 헤이든과 엘리아 카잔은 공산주의 전력자들의 이름을 대는 것으로 압박에서 빠져나왔다.
극작가 리처드 콜린스는 블랙리스트에서 빠지기 위해 HUAC[19]에서 증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와 이혼까지 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후 매카시즘이 잦아든 뒤에 엘리아 카잔은 배신자란 낙인을 찍히고 제대로 영화인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그가 1999년 아카데미상 공로상을 받을 때 할리우드의 분위기는 대단히 험악했다. 물론 존 포드 같이 대놓고 비난하며 맞서던 영화인도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자유보수주의자들이 주류를 차지하던 할리우드[20]에서 주류가 완전히 민주당쪽으로 넘어오게 된다.[21]

7. 미디어에서의 매카시즘


매카시즘을 풍자나 우회적 묘사 없이 정면으로 소재로 다룬 영화로는 매카시즘과 맞서 싸운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이 있다.
2008년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4편에서 매카시즘 광풍을 희화적으로긴 해도 나름대로 잘 묘사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를 빨갱이로 모는 CIA, 공원에서 빨갱이를 때려잡자라는 피켓을 들고 단합대회하는 사람들. 다만 영화의 배경인 1957년은 매카시즘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점이라는 건 애교로 넘어가주자.
영화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가 노골적으로 매카시즘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영화는 스릴러와 인간승리로 포장했지만 원작은 블랙 유머로 매카시즘을 풍자하고 있다. 소설판에서 '''공산당 간첩'''을 강조하는 사람의 군대 시절 이야기는 매카시의 그것을 풍자했고 영화에서 그 의원 역시 매카시처럼 알코올 의존증에 포즈까지 흉내낸다. 심지어 영화 중간에 그 의원의 기록영상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새로 찍은 게 아니라 매카시의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이렇게 '''반공주의'''를 외친 사람이 바로 '''소련의 진짜 첩자'''라는 게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면서도 현실적인 게, 사실 매카시즘 시절 저런 '''고발과 의심의 광풍을 주도한 이들은 전직 미국 공산당원들이었다.''' 2차대전 당시 소련과의 우호 관계 등을 고려한 것도 있고, 아직은 사상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자유주의적 풍토가 확고하게 강했기에 1910년대 1차 적색공포 시절 대대적으로 한번 탄압 당한 이후 다시 성장할 수 있었던 미국 내 좌파 세력이 이 시절 갈려나가면서 밥그릇과 삶의 터전이 위기에 처한 전직 공산당원들이 '''서로를 마구잡이로 고발하면서''' 매카시즘의 판도가 저렇게 커진 것이다. 당장 위의 차이나 핸즈 중국통 싱크탱크 숙청을 주도한 언론인 루이 F 버덴츠, 프레다 어틀리 같은 사람들은 모두 전직 공산당원이었다. 미국 헌법의 원칙을 숭상하며 적법한 절차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 영미식 보수주의,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면 당장 알콜 중독자 아저씨가 무죄추정의 원칙이고 법이고 나발이고 없이 마구잡이로 아니면 말고식 고발을 해대는 꼬라지도 보기 싫은데 저런 뿌리없는 전직 빨갱이들이 서로 살아 남겠다고 아귀처럼 물어 뜯으며 사회 분위기를 개판으로 몰고 있었으니 이 작태 자체가 이념을 떠나 눈꼴시러웠던 것도 무리가 아니며, 이렇기 때문에 매카시즘을 끝장낸 것도 정작 이들이 때려잡으려 했던, 어느 정도 성공한 좌파가 아니라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트럼보에서는 각본가인 달튼 트럼보가 겪는 고초를 통해 매카시즘의 야만성을 보여준다. 영화 헤일 시저에서는 매카시즘과 미국 내 사회주의자들을 동시에 풍자한다.
밥 딜런의 곡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22]는 매카시즘을 풍자한 노래다. 극우 반공 단체 '존 버치 협회'의 회원이 빨갱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 이곳저곳 들쑤시다 자기 자신까지 훑어본다는 내용.
TRPG 파라노이아 역시 디스토피아 SF에 메카시즘을 융합시킨 블랙 코미디 TRPG로 인류가 망한뒤, 알파 컴플렉스를 관리하게 된 컴퓨터가 원인규명에 나섰다가, 데이터베이스의 오류로 냉전 당시의 자료를 접하게 된 뒤 인류멸망이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판단해 버린 이후에 벌어지는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는 매카시즘이 한창이던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 제임스 도노반은 소련 스파이였던 루돌프 아벨을 변호했다가 사람들한테 눈총을 받을 뿐 아니라 손가락질을 당하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협을 받게 된다.
마블 코믹스에서의 판타스틱 4의 리더 리드 리처즈의 삼촌은 메카시즘으로 인해 처벌되어 끔찍한 말년을 버림받은채 보냈고, 그를 좋은 눈으로 바라보던 리처즈는 메카시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설정이 있다. 이는 시빌 워 당시 스파이더맨이 리처즈에게 직접적으로 인용하면서, 리처즈가 히어로 등록 법안 찬성파에서 후일 빠지는 계기가 된다.

8. 매카시즘의 피해자


확실히 매카시즘은 미국의 두뇌를 반쯤 박살냈다. 특히 문화계와 외교계. 그나마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였고 국가 내부적으로 이런 미친 짓거리를 멈추려는 이들이 존재했으며 심지어는 매카시를 '민주적으로' 날려버릴 힘이 있어서 이정도였지 미국이 60, 70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수준이었다면 희생자는 더욱 더 늘어났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매카시즘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수 있다.

9. 재평가 논란


그 뒤 1995년 기밀해제로 공개된 미-영 간의 러시아어 암호 해독 프로젝트인 "베노나(VENONA)"에 의해 매카시가 공산주의자 및 소련간첩으로 지적한 이들[23]이 당시에 정말로 소련의 간첩으로 활약한 사실이 드러나 매카시 상원의원의 지적이 사실이라는 이야기가 돌고는 있지만...
그러나 베노나 프로젝트에 의한다 하더라도관련 글 매카시의 '지적'이 재평가 운운할 정도로 미국 안보를 공고히 하였는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실제로 베노나 프로젝트에 있는 명단과 매카시의 명단을 상호 비교해보면 매카시가 지적한 사람들이 베노나 명단에 있는 경우는 극히 적다. 매카시의 주장으로 1950년대의 미국 사회가 얼마나 공포에 감염되어 경직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매카시즘을 재평가한다는 것은 황당한 일일 뿐이다.
현재 국내에 재평가 운운하면서 나도는 떡밥은 모 교수의 주장과 그가 번역한 미국의 앤 콜터(Ann Coulter)[24]라는 정치평론가의 저서, 그리고 그들을 소스로 한 모 극우 블로거의 포스팅들이 대부분으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그러한 극우 블로거들은 '누가 뭐라고 떠들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매카시 의원의 발언이 미국 안보에 별 공헌을 못했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며 논점을 흐리는 주장에 불과하다' 면서 '더불어 역매카시즘 때문에 이후 거꾸로 반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미국에 팽배하게 되었고 소련 간첩을 열심히 잡고 신고하는 사람은 변태 취급을 받게 되어 오히려 미국의 방첩망에 큰 장애를 주었다' 라고 하며 현대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까지 들먹거리기도 한다. 물론 조금만 생각하면 인과관계를 혼동한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방첩망이 악화되었다면 이는 매카시즘의 부작용이지 매카시즘을 진정시키려는 노력 때문이 아니다. 반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킨 이유가 매카시 의원의 삽질이었으니까.
그 당시 국무성에서 일하고 있었고 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각료가 되는 딘 러스크[25] 장관은 자서전에서 매카시즘으로 훌륭한 중국 전문가들이 희생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외무성이 매카시즘으로 인해 위축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10. 관련 문서




[1] 205명이 아닌 297명이라고 되어있는 곳도 있다.[2] 당연하지만 기소 이후 법정에서는 증거로서 인정되지 않거나 인정되더라도 이후 결과가 뒤집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3] 군인 출신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미국 공화당 내의 중도우파의 상징적 인물로, 이후 공화당 내 온건파는 아이젠하워의 계보를 잇는다.[4] 특이한 것은 또 다른 밀고자 아돌프 만주(Adolphe Menjou)도 큐브릭의 영화 《영광의 길》에서 인간말종 프랑스 장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큐브릭의 할리우드 혐오가 잘 드러나는 사례.[5] 미중 국교 정상화 이후 칼텍 출신끼리 만나자고 부른 자리조차 미국이 싫다며 거절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게 장인이 국민당과 연관이 있음에도 심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6] 다만 이 일은 첸쉐썬 한사람만의 병크가 아니라 제사해 운동 및 토법고로와 얽혀 일어난 거다.[7] 응오딘지엠미국으로 초청하는 등 미국이 베트남의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미시건 대학의 싱크 탱크 베트남 고문그룹의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사람이다. 전쟁 중반에 반전파로 돌아섰다.[8] 오웬 라티모어 교수는 청조 말기 톈진의 미국인 영어 교사 부모에게서 나고 자라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적백내전과 중국의 대군벌시대, 국공내전으로 '''개막장 무법지대였던 1930년대 신장 위구르 일대와 몽골, 소련령 튀르키스탄에서 직접 수년간 도보로 여행하고''',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의 고문으로 일했다. 이미 격동적인 중국 현대사를 몸으로 겪었던 미국인이라서, 꽤나 유명한 중국통이다. 순수한 학문적인 명성도 대단했다. 당연히 조국에서 쫓겨난 그를 받아준 곳은, 영국의 리즈 대학이다. 이 시람은 리즈 대학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다가, 1989년에 사망했다.[9] 특히 이 사람이 집중 연구 했던 몽골-만주 스텦의 중국 변경사는 아예 이 사람이 당시 학술활동 따위 할 정신머리는 없었던 동양 국가들을 포함해 독보적이고 독자적으로 설립한 분야이기 때문에 특히 서양측의 시각으로 중국사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 쯤 읽어 보았을 교과서적 위치의 거물 학자이다. 게다가 라티모어 교수의 경우 시기적절하게도 청나라 멸망 이후 청 황실을 통한 동군연합적 성격에 의해 정치적, 민족국가적 의미로 '중국'에게 느슨하게 묶여 있던 내외몽골, 위구르 같은 많은 유라시아 내륙 중국과 연관된 반유목 집단들이 아직 훗날의 문화대혁명과 무분별한 산업화로 인해 전통 사회가 해체되버리기 전에 이를 직접 발로 뛰며 연구한 사람이라 다시 반복할 수도 없는 귀중한 연구 자료와 시각을 가진 핵심 인재였다. 이런 사람들을 제대로 된 심사도 없이 대충 눈에 드러난 연좌제적 성격의 전적과 의심, 여론 몰이만으로 덜컥 추방했다는 거다.[10] 풀브라이트 장학금에게 이름을 준 그 사람이다.[11] 풀브라이트는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완고한 보수주의자였지만 이와 별개로 조셉 매카시의 마녀사냥질이 적법한 절차를 따른 안보 정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설치는건 경멸하며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사실 제대로 된 안보관의 소유자라면 이게 당연한 모습이다'''.[12] 이게 어느정도로 심한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스탈린에 의해 러시아에 살던 조선인들이 중앙아시아에 끌려갔는데 이유는 단지 '''일본인과 비슷하니 일본인과 협조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들이 '''러시아와 손잡아야 한다면 손잡을지언정 일본과 손 잡을 리는 절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나마 러시아가 이주시킨 이들은 고급 인재가 없으니 망정이지 고급 인재를 중앙아시아에 처박았다면 이쪽도 이쪽대로 손해였을 것이다.[13] 사실 소련의 한인 강제 이주는 아예 경우가 다른 게 '일제와 협력 가능성'은 그냥 외부적 명분에 가까웠고 '''오히려 소련 당국이 그 일제 본인들과 국경 통제를 서로 원활하게 하고 충돌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 일부로 강제 이주 시킨 것이다. 모스크바가 무식해서 한인들을 강제 이주 시킨게 아니라 뻔히 다 알면서도 냉소적인 관점에서 대외 관계를 위해 집행한 민족적 핍박이었다면,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 공산화=중국의 세력확대론은 진짜 빼도박도 못한 무식의 소치가 맞다.[14] Vietnam: State, War, and Revolution (1945–1946), 2013년 작 중[15] 이 사람은 2006년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 치고 수니파시아파의 차이점도 모르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하여 주목을 끈 전적도 있다.[16] 베트남전테러와의 전쟁 뿐만 아니라 중남미 외교에서도 매카시즘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았다. 본래 제3세계였을 뿐인 국가들이 조금만 좌경화 한다 싶으면 바로 쿠데타를 조장, 독재정권을 만들어 냈고 이들이 자국민에게 심각한 인권 탄압을 벌이면서 반미, 반서방 감정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시도 반미감정의 뿌리중 하나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이 독재정권인 전두환 정부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한일협정으로 인해서 안좋기도 했지만 이쪽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17] 희한하게 게리 쿠퍼는 매카시즘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하이 눈에 출연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 자체가 엄청나게 은유적이고, 여러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에, 게리 쿠퍼가 제대로 알았을 지는 의문이지만, 각본가의 의도를 알았다면 아마도 출연을 거절했을 듯.[18] 이 단체는 무려 1975년까지 이어졌다.[19] 하원 비미(非美) 활동 조사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반미활동 조사를 위해 설치된 미 하원의 위원회이다.[20] 월트 디즈니,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같은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전부 공화당원이었다. 전부 30~4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는 점. 프랭크 시나트라도 공화당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나트라는 이때는 골수 민주당원이었다.[21] 이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말론 브란도가 있다.[22] 정규 앨범엔 안실려 있고, 당시 출간된 포크 음악 잡지 부록 레코드와 후에 발매된 공식 해적판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었다.[23] 가령 뉴딜 정책의 발안자인 해리 화이트, 그리고 로젠버그 부부 등[24] 미국의 대표적인 극우 보수 언론인이다.[25] 러스크 서한을 작성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