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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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문장
1. 개요
2. 영신수련과 예수회의 교육
3. 역사
3.1. 초창기
3.2. 엘리트 교육
4. 선교
4.2. 동아시아 선교
4.2.1. 한국에서
4.3. 근황
5. 예수회 성당의 예술
6. 예수회 소속의 유명 수도자
7. 관련 창작물
8. 음모론 관련
9. 기타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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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MAIOREM DEI GLORIAM'''”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예수회의 공식 표어


1. 개요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이다. 교황청 직속으로, 교구에 소속되지 않는다. 이 수도회 회원을 영어로는 제수이트(Jesuit)라고 하는데, 뿌리상 스페인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관계[1]로 국외에서도 스페인어식으로 '헤수이트'[2]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예수회는 회원들의 인격 완성과 이웃 봉사, 그리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식별하고 추구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창립자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신수련(靈神修鍊) 개념이 이러한 목표를 위한 예수회원들의 수행의 지침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예수회는 가톨릭종교개혁개신교에 부딪쳤을 때, 이에 반대하는, '''반 종교개혁적 성향'''을 지닌 단체였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종교적 자기 반성과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는 조직을 강조하는 쇄신을 통해 가톨릭이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또한 근세에서 근대까지 '''아시아남미 지역에 대한 선교 활동'''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2. 영신수련과 예수회의 교육


영신수련(靈神修鍊) 개념은, 이것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를 말한다. 예수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召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3]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도회와 달리 예수회는 일반 교육사업을 매우 강조한다. 1547년 최초의 예수회 대학을 설립한 이래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 진출해 226개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을 세웠다. 한국에는 서강대학교가 있고, 미국에는 보스턴 칼리지, 조지타운 대학교[4], 로욜라 대학교[5], 포덤 대학교[6], 시애틀 대학교 등이 있으며, 일본에는 사립 3대 명문인 소케이조치의 일원인 조치대학(소피아 대학교)이 예수회에 의해 설립됐다. 이것은 예수회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신학·철학·문학에 밝은 선교사들을 각지에 파견하며 교육사업에 힘썼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교육은 서양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들을 배출해 낸 것으로 유명한데, 대표적인 예로는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 플레슈(La Flèche) 출신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 많은 학자들이 거론해 알다시피, 데카르트는 서양 지성사에 한 획을 긋다 못해 '''서양 지성의 방향 자체를 전환'''해버린 경이로운 천재다. 물론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에서 배웠던 것들을 상당부분 부정했지만, 그는 라 플레슈에서 배운 학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라 플레슈의 교사들이 당대 최고 수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도 사실이었다.'''
예수회가 가톨릭 계열이라서 보수적이고 교조적인 단체였다고 보면 이는 상당 부분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회의 교육을 교조적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반대로 예수회의 교육을 매우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의 장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7] 두 의견 모두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예수회의 교사 양성 교육이 현대 학제의 사범대학만큼은 못하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정도의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 '체계'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던 근세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 결과 예수회의 체계화된 교육은 근세에 한 획을 긋는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3. 역사


근세 유럽 지성사학자 휴 트레버-로퍼의 평에 따르자면 '근세 가톨릭 반격의 '''기동 타격대'''(Shock-troops of Counterreformation, 대항종교개혁 특공대)'. 기동성을 중시해 왔기에 '하느님해병대'라는 별명이 있다. 사실 창시자부터가 군인 출신이다.

3.1. 초창기


1534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했던 가톨릭 모임이 그 기원으로, 1540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분열이 일어나 개신교가톨릭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과 교세가 활발하게 번져갔으며 마르틴 루터장 칼뱅의 등장으로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회는 이러한 가톨릭의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어찌보면 스페인이 종교개혁의 위기 속에 가톨릭을 잃지 않았던 건 이 예수회 운동 덕분이기도 하다. 루터와 칼뱅의 교리와 가톨릭의 허점을 노린 지적들이 파고들 틈을 막아버렸으니.
이냐시오는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어 종교에 몰입하게 되었으므로, 엄격한 기풍에 걸맞게 회원들은 군대제도를 모방한 엄격한 규율을 중심으로 뭉쳤다. 이에 맞춰 예수회는 굳건한 결합력을 자랑했으며, 반 종교개혁 운동과 유럽 이외 지역의 선교에 앞장섰다. 이냐시오 본인을 비롯하여 2, 3대 총장 모두 스페인 출신이었고, 스페인 왕실의 비호를 적극적으로 받은 만큼 초기 예수회는 전투적이고 팽창적인 스페인 가톨릭 신앙의 영향력이 짙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예수회는 개신교사도전승 부정을 노골적으로 의식하여 가톨릭의 수직적 구조와 상명하복의 원칙을 중시한다. 그러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로욜라 본인도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감방에 신세를 진 적이 있었고, 지금도 바티칸에서는 명백히 단죄하는 라틴 아메리카해방신학과 관계가 가깝다는 것이다.[8] 이는 예수회 자체가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가 현지에서 학교, 병원 등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며 지역 현실에 치열하게 파고 들어간 역사적 전통에서 나오는 아이러니라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회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 자체가, 마르틴 루터가 불 지핀 종교개혁의 불길에 안일하게 대응한 교황청과는 달리 스페인이나 북이탈리아, 플랑드르 지방의 지역 교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가톨릭의 신앙적 혁신을 추구했던 것이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로마와 예수회 등의 지역별 베리에이션 간의 온도차나 사고 방식의 차이는 뚜렷한 편이다. 막상 언급된 해방신학도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로마에서나 삿대질 하지, 중남미 현지 교회는 현실적으로 하나의 실체로 인식하며 교황청에서 뭐라 하든 협력하는 편이다. 또한 예수회가 군대적 규율에 기반하여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교조적이고 수직적인 형태를 가졌다고 하나, 이는 수도회의 행동적 특징일 뿐이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비롯한 예수회 초기의 신앙적 지도자들은 되려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이나 파리의 신비주의적 신앙관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양심을 중요시했다.''' 또한 미사뿐만 아니라 사적인 고행과 성찰, 명상을 통한 개인적인 신학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 등 르네상스의 신학적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교황청과의 노선 차이가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편이다.''' 애초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대표 저서이자, 예수회 양성 과정의 핵심이자 꽃인 영신수련 자체를 두고 이냐시오 본인은 "이러한 (신앙적 각성) 과정은 이를 체험하는 각 개인의 성격, 배경, 심성, 성향에 맞추어 적용 해야 한다"고 말했을 만큼 이성적이고, 지성에 기반한 믿음을 중시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3.2. 엘리트 교육


유럽 지역에서 예수회는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가 성당 건물을 세우며 도시에 확립한 삼각 구도를 아예 삼각 구도의 내부로 파고들어 선교하면서 돌파하려 시도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본인부터 귀족 가문의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적 엘리트였고, 예수회 내부에서도 교황청에서는 억압한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신학관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만큼 예수회는 교육 활동, 그것도 당대 유럽 귀족과 군주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여 짦은 세월에 지리적으로는 개신교가 장악한 독일이나 동유럽의 영토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이후 철저하게 반가톨릭 정서가 뿌리 박은 영국에서도 여러 귀족 가문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역 가톨릭 귀족들과 연계하여 반 왕실 음모 계획에 가담하는 등, 근세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공세를 막아내고 플랑드르, 보헤미아, 폴란드 등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물론 해당 지역의 개신교도들 입장에서는 스페인의 군대와 함께 적그리스도 교황청의 마수의 양 축을 이루는 악의 사도들로 보였다. 왜냐하면 당연히 수복이라는 과정에서 예수회 주도로 개신교도 색출, 마녀사냥, 종교재판, 집단학살, 강제개종과, 재산 몰수 추방 등의 강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폴란드프랑스의 예수회는 당시 국왕들의 가정교사로 개신교 탄압을 부추겼고,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은 예수회 사제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위그노들이 영국네덜란드, 독일로 쫓겨나면서 예수회에 대한 악감정을 가졌고 개신교가 우세한 북유럽 전체에 퍼져나가서 악명이 퍼졌다.
실제로 국교회로 갈아탄 잉글랜드와 그 잉글랜드의 지배 아래 있는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을 수복하기 위해 예수회 수사와 사제가 지속적으로 파견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 암살 시도, 메리 여왕 복위 운동, 제임스 1세 암살 음모 등에도 예수회 사제가 직접 개입했거나 예수회 사제들에 의해 고용된 암살자 조직이 연루되었다.
명예혁명의 원인이 된 찰스 2세,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용인 정책 과정에서도 대륙에서 예수회 사제들이 많이 들어와서 영국국교회와 그보다 한층 더 반 가톨릭적인 청교도들에겐 공공의 적이었다. 청교도 혁명과 왕정 복고 과정에서 청교도들이 다시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나서 미국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좋지 않았다.
웃긴 점은 정작 가톨릭 내부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단 명칭부터가 감히 '''예수'''회라 칭한 것이 다른 수도회에서 크게 이의를 제기할 정도고[9] 초창기 바오로 3세가 창립에서부터 전례 없이 전폭 지지했으며, 무엇보다 내부에선 수직적 위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권위는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회가 다른 가톨릭 조직 교구 주교나 세속 왕국과도 충돌했고 17세기 일시적으로 해산되고 포르투갈프랑스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완전히 추방되기도 했다.
본고장인 스페인에서조차 배척받았는데, 예수회가 대항종교개혁의 선봉이었지만 정작 스페인에서는 예수회가 지나치게 프로테스탄트적이며 지나치게 유대스럽다 또는 유대인에 온정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앞서 개신교들은 세속 가톨릭 왕국에 섬처럼 떠 있는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교육에 대해 상당한 투자를 했는데, 예수회 역시 교육 특히 엘리트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엘리트 교육 중심 방법은 동양에선 유학자와 다이묘 등을 집중적으로 선교하며 나선 중국, 일본 등지의 선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4년 정규 대학 대졸자만 입회 받는 것으로 유명하며, 출신 대학의 학벌도 따진다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다.

4. 선교


예수회의 선교 판도에는 스페인에 의해 점령된 멕시코페루, 그리고 대항해시대에 발 맞춰 무역이 흥성하게 된 인도중국, 일본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수회의 선교는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그 활동 반경이 매우 넓었다.

4.1. 남아메리카 선교


페루에서는 잉카의 11대 왕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의 궁전을 파괴하고 그 위에 예수회 성당인 <라 콤파냐 데 헤수스 성당(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을 짓기도 하였다. 1668년에 완공된 이 성당에서는 성 이냐시오의 조카 마르틴 가르시아 오네즈 데 로욜라(Martín García Óñez de Loyola)와 잉카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투팍 아마루의 조카 베아트릭스 클라라 코야(Beatriz Clara Coya)의 결혼식이 열렸었다.

4.2. 동아시아 선교


포르투갈아시아 지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예수회의 동양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예수회는 비록 엄격한 조직이기는 했지만 현지 사람들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사원의 파괴·이단심문 등의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16세기 살라망카 대학에서 비교적 유화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교도 대전'을 해석했던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에 맞춰 예수회는 현지 적응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신자의 자격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이 사도신경을 믿는 사람들이면 신자라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무작정 현지의 신앙을 탄압하기보다는 현지인들의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이 나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덕분에 당대 동아시아 선교활동 세력 중 예수회가 가장 많은 신자들을 만드는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사고는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 못지 않게 고도의 체계를 갖추고 있던 중국의 정치와 학문 세계를 접한 예수회는, '''단순한 기독교 우위의 선교만으로는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중국인들은 고도로 전문화된 유교를 중심으로 한 중화사상이 매우 굳건했기 때문에 유럽의 문명을 설파한다 한들 씨알도 안 먹혔다.
먼저 선교의 거점이 된 곳은 인도였는데, 포르투갈이 1513년 고아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선교사들이 원활히 활동할 수 있었다. 하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나서 크게 성공했고, 중국 진입을 노리기도 했으나 당시 명나라 정부의 해금령으로 실패했다.
이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통해 진입한 마테오 리치와 미켈레 루지에리 등의 신부들에 의해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미켈레 루지에리는 불교기독교를 비견하여 선교를 시도한 '천주실록'을 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마테오 리치가 유교적 관념을 기독교와 접목시켜 선교에 나서면서 천주실의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지에도 전래되어 동아시아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아담 샬이 명청 교체기에, 조아킴 부베와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등이 청나라 시대에 활동하면서 교세를 펼쳐나갔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황제의 관료로서 활동하며 청 황제의 시강을 맡는 한편, 중국의 지식인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중국어유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익혔다. 그들은 상류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발달된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한편, 중국 전통 사상과 가톨릭의 공통점에 착안해 중국의 가톨릭화를 모색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저술들은 비록 중국의 가톨릭화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바깥의 지식들과 사상들을 습득했다. 공자, 맹자의 이름을 라틴어화하여 서양에 전하거나, 네르친스크 조약 협상과정에서 라틴어 통역을 담당하는 등의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 이 시기.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의 경우 화가로서 중국의 화풍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한편 교세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의 가톨릭은 그다지 흥하지 못했다. 중국의 1억 인구 중에 마테오 리치 신부 시기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23만 명, 1662년 당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11만 명 수준이었다. 이는 전국시대 일본만도 못한 수준에 불과했다.
순치제 등 유력 인사들이 가톨릭에 관심을 갖고 서광계, 이지조 등의 유학자들이 전향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도시 중심의 활동으로 인해 민중 종교로 파고들지 못한 점은 예수회 선교의 계속되는 약점으로 남았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외래종교에 대한 적대감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명나라의 위기 시대에 적대감이 폭발한 난징 천주교 교난, 아담 샬 때문에 천문 기관에서 밀린 양광선의 박해 시도 등이 이러한 대표적인 예였다.
정작 중국 정부에서도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용한 기술자'로서 천문 관측, 기계 기술 등의 측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까지도 허용해준다는 개념이었지, 종교적으로 이들을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철저히 중국화를 추진하면서도 선교사들을 남겨두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강희제 시대 선교의 자유가 허가되면서 정점을 맞는가 했던 예수회의 선교는 이후 커진 전례 문제로 인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다. 현지 적응 중심의 예수회의 뒤를 이어 등장한 원칙 중심적인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가 예수회와 전례 문제로 대립한 것은 17세기 초반부터였다. 'Deus'를 원어로 쓸 것인가 혹은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조상 제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중점이었는데, 17세기 말 교황들은 '번역어로 천주(天主)만을 허용하며, 조상 제사는 금지할 것'을 확정해 나갔다.
문제는 강희제가 기독교의 천주를 중국의 전통적인 천(天)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여 경천(敬天) 현판을 천주교 교당에 내려주고 조상 제사는 중국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식으로 보는 등, 이 조치와는 반대 노선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교황은 특사를 파견했지만, 이 특사는 강희제가 제시한 한자 몇 글자와 <천주실의>마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에 강희제는 분노했고 1692년 중국 선교는 금지되었으며, 선교 없이 기술만을 협조할 선교사만 남게 했다. 옹정제건륭제에 의해 이 조치는 고수 혹은 강화되어,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에는 기독교가 쉽게 발을 붙이지 못했다.[10]
일본센코쿠 시대 유력 다이묘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는 등 교세가 크게 흥성했다. 유교보다 불교, 특히 타력구원 성향의 정토종 계열이 흥성했던 일본에서는 내세관을 갖춘 기독교에 훨씬 개방적이었고, 예수회도 극단적인 선악관을 가진 신란의 정토진종에 대해 '마르틴 루터의 무리가 이미 일본에 있다'고 발언하는 등의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유사점은 기독교 전도에 큰 도움이 되어, 중국과는 달리 일본의 기독교는 민간종교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남만사(南蠻寺)[11]와 선교사 양성지, 그리고 화승총과 직물을 비롯한 활발한 무역으로 흥성하던 기독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권 말기부터 서서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 노예가 판매되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의 반감, 엔랴쿠지 등 불교 세력을 압도하면서 견제구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기독교의 전파, 그리고 화승총 무역 등으로 지방 정권의 군사력이 뒷받침되던 점 등이 통일 정권을 향해가던 일본 집권자의 압력을 부르게 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를 거쳐, 에도 막부로 진입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쇄국 단계에 들어서고 선교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선교 없는 교역만을 조건으로 네덜란드만이 흔적을 남긴 채 서양 세력은 완전히 쫓겨나 예수회 선교도 사실상 종결되고, 시마바라의 난으로 남은 기독교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진다.
이후 예수회 등의 선교 세력이 향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프란체스코 부소미 등의 신부는 당시 남북[12]이 갈려 격하게 대립 중이던 베트남에 진입해 집권자들과 교역을 트고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두 정권이 전쟁보다 내부 안정을 우선시하면서 교역을 통한 무기 확보에 열의가 떨어지고, 전통 관습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예수회 선교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베트남에는 예수회 대신에 조선에도 선교사를 파견했던 파리 외방전교회가 선교를 담당하게 된다.
즉 원래 이런 건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제일 고생한다는 클리셰를 그대로 밟은 자들이다.

4.2.1. 한국에서


서양 과학기술 및 천주교 관련 책들이 조선의 연행사(사신)들에 의하여 국내에 소개되어 실학 사상이 싹트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국내의 의견은 18세기 이전까지 대개 비판적이었다. 한때 서광계가 조선 사신으로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천주교 선교를 노리기도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소현세자아담 샬 신부와 교류했다는 아담 샬의 일방적인 주장만이[13] 조선 내 예수회 선교의 흔적으로 남았다. 즉 천주실의 몇 권과 연행사가 선교사들과 만난 게 다였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 선교에 가장 힘을 쓰지 않았음에도, 아니 아예 신경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근현대에 천주교가 자생하여 순교자들의 피가 흘러내린 곳이 한반도였다. 게다가 초기 조선 천주교의 중심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대상으로 하던 사회지도층인 기호남인이었다. 이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주로 관할하였고, 순교자도 나왔다.
만약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아예 자리잡고 중국에서처럼 활동했다면, 한국은 구한말 이전 본격적으로 서구와 교류했을지도 모른다. 이양선을 대한 것과는 다르게 했을 테니까. 물론 이는 다소 낭만적인 추측이기는 하지만, 예수회와 한국 천주교의 관계는 굉장히 흥미로운 편이다.
예수회와 한국 천주교의 관계는, 물론 예수회 자체가 가톨릭의 대표적인 대형 수도회 중 하나, 아니 최대 규모의 수도회로서 가톨릭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고[14] 예수회 한국관구는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의 일개 지부에서 시작하여 독자적인 관구로 승격, 성장하고 주교까지 배출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발전을 해왔다. 때문에 한국 내의 여러 수도회 관구들과 마찬가지로 대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일례로 베네딕토회프란치스코회 등은 교구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성당들이 있지만, 예수회 한국관구가 운영하는 본당은 예수회 자체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서강대학교 내부의 이냐시오관과 실험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조그마한 한옥 가옥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무악동 선교 본당 정도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천주교 교구들에서는 예수회에 대해 꽤 냉담한 편인데, 타 남자 수도회사제 양성을 위해 교구 신학교에 소속 신학생 수사들을 위탁하여 교육하지만, 예수회는 한국 교구 신학교가 아닌 국외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에 수사들을 유학 보내서 사제 양성을 하고 있다. 예전에 광주대건신학대학(광주가톨릭대학교)을 예수회에서 운영할 때 광주대건신학대를 졸업한 사제들을 제외하면, 현재 예수회 한국관구의 사제들은 거의 대부분 유학파이다. 예수회 한국관구에서도 서강대학교에 자체적으로 신학교 창설을 추진한 적도 있지만, 교구에서 반대했다고 한다.
이처럼 교구와 예수회의 묘한 분위기는, 한국 천주교 교구들이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에 의해 창설되어 파리외방전교회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 예수회 스스로가 교구의 교육 과정과 사상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제 양성을 고수한다는 점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예수회가 한국 선교에 냉담했다는 것도 이유인 것 같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한국 선교를 위해 큰 공을 들이며 막대한 인명피해[15][16]를 내면서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에 교계제도의 기틀을 잡고, 방인 사제를 육성하고, 교세를 확장하는 등 한국 교회를 사실상 만들다시피 했다.
하지만 예수회는 전교와 교육으로 이름이 높은 수도회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에 전교와 교육을 담당할 신부를 단 1명도 파견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일본식민지였고, 일본에는 오래 전부터 예수회가 진출하여 성 소피아 대학교(조치대학)를 설립하는 등 공을 들인 것과 대조적이다. 같은 시기에 베네딕토회와 메리놀 외방 전교회 등이 한국에 진출하고, 그에 앞서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17]가 한국으로 진출하여 전교와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해방 후에야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에서[18]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 천주교파리외방전교회와 매우 가깝고,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활성화된 수도회베네딕토회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등이며, 예수회는 전세계 천주교에서의 명성과 규모에 비해 한국에서는 서강대학교 정도를 제외하면 노동 사목과 지방의 일부 농촌 사목 정도로 그 활동이 미미하고 교구들과도 관계가 썩 살갑지 않은 것에는 이런 역사적인 이유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회가 동아시아 선교에서 중국과 일본 선교에는 긴 세월 동안 큰 공을 들였지만 한국 선교는 근대까지 무시했기 때문에, 현대 한국 가톨릭에서 타 수도회와 선교회들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약간 겉도는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수도사제를 가장 많이 배출한 수도회는 바로 예수회다. 참고로 2위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3위는 살레시오 수도회이다.

4.3. 근황


이렇게 동방 선교가 쇠할 때쯤 스페인포르투갈의 국력도 약해지면서 예수회는 본격적으로 다른 수도회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스페인도 왕권 지상주의를 앞세운 개혁에 나서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예수회가 아예 해산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회에 대한 압력은 아메리카에서 큰 권위를 누리던 예수회 세력의 반감을 불러,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라틴아메리카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1810년 멕시코 독립운동에 나선 미셸 이달고 등의 신부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예수회의 재건 운동이 시작된 한편,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해방신학이 예수회 등에 의해 흥성하기도 하였다.
예수회는 현대에 들어서 중세나 근대만큼의 명성이 남아있지는 않다는 평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로 예수회원들의 대거 환속이 있었고, 교황청에 의해서 이단 신학자로 경고를 받은 회원이 많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과거 예수회의 본래 영성이 쇠퇴하고 지나친 사회 참여로 이냐시오 영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2013년 3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선출됨에 따라 마침내 예수회 출신 교황이 탄생했다. 문제는 예수회 장상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도사제였을 때 쫓아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관구장 당시에 해방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회 장상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탈퇴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은 탈퇴한다는 문서를 가지고 있는데, 안 그래도 탈퇴하려던 참에 갑자기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의 보좌주교가 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수사가 주교가 되면, 수도회원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되 수도원장이나 수도회 총장에게 순명해야 할 의무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기 때문이다.[19][20] 그래서 예수회 장상들의 속사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후문이다. 자기네들이 박해하던 사제가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만 그렇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와 아주 원수를 진 건 절대 아니고, 문장 안에 예수회 문장을 넣는다던가 방한 때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를 깜짝 방문한다던가 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애초에 십수억이나 되는 초거대 집단의 수장이 이 정도로 진보적인 형태를 보이는 것도 그가 나고 자란 라틴 아메리카라는 공간적 배경과 예수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21]

5. 예수회 성당의 예술


근세의 개신교 예배당이 예술적으로 검소함을 보였음과 대비되게 예수회 계열의 성당들은 더욱 화려한 바로크적인 장식을 보여주어 천국의 모습과 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원래는 예수회 역시 성당의 내부를 단순하게 회반죽을 바르는 등 개신교와 비슷한 검소함을 보였지만, 곧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예수회를 창설한 성 이냐시오(Sant' Ignazio)에게 바쳐진 로마의 성당인 <성 이냐시오 성당(Chiesa di Sant' Ignazio di Loyola)>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안드레아 포초(Andrea Pozzo)가 1691년부터 1694년에 그린 거대한 천장화 ‘성 이냐시오의 승리(Gloria di Sant'Ignazio)’는 조각과 건축, 회화가 어우러져 입체적인 환각 효과를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이다. 주로 바로크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인 환영을 통한 공간을 보여주는 이러한 것을 콰드라투라(Quadratura) 기법이라고 한다.
예수회 성당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제수 성당(Chiesa del Gesù)>의 정면(facade)은 16세기의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하였으며, 이는 예수회 성당들의 정면 디자인의 모범이 될 정도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특징 중 하나는 기둥의 튀어나온 정도를 다르게 하여 입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제수 성당의 바깥 기둥은 얕고, 점점 가운데 기둥에 가까워질 수록 튀어나오며, 입구 주변의 원 기둥은 벽에서 독립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구를 강조하고 있다. 제수 성당의 내부는 회반죽이 발려 검소한 모양이었지만 후대에 화려한 바로크적 장식이 덧붙여졌다.
한편 제수 성당의 정면과 유사하게 지어진 산 수산나 성당의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는 이 덕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과 신랑을 설계했지만, 워낙 대성당 정면의 너비가 길어 비례가 다르고, 크기 차이 있어 작은 성당인 제수 성당의 정면이 가졌던 특유의 미적 효과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22]

6. 예수회 소속의 유명 수도자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예수회 창시자
  • 디에고 라이네스
창조론적 진화론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를 꾀한 신학자, 인류학자로 유명하다. 북경원인의 발견자 중 한 명이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확산을 해오는 진화를 거쳐 지향점인 오메가 점으로 수렴하고 , 이 오메가 점이 바로 예수의 재림이라고 한다. 저서로 인간현상 등이 있다.
  •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보나벤투라프란치스코회 제2의 설립자라 불린다면,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프란치스코 데 보르하)는 예수회 제2의 설립자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성씨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 경건하고 검소했으며 훗날 성인으로 시성된 예수회 3대 총장이 바로 그 유명한 막장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증손자 되시겠다. 본인 또한 이러한 혈통에 대해 나름대로 골치 아파하며 의식적으로 더욱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듯하다. 축일은 10월 10일. 참고로 알렉산데르 6세의 조카인 프란치스코 데 보르자 추기경과는 동명이인이다.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1960년대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바실 프라이스 신부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뒤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의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빈민들과 기거하였고, 1980년대 서울시의 빈민촌의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빈민들의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한 선행으로 인해 1986년 제정구 前 위원과 함께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하였다. 2014년 6월 2일 선종.
  •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본명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대한민국 귀화 외국인 1호이기도 하다.[23] 한국에 파견되어 서강대학교 초대 학장을 맡는 등, 서강대를 설립하고 기반을 닦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서강대 재직 중에, 성심수녀회 주매분[24] 수녀의 소개로 64학번 신입생 조안 리[25]를 알게 되었다. 주 수녀는 길로연 신부가 조안 리의 신앙을 잘 이끌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주 수녀의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은 4년간 은사-제자로서 돈독한 친분을 쌓아 오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한국 가톨릭과 예수회뿐 아니라 교황청까지도 크게 뒤흔든 끝에, 결국 조안 리가 서강대를 졸업한 1968년에 길로연 신부는 환속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조안 리와 결혼했다. 당시 조안 리는 23살, 길로연 신부는 49살이었다. 아내 조안 리가 49살 무렵 출간한 자서전[26][27]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에 아주 자세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조안 리와의 사이에서 1970년 큰딸(54세)을, 1972년 작은딸(52세)을 낳았다. 큰딸이 14살, 작은딸이 12살일 때 죽었다. 딸들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큰딸은 동갑내기 중국계 미국인과, 작은딸은 16세 연상의 프랑스인과 결혼했다.

7. 관련 창작물



8. 음모론 관련


음모론의 단골 등장 조직이다. 이것은 과거 16세기 창설시부터 앞서 반종교개혁의 주역으로 개신교 탄압과 강제개종의 일선에서 나선 흑역사도 있고, 19세기엔 유대인 음모론과 결합하여 프리메이슨-국제유대인 조직(국제 금융자본)-예수회 삼각 음모론이 매우 흥했다. 이들 조직들 공통점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졌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이걸 진지하게 믿은게 2차대전 이전까지 독일이었다. 나치 독일이 이런 대중들의 음모론 감정을 이용하여 유대인과 국제적 요소가 있는 조직을 대거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강경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도 유명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예수회가 발행하는 잡지인 라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가 "수십년동안 가장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이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물론 인종상의 이유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지어 히틀러까지도 이 잡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이다. 나아가 1946년까지는 인종상으로 유대인이면서 증조부, 조부, 부친과 본인에 걸쳐 4대가 가톨릭 신자인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 후보자의 예수회 입회를 금지하기까지 하였다[28].#
동유럽 정교회 문화권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음모론이 흥했다. 프리메이슨과 한 패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동방가톨릭을 내세워서 동유럽에 침투하는 예수회 조직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어 보면 주인공 중 하나인 알료샤가 예수회를 무슨 죽음을 먹는 자를 언급하듯이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 이반의 극단적인 주장을 듣고 '그런 건 예수회나 할 법한 사악한 생각이에요!'라고 외친다거나.[29]
동유럽 문학사에서 시간, 공간적 배경으로서 큰 위상을 가진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방에서 역사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계와 폴란드화 된 리투아니아계 귀족, 지주 계층이 주로 예수회 교육을 받으며 정교회 신자가 다수였던 농민들을 핍박, 괄시하고, 원래 정교회를 믿던 토착 엘리트들도 그 양질의 교육 과정과 나머지 서유럽 세계와의 접촉을 미끼로 가톨릭 쪽으로 낚아채 버린 전례가 상당히 많다 보니 이런 음모나 꾸미는 음험한 이미지로 각인된 듯하다.
또한 일본에서도 예수회를 '''악의 비밀결사'''라고 보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예수회를 둘러싸고 갖가지 음모론이 회자되는데 대표적인 걸로 꼽아보면 혼노지의 변의 배후였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아타미 은산을 탐냈고 종국에는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 가라샤를 죽였다 등이 있다. 물론 단편적인 근거만 가지고 부풀린 음모론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 일본에서 예수회 음모론이 흥한 건, 예수회가 한때 일본 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과거 남미의 경우 스페인포르투갈의 경우 세속국왕이 임명한 주교만 포교하겠다는 주장을 했지만, 교황청에선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의 선교를 허용하여 서로 경쟁하고 수도회끼리 원주민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투까지 벌이는 막장… 짓을 하자 예수회에선 포교의 전속 권한과 더불어 무역 독점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역이권을 탐내는 일본 내부와 스페인과 타 수도회에서 예수회를 음모론의 주범, 부패자금 착복, 비밀 결사 조직으로 고소가 많았다.
영미권 개신교 음모론에서는 일루미나티와 엮이기도 하는데, 과거 예수회 독일 관구 본원이 바이에른 잉골슈타트[30]에 있었기 때문이다. 잉골슈타드가 어디 작은 도시도 아니고, 그 안에 있던 많은 단체들을 전부 일루미나티로 보려는 건지...
드루킹 등에서 문재인 정부를 제수이트 정부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재수회를 예수회로 착각한 것으로, 개신교 근본주의 음모론의 재탕에 불과하다.
가뜩이나 음모론의 주 떡밥인데,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한 이후로는 더더욱 공격을 많이 받는다.

9. 기타


스위스에서는 무려 연방'''헌법'''(1848년 제정)으로 예수회의 활동을 금지했는데 이는 1973년에서야 개정되었다. 그 이유는 존더분트 전쟁 참고.
예수회와 이름이 비슷한 예수수도회(Congregatio Jesu)라는 수도회도 있는데, 이 수도회는 여자 수도회(수녀회)이다(옛날에는 "동정성모회"라고도 불렸다). 1609년 설립된 최초의 활동 수녀회로, 설립자인 영국인 여성 메리 워드(Mary Ward, 1585-1645)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영성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예수회의 회헌에 기반하여 수녀회를 창립했다. 예수수도회는 로마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에서 여성교육 등 여러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1964년에 진출하여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 본원을 두고 있다. 예수수도회 한국관구는 대전에서 성모초등학교와 성모여자고등학교[31]를 운영하고 있으며, 학교 외에도 선교, 복지, 이주노동자 돌봄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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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술되는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후에 헤수이트 운동을 주도한 것도 스페인 가톨릭이다.[2] 예수스페인어로 '헤수스'(Jesús)다.[3] 이렇게 자기 자신의 영성을 단련하는 것과 인격완성을 강조한다는 면이 부각되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 자체를 중요시하는 가톨릭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충돌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4] 미국워싱턴 DC 소재의 명문 대학으로 정치 외교학, 정부학, 법학은 전미 탑 스쿨 중 하나이며 미국 최초의 가톨릭계 대학이기도 하다. 미 대학농구의 간판격 대학이기도 하며, 패트릭 유잉, 앨런 아이버슨, 알론조 모닝 등이 본교 농구팀 출신이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5] 창시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이름을 붙인 대학.[6] 미국 뉴욕시 브롱스 소재.[7] 실제로 데카르트는 늦잠을 자는 버릇이 심했는데, 라 플레슈에서는 이 버릇을 강제로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데카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특별 대우해주었다. [8] 요한 바오로 2세 당시 예수회 총장이었던 페드로 아루페는 해방신학을 '아직 성숙하지 않았지만, 장래가 크고 의미 있는 움직임'이라며 옹호하다가 교황의 갈굼을 먹은 전력이 있다. 예수회 총장인 아돌포 니콜라스 총장 또한 해방신학을 '라틴아메리카의 비참한 사회 현실에 대한 용기 있고 혁신적인 대응'이라 칭송했다가 베네딕토 16세에게 갈굼먹고 '물론 어떤 신학처럼 해방 신학은 하나의 신학으로서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성숙의 여유가 주어지지 않고 해방신학의 날개가 조숙하게 잘리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한다'며 뼈 있는 대답을 한 적이 있다.[9] 창설자 이름을 본 딴 도미니코회, 베네딕토회, 프란치스코회 등과 달리 이냐시오회가 아닌 예수회로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내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져야 할 이름이기에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 분(예수)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10] 이 와중에 다소 엉뚱하게도 누르하치의 숙청당한 큰아들 추옝의 장자의 장손의 장손으로 이어지는 누르하치 종갓집(!)이 일가족째로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가 옹정제 즉위 후 황8자당 숙청작업에서 잘못 찍히고 이 신앙까지 문제시되어 일가가 내몽골로 유배되는 난리가 벌어져 수많은 일가족이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쟁이라 한들 누르하치의 종가로서 존중받아야할 이들을 몰살하는건 황실의 체면에도 안 좋다 여겼는지 옹정제가 결국 적당한 선에서 못 이긴 척 천자에 대한 충성과 양립하는 신앙의 자유를 눈감아주며 이들을 유배에서 풀어줬다.[11] 당시 기독교 교회를 일컫던 일본의 용어.[12] 북쪽의 찐氏, 남쪽의 응우옌氏[13] 아담 샬과 소현세자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하고 주고받았다는 서신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짓이 아니라도 서신 교환 정도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14] 예수회 총장은 로마에서 타 수도회 총장을 능가하는 위상을 갖고 있다. 종신제에, 퇴임하려면 교황의 허가를 받고 전세계 예수회 관구 장상들의 회의를 열어 최종적으로 동의를 받아야 한다.[15] 파리 외방전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소속 주교와 신부의 숫자가 매우 적다. 이 때문에 선교지에 주교를 파견하여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전략으로 선교를 해온 것.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원 숫자(13명)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규모를 감안하면 매우 큰 피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처음 교황청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위탁했을 때,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회원이 불과 10명이었다![16]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살해당한 파리외방전교회원 숫자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24명의 파리외방전교회원들이 살해되었다.[17]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18] 유럽의 예수회 관구가 아닌 미국의 예수회 관구가 해방 이후에 한국에 지부를 설치했다는 것에 주목할 것.[19] 정확히 말하자면 수사 시절의 종신서원 때문에 수사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수도회원으로서의 신분에서는 자유로워진다. 수도회마다 케바케인데, 예수회의 경우에는 예수회원이 주교로 임명되어 주교품을 받으면 예수회에서는 탈퇴하게 된다. 그러나 교구장 주교가 되어도 수사로서의 종신서원 때문에, 주교가 되어 예수회를 떠나도 평생 수도사제로 살게 된다. (ex: 이한택 요셉 주교)[20] 즉, 교황으로서 바티칸 시국 국가 원수이면서 사제로서는 로마 교구 교구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수도자이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사로서 수련 과정을 마친 후 종신수도서원을 했기 때문이다.[21] 물론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 마냥 프란치스코 교황이 빨갱이(…)는 아니다. 애초에 가톨릭은 그 속성상 결코 공산주의와 친해질 수 없다.[22] 성 베드로 대성당도 제수 성당과 같은 원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효과가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성당 정면의 좌우 너비가 워낙 넓다보니 각 기둥의 거리가 먼데, 더 많아진 기둥들 간의 입체감 차이는 상대적으로 적어져 입체감이 달라지는게 생각보다 잘 눈에 안띈다. 또한 정면의 크기에 비해 입구들이 작은 편인데 중앙으로 가면서 그 크기도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며, 2층의 발코니 때문에 중앙의 입구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런 작은 입구를 강조해야 하니 밋밋해보이는 것.[23] '서강 길씨'의 시조. '길로연'이라는 한국식 이름은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지어주었다.[24] 중국인 수녀로, 초창기 성심여중&성심여고 교장을 지냈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주 수녀님'이 바로 주매분 수녀. 성심여중고에서 6년간 가르친 조안 리를 각별히 총애하여, 조안 리에게 가톨릭 미션스쿨서강대로의 진학을 권했다.[25] '조안'은 세례명인 '요안나'의 영어식 발음으로, 그녀는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국제무대에서 기업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다 보니, 영어식 이름을 사용하는 듯.[26] 헌데 조안 리의 자서전은, 아무래도 조안 리 자신의 시각으로 당시 일의 진행을 바라보고 자신의 주관으로 느낀 바를 중심으로 서술했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 길로연 씨와의 연애와 결혼뿐만 아니라, 해당 자서전에는 조안 리 자신의 시각과 주관대로 주변 사건과 상황을 보고 써서 실제와 다소 괴리가 있는 이야기가 좀 있다. 예를 들어서 해당 자서전 1권 프롤로그는 모 정치인과의 전화 통화 내용인데, 여기에서 조안 리는 자신이 운영하던 스타 커뮤니케이션이 판촉한 F/A-18이 선정되지 않고 F-16이 선정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결국 F-15를 사야 하는데, 만약 자기가 홍보했던 F/A-18이 선정되었다면 굳이 공대지 공격을 위해 F-15E를 도입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이유라는 것이 웃기게도 F/A-18의 'A'가 Attacker여서(…). 당연하지만 F-15E급 전투기 도입은 KFP 사업과 별개로 공군 장기발전계획에 포함된지라 F/A-18을 도입했더라도 F-15E급 전투기가 도입되는 미래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27] 조안 리가 KFP 사업에서 홍보 대행을 담당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부분에서도 오류는 꽤 많이 보인다. 그리고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은근히 자화자찬이 좀 많다(…) 어차피 자서전이라는 것이 다 자신의 제한된 시각과 주관을 중심으로 저술될 수 밖에 없긴 하지만.[28] 더 정확히는 1593년에서 1594년에 걸쳐 진행된 총회에서는 부모가 유대인이거나 무슬림인 경우에만 입회를 금지하였으며, 이는 5차 총회까지도 연장되었다. 이는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대인이나 무슬림 출신 개종자들과 (몇대에 개종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손들의 입회를 막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이후 무슬림에 대한 제한은 사라졌으나, 1923년 27차 총회에서 증조부, 조부, 부친, 본인의 4대에 걸쳐 가톨릭 신자가 아닌 유대인의 입회를 금지하였다. 1946년 29회 총회에서 이러한 금지가 해제된 이후에도 "유전적인 배경"과 관련된 의심이 있는 후보자에 대해 주의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현재는 본인이 스스로 개종하여 예수회 신부로 아무런 제약없이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예시[29] 정작 예수회 출신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이기도 했던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은 저서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드라마(Le drame de l'humanisme athée)에서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의 유물론, 니체의 니힐리즘과 콩트실증주의 무신론을 비판한 후, '''도스토예프스키'''만이 근대 무신론을 제대로 지적했다며 〈악령〉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30] 일루미나티가 이곳에 존재했다.[31] 부산의 성모여자고등학교는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다. 예수수도회와 부산교구 모두 성모여자중학교도 운영하고 있었으나, 부산 성모여중과 대전 성모여중 모두 폐교된 지 오래다.[32] 유명한 가톨릭 계열 대학이라서 예수회 계열 대학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예수회가 아닌 성십자가회 계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