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A. 더글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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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 Arnold Douglas
1813. 04. 13. ~ 1861. 06. 03.
미국의 정치인. 일리노이 주 출신이다.
1. 개요
2. 에이브러햄 링컨과의 관계
3. 기타


1. 개요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남북전쟁 당시에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의용군을 30만 명이나 모으는 등 여러모로 솔선수범하는 정치인이었다.
특히 그의 중후하고 우월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명연설은 더글러스를 당대의 연설의 달인으로 만들어줬다. 외모도 비록 키는 좀 작았지만 미남에 단단한 몸을 갖고 있어서 단순히 외모만 보고 평가한다면 누가 봐도 호감을 갖는 외모를 지녔다.

2. 에이브러햄 링컨과의 관계


이 사람이 미국 이외의 문화권에서 유명한 이유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라이벌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웅변가이자 정치가로 유명하지만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그냥 링컨의 라이벌로만 기억될 뿐이다.
더글러스는 링컨과는 달리 단신이었다. 대신 키만 컸을 뿐 호리호리하고 멋대가리없는 외모의 링컨과는 달리 더글러스는 준수한 얼굴에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 또한 더글러스는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달변가로도 소문이 났다. 이른바 "작은 거인"이다.
공화당의 링컨과는 매우 거세게 맞붙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7회에 걸쳐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개된 링컨-더글러스 토론으로 특히 유명하다. 노예제도를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각 지방 정부에 일임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더글러스의 ‘주민투표론’에 대하여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반론을 폈다.
더글러스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링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링컨은 정치인으로서 뭘 하려 해도 항상 더글러스에게 막혀 좌절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메리 토드는 더글러스와 교제 중이었는데, 후에 링컨을 선택해서 결혼했다.
1858년에는 링컨을 상대로 논쟁을 벌였다가 역관광을 당하기까지 했다. 더글러스가 링컨에게 "저 녀석은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라고 링컨을 디스하자 링컨은 "그 당시 우리 가게 최고의 고객은 더글러스였다."라고 응수했다.
링컨에 대해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난했다가, "나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면 내가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냐?"라는 링컨의 얼굴개그에 데꿀멍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는 계속 링컨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더글러스였고 링컨은 더글러스를 상대로 매번 쓰라린 실패만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정작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에게 패했다. 사실 이 선거 이전부터 민주당 내에선 노예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더글러스를 민주당 내 남부 계열 인사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국 존 C. 브레킨리지 부통령을 비롯한 남부 계열의 민주당 과격파들은 더글라스가 선출된 민주당 전당대회에 불복해 1860년 6월 28일 입헌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반대로 민주당 내 북부 출신들은 더글러스를 지지했다고 한다. 남북전쟁은커녕 대통령 선거 시작도 하기 전부터 당 자체가 남북으로 분열되어있던 상태였던 셈이다. 결국 스티븐 더글러스는 득표율에서 29.5%로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남부주 지지표 이탈로 선거인단에서 단 12명을 얻는 참패를 당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링컨에게 패배하였다.
대선 낙선 이후에 더글러스는 전쟁 직전에는 남북 화해에 힘을 썼고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남부가 아닌 링컨 대통령의 연방통일제를 지지하며 북군의 편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또한 정적이었던 링컨에게도 매우 협조적인 아군이 되어주었다. 링컨 대통령이 7만 5천명의 북군을 모집해줄 것을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고, 오히려 대통령에게 7만 5천이 아닌 20만 의용군을 모집해야할 것이라며[1] 조언을 건넸다고 한다.
이후에는 전국을 돌며 미합중국을 지키기 위해 링컨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칠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미국의 위기 상황에서 라이벌과의 악연은 접어두고 초당적으로 링컨을 위해 나섰다. 더글러스의 전폭적인 협조를 통해 북군은 무려 30만 명의 의용군을 모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지지자들을 모으던 도중 시카고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링컨의 정적으로 주로 언급되는 덕에 링컨과 달리 노예제 찬성론자였다는 이미지가 많이 박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위에 잠시 언급했듯이 더글러스는 노예제에 대해선 공식적으론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말고~"하는 식의 온건파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1860년 대선에서 남부로부터 비토를 받았다. 게다가 더글러스는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반대했다는 언급이 1970년대 이후로 기밀 해제된 여러 편지문서들을 통해 언급이 되기 시작했다. 링컨 직전의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 같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단지 1820년대부터 민주당의 당권파는 남부였기 때문에 눈치를 봤을 뿐이다. 더글러스는 북부 출신이었는데 북부는 휘그당 - 공화당으로 이어지는(뉴욕도 당시에는 휘그-공화당) 노예제 반대파가 잡고 있었다. 결국 민주당은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가 주도를 하게 됐다. 더글러스도 이런 당내 분위기 때문에 확실한 반대파가 아닌 온건파로 자신의 정치적 방향을 수정했다.

3. 기타


마치 조조 항목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타인이 원소(삼국지)이듯 이 항목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타인의 이름이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물론 링컨 항목에도 가장 많이 언급된 인명이 더글러스이고.
시카고 대학의 설립자이지만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한 반인종차별주의가 퍼지면서 기념물을 제가하겠다고 한다.#
[1] 더글러스 자신 또한 남북전쟁의 양상(총력전)을 예측했다는 반증으로 만약 죽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아서 조력했다면 북군의 조기승리에 크게 공헌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