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일본어'''
親日派[1], 親日家[2], 親日[3]
'''중국어'''
亲日派[4], 哈日族[5]
'''영어'''
Pro-Japanese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주의할 점
5. 관련 작품
6. 캐릭터


1. 개요


'친O파'라는 것은 일본식 한자어 표현으로 특정 국가를 좋아하고 잘 안다는 뜻이며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랑은 원래 상관없는 단어다.

2. 상세


그러나 한국 (당시의 조선총독부 등)또는 친일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집단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벌이고 일제에 협조하여 수혜를 독점하거나 위안부, 정신대를 독려하여 국민을 팔아넘기는[6] 행동을 너무나도 많이 했다'''. 게다가 해방 후 친일파 집단이 정치적 힘을 잃고 몰락하면서 그들의 행위를 옹호해줄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고, 현대 한국에서 친일파는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동의어가 됐다. 물론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던 친일 세력들은 6.25 전쟁냉전 구도 속에 재기에 성공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친일 행위를 반성하기 보다는 자신과 분리시키는 유체 이탈적(?) 노선을 취하면서 친일파란 단어는 부정적 이미지의 극으로 계속 남게 됐다.
친일파라는 말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에서도 당연히 쓰는 단어지만, 일본은 매국노라는 함의를 전혀 이해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친일파를 척결하자!!"는 정치적 구호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은 곧 반일'이라는 오해에서 기인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팔고 부정부패의 대명사가 된 친일 세력들을 척결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친일 척결'의 역사적 함의를 일본인에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보니, 이런 일본인들의 오해는 고착된지 이미 오래다.
한국인이 이해하고 사용해왔던 친일파라는 단어는 일본 제국을 좋아하거나 수혜를 받은 자 혹은 그의 후손이라는 뜻이며, 사회적으로 누가 자기를 친일파라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욕이다. 때문에 단순히 현대 일본, 일본인이나 일본 문화를 좋아하거나 일본에 연이 있다는 뜻은 '지일파'란 단어로 대체된다. 6.25 전쟁 후 '동무'라는 단어가 '친구'에 그 지위를 넘겨주고 사어(死語)가 된 것과 같은 사례. 현재 한국의 친일이라 하는 이들은 일본을 맹목적 추종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일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동조하고 때로는 집단적 움직임을 보일 기미도 있다. 역사 갤러리에서 주로 서식하며 댓글이나 남기지만, 부산 소녀상 설치 때같이 한일 우호를 외치며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양인의 경우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경우가 있고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이라면 다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와패니즈, 자포네스크 참조. 일본에 출장오거나 일본으로 유학 또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오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 사회에서 살면서 친근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백인들은 지금도 양산되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 진보 진영을 향해 빨갱이라 비난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진보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친일몰이처럼 친일파로 몰아가서 억울한 사람들을 근거 없이 폄하할 때도 쓰인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친일파 청산 사업을 시도했으나, 정작 이를 적극 지지하던 진보 인물이 친일파 후손인 사례가 줄줄이 나와[7] 유야무야된 적이 있는 걸 보면 진보 진영도 친일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친일파'라고 함은 지나친 일본 추종이란 의미가 강하므로, 단순히 건전한 수준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에 대해서 찾는다면 친일 문서를 참조.'''

3. 역사


일본은 1867년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근대 서양의 시스템으로 국가를 개조했다. 중국이 정점에 서는 수천 년 간의 조공 제도로 고착된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깨고 천황의 이름으로 대등하게 청나라조선에 외교 문서를 보냈다. 특히 이듬해인 1868년 조선을 향해 자신들이 '왕정 복고'를 이뤘음을 국서로 통보했는데, 그동안 형님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던 조선 조정에 황제를 참칭(?)하는 민감한 언어 선택으로 큰 충격을 줬다. 자연히 '왕'인 조선은 일본에 격이 한 등급 내려간다. 당연히 조선은 국서 접수를 거부하고 일본도 1872년 외교 사절단이 철수하는 등 갈등은 점점 고조됐다.
그러나 1876년 운요호 사건 때 이양선으로 일본이 무력 시위를 하자 조선 조정은 격론 끝에 문호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당연히 일본과 통상은 텄다고 해도 조선 조정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국론 역시 존왕양이의 외세 배척 여론은 더욱 강해졌고,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는 이런 여론을 잘 이용했다. 이 때만 해도 우의정 박규수와 영의정 이유원 정도가 외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었는데 실상 그마저도 동도서기론, 즉 "서양 문명은 기술 면에서 앞서 있을지는 모르나 동양의 정신 문화를 존중하고 배울 점이 있다"는 식의 이상론이었지 일본을 좋아한다는 커녕 최소한 일본에게 뭘 배운다거나 가까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아예 안중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친일파는 이 때까지 제로.
그러다 1880년 대, 우의정 박규수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본 책과 문물을 접하고 일본의 발전상을 흠모하게 된다. 물론 김옥균의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니, 우리는 프랑스 같은 문화 군사 강국을 이루자'는 언급을 볼 때, 일본과 동급으로 조선을 생각했지, 결코 부하가 된다는 생각은 그들 역시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임오군란 당시 전권을 잡은 대원군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들이 청나라식 근대화, 양무운동을 개화 모델로 삼고 국정을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식 급진 개혁을 바랐던 김옥균의 개화당은 친일파란 누명을 쓰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서양에 쓰러지기 직전인 청나라 모델로는 미래가 없다는 건 확실했던 개화파는 초조했다. 1884년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우정국 완공 축하연에 난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도 확보하고 서울 요지를 선점한 그들의 난은 성공하는 듯 했으나 압록강 근처에 주둔했던 청나라 군대가 삽시간에 반격을 가하면서 실패한다. 갑신정변이다. 역적이 된 개화파는 일본으로 탈출했고, 조선에 일본식 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친일파가 처음 매국노의 멍에를 쓴 건 한일 강제 합병이 아닌 이 때가 최초다.
그러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한일 합병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전만 해도 친일 세력을 발본 색원할 것같이 굴었던 수구파(개화당을 제외한 민씨 쪽 친청파 + 이완용)들은 얼굴을 싹 바꿨다. 1905년 외교권을 뺏긴 을사조약을 시작으로 정미 7조약 등등 대한제국을 해체할 치명적인 조약들마다 수구파들은 누구보다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각기 무리를 짓고 친일 충성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맨 앞에서 길 안내를 맡은 것은 친일파들이 심어놓은 헌병 보조원, 즉 조선인 앞잡이들이었다. 1910년 강제 병합이 완성되자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은사금과 부동산 등은 물론 조선귀족 지위까지 나눠 받았다. 과거 대한제국이 부족한 재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주미 공사관은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넘어갔고, 개화파의 거두이자 왕실 종친 박영효는 28만원, 이완용은 15만원, 박제순은 10만원의 은사금을 받고 아주 떵떵거렸다. 구한말 끝날 때까지 그동안 친일을 했든 친청, 친러였든 상관없이 합병 때까지 조선 조정에서 버틴 자들은 모두 친일파라고 봐도 된다.
그 후로도 일본 제국이 35년 간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제국주의의 양상도 같은 듯 같지 않게 계속 변모했는데, 친일파들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변모해 갔다. 조선이 점점 제국주의 일본에 동화되고 식민 지배의 정도도 깊어지고 점차 더 많은 조선인들이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일부 권세를 가진 집안들이 저질렀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그 범위를 넓히고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런 시대를 시각적으로 리얼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 옛 MBC의 불멸의 명작 여명의 눈동자. 친일파의 출신 성분은 조선 귀족들에서 점차 일반 서민 출신들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4. 주의할 점


그냥 일본 문화를 좋아하면서 우리 문화도 아끼는 사람들이 욕먹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극우 컨텐츠를 옹호하거나 우리 것을 망가트리며 비웃는 식으로 윤리적 공분을 불러와서 비난을 받을 뿐이다. 실제로 초밥 좋아한다고 욕한다면 도리어 욕한 사람이 욕 먹는게 현실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화에 대한 선호와 일본의 죄악에 대한 맹목적 묵인은 구분하고 있다 말할 수 있겠다.[8]
애초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어릴 때 보고 자란 문화 매체는 자유로운 문화 교류가 허용되기 이전까지도 제대로 번안이 안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서 선호도가 높아진 것도 있다.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도 지나치게 영향력이 남아있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뜻으로 쓰이고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미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왠지 모르게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오해받는 일이 다반사. 사실 이 때문에 친미파친러파 같은 친◯파도 어감이 안 좋아졌다. 그런데 반대로 친한파는 어감이 더 좋아졌다. 보통 지일파(知日派) 등 지◯파로 대체하는 듯하다.
그런데 지◯파와 친◯파는 사실 다른 의미로, 후자와는 달리 전자는 대상국에 '''관심을 갖고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지한파는 한국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감정적이거나 무리한 주장을 하지 않을 뿐, 한국에 반드시 우호적이라거나 적대적일 이유는 없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극일(克日)을 외치며 일본으로 유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비교적 지일파이지만 친일파는 당연히 아니며, 반대로 조선을 반드시 정복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조선에 대해 공부했던 옛 일본의 정한론자들은 지한파이지만 친한파는 아니다. 실제로 산케이신문구로다 가쓰히로 편집장은 지일파를 자칭하면서도 "한국은 일본에 재정복 당해야 잘사는 나라가 된다" 따위의 혐한에 가까운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5. 관련 작품



6. 캐릭터



[1] 원래 단어의 뜻은 같으나, 위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이 쓰이는 용례가 다르다. 그저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정도로 쓰인다.[2] 사실 친일반민족행위자도 친일파로 부른 이유 때문에 단순히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 될 경우에는 지일파로 구별한다. 한국의 지일파와 비슷한 예.[3]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표기법.[4] 위의 일본어처럼 원래 단어의 뜻은 같으나, 쓰이는 용례가 다르다. 그저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정도로 쓰인다. 중국어에서 친일파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는 매국노와 비슷한 뜻인 汉奸(한간)이다.[5] 합한족에서 유래한 단어로 보인다.[6] 조명이 잘 안돼서 그렇지 위안부에서 일제에 부역하여 같은 한국인을 속여 넘긴 친일 한국인들이 상당히 많다. 일본에서도 이를 지적하며 위안부, 정신대에 관여한 인물들을 왜 자꾸 죄다 일본인으로 몰아가냐고 거세게 반발할 정도.[7] 대표적인 인물로 신기남 전 의장, 김희선 전 의원,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 수석 등이 있다.[8] 물론 덮어놓고 일빠라 욕하는 악플러들이 있긴 하나, 그런 경우는 단순히 친일 문제로 판단할 게 아닌 취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