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스 저격사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도움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나라다. 그러므로 조선과 일본간의 조약 체결은 정당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 조선은 일본의 도움을 받는 혜택을 얻었다.

- 더럼 W.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

1. 개요
2. 사건의 진행
3. 사건 이후
4. 관련 문서


1. 개요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가 미국인 외교관 더럼 W.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있던 더럼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적극적 친일파였다. 미국 워싱턴 주재 일본 외무성 고문에 부탁해 고용되었으며 1904년 12월 27일 대한제국 외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는 일본의 압력으로 차지한 자리였으며 자연스럽게 친일파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기자 회견에서 을사조약을 미화하고 찬양했다. 조선인들은 그의 태도에 분개해 스티븐스를 습격했지만, 그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1908년 3월 23일에 그는 워싱턴 D.C.로 가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미화하려 했고, 그 때 그는 조선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2. 사건의 진행


[image]
저격당한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빌딩
1908년 3월에 더럼 스티븐스는 이토 히로부미의 허락을 받고 휴가차 미국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그는 배 위에서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이며 무능한 조선이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며 일본의 조선 지배를 긍정적인 일이라 주장했다. 3월 21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스티븐스는 미국의 각 신문사에 "조선인들은 일본이 보호해주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보냈고 이어 기자 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 기자회견에서도 "을사조약은 미개한 조선인을 위해 이루어진 조치"라며 "조선인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라는 막말을 했다. 이때 기자 회견을 지켜보던 한국 교민 대표 4인방이 분노해 그를 구타하기도 했다.
[image]
[image]
장인환 의사
전명운 의사
한국 교민 대표 4인방이 스티븐스의 막말을 다른 한국 교민들에게 전달하자 이에 격분한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가 암살을 계획했다. 전명운 의사는 재미 교포로 철도 관련 일에 종사했던 외국인 노동자였으며, 재미 교포 장인환 의사 역시 철도, 어부 일에 종사하던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들은 스티븐스의 발언에 격분하여 암살을 계획했다. 이 두 의사는 각자의 계획을 따로 진행하다 우연히 같은 목표를 노렸으며 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다.
[image]
1908년 3월 23일, 9시 30분에 워싱턴 D.C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 빌딩에 도착한[1]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먼저 도착해있던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하려 하였으나, 권총이 불발되어 실패했고, 이에 전명운 의사는 권총의 그립으로 스티븐스를 가격하는 등 몸싸움을 벌였지만 전명운 의사가 체격의 차이로 밀렸다.
이 때 때마침 역에 도착한 장인환 의사가 3발의 총알을 스티븐스에게 쏘았고, 이 과정에서 전명운 의사도 총알이 빗나감으로 인한 팔 부상을 입었다. 이중 2발이 스티븐스의 몸을 관통하여 심장과 폐에 기흉을 냈다. 두 의사는 사건 직후 미국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스티븐스는 이틀 뒤에 샌프란시스코 세인트프랜시스 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하였다.
사건 당시 주변에 있던 행인들은 전후사정을 모르다 보니 웬 신사가 동양인들에게 테러를 당한 것으로만 보고 '저 동양인들을 린치해 버려라'라고 아우성쳤다고 한다.

3. 사건 이후


법원으로 이송된 전 의사와 장 의사는 재판을 받았는데, 전명운 의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구형받았다.[2]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미국 변호사 네이선 코플런(Nathan Coughlan)을 선임했으며 유학생이던 신흥우[3]가 통역을 맡았다.
당시 교민들이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하자 그는 3천 달러의 보수를 요구하였다. 교민들이 그 돈을 모아 줬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며 변호를 거절한다. 이런 상황을 봤을 때 이승만은 통역 요청을 완곡히 거절할 의사로 거액을 불렀는데 실제로 모아오자 저런 이유를 들며 다시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독립론자였던 이승만은 원래부터 이 저격 사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은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중략)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이 1912년에 쓴 '청년 이승만 자서전' 中

이처럼 이승만이 보기에 이런 사건을 저지르는 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전명운과 장인환의 입장에선 친일파 미국인을 처단한 의거였지만 미국인들의 입장에선 자국의 외교관이 암살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전명운 의사는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대한 국민회 블라디보스톡 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으며 맥 필즈(Mack Fields)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1920년에 한 여성과 결혼해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 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장인환 의사는 1919년에 특사로 풀려났으며 1927년에 한국으로 귀국해 결혼을 했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1930년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더럼 스티븐스의 시체는 4월 2일에 병원을 떠나 6일에 워싱턴에 도착했으며 8일에 기독교식으로 장례가 치루어진 후 워싱턴 온비루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추도식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화를 비롯해 유명 인사들의 조화가 왔으며 일본 정부는 스티븐스에게 1등급 훈장을 추서했고 그의 유족들에게 조의금으로 15만엔을 지급했다.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암살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4. 관련 문서



[1]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 페리 빌딩에서 배편으로 오클랜드로 이동한 후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를 탔다.[2] 이후 모범수로 10년 만에 가석방 했다.[3] 일제 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