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법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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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수말당초의 군웅이자, 단명정권인 심양(沈梁)의 유일한 군주이다.
2. 생애
심법흥의 부친인 심각(沈恪)은 남조 진나라에서 특진, 광주 자사를 지냈다. 심법흥은 수나라 말에 오흥군 군수로 있었다. 당시의 수나라는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심법흥의 임지였던 오흥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동양군의 도적 누세간이 오흥군을 포위하자, 양제는 심법흥과 태복승 원우(元祐)에게 누세간 토벌 명령을 내렸다.
618년에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자, 심법흥은 우문화급 토벌을 명분으로 내걸고 동양군에서 거병한다. 우문화급을 토벌하려던 심법흥은 도중에 비릉군의 노도덕에게 연합을 제안하는 척하면서 그를 제거하고 비릉군을 점거하였다. 그러다가 월왕 양동이 단달에 의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심법흥은 양통에게 표문을 올리며 자신을 대사마, 녹상서사, 천문공(天門公)으로 칭하였다. 물론 이때가 되면 당나라가 이미 건국된 상황이었고, 양통은 당나라의 입장에서 비정통 군주로 간주되었다.
619년에 왕세충이 월왕 양통을 죽이고 정나라를 세웠다. 심법흥은 비릉군을 점거하고 스스로 양왕(梁王)을 칭했으며,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정하였다. 이때 두복위(杜伏威), 진릉(陳棱), 이자통(李子通)이 서로 강표를 넘보는 상황이라 심법흥은 3면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이었다. 620년, 이자통이 진릉을 공격하자 진릉이 심법흥에게 인질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심법흥은 진릉의 구원에 응하여 이자통을 공격하였지만 이자통에게 패배하였다. 더불어 이자통은 심법흥을 공격하여 이때 심법흥이 대패하였다. 심법흥은 오군의 도적 수령인 문인수안(聞人遂安)[1] 에게 의지하려고 했다. 문인수안은 부하를 보내 심법흥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심법흥은 문인수안에게 가던 도중 문인수안에게 가려던 것을 뉘우치고 회계로 가려고 했다. 문인수안의 부하는 심법흥의 의도를 알아차려 심법흥을 공격하였고, 궁지에 몰린 심법흥은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3. 둘러보기
[1] 복성인 문인씨(聞人氏)다.