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헌력

 

時憲曆
1. 개요
2. 역사
2.1. 시헌력의 개발
2.2. 우리나라의 도입
3. 여담


1. 개요


태음태양력의 하나. 중국 청나라의 달력으로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음력'은 대부분 이것을 가리킨다.

2. 역사



2.1. 시헌력의 개발


1281원나라 시기에 수시력(授時曆)이 만들어졌다. 수시력은 이전의 중국 역법과 비교하여 매우 뛰어나서, 명나라가 건국된 뒤에도 수시력에서 계산의 기준이 되는 연도와 일부 수식의 값만 바꾼 채 이름을 대통력(大統曆)이라 하여 1368년부터 사용하였다. 실질적으로 대통력은 이름만 바꾼 수시력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아라비아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회회력(回回曆)이 만들어져서 대통력과 병행되었다.
이 시기 역법은 황제의 명령으로 발표된 것이고, 여기에는 학자들이 정한 계산식까지 포함되었다. 계산의 기준이 되는 연도, 그리고 계산식까지도 황명으로 발표된 것이므로 학자들이 계산식을 임의로 수정하거나 오차를 보정할 수 없었다. 수시력-대통력이 쓰이던 수백 년에 걸쳐 오차가 축적되자 역법은 점점 정확성을 잃었다.
1627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즉위했다. 숭정제는 대통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껴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에게 지시하여 숭정력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숭정력은 이자성북경을 점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미처 반포되지 못했다.
청나라는 천문학에 밝은 아담 샬을 중용하여, 숭정력을 '시헌력'이라는 이름으로 1644년 10월에 반포하였다. 아담 샬이 만든 시헌력의 계산식을 중국인 학자와 예수회 학자들이 케플러의 법칙을 받아들여 일부 수정하는 등 변동이 있긴 했지만 시헌력은 청나라가 멸망하는 날까지 사용되었다. 쑨원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트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뒤, 1912년 1월 1일부터 그레고리력을 도입하고 시헌력을 폐지하였다.
이후 시헌력은 전통명절의 계산에만 일부 남게 되었다. 게다가 계산식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현대 천문학의 방법대로 하며, 월과 날짜를 정하는 규칙만 시헌력을 따른다.

2.2. 우리나라의 도입


소현세자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시헌력도 같이 전래되었다. 1644년(인조 22년) 관상감 제조(提調)로 있던 김육이 상소하여 시헌력 채용을 주장하였다. 김육은 청나라에 가서 아담 샬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시헌력법에 관한 서적을 구하여 왔다. 그 뒤로 10여 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결과 1653년(효종 4년) 시헌력을 실행하였다. 원래 제후국황제가 발표하는 역서를 받아가서 사용하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조선인이 시헌력을 배우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죄였다. 그래서 청나라 흠천감[1]의 관원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시헌력의 내용을 배웠다. 이후에는 이것을 또 서양식 기법으로 수정하여 본국력을 만들어 썼다.
하지만 시헌력이 시행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시헌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주를 보거나 제사를 지낼 때에는 대통력을 사용하는 등 조선에서 정착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상 숭정력에서 이름만 바꾼 건데, 청나라 역법이라는 핸디캡(?)이 있다 보니 반청 의식이 너무 철저하게 작용됐던 듯. 이후 조선에서 시헌력이 완전히 정착한 이후에도 관상감에서는 매년 대통력을 기준으로 만든 역서를 한 부 제작하여 임금에게 올리기를 고종황제 시절까지 계속하였다.

3. 여담


흔히 음력을 두고 '우리 전통역법'이라곤 말하지만 시헌력은 사실 '청나라 역법'이고, 그나마도 '서양 천문학 지식'을 도입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로 시헌력이 도입되었을 때는 서양역법으로 취급받았다.

[1] 청나라 국립 천문대로 조선의 관상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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