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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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 연출 역사상 최고의 거장이며 우리는 모두 이 분의 영화를 모방하느라 허덕였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볼 때면 그가 나를 다시 놀라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그러했다. 내가 큐브릭 감독으로부터 배운 것은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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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의 영화 감독. 영화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완벽주의적'''인 제작 노력으로 유명하며, 각기 다른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개척하였음에도 작품마다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영화 역사에서 명감독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의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후보로만 그치며 외면받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시각효과상을 수상했을 뿐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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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어린 여동생 바버라 크로너(Barbara Kroner / 1934년 5월 21일- 2003년 10월 9일)와 함께한 사진. 아버지 제이컵 큐브릭이 30년대에 찍은 영상들이다.
1928년 7월 26일 뉴욕의 자치구 맨해튼에서 의사 제이컵 레너드 큐브릭(Jacob Leonard Kubrick / 1902년 5월 21일-1985년 10월 19일)[5] 과 그의 아내 세이디 거트루드 큐브릭(Sadie Gertrude Kubrick / 1903년 10월 28일-1985년 4월 23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탠리의 부모는 공통적으로 그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 중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인물을 두었으며, 스탠리의 두 번째 아내 루스 소봇카(Ruth Sobotka / 1925년 9월 4일-1967년 6월 17일)[6] 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7] 유대인이었으나, 그의 부모가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것의 영향과 스스로를 무종교로 여기게 한 그의 발언 등[8] 을 고려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지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으나, 그의 후기 예술이 유대인 혈통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는 의견들 중에서 제프리 콕스(Geoffrey Cocks)가 서술한 ''문 앞의 늑대'' The Wolf at the Door는 스탠리 큐브릭을 일관되게 포스트홀로코스트(post-Holocaust) 예술가로 묘사한다.
큐브릭의 유년 시절부터 감독 생활 및 그 외 일상 모습들이 담긴 영상이다.
유대인 단체의 자금 기부 요청을 거부한 일이 있었으며[9] , 할리우드를 움켜쥔 유대인들 횡포(상업적으로 많은 인재를 억누른다는 뜻)가 심하다는 발언으로 인해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동료 유대인 영화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비난에 반론하여 큐브릭을 옹호했다.[10]
뉴욕 자치구 브롱크스에서 자랐으며, 10대 때 사진작가[11] 와 재즈 음악가[12] 를 꿈꾸었다. 1940년 거주 공간의 변화가 스탠리의 낮은 학업 성적을 개선하는 데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한 아버지 제이콥은 스탠리를 캘리포니아의 도시 패서디나에서 그의 삼촌 마틴 퍼벌러(Martin Perveler)와 살게 했다. 브롱스로 돌아온 이후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다닌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고등학교[13] 에서의 성적은 좋지 않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참전군인들의 대거 복귀가 더해져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image]"나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으며, 19살이 될 때까지 독서가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I never learned anything at all in school and didn't read a book for pleasure until I was 19 years old.)
-스탠리 큐브릭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첫 번째 부인 토바 메츠(Toba Metz)의 사진. 큐브릭과 1948년 5월 28일에 결혼했으며,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동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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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잡지 ''LOOK''에서 일할 당시의 큐브릭. 그의 사진들 중 900점 이상이 ''LOOK''에 실렸다. 당시 사진들 중 일부
16세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을 다룬 사진 세트를 제작했으며, 17세에 이에 포함된 슬픈 표정을 지은 노점상의 사진[14] 을 실은 것을 시작으로 플라잉 파드레 (1951), 항해자 The Seafarers(1953)까지 사진기자 기간에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52년 큐브릭과 마찬가지로 그리니치빌리지에 거주하던 제임스 에이지[15] 의 각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텔레비전 영화 링컨에서 제2제작진 카메라맨으로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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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포와 욕망(1953)의 제작진과 함께한 큐브릭.
뉴욕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체스 시합에 출전하여 획득한 상금에 아버지와 삼촌 마틴[16] 의 원조가 더해진 제작비로 1953년 자신 역시 관여한 하워드 새클러(Howard O. Sackler / 1929년 - 1982년)[17] 의 시나리오 '덫 The Trap'를 바탕으로 장편 영화이자 반전(反戰) 영화 공포와 욕망[18] 을 연출, 제작, 촬영, 편집했으나[19] 흥행에 실패했다. 영화를 작업한 인원은 총 14명이었으며, ''LOOK''에서 큐브릭의 조수로 일했던 밥 디렉(Bob Direk)가 제작 매니저를 맡았고, 아내 토바 메츠는 대사 감독과 제작 보조의 역할을 맡았으나, 당시에 겪은 마찰로 인해 결별했다. 큐브릭은 1952년에 만난 루스 소봇카와 교제했으며, 그녀와 1955년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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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스 키스(1955)에 카메오로 등장한 루스 소봇카.
'미노토어 프로덕션(Minotaur Productions)'이라고 이름 지은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여 장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지원을 획득한 후, 1953년 7월 시나리오 '스파이더 게임 Along Came a Spider'을 영화제작관리국(PCA)에 제출했으나, 건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때문에 일부 자극적인 요소들을 배제, 수정한 스토리라인을 구상했으며, 전작 <공포와 욕망>의 작업을 함께한 하워드 새클러가 큐브릭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시나리오 '키스 미, 킬 미 Kiss Me, Kill Me'를 작성했다. 제작 단계에서 영화의 제목은 수정되어 '요정과 미치광이 The Nymph and the Maniac'를 거쳤으나, 1955년 9월 28일, 킬러스 키스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으며, 큐브릭은 작품에서 이전과 유사한 연출, 제작, 촬영, 편집 등 다수의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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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제임스 B. 해리스(James B. Harris / 1928년-), 우측은 큐브릭.
이후 제임스 B. 해리스와 동업을 계획하여[20] 뉴욕 웨스트 57번가에 사무실을 차리고 '해리스-큐브릭 프로덕션 Harris-Kubrick Productions'를 설립한다. 해리스는 큐브릭에게 범죄자의 시점으로 경마장 강도 사건을 다룬 라이어널 화이트(Lionel White / 1905년-1985년)의 소설 <클린 브레이크>를 영화화할 것을 권했고, 큐브릭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해리스는 화이트의 대리인을 통해 <클린 브레이크>의 판권을 1만 달러에 구입했으며, 큐브릭은 시나리오 작가로 영입한 범죄 소설 작가 짐 톰슨과 함께 소설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시나리오의 제목은 폭력의 날 Day of Violence을 거쳐 공포의 침대 Bed of Fear로 명명되었다. 참고로 톰슨은 영화의 크레딧에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신의 이름이 큐브릭의 이름 다음으로 작게 나타난 것을 보고 분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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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릭의 수필이 포함된 시나리오의 한 페이지.
영화제작관리국은 제출된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 해리스에게 영화 속에서 자동화 무기가 사용될 수 없으며, 소지가 가능한 총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경고문을 보냈다. 이에 큐브릭은 새뮤얼 풀러의 영화 대나무집 The House of Bamboo(1955)에서 자동화 무기인 독일제 P38 권총의 사용이 허락된 것을 언급하며 불만을 표했다. 촬영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되었으며, 큐브릭은 연출을 맡았다. 비록 예산은 적었으나, 전문 기술자들과 노련한 스태프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영화는 1956년 5월 20일 킬링이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다. 이 작품에서 미술 감독을 맡은 루스 소봇카와의 별거가 1958년에 시작되었으며, 1961년에 이혼했다. 이후 6년 후에, 루스는 만 4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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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광의 길(1957) 촬영 당시 큐브릭.
10대에 아버지의 서재에서 접한 험프리 콥의 소설 영광의 길을 영화화할 것을 제임스 해리스에게 제안했으며, 승낙을 받았다. 소설의 각색을 위해 전작에서 작업을 함께한 짐 톰슨과 콜더 윌링햄[21] 을 영입해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MGM은 제출된 프로젝트를 거절했으나,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한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영화에 출연하는 데 동의[22] 하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23] 로부터의 지원 획득에 이바지했다. 영화 영광의 길은 큐브릭에 의해 연출되었으며, 1957년 12월 20일에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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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영광의 길의 장면. 선술집 주인[24] 은 프랑스 보병대에게 독일 여자를 소개한다. 좌측은 크리스티안 큐브릭(Christiane Susanne Kubrick / 1932년-)으로, 큐브릭과 결혼하기 전에 가졌던 성은 할런(Harla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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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함께한 사진.
큐브릭은 영광의 길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해 프랑스 보병대 앞에서 노래를 부른 배우 크리스티안과 1958년에 결혼했다. 크리스티안에게는 큐브릭과의 만남 이전 1953년에 출산한 딸 카타리나(Katharina Kubrick / 1953년 12월 25일-)가 있었고, 스탠리와의 관계에서 두 딸 애니아(Anya Kubrick / 1959년 4월 6일-2009년 7월 7일)[25] 와 비비언(Vivian Kubrick / 1960년 8월 5일-)을 낳았다. 큐브릭은 친자가 아닌 카타리나를 포함한 딸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지며, 크리스티안과의 관계는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크리스티안은 배우로 활동한 이후 미술가로 직업을 전향했으며, 큐브릭의 영화들에 미술 부분을 담당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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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큐브릭, 우측은 말론 브란도.
이후 영화 감독으로서의 그의 재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배우 말론 브란도가 큐브릭에게 찰스 네이더의 소설 헨드리 존스의 진짜 죽음 The Authentic Death of Hendry Jones의 영화화를 함께 작업할 것을 권했다. 두 사람은 이를 각색한 시나리오 작성을 6개월 동안 진행했으나, 불만을 가지게 된 큐브릭은 하차했다. 결국 프로젝트를 속행한 브랜도가 연기와 연출을 병행했으며, 영화는 애꾸눈 잭 One-eyed Jack이라는 이름으로 1961년에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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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파르타쿠스 Spartacus(1960) 촬영 당시 큐브릭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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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커크 더글러스, 우측은 큐브릭.
<스파르타쿠스>의 제작과 주연을 맡은 커크 더글러스의 압력으로 예정되어 있던 감독 앤서니 맨(Anthony Mann / 1906년 6월 30일-1967년 4월 29일)을 제치고 큐브릭이 <스파르타쿠스>에 기용되었다. 큐브릭은 연출 과정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고, 각본을 수정할 권한과 최종 편집권을 갖지 못했으며, 본인에게 이러한 압력을 가한 주체들 중 하나인 더글러스와 큰 갈등을 겪고 관계를 끊었다. 비록 큰 흥행을 거두었으나, 큐브릭은 1960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삭제되길 바랄 정도로 싫어했다. 큐브릭은 자유로운 환경을 추구하여 할리우드를 떠나 영국으로 이동했고, 이후 미국의 자본과 영국의 기술력이 혼합된 영화들을 연출했으며, 반드시 제작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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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큐브릭, 우측은 영화 로리타#s-2.1(1962)에서 롤리타를 연기한 수 라이언(Sue Lyon / 1946년 7월 10일- 2019년 12월 26일).
큐브릭과 제임스 해리스는 출간되기 전에 읽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영화화를 계획하여 판권을 구입했다. 그들은 나보코프의 대리인 어빙 스위프티 라자르(Irving Swifty Lazar)를 만나, 나보코프가 시나리오를 작성할 수 있는지를 논의했으나, 나보코프가 거절했다. 이에 큐브릭은 영광의 길의 시나리오를 함께 작성한 콜더 윌링햄에게 롤리타의 시나리오 작성을 요청했다. 윌링햄은 시나리오 초안을 집필했지만, 큐브릭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큐브릭과 해리스는 롤리타의 영화화에 대한 워너 브라더스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영국의 세븐 아차스와 계약을 했으며, 영국 배우와 스태프를 고용하는 조건으로 세금 혜택을 얻었다. 큐브릭은 나보코프에게 시나리오를 작성해 줄 것을 다시 요청했으며, 나보코프의 수락을 받았다. 나보코프는 1960년 여름에 400페이지 분량의 시나리오를 작성했는데, 일부 장면은 기존의 소설이 갖고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상당한 부분이 검열에서 지적되었기에, 큐브릭이 시나리오의 많은 요소를 삭제하고 변경했다. 큐브릭에 의해 연출된 영화 로리타#s-2.1는 1962년에 개봉되었으며, MGM에 의해 배급된 최종 필름본은 미국영화협회(MPAA: 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로부터 성인 등급인 'A'를 받았고, 영국검열위원회로부터는 'X' 등급을 받았다. 타임과 카예 뒤 시네마 등 여러 잡지의 비평가들은 영화를 소설과 비교하며, 교황청과 종교 단체들은 소아성애를 비롯한 선정적인 요소를 지적[26] 하며 혹평했다. 영국 배우들을 기용하였기에, 원작에서 드러난 미국 사회를 겨냥한 비판에서 느낄 수 없었던 노쇠해가는 영국 사회에 대한 조사(弔辭)를 일으킨다는 평가가 나타났다
1964년에 연출한 블랙 코미디로서 로리타#s-2.1와 이어지며, 미래 시리즈 3부작의 시발점이자 큐브릭의 최전성기의 시작인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27] 는 냉전을 다루었으며, 주류에서 절대적인 위상의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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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촬영 당시 큐브릭의 모습.
1968년,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인 화면의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4년 만에 완성했다. 컴퓨터 그래픽스를 활용할 수 없었던 시기에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환상적인 시각효과를 연출했다. NASA에서 지원한 탐사자료가 기반이 되었기에 인류가 달에 가기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우주 공간과 관련된 장면들은 대단한 사실성 역시 지닌다. 영화의 여러 요소가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매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황청 역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한 것을 언급하며 호평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스탠리 큐브릭이 아카데미로부터 유일하게 받은 상이다.[2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다룬 영화 나폴레옹 ''Napoleon''을 만들고자 했으나,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영화 워털루 Waterloo(1970)의 흥행 실패가 상당한 영향을 끼쳐 제작이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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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시계태엽 오렌지 촬영 당시에 사진작가 드미트리(Dmitri Kasterine / 1932년-)가 찍은 큐브릭의 모습
1971년, 사회비판과 염세주의가 극에 달한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연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를 본 영국 청소년들의 모방범죄가 다수 발생했다. 높은 수위의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정식 개봉을 하지 못했지만, DVD와 블루레이는 출시되었다.
1975년, 사극 배리 린든을 연출했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29] 상업성을 고려하게 된 큐브릭은, 1981년,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채택하여 영화 샤이닝을 연출해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샤이닝은 원작자 킹이 싫어했고 당시 평론가들 반응도 좋지만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서는 영화 매체 등에서 역대 공포영화 순위를 매길 때 최상위권에 빠지지 않는 작품이 됐다.
1987년, 영화 풀 메탈 재킷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플래툰의 개봉 시기와 큰 간격을 갖지 않아 비교에 의한 악영향을 받았다.[30]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영화 A.I.를 기획했다. 비교적 낙관적인 톤이었던 이 영화가 본인의 염세적인 작풍과 맞지 않다고 여겨 스필버그에게 감독직을 양도하고자 했으나, 스필버그는 반대했고 1995년에 큐브릭이 A.I.의 연출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2001년, 영화는 1999년에 사망한 큐브릭을 대신한 스필버그의 연출로 개봉되었으며, 큐브릭의 특징과 의도 역시 짙게 배어 있다.
풀 메탈 재킷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1999년, 당시 부부였던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연출했다. 스탠리 큐브릭은 최종 편집 작업 후, 1999년 3월 7일, 영국 세인트올번스의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했다.
3. 성향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영상을 만들어낸 감독으로 여겨진다. 배리 린든에서는 ''나폴레옹'' 프로젝트에서 계획한 기계적인 조명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사실적인 자연광 촬영에 대한 바람을 유지하여 촛불을 조명으로 활용한 기법[31] 을 도입했으며, 샤이닝에서는 스테디캠[32] 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완벽주의 때문에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다. A.I.를 기획할 때에는 촬영 기간 내에서 어린 배우의 신체적 변화가 나타날 것을 우려해[33] 로봇을 제작하거나 컴퓨터 그래픽스로 구현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또한 ''스파르타쿠스'' 촬영 당시 3500명의 엑스트라들에게 한 명씩 숫자를 지정해 자세와 동작을 지시하기도 했다. 본인이 설정한 방향에 대한 고집 역시 상당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잦았다. 커크 더글러스가 이에 해당되어 ''스파르타쿠스''를 작업한 이후 '''"스탠리 큐브릭은 재능있는 개새끼(Stanley Kubrick is a talented shit)"'''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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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촬영 당시 잭 니콜슨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그를 흐릿하게, 자신과 딸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장난도 했다.
샤이닝을 함께한 잭 니콜슨은 촬영 기간 동안 대체로 그와 좋은 관계를 가졌으나[34] , 마찬가지로 불만을 갖고 "큐브릭은 재촬영을 해야 하는 이유도 설명하지 못하는 놈이다."라고 했으며, 큐브릭은 이에 대해 "많은 재촬영을 감행해야 니콜슨의 제대로 된 연기를 볼 수 있었다."는 말을 했다.[35] 아래는 샤이닝 스페셜 에디션 DVD에서 들을 수 있는 이와 관련된 언급이다.
큐브릭의 ‘무한 반복 테이크(Take)’ 신공은 (샤이닝 촬영 당시) 69세였던 스캣맨 크로더스에게는 특히 가공할 만한 고문(?)이었다. 예컨대, 딕 핼러런과 대니가 부엌에서 샤이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자. 큐브릭은 영화에서 약 7분가량 계속되는 이 장면의 촬영을 무려 148 테이크에 걸쳐 반복했다. 물론, 언제나처럼 큐브릭은 ‘왜 같은 연기를 그렇게 많이 반복해야 하는지’, ‘뭐가 잘못됐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핼러런 역을 맡은 크로더스는 (다행히) 별다른 불평 없이 큐브릭의 지시에 순순히 응했지만, 재촬영이 100회를 넘기자 서서히 인내심이 ‘고갈’되어 갔다. 큐브릭은 148 테이크째를 마치고 — 스스로도 ‘너무 가혹하다’라고 느꼈는지 — 촬영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했는데, 휴식 도중 크로더스는 개릿 브라운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던졌다. '''“와! 큐브릭이 사람 잡네요!”'''[36]
셜리 듀발은 큐브릭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샤이닝을 촬영할 당시의 관계는 좋지 않았으며, 큐브릭에게 욕설이 섞인 지적을 듣기도 했다.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 당시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큐브릭 때문에 상당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로 인해 부부였던 두 사람의 불화의 진행에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까지 제기되었다.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인 존 백스터(그는 샤이닝 SE DVD에서 개릿 브라운과 함께 음성해설을 맡았다)는 큐브릭이 배우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같이 설명했다. “최초에 배우가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면 큐브릭은 ‘좋았어요. 한 번 더 갑시다’라고 말하고는, 같은 연기를 몇 차례나 반복시킨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배우들은 ‘오버’하는 연기를 하게 되고, 12~14 테이크 정도에 이르면 점점 지치기 시작하여 힘을 아끼려고 한다. 큐브릭은 그래도 연기를 계속 반복하라고 지시한다. 마침내 배우가 더이상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가 없을 지경이 돼도 큐브릭은 재촬영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수십 테이크째에 이르면, ‘맛이 간’ 배우들은 평소 하지 않던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괴성도 질러가며 말이다. 샤이닝에 삽입된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연기는 모두 ‘그 단계’의 테이크라고 보면 된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 들라지(Alex Delarge)를 연기한 맬컴 맥다월의 경우, 그가 표출한 큐브릭에 대한 불만은 영화 촬영 당시의 불화가 아닌, 역할이 끝나자 큐브릭이 자신과 단절했다는 것이다. 맥다윌은 촬영 기간에 그와 함께한 탁구와 체스를 호의적인 유대의 증거로 여겼으나, 그보다 큐브릭과의 오랜 관계로 성향을 파악한 이들은 큐브릭이 자신의 배우들을 상대로 행한 스포츠 경기는 큐브릭이 승리에 큰 자신을 가졌던 것으로, 게임에 패배한 배우가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한 전략으로 여긴다.
''스탠리 큐브릭 장르의 재발명''에 수록된 인터뷰에 보면, 찌라시들이 소문낸 대표적인 소문이 연기자와의 불화라고 한다. 실제로는 연기를 지시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대부분 영감을 주는 선에 머무른다. 여러 번 테이크를 내면, 오히려 배우들이 안심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한두 번만 하면, 이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는데, 여러 번 하면 이전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꺼림찍하던 부분들을 고치며 최선을 다하게 되기 때문에 배우들도 좋아한다. 실제로 잭 니콜슨은 감독이 수백 번 테이크를 갔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큐브릭의 차기작 ''나폴레옹''에 큐브릭이 자기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비디오 같은 매체도 표지까지 자신이 보고 마음에 들 때까지 내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해외 출시판도 예외는 아닌지라, 한국어나 일본어를 몰랐지만 완벽주의답게 해당언어 유학생을 고용하여 철저하게 점검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한국판 비디오와 일본판 비디오에 걸쳐, 저 멀리 터키어판 비디오까지 정식으로 출시하기 전에 표지를 받아서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내라고 요구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한국어판 비디오로 낸 우일비디오 측만 해도, 큐브릭 감독이 마음에 안 든다고 4번이나 퇴짜를 놓아, 우일비디오는 계속 표지를 새로 만들어서 큐브릭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다. 터키 같은 경우는 12번씩이나 거부하여, 그 비디오 업체는 판권비보다 비디오 표지를 또 만들고 검토 받고 하는 돈이 더 많이 들겠다면서, 그 이후 다시는 큐브릭 영화를 계약하지 않았다는 후문까지 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기행과 비밀, 완벽주의 때문에 악명(?)이 과장된 측면은 꽤 있다. 위에서도 잠깐 나온 이야기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업계의 유명한 감독들과의 친분도 꾸준히 유지했고, 아서 C.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때 함께 작업한 이후[37] 큐브릭이 죽기 전까지 쭉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큐브릭이 그렇게 융통성 없이 고집만 강한, 이상한 사람이었다면, 늘 함께 일하는 촬영 감독과 조력자들[38] 이 있었을 리 없고, 시계태엽 오렌지 이래로 늘 워너브라더스가 그의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리들리 스콧[39] 도 블레이드 러너의 극장판 엔딩을 위해 초면의 큐브릭에게 전화를 걸어 샤이닝의 미사용된 삼림 촬영분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을 맡았는데, 스콧은 큐브릭이 흔쾌히 자신에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또한 공들여 만든 세트나 소품 등을 일단 촬영이 끝나면 전부 부숴 버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중에 싸구려 영화에 재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덕분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촬영에 사용된 디스커버리호를 비롯한 각종 우주선들은 원형이 남아있지 않아,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라모델 하나 만들 수가 없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성악설에 기인해서 냉정하고 냉소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행위와 저변에 깔린 동기를 탐욕과 색욕 등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충동에 기인하며 현대 문명의 제도는 그 충돌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발전했다고 보지만, 그 제도는 본능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어필한다.[샤이닝스포일러] 순수하게 악한 행동이 주는 쾌락을 위해서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불한당을 세뇌시켜 억지로 과학과 의학으로 교정시켰지만 결국은 야만적인 본능에 굴복하여 다시 원상복귀되는 과정을 그린 시계태엽 오렌지, 결혼을 하였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에 대한 관능적인 매력이 퇴색되어 배우자 이외의 타인의 육체를 탐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부부들의 이야기를 그린 아이즈 와이드 셧 등.
특히 섹스를 만악의 근원으로 여길 만큼 혐오한다. 블랙코미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핵전쟁을 일으키는 리퍼 장군의 동기가 섹스를 하면 했는데 기운이 빠지는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을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여기며 핵전쟁을 감행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샤이닝에서 함께 작업한 잭 니콜슨과는 정반대.[40]
4. 미국내 흥행실적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들이 워낙 예술영화라는 인식이 있어, 큐브릭의 영화는 흥행을 못 했다는 오해가 많은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영리하게 고려해 스튜디오와 유연하게 타협하면서도 구상의 많은 요소를 실현한 흥행사로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함께 알프레드 히치콕에 비견될 자격을 가진다. 상대적인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던 배리 린든의 수익은 본전에 닿았으며, 풀 메탈 재킷은 비디오 판매 등의 2차 시장에서 선전하여 극장에서 거둔 부진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영화의 흥행이 생전의 큐브릭에게 향했던 비판들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큐브릭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장 뤽 고다르를 포함한 카예 뒤 시네마의 평론가들과 뉴욕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기류였으며, 영화 잡지 ''무비 Movie''는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여기지 않았다. 큐브릭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날카로운 반응을 했다. 그러나, 대중문화에 남긴 큐브릭의 거대한 족적을 부정할 근거는 없다.
5. 필모그래피
따로 원작이 있는 것은 ★표시를 첨부하되, 원작의 제목이 다르면 제목을 따로 표기한다.
- 시합의 날(Day of the Fight, 1951) - 다큐멘터리
- 플라잉 파드레(Flying Padre, 1951) - 다큐멘터리
- 공포와 욕망(1953)
- 선원들(The Seafares, 1953) - 다큐멘터리
- 킬러스 키스(1955)
- 킬링(1956)
- 영광의 길(1957) ★
- 스팔타커스(1960) ★
- 로리타(1962) ★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원작 적색 경보)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
- 시계태엽 오렌지(1971) ★
- 배리 린든(1975) ★
- 샤이닝(1980) ★
- 풀 메탈 재킷(1987) ★(원작 쇼트 타이머스)
- 아이즈 와이드 셧(1999) ★(원작 꿈의 노벨레)
5.1. 나폴레옹 관련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속작으로 예정됐던 나폴레옹은 모든 캐스팅, 대본 작업, 촬영지 선정이 마무리 되있었다. 나폴레옹 역엔 오스카 웨너, 조세핀으로 오드리 햅번이 예정되었으나 비슷한 시기 나폴레옹을 소재로한 소련 영화 '워털루'의 실패로 제작사에서 난색을 보여 프로젝트는 중단된다. 당시 스탠리 큐브릭이 나폴레옹을 준비하기 위해 읽었던 관련 서적만 '''만 권'''이 넘어갔고[42] 당시 조사한 자료들은 훗날 비슷한 시대의 영화 배리 린든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1999년 사망할 때까지 나폴레옹 작업은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미 대본, 의상 디자인 스케치, 촬영지 선정이 모두 되어있었기에 현대에 이 프로젝트를 다시 재현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2013년 초, 생전 절친한 친구였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나폴레옹을 TV 시리즈로 제작하겠다는 발표를 하고 연말에는 스필버그 본인은 제작자로 빠지고 연출은 배즈 루어먼이 담당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방송국은 HBO.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워너브라더스에서 루퍼트 샌더스 감독으로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발표가 있자 프로젝트는 다시 중단되었다. 대본이 나온 지 거의 50년이 되도록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셈
2009년엔 나폴레옹에 대한 대본, 참고자료, 선정됐던 촬영지 및 의상 사진, 촬영 예정이었던 배우들의 스케쥴 표 등을 정리한 책 약 1000페이지 분량의 책이 발간되었다. 제목은 'Stanley Kubrick's Napoleon: The Greatest Movie Never Made (스탠리 큐브릭의 나폴레옹: 만들어지지 않은 최고의 영화)' 국내 정발은 되지 않았고 보려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구매해야 된다.
6. 기행
큐브릭에게는 집착하는 대상이 유난히 많았다. 그중 하나가 활판술이다. 그는 서체에 관한 책을 엄청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영화 포스터에 푸투라체를 사용할 것을 고집했고, 스태프들과 밤새도록 다양한 서체의 장점에 대해 논쟁을 벌이곤 했다. 큐브릭이 좋아하고 집착하는 또 하나는 문구였다. 종이, 패드, 상자 등 문구에 관한 모든 것에 집착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반드시 6인치:4인치 비율의 종이에만 메모를 하도록 명령했다. "스탠리는 6인치:4인치 크기가 메모하기엔 최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직원의 말이다. 한번은 그가 좋아하는 특정상표의 잉크가 절판이 됐다고 하자, 시중에 남아있는 잉크 백여 통을 모두 사들였다. 그는 또한 상자에 열광했다. 상자뚜껑이 열기 불편한 것에 짜증난 큐브릭은, 상자 회사에 연락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자 4백 개를 주문, 제작한 적도 있었다.
큐브릭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겁이 많았는데, 특히 세균을 무서워해서 감기든 사람은 그의 촬영장에 접근 금지였다. 큐브릭은 아팠을 때 치료받을 의사를 선택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모르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영국에 있을 때 브롱크스의 주치의 치과의사를 영국까지 부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치과의사가 영국 의료면허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영토로 간주되어 미국 의료면허 효력이 발동되는 미국 대사관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동물 애호가였다. 풀 메탈 재킷 촬영 때 촬영장에서 사고로 토끼 가족이 죽은 사고가 일어났었는데, 이것에 몹시 화가 난 큐브릭은 그날 일정을 모두 취소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제작 동안 NASA의 화성탐사에 점점 피해망상증을 보였다. '''바이킹의 탐사 결과 화성에 생명체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그의 영화보다 앞서 주목받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런던 로이드 보험사에게 예상되는 손실에 대비한 보험을 들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당황스러운 요구에 대한 보험사의 대답은 NO였다.
큐브릭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모두 테이프 리코더에 저장했다고 한다.
큐브릭은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10년을 조용히 보낸 적도 있다. 간혹 기자나 영화 학도들이 큐브릭에게 질문 한 번 해보려고 그의 집 현관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지금 집에 없어요" 라고 큐브릭이 스스로 말하며, 방문객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통했다. 다만 이것 때문에 1990년대 초에 앨런 콘웨이(Alan Conway,1934~1998)라는 웬 사기꾼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사칭하고 다닌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큐브릭 비서인 앤서니 프레윈이 조사에 나서서 잡혔다.
7. 취미
큐브릭은 어릴 때부터 체스에 열광했고, 실제로 잘 두었다. 세 번째 영화 ''공포과 욕망''의 제작비는 거의 전적으로 큐브릭이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서 체스 경기를 통해 얻은 상금으로 충당했다.
큐브릭은 체스뿐 아니라 탁구도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의 많은 영화에 탁구 장면을 삽입했다. 큐브릭은 영국의 자신의 집 지하에 세계 최고 수준의 탁구대를 설치했다. 방문객들은 종종 그와 탁구 경기를 해야 했는데, 큐브릭은 배우들과 하는 것을 좋아했다. 탁구에서 배우들에게 이기면, 촬영장에서 그들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알란 아킨과 제임스 칸 주연의 코미디 액션영화 ''형사 콤비 후리비와 빈''(Freebie And The Bean)을 좋아했다. 큐브릭은 이 작품을 터무니없게도 1974년 최고작[43] 으로 손꼽았다. 그가 좋아하던 TV프로그램은 로잔느 아줌마, 심슨 가족, 사인펠드였다. 이 작품들이 미국인의 삶을 묘사한 훌륭한 코미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심슨 가족에서 그의 영화들이 많이 오마주되었는데,[44] 그에 대해 제작진들에게 감사를 표한바 있다. 또한 딱따구리 만화도 매우 좋아해서 그의 영화에 딱따구리 만화를 삽입하고 싶어했지만, 딱따구리 만화가이자 저작권자인 월터 랜츠가 허락해주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는 스티브 마틴이 흑인 소작인에게 입양된 멍청한 백인 역을 연기한 코미디 ''The Jerk''였다. 큐브릭은 마틴의 연기가 너무 웃겨서, 그를 아이즈 와이드 셧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내용을 섹시 코미디로 바꾸려고 했다. (큐브릭이 마틴을 만나 정말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그런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8. 기타
말년에는 은둔자에 가까워져 외출을 극도로 삼갔다. 이에 대해 당시의 언론은 묘사를 위해 재너두[45]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칼럼니스트 김정대는 하워드 휴스가 연상된다고 했다. 이러한 일례로, 마지막 작품이 된 아이즈 와이드 셧의 배경이 되는 미국 뉴욕의 번화가는, 뉴욕에서 찍어 온 사진을 참고하여 영화 세트장을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로는 영국의 영화 세트장에서 찍었다. 즉, 큐브릭은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을 위해 절대로 미국에 가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성향은 이미 시계태엽 오렌지를 찍을 때부터 드러났다.
큐브릭이 감독할 뻔했으나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거나 기타 사정들 때문에 제작이 좌초된 영화가 몇 있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후에 ''나폴레옹''을 영화화할 예정이었지만, 비슷한 영화인 워털루가 대차게 말아먹은 탓에, 투자자들이 투자를 포기해서 ''나폴레옹'' 제작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또 1990년대에는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을 소재로 한 ''아리안 페이퍼즈''라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쉰들러 리스트가 나와 버리는 바람에 결국 제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기에는 큐브릭의 아픈 기억이 크게 작용했는데, 베트남전을 다룬 풀 메탈 재킷을 만들었을 적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플래툰이 동시에 나와 버려서 두 영화가 서로 비교당하고, 흥행(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과 아카데미 수상을 다 날려 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그해 아카데미는 풀 메탈 재킷이 수상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1969년엔 비틀즈 멤버들을 주연으로 한 반지의 제왕의 영화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큐브릭은 그 제안을 받기 전까진 반지의 제왕이란 책 자체를 잘 몰랐다고 한다[46] . 그러나 원작자인 톨킨이 자기 작품의 영화화에 반대한데다가, 큐브릭이 그 책을 읽어보고 작품성은 인정했지만 당시의 기술로선 영화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포기해서 결국 큐브릭의 반지의 제왕은 실현되지 못했다. 샤이닝을 찍을 때 즈음의 큐브릭 모습이 후에 반지의 제왕을 영화화한 피터 잭슨의 전성기때와 매우 흡사하다. 잭슨이 반지의 제왕 찍을 때의 모습과 샤이닝을 찍을 때의 큐브릭을 비교해보면 움찔 놀랄 정도.
1940년대 말에 비행기 조종 면허를 취득했으나, 이후 비행기 조종에서 겪은 사고에 더해 비행기 사고로 인해 사망한 친분이 있던 카메라맨의 타 버린 카메라를 목격함으로써 비행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큐브릭은 영국에서 영화를 찍게 됐다. 배리 린든이 영국 바로 옆의 아일랜드에서 로케이션을 한 외에는 대부분 영국에서 촬영했는데, 심지어 풀 메탈 재킷은 런던 부근의 폐공장에다가 수입한 야자수를 심어서 베트남같이 보이게 했을 정도. 이처럼 촬영 과정이 험난했던 영화로 지옥의 묵시록이 있다.
영상의 특수효과에 대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자문을 구하자, 런던으로 불러서 런던 교외의 집에서 캐머런과 만난 일도 있었다. 예외적으로 샤이닝을 찍기 위해서 미국에서 영화를 촬영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영국에 정말 미국 호텔 같은 호텔을 짓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앞서 말한 대로 같은 유대인 출신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도 친밀한 사이였고, 두 사람이 함께 A.I.의 기획과 각본에 대해 의논했지만, 큐브릭은 비행 공포증이 있었고, 스필버그는 할리우드에서 바빴던 탓에, 결국 두 사람은 국제전화로 영화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스필버그는 어마어마한 국제전화료를 물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대표작은 죄다 영국에서 찍었지만, 반(反) 할리우드파 감독들의 소굴인 뉴욕파 감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실제 뉴욕파의 거장인 이탈리아계의 마틴 스코세이지나 우디 앨런 등 뉴욕파와 교류가 깊었다. 또한 영국 출신인 리들리 스콧이나 테리 길리엄과도 상당히 친했다고.
스탠리 큐브릭에 관한 양질의 정보를 다루고 있는 것들 중 ''스탠리 큐브릭 - 영화 속의 인생'' (Stanley Kubrick: A Life In Pictures)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큐브릭 감독의 영화를 제작해오던 얀 할란이 2001년에 감독한 다큐멘터리인데, 2시간 20분짜리 다큐로 큐브릭 팬이라면 정말 재미지게 볼 수 있다. 내레이터는 톰 크루즈가 맡았다. 다큐를 보면 모두 큐브릭을 존경하고,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그런다. 다시는 그의 작품을 볼 수 없고, 다시는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없다는 것도 안타깝게 여기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즐거웠다고도 하고. 물론 힘들긴 정말 오질 나게 힘들었다고도 하지만(…).
샤이닝부터는 4:3 화면비를 고집했는데, 이미 1.85:1, 2.35:1이 극장가를 주름 잡은 지 한참 지난 이 시기에 4:3으로의 회귀는 확실히 특이하다. 샤이닝 이전에 4:3으로 촬영한 마지막 작품은 흑백영화 영광의 길이었고, 이후로 쭉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를 써왔다. 이후 출시된 DVD들은 위아래를 잘라내 억지 1.85:1로 출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호기심이 무척이나 많아, 평상시나 영화 촬영 때 주변 지인들에게 별의별 질문들을 답변자가 답을 할 때까지 물어봤다고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파라다이스에 실려 있는 작품들 중 '영화의 거장'이라는 작품에서, 이 사람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패러디 인물인 '데이비드 큐브릭'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는 신비주의 컨셉 캐릭터이며, 일단 작품상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자손으로 나온다.
2015년 11월 29일부터 2016년 3월 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스탠리 큐브릭전이 열렸다. 해당 전시회는 유럽에서 시작해 전세계를 돌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처음이었다. 전시회 연계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선 큐브릭의 모든 영화를 상영하는 특별전이 열렸는데 주말에는 매진될 만큼 호황이었다. 구하기 힘든 초기 작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스탠리 큐브릭의 자손이 GV를 하기도 했다. 배리 린든 같은 경우에는 4K의 초고화질로 상영되었다. 영상원의 특별전이 종료되고는 서울과 부산의 CGV 아트하우스에서 일부 대표작들로 구성된 특별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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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중반 경에 스탠리 큐브릭이 쓴 것처럼 보이는 편지가 웹상에서 화제가 됐었다. MGM에 보내는 편지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이내 페이크임이 밝혀졌다.친애하는 제임스에게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너와 네 스튜디오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시퀄 제작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내 변호사는 판권이 네게 있으므로 제작을 막기 위해 내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알아 두길 바란다. 2001에 나왔던 tapir(돼지의 일종)의 뼈 막대, moonwatcher(영화에 등장하는 유인원)이 던진 거 말야, 그거 내가 가지고 있거든? 속편 같은 거 만들기만 하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주적 초지성쯤은 있어야 겨우 다시 빼낼 수 있을 정도로 이 대퇴골을 네 엉덩이 속으로 존나 쳐 올려 주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나랑 난장 깔 생각하지 마라.
불비(不備), 스탠리로부터
8.1. 달착륙 조작 음모론
음모론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내용이, '아폴로 달 착륙 화면은 사실 큐브릭이 CIA와 계약하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촬영 중간중간에 섞어서 몰래 찍은 가짜 화면이다.'라는 것이다. 큐브릭이
말년에 영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도 암살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이를 반박하는 측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이 착륙 화면을 찍은 것은 맞다. 다만 그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달에 직접 가서''' 촬영한 것이다"라며 돌려 까기도 한다.
큐브릭이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영상을 조작한 것을 인정했다는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으나, 이는 '''날조영상'''이라는 설이 있다.링크
이 부분은 2017년 11월 5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