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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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는 1929년에서 1933년까지의 지역별 인구감소율 표.
1. 개요
2. 과정
3. 원인에 관한 고찰
3.1. 스탈린이 고의로 일으켰다는 주장
3.2. 조직적인 학살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
3.2.3. 경제적 계산의 착오로 인한 재앙
4. 참혹한 실상
5. 이후의 전개
6. 다른 지역에서는 어떠하였는가?
6.1. 카자흐스탄 대기근
6.2. 1921~1922년 타타르스탄 대기근
7. 사과 및 보상 요구
8. 기타
9. 창작물에서


1. 개요


  •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Голодомор[1]
  • 영어: The Holodo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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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은 시체 옆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지나가는 행인. 어디 산간 벽지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당시 행정수도인 하리코프에서 1933년에 벌어졌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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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사진이 찍히기 불과 2년 전의 하리코프의 풍경.
1932년~1933년소련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이다.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라는 명칭으로도 널리 불리우며, 의미는 '''기아를 통한 대량살인(Mass killing by hunger)'''이다. Holodo는 기아란 뜻이고 mor는 대규모 죽음이란 의미다.
대기근이 미친 피해 정도는 구소련의 고난의 행군이라 할 만큼 끔찍했다. 기록이 부실하여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니얼 퍼거슨 스탈린의 대숙청을 연구한 로버트 콘퀘스트 등 반공 인사들은 최소 1100만 명에서 많게는 1500만 명의 인구 감소 결과가 있었다 주장한다. 이는 출산손실을 감안한 수치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유산 및 영양결핍으로 인한 신생아 출산 감소까지 감안한 수치인 셈.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과 맞물리는 까닭에 정치적으로 계획된 대기근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학살에 확실히 무게를 두는 분위기이다. 학계에서는 여전히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2. 과정


소련의 스탈린은 신경제정책(NEP)으로 느슨해진 식량 생산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자, 사회주의적 집단화 정책으로 통제를 극대화 함과 동시에, 계획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려 했다. 하지만 자영농들은 자기들이 힘들여 일군 농사의 열매들이 자기들이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넘어가게 되니 당연히 반발했고,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의 큰 목표였던 집산화 자체도 느리게 전개되었다. 곡물의 생산량도 당국의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2] 넓어 전통적으로 자영농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집단화 정책과 함께 곡물 생산량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쿨락(부농)들을 소련 정부가 때려잡기 시작하자 생산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집단화 정책이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재앙적인 효과를 초래하게 되자[3]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곡물 수탈 계획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자 했는데, 집단화로 워낙에 농업 생산력이 망가져버린 까닭에 우크라이나의 경우 수탈량을 원 계획에서 3분의 1까지 줄였는데도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축업 문제 역시 심각했다. 가축을 기르는 체제가 갑작스레 집단화되자, 농업지식이 전무했던 공산당원들은 온갖 문제에 부딪쳤다. 거기에 사료도 부족했고 날씨마저 돕지 않았다. 그리고 또 원시적인 농업에서 밭을 갈던 말 등이 기아로 쓰러지면서 다시 파종 등 농업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기근이 참혹했던 돈 강 유역에서 자란 러시아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그 군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말 그대로 '''"남 줄 바엔 잡아먹자"'''였다.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Гремячий лог)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種牛)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 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약 200푸트[4]

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별별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을 죽였다. 그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꾹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5]

M. 숄로호프, 뒤엎어진 땅. (M. Sholokhov, The Soil Upturned, 영어본, Moscow 1934), 152면)

이 당시 우크라이나는 아직 기계화 영농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마소와 같은 가축은 필수적인 농사 수단이었다. 가축 수의 절대 부족은 바로 농업 생산량의 격감으로 이어졌고, 식량 부족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1932년경에는 농작물의 작황 또한 좋지 못했는데 고르지 못한 날씨와 농업 사보타주가 겹친 결과였다. 이 지경에서 국가에서 할당한 징발량을 억지로 채우고 나면 당장 끼니를 때울 식량마저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러한 사태를 가장 집중적으로 직면했던 국가가 바로 우크라이나였다.
이 대재앙으로 인해 1931-33년 사이 소련 전역에서 식량 부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사망자는 '''700만에서 1100만'''으로 추정된다.[6] 기근에 이은 전염병까지 포함이며 이와 별도로 200만명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로 추방 쿨라크로 몰려 350만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한 걸로 추정한다.
한편 우크라이나 법원에서는 이 대기근이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학살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종 청소였는지, 아니면 소련 농민들을 손봐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유도된 대기근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스탈린이 저지른 정책 실패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도와도 관련이 있어서 반러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소련의 인종 청소 시도라고 법적으로 명시되었다가, 친러파가 집권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해마다 공식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

3. 원인에 관한 고찰



3.1. 스탈린이 고의로 일으켰다는 주장


우크라이나, 그리고 그 외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집단살해로 인정한 국가들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를 잠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적백내전 당시 백군의 주요 기지가 되어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적군이 점령해 소련의 영토가 될 수 있었다.
대기근 당시 소련의 상황을 묘사한 《Havest of Sorrow》라는 도서에 의하면, 몰수한 식량을 서쪽으로 운송하여 바다에 버리거나 그대로 썩게 방치시켰다는 서술이 있다.[7]
집단화 정책에 대한 저항이 가장 심한 곳은 우크라이나였다. 후에 스탈린이 '''"독소전쟁보다 농민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다"'''란 표현을 하게 할 정도의 반항을 했으며, 그 방법도 '''집단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미리 파손''' 하는 것이었다. 당장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육류와 낙농, 채소 같은 농산물의 생산이 급감하여 1960년대에 흐루쇼프가 '''"아직도 계란 생산량이 대기근 이전보다 못합니다"'''란 말을 할 정도였다.
또한 대기근 때문에 원래 수탈량의 1/3만 걷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수탈량 산정 자체가 과도하게 높았다. 뒤늦게 1/3으로 줄여도 현지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이 없어지는 셈. 게다가 소련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 달리 철저하게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농부가 수확한 식량을 농부에게 남겨줄 최소한의 식량을 남겨주지 않고 전부 가져가버린 것도 한몫했다.'''
또한 대기근이 일어나기 전에 스탈린 정권이 농촌이 우익적인 풍토를 지향한다며 이를 배격하는 사건이 벌어진적이 있는데, 대기근이 발생할 당시 도시와 촌락 사이에 엄청난 사망자 차이가 있었던 등의 이유로 고의적 방치라는 주장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정책이 실패했으면 시정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에서 최소한의 대처도 마련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인위적인 참사라고 보는 또 다른 견해로는, 러시아를 맹주로 한 15개 공화국 구성체인 소련에서 우크라이나는 분리독립의 원심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나라였다. 유독 격렬한 농업 집단화에 대한 반발이 그 예시라고 할수있는데 모스크바의 집권 세력으로서는 농업 집단화 완수와 혹시 있을 수 있는 각지의 분리주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소비에트 측은 대기근의 존재를 비밀리에 부치면서 대기근이 극심한 우크라이나, 북캅카스, 돈강 유역에 대한 출입을 봉쇄하기도 했는데 외부 인사의 유입뿐 아니라 굶주린 농민들이 외부로 나가는것 또한 통제했다, 이들의 이주나 탈출을 용인한다면 지역이 공동화되어 식량 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차를 타고 외부로 탈출하려던 어린이들이 당국에 체포되어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농촌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영양실조로 곧 사망했다고 한다.

3.2. 조직적인 학살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


대기근의 책임이 소련 정부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이와는 별개로 따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농업 집단화가 농업 생산력에 타격을 주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기 위해서 시행된 정책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적 경제원칙에 따라 경제구조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정책 실패인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소련 정부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대기근을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근거 제시가 필요한 일이며, 이 근거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소련 정부의 책임임을 주장하는 근거와는 별개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소련의 민족 정책이 유화적이고 정치적으로 소련 시스템에 대한 소속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민족적 자치를 주장했던 '피에몬테 원칙'[8][9]에서 더 강경하고 획일적이며, 다양한 민족 의식보다 국가 중심의 새로운 소비에트 민족주의 주입을 추구하게 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우크라이나 지식인과 엘리트들 또한 집단 탄압 받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초이자 최대의 민족 역사학자였던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가 1931년 모스크바로 강제송환 된 이후 34년 강제 구금 중 사망했고, 미콜라 흐비로비, 발레리안 삐드모힐늬, 레스 쿠르바스 등 소위 1920년대의 우크라이나 르네상스(Розстріляне відродження)를 주도했던 문인들 또한 대거 처형 당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당국의 탄압은 대기근과는 전혀 별도의 이유와 과정으로서 진행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한 사람들 입장에서 그 원한과 고통의 기억이 학술적으로 섬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어도 우크라이나측에서는 스탈린 치하에서 당한 고통을 명백히 자신들의 민족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로 기억하고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반론 주장도 있다.
집산화 정책을 진행하던 소련 정부의 의도 자체가 학살은 아니었다는 반론은 일단 크게 세 가지가 있다.

3.2.1. 도시화


첫 번째로는 당시 소련 정부가 농산물 수출 외에는 외화 소득원이 부족했고, 동시에 산업화를 위해 위해 의도적으로 가족 경영 형태의 농촌 경제를 붕괴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농업 국가가 산업화되기 위해서는 토지, 자본,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농촌 사회를 해체시키면 도시화와 공업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토지와 노동력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산업 기반이 부족한 나라는 주로 농민에 대한 중과세로 투자 자본을 마련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정부가 의도한 것이든,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졌든 산업혁명을 위해 필요한 저렴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농촌 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을 거쳤다. 여기에 도시 노동자들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농촌을 빚이나 중과세로 옭아매고 농산물을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도시로 강매시키는 과정이 추가된다.
영국의 경우 인클로저 운동이 토지의 사유화와 그에 따른 농업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농촌 인구가 급감했다.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는 1870년대 가뭄 와중에도 식량이 부족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식량 자원을 이동시켰고 이 과정에서 2천만여 명이 기근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빈곤 문제로 각지로 흩어진 인도인 인구는 이주노동자 형태로 영국 해외 식민지의 철도건설이나 플렌테이션 운영 등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작용하자면 우크라이나 대기근 역시 1870년 인도 대기근과 마찬가지로 산업화를 위한 농촌 해체 과정에서 관료들이 무책임과 인명 경시 때문에 굳이 발생하지 않아도 될 기근 사망자가 폭증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며,[10] 고의적인 학살로 단정짓기는 힘들어진다.
나고 자란 전통 사회가 붕괴되어 생존과 경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산업화의 주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대규모 잉여 노동 인력를 만들어 내기 위해 농민들에게 불공정한 정책을 강요하고 전통 사회를 파괴한 건 19~20세기에 들어 1차 산업 중심의 농업 국가에서 산업화 체제로 넘어 간 나라라면 모두 다 한번씩 겪은 성장통이다.[반론] 물론 저러한 '''농민과의 전쟁''' 과정에서 공권력의 무력을 통해 문자 그대로 전쟁에 가까운 억압을 하면서 이뤄낸 것이 문제이지만 그것은 민족 탄압과는 다른 문제이다.

3.2.2. 계급투쟁


우크라이나의 체르노젬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소출이 높던 지역으로 소련 내 다른 지역보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자가 소유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농업 집산화에 대한 저항도 훨씬 극심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소련의 경제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 초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정책은 집산화를 중심으로 했다. 즉, 공장을 국유화한 것처럼 농토도 국유화해야 한다는 것이 소련 정부의 입장이었다. 콜호스가 가족 위주 소농 경영보다 농업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소련 간부들도 잘 아는 내용이었으나, 소련 입장에서는 농업 생산성을 희생해서라도 소련 사회의 대대적인 개편과 산업화를 위해 농업 집단화를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 입안과 미숙한 실행능력으로 인하여 끔찍한 참극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본다면 소련 정부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각각 대의로 여기는 바가 달랐기에 충돌이 벌어진 것이며, 이는 계급투쟁이 맞다. 원래 20세기 초중반의 공산주의 국가 성립 과정에서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현실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사회적 소유관계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국유화에 반대하는 집단을 상대로 벌어진 것들이었으니까. 이러한 관점을 채용하자면 대기근과 이에 따른 우크라이나의 집중적 피해는 그 해당 지역이 계급 투쟁 과정의 부작용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학살이 된다.[11]

3.2.3. 경제적 계산의 착오로 인한 재앙


세 번째로는 소련의 경제적 손익을 계산했을 때 대기근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정권의 주요 곡창이자 국가 방위의 최전선이며, 이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고 식량 생산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그 피해는 우크라이나에 국한되지 않고 전 소비에트 연방이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고의적 학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소련 정부는 굶주린 우크라이나에 공급할 식량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봉쇄하여 주민들을 말려죽였다는 것인데, 식량이 넉넉한데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한 것이라면 당연히 다른 지방의 식량 공급은 원활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비에트 연방 전역에서 기아가 발생하고 있었다.'''[12] 대기근이 발생한 시기에 소련의 대외 식량 수출량이 32%로 줄어든 것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집산화 저항에 대한 주장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이 대기근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주요한 반증이다.
또한 1930년의 추수량은 전년, 즉 1929년 대비 37%가 증가한 전례없는 대풍작이었다. 유례없는 추수량에 고무된 소련의 당 관료들은 곡물 생산 목표치를 매우 높게 잡았으나, 1931년의 추수는 작황이 좋지 않았다. 무리한 수탈이 지속되지 않으면 당에서 설정한 목표치를 달성할 수 없었고, 겨우 1930년과 그럭저럭 비슷한 수준의 추수량을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 진행 중이던 제 1차 5개년 계획에 의해 급속도로 성장하던 도시 인구의 식량 수요량은 매년 15%씩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높았다고 주장되는 수탈량은 사실은 오히려 불충분한 양이었다.
대충 정리하면, 한쪽은 정부의 식량 공출 자체는 타 지역에도 차별 없이 적용된 것이며, 소련의 초보적인 관료제가 실패하면서 제 시간에 구제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사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의 부담은 경감하는 등 뒤늦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반대편은 정부가 고의적인 식량 봉쇄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기근 사태만을 더 가혹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양측 주장의 차이다.

4. 참혹한 실상


영국 기자 개리스 존스는 1933년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대기근의 현장을 접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폭로했는데, 당시 모스크바 주재 서방 기자들은 대체로 친소 성향이라 이들은 존스의 취재가 거짓, 과장되어 있다고 방해했고, 결국 그의 기사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존스는 끈질긴 노력 끝에 뉴욕 이브닝 포스트에 기사를 올리긴 했지만 곧바로 친소 기자 중 한 명이었던 뉴욕타임즈의 월터 듀런티[13]에 의해 반박기사가 나왔고, 이후 존스는 소련 입국금지 처분을 받은 건 물론 소련의 공작으로 의심되는 감시까지 받다가 1935년 내몽골에서 살해된다. 유족들은 이를 소련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후 존스의 취재가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존스는 재평가 받고 존스와 그의 취재를 의도적으로 폄훼했던 월터 듀런티를 비롯한 기자들은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한 언론윤리를 저버린 자들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2003년 월터 듀런티에 수여된 퓰리처상의 재심이 이뤄졌고, 이에 뉴욕타임즈는 월터 듀런티가 스탈린 인터뷰 등 소련취재물 연재를 위해 거짓을 보도했다고 보도하며 사과했지만 퓰리처상이 박탈되지는 않았다. 2019년 12월에는 개리스 존스와 위 일화를 영화화한 영화도 개봉했다. 작품명은 '미스터 존스(Mr.Jones)'.
소련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인 《차일드 44(Child 44)》의 도입부에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소설의 본문에 따르면 '개미나 곤충 알이 있을까 싶어 '''흙덩이'''를 깨무는' 수준이었고 '나무껍질을 씹다가 잇몸이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 소설의 본문에서 이 대기근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줄어들어버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버렸다."'''
1937년 이 지방을 다녀온 미국인 사진 작가가 말하길, 아프리카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유색인종 아이들이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으로 을 뜯어먹는 걸 여럿 보았지만 백인 아이들이 똑같은 꼴로 풀을 뜯어먹는 걸 우크라이나에서 처음 봤다고 한다.
33년 1월 초,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몰도바의 7개지역부터 시작해서 기근이 찾아왔다. 최초 보고 기록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중부 체르카시와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집단적인 영양부족 사태와 기근이 발생했다. 2, 3월에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중동부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주와 키예프에서 장티푸스와 말라리아가 창궐하기까지 했다. 최초 발생일로부터 6개월 만에 기근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북부 체르니하우까지 확대되었다.
33년 3월 우크라이나 집단농장의 절반은 곡물배급이 중단되며 우크라이나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대기근을 맞았고, 농민들은 자신의 식량과 동물사료가 부족해지자 남은 가축을 도살하며 버텼으나 이 정도면 차라리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대부분은 배를 곯다가 굶어죽거나 질병으로 쓰러져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 해 연말까지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0~25%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932년 1월 통계는 우크라이나 총 인구 3268만 7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태 직후 현지의 한 조사에 따르면 대기근 희생자는 2기근이 한창일 당시에 약 480만이었는데 최근에는 그 숫자를 500만에서 1천만까지 추산하고 있다. 심지어 극심한 지역은 하루에 분당 17명씩 약 2만5천이 죽어나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33개 지역에서 '''식인 사례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폴란드 제2공화국루마니아 왕국의 국경지대에서는 소련령에서 이쪽으로 탈출하려다가 사살당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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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여자들이 죽었다. 가장 끔찍한 광경은 꼬마들이었다"고 한 당 활동가는 썼다. 굶주림은 아이들의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자취를 깡그리 앗아갔고 그들은 고통받는 괴물을 닮아갔다. 두 눈에만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엎드려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얼굴과 배는 부풀어 오르고 두 눈은 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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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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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는 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추모비 지하의 기념관이 있다. 또한 추모비 앞에는 이삭을 소중히 잡고 있는 맨발의 앙상한 소녀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이곳에 매년 11월 넷째 토요일에 우크라이나 장관들이 와서 곡물을 뿌리면서 굶주림으로 죽어간 넋들을 기린다고 한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이 동상 앞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였다.

5. 이후의 전개


여하간 대기근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자체에 대한 차별은 심각했기에, 독소전쟁이 터진 뒤 독일 국방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자 다른 지역들과 달리 주민들이 '우리의 해방자'라고 외치며 꽃다발을 들고 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물론 새로운 지배자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환영의 열기도 다 사그라졌다. 이 때문인지 독일군이 소련 주민들을 사람으로 대하고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조금만 자제했어도 우크라이나 등 수많은 소련 위성국가 국민들이 줄줄이 독일 편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자신들 스스로를 망친 셈이다. 하지만 이들 중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홀로도모르와 대숙청을 전후하여 이미 다 사라진 후라, 전쟁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다.
결국 흐루쇼프가 집권하기 전인 1950년대 초반까지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존재했다. 그나마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 크림 반도를 떼어서 우크라이나에 주는 등 거의 노골적으로 고향을 우대한 덕분에 반감을 많이 감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로서는 행정구역 변경정도의 수준이었기에 괜찮은 방법이었지만[14]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 차라리 물자나 투자를 퍼주었다면 모르지만, 땅과 인구도 함께 퍼주어버리는 바람에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로부터 문제가 생겼고 '''2014년 2월부터 격렬하게 불타오른 우크라이나 민족 갈등의 불씨를 심었다.'''[15] 한편,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도 우크라이나 출신이어서 사태는 그제서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련과 스탈린은 이 사태에서 뭔가를 배우기는 커녕, 소련의 식량 상황을 더욱 나쁘게 했다. 이 때 대두되던 인물이 바로 트로핌 리센코였기 때문이다. 리센코는 스탈린의 지지 아래 우크라이나의 식량문재를 해결할 인재는 자신밖에 없다고 설치고 다녔으며, 바빌로프 같은 학자들이 서방의 부르주아 학문을 들여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하였다고 공격했고, 결국 대숙청의 피바람 속에 바빌로프와 그를 따르던 유전학자를 수용소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결국 소련의 농업은 회생 불가능할 수준으로 퇴보했으며,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식량을 미국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그나마 1950년대 이후로는 소련이 이전처럼 고립은 되던 상황은 아니었기에 기근은 없었다지만 어찌되었던간에 엄청난 국토를 지닌 것과는 별개로 상당한 외화를 곡물수입에 써야했고, 소련 농산물 생산에서 별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해졌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 농업 생산성 하나만큼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원래 동유럽에서는 농업 기술 발전이 늦어지고 농노제가 오래 유지된 영향에다가 농민들이 수확한 밀을 수출해서 귀족들의 사치품을 수입하던 영향으로 부드러운 흰 빵, 육류, 낙농, 채소 같은 다양한 식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고위층에 한정'''되고, 중산층 이하의 일반인은 호밀 등으로 만든 거친 검은 빵과 '카샤'라는 죽 중에서도 재료가 저렴한 것만 주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 대부분이지만[16] 이 기근으로 더 심각해졌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전투식량을 보면 주 품목이 돌덩이 이나 날감자, 청어 머리 같은 것으로 맛도 없고 단단해서 먹기도 고역인 물건이 대다수였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계란 같은 것은 귀중품이었다. 이는 1960년대 후반까지 계란을 하나씩 짚을 이용해서 정성들여 묶은 것이 큰 선물이 되었던 대한민국의 과거만 봐도 알 수 있다.

6. 다른 지역에서는 어떠하였는가?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가 1932~33년의 대기근에서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1932~33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만 피해를 본 것은 아니었으며 다른 지역도 강제적 집단화에 의한 큰 피해를 입었다. 본 문서 맨 위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러시아 영토인 보로네슈, 돈 강 하류 등 러시아 남부 지역도 대기근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우크라이나에서 멀리 떨어진 카자흐스탄도 이때 대기근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6.1. 카자흐스탄 대기근


[image]
  •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골로쇼킨 제노사이드 희생자 추모비.
사실 어느 측면에서는 홀로도모르보다 오히려 카자흐스탄의 대기근이 더 참혹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보통은 150만 명 이상, 많이 잡으면 230만 명 정도이지만 인구 비율로 따지면 카자흐스탄의 피해가 우크라이나보다 심각한데 '''카자흐스탄 인구의 1/3이 말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주류 민족인 카자흐인들이 이 기근의 주요 희생자였는데 카자흐인 희생자는 약 130만 명, 카자흐인 민족의 약 38%가 사망했고, 60만여명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소련을 떠났다. 당시 카자흐스탄을 떠난 카자흐인들 중에서 신장성 동북부 일리 강 동부 유역으로 이주한 인구도 많았는데, 40년대 중국 국민당에서 이들에게 무상으로 말을 징발하자 당시 악몽을 기억하고 있던 카자흐인들이 즉각 봉기하였고, 이는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인들은 유목 문화를 유지하던 상황이었는데, 유목민들한테 순순히 가진 가축을 다 내놓고, 하루아침에 비좁고 더러운 목화공장에 들어가서 일할 리도 없고 농업집산화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축을 다 잡아먹다[17] 엄청난 참극을 겪은 것.
출산율이 높았을 시점이라 인구복구가 비교적 빨랐음에도 카자흐인들의 인구는 1937년 281만명으로 1926년도의 비해 1/3이나 감소해버렸고, 카자흐인의 민족 공동체/민족 문화가 아예 뿌리채 뽑혀버리다시피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 자리를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독일계 러시아인, 크림타타르인, 체첸인, 고려인들로 채워버린다.
1919~22년의 전시 경제 체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아직 인구 손실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로 대기근이 닥쳐 카자흐스탄 인구가 혁명 이전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리자 소련 당국은 인명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러시아인을 대거 카자흐스탄으로 이주시켰고 그 결과 카자흐스탄 내 카자흐인과 러시아인의 인구 비율이 역전되어 버렸다. 이후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인의 나라'라는 뜻의 국명과 달리 '''독립 이후인 1990년대 말까지 러시아인의 인구 수가 카자흐인보다 더 많은 기형적인 인구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의 대기근은 카자흐스탄의 농업집단화를 주도해 대기근을 불러일으킨 필리프 골로쇼킨(Филипп Исаевич Голощёкин)의 이름을 따 '''골로쇼킨 제노사이드'''(카자흐어: Goloshekındik genotsıd)라고도 한다.

6.2. 1921~1922년 타타르스탄 대기근


홀로도모르보다 10년 앞서 일어난 대기근이다. 1921~1922년도 당시는 1932년도와 마찬가지로 당시 소련 전역에서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했지만 그 중에서도 볼가 강 유역 타타르스탄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었다. 이 대기근은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황폐화에다가 농장을 재국유화하는 정책에 따른 농민들의 반발로 농업생산량이 혁명이전보다 감소했고, 거기에 기록적인 가뭄까지 겹치면서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졌고 기근의 틈을 타서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까지 겹치며 소련 전역에서 약 500만명 가량의 사망자가 나왔고 사망자의 10~20% 가량이 타타르스탄에서 나왔다.
타타르스탄 전체 인구의 10% 정도가 사망하고 13%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희생자 규모는 50만여 명에서 200만여 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주로 볼가 타타르볼가 독일인 사이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당시 소련 상황이 워낙 만신창이였던 관계로 기아 희생 규모가 더 커질 수도 있었으나 해외에서 구호 식량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피해 규모가 감소하였다 한다.[18]
당시 대기근 역시 1차대전 이후 소련의 반독감정으로 인한 독일계 러시아인에 대한 제노사이드였는지 관련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소련 수립 직후 세계 열강들이 소련을 불법정권 취급하고 무역을 거부하면서 타타르스탄의 무역이 타격을 받고,[19] 농촌에서 도시로 식량을 수탈, 운반하던 볼셰비키들이 비교적 소출이 많고 부유했던 독일계 농민들의 농작물을 집중적으로 뜯어가면서 피해 규모가 더 늘어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10년 뒤 일어나는 대기근의 전초전에 해당하는 참사였다.
당시 기근은 신경제정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7. 사과 및 보상 요구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게 스탈린이 저지른 이 만행에 대한 사과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련과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인정은 하고 있으나 소련이 무너진 지금, 러시아한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피해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8. 기타


  • 이 당시에 식인 행위가 널리 퍼졌다는 문서 자료 및 사진 자료가 있다. 당연히 이 당시 소련 정부는 충격을 받아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포스터까지 제작해서 곳곳에 붙였고, 우크라이나의 소련 경찰과 군대에게 식인행위를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럼에도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아이들이나 연고자 없는 이방인을 몰래 죽여서 인육 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인육을 파는 시장을 찍은 사진까지 있었는데, 이것을 찍은 외국인 사진작가들은 자신도 그런 꼴이 될까봐 조마조마했었다고 한다. 소련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우크라이나에 이게 자행된다는 것에 잡아먹힐까봐 우크라이나로 방문할 엄두를 못낼 정도였다.
  • 당시의 식인 사례를 보면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20] 자기 집 아이를 살았든 죽었든[21] 옆집에 넘겨 먹게 하고 그 옆집 아이를 받아다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특히 살아있는 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아이를 주고받는 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현지 치안당국조차 그냥 넘어가 주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살아있는 아이를 죽은 아이라고 속여서 서로 바꾸어 먹은 가족들이 총살당한 사례가 당시 적발되어 처형된 식인 범죄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닌 말로 굶주린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을 잡아먹기란 쉽지 않으니, 일단 만만한 것들을 잡아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 1978~1990년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55명의 아이들과 여자를 죽이고 강간, 심지어 시체를 먹기까지 한 연쇄살인마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형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힌 걸 본 뒤로 복수심을 가져 무작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다만 그 당시 워낙에 흔했던 일이라서 이것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치카틸로는 1994년 경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Ghoul이라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현장의 어떤 마을로 간다는 내용의 페이크 다큐 영화가 있다. 배경은 위에서 서술한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태어났다는 설정의 마을인데 치카틸로의 형 스테판이 대기근 당시 사람들에게 잡혀 먹혔다는 설정을 가지고 이어나가는 영화이다(이건 후반부에 나온다). 내용은 말할 것 없이 대기근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한 마을로 가면서 시작된다.[22][23]
  • 곡식을 주웠다는 이유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24]도 있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어린이들이 기차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체포되어 돌려보내지거나 고아원행 → 영양실조로 사망 테크를 밟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웃기는 건 이삭줍기 꼼수는 과거 봉건영주 시절의 소작농들이 쓰던 방법인데 이때도 영주들이 고의로 이런 짓을 하면 엄벌하겠다고 단속하고 다녔다.
  • 하도 굶주림이 심하다보니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했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드니스테르(Dniester) 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월경을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이 소련 국경경비대에게 발각되어 도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강을 건넌 사람들은 루마니아에 수용되었다.
  • 좀비 영화 랜드 오브 데드가 우크라이나에서 상영금지 되었는데, 좀비들이 사람을 먹는 게 이 고통스러운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PTSD는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기만 했을 때에도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보통 좀비 영화는 전염 과정에서 식인 장면이 꼭 따라오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
  • 대기근 당시에 농민들의 반발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자, 인민을 지킨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학살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에 군인들 사이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감이 생겼고, 공산당원인 군인들 중 일부가 당에서 스탈린에게 노골적으로 반대하거나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게 스탈린을 자극해서 군에 대한 대숙청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 이 시기 사진이라고 돌아다니는 사진들 중 다수는 전시 공산주의에 의해 발생한 1921~1922년 대기근의 사진이다.
  • 2006년 이후로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에 우크라이나에서는 홀로도모르로 인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일이 있다.

9. 창작물에서


  • 2019년 HBO의 체르노빌 5부작에서도 피난을 거부하는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언급한다.
  • 소일렌트 그린도 이 사건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 2019년 당시 대기근을 취재 조사한 영국인 기자인 가레스 존스를 소재로 한 영화 미스터 존스가 만들어졌다.

  • 2016년 Bitter Harvest가 개봉했는데 국내에는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 대학살라는 제목으로 VOD가 풀렸다.
  •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해당 대기근이 은유되는데, 돼지 나폴레옹이 달걀을 팔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여 달걀을 부수고 저항하는 닭들을 굶겨죽이는 내용이 나온다.
[1] 철자는 같지만 읽기는 다르다. 우크라이나어로는 '홀로도모르', 러시아어로는 '골로도모르'[2] 우크라이나 지역은 지표면 아래 1.5미터까지 차 있는 흑토(чернозём, 체르노좀) 덕분에 막말로 씨만 뿌려도 농사가 되는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프레리, 아르헨티나 팜파스, 중국의 둥베이와 함께 세계적인 옥토로 꼽힌다.[3]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극렬하게 반대한 이유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계이기는 하나 농업 경영 방식에서는 러시아 농민들과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농민들이 오랫동안 미르(mir)라는 농촌 공동체를 통해 토지를 공유해 왔다면, 우크라이나 농촌은 전통적으로 토지의 개인 소유와 개별 영농의 성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랬기에 러시아에서는 농업 집단화 정책이 전반적으로 커다란 반발 없이 수용되었던 것에 비해 우크라이나 농촌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뒤따랐던 것이다.[4] Пуд. 러시아의 옛 질량 단위로 (1899년 이후) 1푸트는 약 16.38kg에 해당한다. 200푸트면 거의 3200kg에 달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가축들이 도살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헌데 그 많던 고기도 얼마 안 가서 다 없어졌다.[5] 이런 식의 협동농장화에 대한 반발로 농민들이 가진 재산을 파괴하거나 팔아버리거나 소비해버리는 일은 이후에 마오쩌둥에 의해 공산화된 중국에서 반복되었다. 중국에선 위에서 언급된 가축 도살 뿐만 아니라 숲 전체를 베어 팔아버리고 집까지 부숴서 벽돌로 만들어 팔아버리는 등 저항이 이어졌고 이마저 통하지 않으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6]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니얼퍼거슨 《증오의 세기》[7] 폴타바 지방에는 상당한 식량이 썩어서 낭비되었고 루보티노 지역에서는 몰수한 감자가 철조망 안에서 썩어가게 방치하였다고...[8]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당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통일의 주도국가로 결국 나머지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된 것처럼, 폴란드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카자흐인, 아르메니아인 같이 소련이 경쟁 상대에 있는 이웃 국가와 공유하는 소수민족들을 상대로 정치적 자치 보장, 문화적 발달 권장 같은 유화책을 통하여 소련 외부에 있는 해당 민족 집단의 친소련화를 유도한다는, 스탈린 독재 채제가 공고화 된 1930년대 이전 까지의 소련의 주요 소수 민족 대우 노선이었다.[9] 참고로 이 피에몬테 원칙이 소련의 소수 민족 정책이었던 시절 마침 연해주의 한인들 또한 대규모 이민으로 급격하게 수를 불리던 터라 탁상 위 구상으로 끝났지만 한때는 위와 비슷한 방법으로 일제의 조선 통치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연해주에 고려인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 설립을 고려하기도 했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소련의 소수 민족 정책 전문 역사학자인 Terry Martin의 논문 The Origins of Soviet Ethnic Cleansing 참조[10] 농촌 해체의 이유가 산업화를 위한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인데 기근으로 주민이 백만 단위로 사망하면 국가 입장에서 뼈아픈 타격이다.[반론] 이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영국의 경우 인클로저 운동이 중앙정부 주도로 일어난 것은 아니고 한국의 저곡가 정책이란 농민들에게서 곡물을 비싸게 수매하여 시중에 싸게 판 이중가격 정책으로서 농민의 재산을 강탈한 정책과 거리가 멀다. # 또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촌향도 현상은 농업 혁명의 결과로 잉여노동력이 농촌을 떠난 사건으로 농업 생산력을 저하시키면서 농촌을 수탈한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농업 집단화와는 전혀 다른 사태이다.[11] 다만 결과적으로 일어난 학살 수준의 인명 피해와 레닌그라드 봉쇄 수준의 고의적 학살은 엄연히 다르다.[12] 특히 시대는 다르지만 1921년하고 22년에는 러시아에 대기근이 일어나서 120만이 아사했다. 이건 적백내전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된 여파긴 하지만.[13] 그는 소련 취재 연재물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스탈린을 직접 인터뷰 하기도 한 당대에 뉴욕타임즈의 스타 기자였다.[14] 다만 흐루쇼프로서는 소련이 붕괴될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의 성장세는 괜찮았기에 앞으로 미국을 따라잡을것이다라는 취지(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의 발언도 했던 사람이었기에 흐루쇼프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일이기는 하다.[15] 결국 크림 반도는 수많은 피를 보고 나서야 다시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16] 현재 러시아는 이제는 곡물 생산이 소련 이전 시절로 회복(...)되긴 했지만, 토지의 비옥도가 낮다보니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농산물의 품질이 낮은 편이다. 2014년에 미국과 유럽이 경제제재를 한것에 푸틴이 빡쳐서 미국, 유럽산 농수산물 수입을 금지했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반발이 심하며 유럽산 치즈와 버터 밀수가 한동안 활개를 쳤다.[17] 당시 카자흐스탄의 가축 대다수다 농업집산화 저항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 통계상으로도 나타난다. 기근 전후로 양, 말, 소 사육 두수가 40~100%(!) 감소하였다.[18] 이때 허버트 후버가 지원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인도적인 지원과 대형건설사업 지휘로 유능한 관료로 이름을 높였고 미국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나중에 대통령직에까지 오른다. 문제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였지만[19] 최소한 이 부분만큼은 소련이 고의로 그랬다고 보기는 힘들다.[20] 위의 포스터 내용과 상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녀를 잡아먹어서 체포된다는 것이 무서웠던 거다. 이해가 안 간다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왜 나돌아 다녔는지를 생각해보라.[21] 산 아이를 죽여서 먹으면 살인죄가 되지만, 기아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먹는 것은 식인은 될지언정 살인은 아니라는 논리였다.[22] 제작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대기근 당시의 내용들과 치카틸로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스테판을 하나로 엮어서 영화랍시고 만든 고인드립 쓰레기급이다. 우크라이나가 무슨 동남아 오지의 문명의 해택도 못 받고 대기근을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묘사해 버린 게 악의적으로까지 느껴진다.[23] 하지만 딱히 우크라이나 전국민 자체가 화낼 영화는 아닌 게 구울이란 영화에서 식인을 하는 등 나쁘게 표현되는 건 대기근 당시 식인을 한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다. 당시 식인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엄밀히 따지면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이라 영화에 화를 낼 이유는 없는 셈. 영화 속에서 식인을 한 사람에 대해 나쁘게 표현되는 모습들에 화를 낼 사람이 있다면 대기근 당시 식인을 한 사람들 정도일 텐데 이 경우도 본인이 식인을 해서 그걸 모티브 삼아 식인을 했다는 식으로 영화속에서 나쁘게 표현되는 걸 뭐라고 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구울이란 영화를 검색해서 줄거리를 보거나 영화를 직접 감상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악의적인 영화는 아니다. 줄거리를 대충 설명하자면 세 명의 미국인이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의 카니발리즘(식인행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대기근 당시 실종자가 가장 많았던 도시로 가서 최후의 생존자라고 알려진 사람과 인터뷰를 하려고 하는데 실수로 50명이상을 죽인 연쇄살인마에 식인마인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악령을 깨워버려서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다는 줄거리의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B급 공포 영화다. 그다지 악의적인 영화는 아니다.[24] 이삭줍기(Gleaning)는 본래 농부들이 수확을 마친 밭이나, 상업적으로 이득이 없는 밭에서 떨어진 곡식의 낱알을 줍는 행위였는데, 문제는 소련에서는 이게 불법이었다. 작은이삭 법(Law of Spikelets)에 따라 최소 10년의 복역이나 강제 노동, 심하면 사형까지 내릴 수 있었다. 좀 어이없어 보이겠지만 수확기에 일부러 이삭을 흘린 다음 나중에 주워 사유재산으로 챙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범죄로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