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법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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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法高爐
중국어: 土法炼钢/土法煉鋼
1. 소개
2. 전개 과정
3. 후폭풍


1. 소개


그 유명한 제사해 운동을 능가하는 마오쩌둥 주연의 대참사.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으며, 대약진 운동에서 중국인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데에는 토법고로의 악영향이 지대했다.[1]
토법고로란 "전통적인 기술[2]로 만든 작은 괴[3] 철로에서 농민들이 강철을 직접 생산하자"는 운동이다. 이는 거대한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을 대량 생산하기에는 기술력도, 자본도 모자라니 인해전술로 따라잡자는 것이다.

2. 전개 과정


중국은 건국 이후 여러 부문에서 소련벤치마킹하는 정책을 폈고, 마오쩌둥도 "짧은 기간에 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탈바꿈한 소련의 경로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소련에서 많은 원조를 받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개발 계획을 실시했으나, 니키타 흐루쇼프가 취임하고 서방과의 화해를 추진하는 등 개량주의적 변화가 일자 1950년대 후반 무렵 소련과 관계가 틀어졌다.
결국 제대로 된 우방이 남지 않게 되자, 다급해진 마오쩌둥은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최대한 빨리 발전시킨다는 미명 하에 중공업 생산력을 늘리려 했고, 가장 대표적 케이스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을 따라서 국가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시행된 정책이 바로 이 '토법고로' 정책이고, 이에 9천만 명이나 되는 농민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일자무식인[4] 당시 농민들은 강철 생산은 커녕 담금질이 뭔지도 몰랐다. 대장장이도 아니고 농민들에게 다짜고짜 강철을 만들라 시켰으니 당연히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전문기술대학 졸업생들을 데리고 해도 애로 사항이 넘쳐나는데, 전문기술이 없는 사람들에게 용광로를 던져주면 뭘 하겠는가. 전통 방식으로도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대로 불순물을 제거하고 적절한 비율의 탄소를 주입해야 하는데, 이 점이 매우 까다로워 예부터 대장장이 같은 야금 전문가들이나 만들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희망적인 전망제시를 통해 "이러한 경제건설이 잘 이뤄지면 중국영국프랑스를 곧 따라잡을 것이고 곧 우리도 잘 살 수 있게 될 거다"라고 열심히 선전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국가경제 건설에 이바지한다고 뿌듯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이건 1차 5개년 계획이 그런대로 성공했기 때문에 2차 5개년 계획도 성공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이 당시의 일화들을 보면 참혹한 결과에 비해 사람들이 싱글벙글하게 작업해서 황당한 것들이 많은데, 부녀자들이 생산증산에 도모한답시고 기쁜 마음으로 머리카락을 잘라내서 그 머리카락을 연료로 쓰게 한다거나 하는 일화들도 있을 정도였다.
현대적인 제철소에서도 제선 및 제강 과정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산업용 강철을 만들어 사용하기 위해서는 해당 탄소 함유량을 2.11% 이하로 줄여야 되고, 2.11% ~ 5%에서는 주조용 철인 주철이 되어버리며, 5% 이상 넘어버리면 산업용으로는 못 쓰는 철이 되어버린다. 철에서 탄소와 불순물을 걸러내는 이 과정은 산소의 주입량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걸 알고 시켰을 리가 없다.[5]
철 안의 특정 원소가 0.1%, 민감한 불순물이라면 0.001%만 차이 나도 똥철이냐 양품이냐가 결정되기도 한다. 현대의 제철 기술은 그야말로 인류가 철을 생산한 이래 수천 년간 쌓은 철기공들의 노하우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정책이 시행되던 당시에도 철강 전문가들이나 기술자들은 이런 멍청한 짓에 대해서 개탄을 하고 있었지만 마오쩌둥의 성격상 이러한 항의나 충고들은 그냥 묵살되었고, 기술자들이나 전문가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라도 입을 열면 자기 목이 날아가니까. 이런 노하우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그냥 녹여서 재활용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니 이미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술할 관리 문제 등 다른 문제가 겹쳐서 더 큰 실패가 되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높은 곳에서 명령이 내려온 데다 농민들은 하라는 대로 무조건 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결국 농민들은 고철들을 주워다 토법고로에 집어넣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아무리 고로에서 나온 의 품질이 저질이라 해도, 그냥 쓰레기보단 써먹을 수는 있는 쓰레기가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윗선에서는 매달 강철 얼마씩을 만들라고 할당량을 정해줬고, 못 채우면 여러 불이익이 가해졌다. 그런데 당시엔 식량을 배급제로 줬던지라 배급량이 깎이는 등 페널티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굴러다니던 고철은 당연히 금방 끝을 보였다.
덕분에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제대로 잘 만들어져 있는 멀쩡한 각종 농기구와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까지 토법고로에 처박혔다. 여기에 인민공사가 설립되자, 개인들이 식사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며 집에서 쓰던 식기구들도 토법고로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모자라면 양철 지붕까지 뜯어냈다. 억지로 고철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금속이면 되는 대로 용광로에 처넣은 것이다. 주객전도가 되어버린 셈인데, 심지어 이들 각종 농기구와 농기계들은 대부분 동유럽이나 소련을 비롯한 외국에서 비싼 값에 수입한 것들이었다.

3. 후폭풍


국가 기획 위원회는 베이징에서 생산한 전체 철강 중 1/5만이 1등급 품질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은 품질이 2등급이나 3등급이었고 20% 이상은 완전한 불량품으로 분류되었다. 허난성에서는 공장에서 제조된 아예 모든 철강이 3등급이거나 불량품이었다. 철강 생산 거대 기업들이 대량으로 내놓은 질 낮은 자재들은 관련 산업들의 전 범위에 파멸적인 연쇄 효과를 일으켰다. 안산에 있는 거대 철강 복합 기업체 '안강'에서 1957년에 생산된 선로는 평균 1등급이었으나 1960년이 되자 안전 기준에 맞는 철강이 1/3 이하로 떨어졌다. 선로의 품질이 떨어지자 철도망의 여러 부문이 도저히 열차를 감당할 수 없어 폐쇄되었으며 몇몇 구간들은 아예 붕괴되었다.

불량 레일과 마찬가지로 불량 철들은 일상의 물건들을 위험천만할 정도로 약화시켰고 질 낮은 소비재는 중국 사회주의 문화의 표상이 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시계가 아무 때나 알람 소리를 울렸고, 금속 대야는 표면에 금이 간 채로 팔렸으며 우한에서는 지퍼가 걸리고 부엌칼이 휘어지며 농기구의 날이 자루째 뚝뚝 부러져버렸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불량품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웃고 부정했다.

"반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가 거부한 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득이다."

그렇지만 반품 문화는 군수 산업도 치명적으로 부패시켰다. 허룽 원수의 절박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선 병사들의 돌격소총이 발사되지가 않고, 선양시에서 생산된 제트 전투기들이 제대로 날지를 못했으며 908호 공장에서는 10만 개 이상의 방독면들이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심지어 핵무기 개발 총책임자 녜룽전 원수조차도 핵개발에 사용된 무선 기기와 계측기의 극악한 품질에 대해 불평했는데 기기 안쪽에 먼지 입자가 새들어가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문제는 이렇게 생초보인 농민들을 억지로 굴려서, 저승에서 고대 중국인들이 뒷목잡고 드러누울 수준의 한심한 메커니즘을 가진 괴(怪)철로로 금속을 녹여내서 만든 결과물은, 이라고 할 수 없는 똥철이었다는 점이다. 액체상태인 철의 탄소 함유량을 조절하여 강철을 만들어내는 초강법을 인류가 처음 발명한 시기가 바로 진시황이 지배하던 시기의 중국이었는데도, 기술이 훨씬 발전했을 1950~1960년도에 이런 삽질을 하고 있었으니, 저승에서 진시황이 마오쩌둥을 두들겨 패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하다못해 똥은 비료라도 만들 수 있지, 이런 똥철은 그 자체로는 전혀 사용할 용도를 찾을 수 없는 쓰레기 그 자체였다. '명색이 금속인 철인데 아무리 저질이라도 써먹을 방법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불순물이 심하게 섞인 철은 손으로 잡고 살짝만 힘을 줘도 파괴된다. 말 그대로 '똑'하고 부러져버리면 양반이고, 심한 경우는 모래처럼 부스러지기도 한다. 차라리 암석이나 나무로 농기구를 만드는 것이 더 나은 수준. 저런 조악하기 그지 없는 고로에 별다른 처리도 하지 않은 고철을 마구잡이로 집어넣는 건, 그나마 멀쩡한 에다가도 불순물을 일부러 섞는 것과 매한가지다. 덕분에 만들어진 산물 중 40%는 그나마 쓸 수 있는 강철이지만 60%가 똥철이라 다시 재처리해야 했다.
근데 저기서 나온 똥철은 원래 없던 불순물까지 잔뜩 섞인 상태라 재처리하려면 제대로 된 현대식 고로(용광로)에서 액체 산소까지는 못 가더라도 최소한 고품질 코크스같은 연료를 사용해서 녹인 다음 불순물을 제거해야 하는데, 저렇게 용광로에서 재처리 과정을 거쳐도 똑같은 용광로를 거쳐 제대로 생산한 강철보다 질이 낮으니 경제적으로 당연히 수지타산이 안 맞고, 또 불순물 제거 과정도 철광석에서 바로 철을 제련해내는 것보다도 복잡하다.

마오쩌둥이 "중국이 15년 안으로 영국추월하리라"고 큰소리쳤던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베이징은 우방국들로부터 아낌없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크레인, 대형 트럭, 발전기, 모터펌프, 압축기, 수확기, 콤바인 등 모든 것이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이앙기파종기는 429대에서 2,241대, 트랙터는 67대에서 2,657대, 대형 트럭은 212대에서 19,860대로 급증했다.

(중략) 1961년 루산 총회에서 중남부 지역 서기 리이칭은 당 지도자들에게 "모범 성 허난성에서 농기구 14만 톤이 불길 속에 던져졌다"고 보고했다.이러한 손실과 방치로 파괴된 것을 합산하면 총계는 전체 농기구의 최소 1/3에서 절반까지 이른다. 산둥성에서는 대약진 운동 1년 만에 전체 농기구의 1/3이 쓸모없어졌다. 광둥성에서는 1961년에 이르자 전체 필수 장비의 40%가 사라졌는데, 이는 장비 340만 개가 손실되었다는 뜻이다. 남은 것 중 1/3은 부서진 것이었다. 허베이성에서 물레방아 숫자가 절반으로 주는 동안 손수레도 50%감소했다. 저장성에서는 전체 수도 펌프의 절반, 전체 파종기의 절반 이상, 그리고 전체 탈곡기의 1/3이 복구불능으로 파손되었다.

즉, 현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윗선에서 무턱대고 할당량만 과도하게 부여해준 덕분에 계속 보여주기식으로 안 만드니만 못한 똥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프로젝트로 강철을 생산하려는 이유가 '생산된 강철로 농기구 등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단기간만 시행해서 굴러다니던 쓸모없는 고철만 강철로 바꿔서 우려먹는 선에서 끝났다면 대박은 못 쳐도 최소한 쪽박은 안 칠 정책으로 끝났겠지만, 장기적으로 시행하면서 계속 만들어낼 것을 요구하니, 방금 막 공장에서 출고된 따끈따끈한 새삥 농기구마저 토법고로에 들어가서 똥철로 윤회하는 막장 행정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이런 토법고로로 1958년도의 산업생산량은 전년도에 비해 무려 55%나 폭증시키며 수치상으로 성공한거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불량품을 대량으로 양산시키게 만들며 중국의 공업체계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사실 토법고로가 100% 완벽하게 돌아간다고 가정해 보아도, 제철소의 고로에 비해서는 효율성이 한없이 낮았다. 연료 사용 측면에서 볼 때, 토법고로는 크기도 작고 단순한 흙 벽돌로 쌓은 용광로다. 단열처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크기가 커다란 고로보다 상대적으로 열 에너지를 대기에 쉽게 빼앗기고, 체계화된 제철소와 달리 열의 재사용을 위한 시스템도 없었다. 따라서 철광석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연료의 양이 멀쩡한 용광로에 비해 훨씬 많았다.
웃기게도 이 정책이 시행된 시기, 토법고로에 모든 연료가 투입되어 버려 정작 국민정부 시기에 설치된 우한시의 근대형 제철소[6] 온갖 꼴같잖은 이유로 강제로 빈둥빈둥 놀아버리며 가동은 커녕 제대로 직원도 출근하지 않아, 마오쩌둥이 바랐던 중공업 성장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악순환만 있었다면 모를까, 괴철로의 불을 피우기 위해 인근 산천의 나무란 나무들을 모두 벌목해 땔감으로 썼으며, 그래도 모자라자 과수원의 과수들까지 싸그리 벌목해 땔감으로 썼다. 때문에 이렇게 생겨난 민둥산들은 비가 오면 토사가 씻겨 나가 산사태를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쓸데없는 정책 때문에 9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은 해야 되는 추수는 안 하고 모두 고철 찾으랴 땔감 찾으랴 돌아다녀야 해서 논밭의 작물들을 그냥 썩혀버렸다. 당대에 유행하던 첸쉐썬의 '심경밀식' 파종법[7] 특성상 제대로 수확을 했어도 수확량이 형편없었을텐데 그마저도 못한 것이다.
어차피 추수해도 인민공사(人民公社, 집단농장)에 바쳐야 해서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논밭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고, 작물들이 잘 자라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자신의 농작물 수확 및 소유 권리를 박탈하고 강철을 생산하도록 국가가 강제하므로, 당연히 국가가 농작물의 수확에 관련된 의무를 타인에게 부여하고, 그렇게 수확된 농작물을 직접 국가 주도로 분배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황된 망상에 빠져있던 마오쩌둥은 농민들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했고, 결과는 대참사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병신짓들과 자연 재해로 대약진 운동 기간 굶어 죽은 사람들은 3천만~5천만으로 추정된다. 결국 마오쩌둥도 그 끔찍한 결과를 보고서는 늦게나마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그나마 중국의 인구가 워낙 많고 그 당시 출생률이 높아서[8] 이런 엄청난 인구 손실을 감당했지, 당대 한국이나 일본 같았으면 인구의 급감으로 인해 그대로 나라가 멸망했을 정도의 엄청난 위기였다.
마오쩌둥이 토법고로 운동의 영감을 얻은 것은, 중일전쟁 기간 중 홍군이 일본군89식 척탄통을 전통적인 용광로를 사용하여 다수 복제해 냈던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용광로에 들어간 들은 굴러다니던 고철이나 철광석 원광이 아니라 일본군의 교통망을 파괴하기 위해서 절단한 철도의 레일이었다. 이미 정제된 강철로 만들어진 것을 다시 녹여서 무기로 만든 것인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던 마오는 여기서 비약을 한 것이다.
관련 작품으로는 옌롄커의 소설인 <사서(四書)>가 대표적이다. 토법고로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또한 장예모 감독의 영화인 인생은 토법고로를 포함한 마오의 전반적인 실책을 다루는 작품으로 참고하면 좋다.[9]
심지어는 주소련 중국대사관에서도 이런 또라이 짓거리를 벌이는 통에, 주소련 중국 대사관에서 고로를 만들고 불을 피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소련에서 "재네 무슨 기밀문서라도 소각하는 거 아니냐" 며 난리가 났다가[10] 전후사정을 전해듣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1]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희대의 망언 때문에 참새를 죽인 게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진짜 원인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지만, 사실 참새를 죽인 건 단기적으로는 악영향이 거의 나타나지도 않았고, 장기적으로 해충이 늘어났다고 해도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을 수준에는 전혀 못 미친다. 제사해 운동의 진짜 폐해는, 참새를 잡은 것보다 참새 잡는다고 농사지을 인원들을 엉뚱한 데 동원한 것이다.[2] 토법. 북한어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단어이다.[3] 塊-덩어리 괴. 금괴, 은괴 할 때의 괴가 이 철자를 사용한다.[4] 1949년 중국의 문맹률은 80%에 달했고, 1950년대 중반기 당시에는 국공내전기때보다 문맹률이 낮아졌지만 중국이 위낙에 큰 나라이다보니 교육체계의 정비가 완전히 이루워지지 않은 탓에 문맹률이 높기는 매한가지였다. 실제로 중국에서 문맹률이 괄목하게 하락하게 될 시기는 1960년대 중반~1970년대의 일이었다.[5] 조금이라도 대학에서 제철 공정을 맛본 사람이라면, 제철이라는 과정이 단순히 철광석을 녹여서 다시 굳힌다고 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 철이라고 불러야 될 정도로 애매한 것도 있지만, 현대 제철에서는 수백 ~ 수천 가지 강철을 정교하게 분류하며, 그 수천 가지 중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엄청난 노하우와 공정이 필요하다. 지금도 중국이 철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지만 괜히 한국포스코가 그들 사이에 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기술력에 의한 품질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6] 거슬러 올라가면 청나라 말기의 중신 장지동이 건설한 유서깊은 제철소로 일본도 탐을 내어 21개조 요구에서 경영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던 곳이다.[7] 대충 설명하자면 같은 면적의 에 심는 모종의 간격을 절반으로 줄이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2배로 늘어난다는 논리에 착안한 파종법이다. 일단 수학적인 계산 해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효율적인 농업이었다면 범지구적으로 통용되는 농업의 역사 속에서, 어딘가 최소한 한 국가가 그런 농법으로 성공했을 것이고, 모든 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주변의 비슷한 환경의 국가들은 전부 그런 농법을 시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경밀식 파종법으로 벼를 심을 경우, 단위 면적당 수확량 자체는 일단 확실하게 늘어나지만, 기존보다 가까이 붙은 벼들이 서로서로 생장을 방해하면서 병충해 발생이 쉬워지고 농약 사용량이 증가한다. 그리고 생장을 방해받는 벼들은 나중에 수확했을 때 이 되는 낟알을 줄이고 잎을 더 늘려서 광합성을 하고, 얼마 안 되는 낟알마저 같이 생장을 방해받아 영양가와 맛이 기존 대비 저하된다.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볏짚의 수확량만 늘어나고 얼마 안 되는 쌀의 품질조차 매우 떨어지게 되는데도, 그 얼마 안 되는 쌀이나마 제대로 수확하기 위해서 기존 파종법 대비 2배 이상의 농약이 들어간다. 설명이 길었지만 쉽게 말해 가성비 최악의 파종법.[8] 대약진 운동 이후 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초반 당시에 중국의 연 출생아 수는 2,100만~2,800만 명에 출산율은 5명 대선을 기록했고, 2010년대에는 연 1,600만 선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출산율은 1.5~1.6명대로 떨어졌다.[9] 영화 내에서 촌장은, 인민을 갈아 생산한 그 똥철로 대만을 정복하고 부강해질 거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이 와중에 주인공 푸궤이의 아들 요우칭은 밤새 용광로에서 일한 후 지쳐 학교에서 쪽잠을 자다가 애먼 교통사고에 휘말려 요절한다. 얄궂게도 차량 운전사인 춘셩이 푸궤이와 같이 전에 유랑극단을 하던 아는 동생이었다.[10] 대사관에서 기밀문서를 소각한다는 것은, 보통 선전포고 직전에 취하는 조치이기 때문. 게다가 중소결렬로 인해 당시 소련과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난리가 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