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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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참상
4. 중공의 조치
4.1. '부패한 관료' 타도 운동
4.2. '자본주의 곡물' 수입
5. 신양 '사태'?
6. 참고 문헌


1. 개요


대약진 운동이 한창 추진 중이던 1959년 10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중국 허난성 지급시 신양에서 100만여 명이 대기근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건.

2. 배경


신양은 중국 허난성 남부 다볘산(大別山) 북쪽 기슭에 자리잡아 화이허강(淮河)의 지류 스허를 끼고 형성된 도시이다. 신양은 과거 의양(義陽)이라고 불렸다가 춘추시대 때 신(申)나라의 영토였기에 이후로 '신양'이라, 명청 시기엔 신양저우(信陽州)라고 불렸다. 신양은 남쪽 다볘산맥의 관문이었기에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했고, 사철이 많이 나서 주요 철기를 생산했으며 토지가 비옥해 허난성의 식량 상당부분을 책임졌다. 또한 화이허강의 지류를 끼고 베이징-광저우 철도가 근처를 지나기 때문에, 허난성과 타지역 간 물류교류를 책임지는 경제중심지였다. 또한 기계, 화학, 전력, 식품 가공업 등이 발달했고 무명, 비단, 죽제품 등 전통 공업도 활발한 산업 집약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1958년부터 대약진운동이 전개되면서 예로부터 물자가 풍요롭기로 유명했던 신양 일대에 기근의 조짐이 일어났다. 당시 중공 중앙정부는 일명 '스푸트니크 운동'을 전개해, 중앙에서 요구하는 목표를 경신하고 최고치를 돌파하는 것은 스포트니크호를 발사하는 것과 같다며 현지 간부들에게 지속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라고 독촉했다. 또한 중앙정부는 각지의 실적을 비교해 분야별로 성과가 제일 좋은 지역 대표에게 '홍기(紅旗)'를 주고 어중간한 성과를 거둔 지역은 '회기(灰旗)', 성과가 가장 나쁜 지역은 '백기(白旗)'를 줘, 홍기를 받은 지역 간부들을 고평가하고 직급을 높여주는 반면, 백기를 받은 지역 간부들은 '우파'로 몰아 맹비난했다. 이에 지역 간부들은 어떻게든 홍기를 타내기 위해 생산량을 허위로 보고하고, 중앙에서 이 보고를 기반으로 정한 식량공출 기준을 근거로 농민들에게 강제 징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곡 매상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지방 간부들이 구타, 고문 등 온갖 폭력을 동원해 농민들을 압박하여 식량을 내놓게 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여기에 인민공사가 도입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신양 지역은 인민공사를 도입할 대표적인 곳으로 지정되었는데, 신양 일대에 속한 구시현에 자리잡은 '7일공사'에 속한 가구는 46,161가구, 201,075명으로 하남성에서 규모가 컸다. 신양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없었고 집에 재산을 쌓아두거나 음식을 저장하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모든 개인 식당 및 객관이 폐쇄되어 오로지 공용 급식소에서 식사해야 했다. 일반 가정집들은 곡식과 소금, 조미료, 솥과 그릇, 심지어 수저까지 모두 수거당했다.
1959년 3월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이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공산당 중앙은 전국 각지에서 식량난이 일어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1958년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식량 1350억 근을 공출해 해외에 수출하기로 결정했다. 이 탓에 전국의 농민 1인당 보유식량은 1957년 250근에서 1959년 174근으로 줄어들었고 1959년 양곡 생산량은 11% 감소했으나 공출량은 오히려 14.7% 늘어났다. 이중 상당부분은 각 성, 지역, 현, 인민공사의 각급 당조직이 마오쩌둥의 지시에 맞추겠다고 허위로 보고한 내용에 기반하여 중앙 정부가 정한 과도한 공출량을 채우고자 농민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기초생활 양식이었다.
신양 역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58년 허난성 전체의 식량 생산량은 실제로는 281억 근에 불과했지만 허난성 위원회는 중앙에 702억 근을 생산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신양 수평현의 작황은 농민들이 강철 제련을 위해 토법고로에 투입되어 몇 달 동안 매달린 나머지, 밀 수확을 제때 하지 못해 10% 가량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양 수평현 차오산 제1호 인민공사는 1958년 가을 인민일보에 자신들이 소규모 토지 2.9묘에서 식량 3821근을 생산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는 기사를 실었다. 또한 1959년 신양 전체 양곡 실제 생산량은 32억 5800만 근으로 전년에 비해 46.1% 감산되었지만, 신양 당국은 72억 근을 생산했다고 보고했고, 당국은 이를 기준으로 9억 근을 공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신양 당국은 중앙이 지시한 목표 공출량을 충족하는 정도를 넘어 초과달성하겠다고 마음 먹고 자체 목표를 10억 근으로 잡았다. 이 양에 맞춰 공출하고자 농민들을 핍박하여 양식을 상납하게 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간부들은 막대기로 '불순분자'를 마구 구타했고, 희생자들은 줄에 꽁꽁 묶여 온몸이 시퍼렁게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다가 죽어갔다. 굶주린 주민들은 흔히 수종을 앓았기 때문에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몸의 구멍으로 물기가 스며 나왔다. 누군가가 '모든 물이 빠져나올 때까지 맞았다.'는 말은 흔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이 워낙 굶주려 막대기로 구타당해도 들판으로 나가려 하지 않자, 간부들은 더욱 잔혹하게 굴었다. 이들은 사람들을 줄로 묶어, 때로는 벌거벗긴 채로 연못에 내던졌다. 뤄딩에서는 열 살짜리 소년이 밀 몇 줄기를 훔쳤다는 이유로 줄에 묶여 수렁에 던저져 며칠 뒤에 죽었고, 어떤 이들은 벌거벗겨진 채 비투회에 나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규탄당했다. 어떤 이들은 여름에 양 팔을 옆으로 쭉 뻗고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서 있어야 했고, 또 다른 이들은 돌이나 깨진 유리 위에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벌겋게 달군 도구로 그슬리거나 끓는 물을 끼얹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어떤 곳에서는 똥이나 오줌 등 배설물을 강제로 먹이는 형벌을 시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신체절단형이 집행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한 농민이 식량을 조금 훔쳤다는 이유로 붙잡히자 귀를 잘랐다. '왕쯔유'라는 농민이 감자를 한 알 파내 먹었다는 이유로 관리들은 왕쯔우의 한쪽 귀를 자르고 다리를 철사로 묶고 등에 10kg이 넘는 돌덩어리를 얹은 뒤 인두로 지졌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구타하게 하고 몇몇은 죽을 때까지 때리게 하는 등 가족끼리 구타를 강요하는 일도 잦았고, 아예 생매장해버리는 곳도 있었다.
처벌은 죽은 뒤에도 이어졌다. 맞아 죽은 시신들은 길가에 방치되어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갔다. 일부 무덤에는 "반당분자", "장제스의 수구" 등 모욕적인 문구가 적힌 표지판을 세우기도 했다. 1959년 광둥성 룽구이 인민공사에서는 시신들을 길가에 묻고 <굼벵이들>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세워 묻은 자리를 표시했다. 후난성 시먼에서는 마오빙샹의 가족 전체가 아사했지만 생산대대 대장은 그들을 제대로 묻어주지 않았고, 일주일이 지나자 쥐들이 시신의 눈을 갉아먹었다. 현지 주민들은 나중에 조사팀에게 "우리는 개만도 못하다. 우리가 죽어도 아무도 묻어주지 않는다." 하고 증언했다. 죽은 친지를 묻어주려고 한 가족들도 처벌을 받았다. 어느 70세 노파가 굶주림에서 벗어나려고 목을 매 죽자, 딸이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현지 간부는 허락 없이 집에 멋대로 돌아갔다며 딸을 마구 구타해 평생 불구자로 만들어버렸고, 딸에게 어머니의 시신을 먹어도 상관없다고 말하고는 시신이 부패하도록 며칠 동안 방치했다.
1959년 가을, 신양지위는 민병대를 동원하여 각 현의 집들을 수색하여 농민과 말단 간부가 숨겨둔 식량을 조사, 몰수했다. 그 과정에서 1만여 명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비투회에서 자아비판해야 했는데, 이중 700명이 사망했다. 그 결과 신양 전 지역에서 당초 목표로 했던 10억 근을 넘어 식량생산량의 절반인 16억 근을 징수했다. 자체목표 달성의 성과는 처참했다. 신양 농민의 손에 남은 식량은 100여 근으로 불과 4개월 분량밖에 안됐고 일부 현에서는 3개월도 안 남았다. 이 탓에 신양은 1959년 겨울에 대재앙을 맞이하고 만다.

3. 참상


1959년 겨울, 남은 식량마저 바닥난 신양 주민들은 기아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공용 급식소들은 운영과정에서 수많은 폐단이 일어나자 문을 닫아버렸기에, 주민들은 도저히 음식을 구할 길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려 죽었다. 신양지위 서기 루셴원(路憲文)은 진실이 외부에 전해질까 걱정하여 각 현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농민들은 불을 피워 밥을 짓지 말고, 밖에 나가 밥도 구하러 나가지 말고,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지 마라.

또한 루셴원은 각 현에 민병대를 파견해 마을을 봉쇄하고 거리와 교통 요로에 관문을 설치해 피난민들을 '적성계급', '탈주범'으로 간주해 모조리 체포해 잔혹하게 고문했다. 이 때문에 1959년 겨울 동안 46만여 명이 피난하다가 체포되었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맞아 죽거나 수용소에서 굶어 죽었다. 농민들은 도망칠 곳도 없어 집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만, 극소수는 목숨을 걸고 화이허강을 건너 안후이성의 린취안과 부남 일대로 도망갔다.
많은 인민들은 허난성 정부가 재난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하여 허난성 위원회에 잇달아 편지를 보내 구조를 요청했으나, 이들은 모두 '우경 반동분자'로 규정되어 체포되고 비투회에 끌려가 모진 탄압을 받은 끝에 죽고 말았다. 허난성 서기 우즈푸(吳芝圃)와 신양지위 서기 루셴원은 만약 베이징이나 외부에 신양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수많은 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자신들에게 화가 닥친다고 내다봤다. 일신의 화를 피하고자 회의를 지속적으로 열어 공안부와 우체부에게 장거리 전화와 우편배달을 엄격하게 검열토록 하고, 식량부족으로 아사 직전에 몰린 이들의 편지를 일률적으로 압수했으며, 편지를 보낸 이를 추적하여 체포하게 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외부의 구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깨닫자 자체적으로 살아남고자 먹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뜯어먹었고, 급기야 시체를 물어뜯고 사람을 죽여 인육먹기까지 했다. 부모는 아기를 잡아먹었고 자식은 노인을 잡아먹었으며, 병에 걸리거나 불구가 된 이들은 자살을 강요당한 후 온 몸이 찢겨나갔다. 이런 참극이 벌어지는 때에 신양 정부 창고엔 식량 11억 근이 모셔져 있었다. 신양지위 부서기 장수번(張樹藩)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신양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지만 식량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정부 산하의 크고 작은 식량 창고에 가득찼다. 그러나 군중들은 굶어죽을지언정 식량창고를 약탈한 적이 없다. 이는 당과 피와 살로 맺어진 인민이 얼마나 말을 잘 듣고, 법을 잘 지키고, 당을 믿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 지도 간부는 인민에게 정말 부끄럽다.

그러나 신양 주민들이 식량 창고를 약탈하지 못했음은 법과 질서를 유난히 잘 지켜서가 아니라 그럴 기력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신양 정부로부터 이듬해에 심을 종자마저 빼앗기는 등 생존권을 철저하게 박탈당했고, 민병대가 각 현을 에워싸고 조금이라도 당에게 반항하는 자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니 어느 누구도 당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편, 신양지위 서기 루셴원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1959년 11월 황천현에서 차를 몰고 지구위로 돌아왔을 때, 루셴원은 부모에게 버려진 어린 아이들, 길가의 시체, 식량을 요구하는 군중들을 목도했지만 무시하고 지역공안부서에게 "도시 기관, 공장, 기업소에는 농촌에서 온 사람을 일체 수용하지 마라." 하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각 현 관청엔 총기로 무장한 경비대를 세우고 도로 요로에 보초를 세워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을 철저히 대비하며, 베이징에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이렇듯 루셴원 등 현지 간부들이 진실을 은폐하고자 총력을 기울이는 사이에 신양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신양 일대의 17개 현 중 일부 현의 비정상적인 사망건수는 몇 년간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 예를 들어 쓰핑현은 약 4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고 정양현은 8만여 명이 굶어죽었으며, 신채현에서는 10만 명 가까이, 한천현에서는 5만 6천여 명이 굶어죽었다. <식현지>는 식현에서 1960년 한해에 10만 7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식현 인구의 25%에 달한다. 또한 화이허강에 인접한 화이빈현에서는 연평균 4천 명이 사망했지만, 1960년에 스무 배가 넘는 9만 8천 명이 사망자로 기록되었다. 이 역시 현 전체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수치다.
당시 신양지위 부서기 장수번의 비서 위더훙은 화이빈현 출신으로 보름 동안 아버지, 어머니, 백부, 백모가 차례로 굶어죽었다. 장수번에 따르면 위더홍의 고향 마을 서쪽에서는 굶어 죽은 집이 절반 이상이었고, 시신을 치우지 못한 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상황이 심각한 쓰핑, 정양, 신채, 한천, 식현, 화이빈현 등 7개 현에서 52만 6천 명이 사망했고, 다른 10개 현은 현 당 평균 1만 명 이상이 사망해 총 사망자 수가 50만 명을 넘었다.
중공 내무부는 1960년 2월 신양에 사람을 파견해 재해 상황을 시찰하게 했다. 신양지위 제2서기 장수번으로부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증언을 듣고 즉시 상경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다. 위생부에서도 허난성 구시현위원회와 허난성 의료대가 연합하여 구신현에서 이미 5만여 명이 사망했다는 전보를 중앙에 보고했다. 내무부는 즉시 지도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국무원 비서장 시중쉰과 중앙 감찰위원회 둥비우는 보고서를 중앙 감찰위원회에 제출했다. 이후 당국은 보고서를 검토한 뒤 그해 7월 허난성 위원회를 개최하여 신양지위 제1서기 루셴원을 전격 체포하고, 신양 일대에 식량을 긴급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둥비우, 리푸춘 등이 신양의 상황을 조사한 후 베이징으로 올라와 당국에 보고하여 신양의 참극이 처음으로 중국 전역에 알려졌다.
신양지위는 허난성 위원회에 사망자가 38만 명이라고 보고했지만, 후에 중앙 당국이 추가로 조사한 결과 축소보고였음이 밝혀졌다. 1961년 1월 13일, 신양지구는 전체 인구 808만 6526명 중 107만 321명이 1959년 11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전체 인구의 13.2%가 사망했는데, 이 중 6만 7천 명은 민병대에게 맞아 죽었다. 2012년 난징대 연구팀은 기근으로 인해 출생하지 못한 인구와 기근으로 인한 도주자를 통계로 집계한다면, 신양 사태로 인한 신양 일대의 인구 손실은 약 125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4. 중공의 조치



4.1. '부패한 관료' 타도 운동


신양 사태는 명백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때문에 일어난 참극이었지만, 신양지위는 적성계급이 공격한 탓이라고 여겼다. 1960년 12월, 신양지위는 허난성 당위원회와 중앙 위원회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번 사태는 10년 전 토지개혁 때 그물망에서 빠져나온 부농들이 혁명 진영에 섞여들어가 세력을 회복한 뒤 복수하려고 인민의 삶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기에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토지개혁과 같은 교훈을 이루기 위해 철저한 민주혁명을 단행하여 지도부를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오쩌둥은 이 보고서를 전국에 배포해 '좋은 문건'이라며 널리 읽게 했고 신양 사태의 원인이 자신이 주도한 대약진운동 때문이 아니라 적성계급의 책략으로 말미암았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백만 명이 굶어 죽은 인재는 한쪽으로 밀렸고 기세등등한 민주혁명이 재개되었다. 마오쩌둥은 권력을 재탈환하라고 명령했다. 나라 전역에서 적성계급을 뿌리뽑기 위한 운동이 베이징에서 파견한 대표단의 뒷받침을 받으며 벌어졌다. 현장들은 쫓겨나거나 체포되고 간부 수천 명이 조사를 받았다.
한편, 신양 지역의 각급 관료와 인민공사의 간부 및 인민공사 공용급식소 회계사무장 20여만 명이 집결해 신양 사태를 야기한 적성계급을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로 인해 '반혁명 분자' 수만 명이 더 많은 가족들과 함께 적발되어 심한 박해를 받았다. 당시 대기근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악에 받친 채였기 때문에, 분위기는 반우파 투쟁 때보다 더욱 무서웠다. 이러한 부패간부 적발 운동이 끝난 후, 신양 지역의 간부 문제가 '근본적으로' 확인되었다.

1. '대약진', '공사회', '반복산' 중 '오풍' (과장 보고, 엉터리 지휘, 부과풍, 공산풍, 강제명령풍)을 일으키고 심각한 법률 및 규율 위반에 직면했다.

2. 가짜 '위성'을 마구 띄우고. 하급자는 상급자를 속였고 상급자는 하급자를 호도했다.

3. 일부 부패관련들은 횡령하고 재물을 더 많이 챙겼고 여성을 강간했다. 지주와 부농의 여인을 '계급투쟁'으로 위협했고 농민의 처녀에게 식량표 2근과 찐빵 몇 개를 주고 그 대가로 성관계를 맺었다.

이후 1960년 11월 3일, 정부는 주민들이 사유 텃밭을 보유하고 부업에 종사하며 하루 여덟 시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현지 시장을 부활시키는 등, 대약진 운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과거 상태로 되돌리는 조치를 취했다.
한편, 사태의 책임자인 루셴원은 1960년 11월 16일에 유기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에도 1983년까지 이런저런 자잘한 공직들을 지냈고 1993년에 사망.

4.2. '자본주의 곡물' 수입


중공은 1959년 대기근이 닥쳐 수많은 이들이 굶어 죽을 때에도 자신들이 식량을 풍족하게 수확했다고 선전하며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에게 막대한 양을 수출했고, 소련에게 빚진 돈을 갚기 위해 식량을 추가로 공출했다. 그러나 1960년 말, 마오쩌둥은 더 이상 이런 '허세'를 부릴 수 없음을 깨닫고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에게 '중국이 많은 농촌 지역을 할퀴고 간 유례 없는 자연재해를 겪는 중이라 더이상 식량을 수출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저우언라이천윈은 마오쩌둥을 설득해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곡물을 수입하도록 허락받고, 홍콩에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버마,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 서양 국가들과 협상한 끝에 1960~61년에 미화 3억 6700만 달러를 지불하고 곡물 600만 톤가량을 수입했다.
또한 중공은 은괴를 런던으로 보내었다. 1961년에는 대략 5천만-6천만 트로이온스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1550만 파운드어치인 4600만 트로이온스는 영국이 가져갔다. 중국은 이러한 거래를 통해 약 1억 500만 달러를 확보했다. 하지만 중공은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고 해외 화교들이 홍콩 은행에게 현금을 내고 쿠폰을 구입하게 한 뒤 그 쿠폰들을 국경 너머 굶주린 친적들에게 보내 곡물과 담요로 교환하도록 했다.
하지만 중공은 사회주의 우방들로부터 곡물을 수입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식량을 보내주지 못하게 된 이상 '''체면 때문에''' 곡물을 달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조 요청을 소련이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도 소련은 인도적 차원에서 무이자 환어음 형식으로 곡물 100만 톤과 설탕 50만 톤을 중국에게 인도하고 비용은 여러 해에 걸쳐 상황받는 조건을 제안했지만, 중국은 곡물은 거절하고 설탕만 받았다. 또한 흐루쇼프는 1961년 4월 중국 외교관 예지장에게 자신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목격했기 때문에 중국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한다며 곡물을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해줄 의향이 있다고 제안했지만, 예지장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 정중하게 거절했다. 중국은 적십자의 지원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편, 중국은 대기근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 후한 원조와 값싼 차관을 제공해 국제적 이미지를 가꾸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소련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싶은 마오쩌둥의 의중이 담긴 조치였다. 마오쩌둥은 알제리와 카메룬, 케냐와 우간다 같은 나라들의 공산 혁명가들을 원조하면서 전투적인 혁명 이론을 선동했다. 이 때문에 버마는 8400만 달러, 캄보디아는 1120만 달러, 베트남은 1억 4200만 루블, 알바니아는 1억 1250만 루블을 원조받았고, 중국의 해외 원조 금액은 총합 4억 2천만 위안에 달했다.
당연히 중국 국민들은 이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1960년 9월 쿠바에 대량의 식량을 보내자, 광저우의 공장 노동자들은 '우리가 먹을 것도 부족한데 왜 쿠바에 수출하는가?' 하며 항의 시위를 벌였고, 간쑤성에서도 주민들이 마오쩌둥이 쿠바로 쌀을 보내기 때문에 자신들이 굶주려야 한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러한 비판을 묵살했고 주민들의 반발을 총칼로 억눌렀다.
물론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각종 중공제 공산품과 식량은 홍콩의 백화점에서 헐값에 팔리고 있었다.

5. 신양 '사태'?


공산당 지도부가 대기근의 참상을 처음 맞닥뜨린 곳은 신양이었다. 지도부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이 참상의 책임을 반혁명 분자 탓으로 돌렸고 반동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는 운동이 중앙으로부터 중국 전역에서 벌어졌다. 이후 당 내부에서 신양 사태와 관련한 보고서들을 작성했는데, 여기에 안후이성 화이허강 옆 평야지대에 자리한 평양현의 이름을 딴 '평양 사태'가 추가되었다.[1] 두 지역에 관한 당 보고서들을 모은 책자들이 1980년대에 유포되었고, 1989년에는 천안문 사태의 여파로 600쪽짜리 문서가 중국 밖으로 흘려나오기도 했다. 이 문서들이 이후 이 시기를 다룬 연구 대부분의 토대가 되었고, 신양은 대기근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1961년 신양 보고서를 논의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회의를 주최한 현지 간부들은 신양 '사태'라는 용어에 지극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신양 사태는 자기네 뒷마당에서 벌어진 일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사태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실제로 이 시기에 주민의 30% 이상이 목숨을 잃은 농촌 마을의 수는 대단히 많았고 일부 촌락은 전체가 사라졌다. 또한 중국 각지에서 현의 인구 10%가 사라진 곳이 즐비했으며 일부 지역은 현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 당시 중국 각지에서는 신양 사태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신양보다 더한 비극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중국-홍콩 접경지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난민들이 몰려들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 중앙정부가 유독 신양을 부각함은 신양이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했지만 대기근의 책임을 적성계급에게 돌림으로써 자신들이 지어야 할 책임을 회피하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6. 참고 문헌



[1] 이곳에서도 주민 33만 5천 명 가운데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